30년 전쟁을 다 끝내지도 못하고 다시 또 하나의 거대한 수렁으로 발을 들여 놓습니다. 추진력과 인내심이 반대인 제 단점인데...
온갖 봉건영주 그리고 헷갈리는 동명이인의 연속인 30년 전쟁과 달리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은 굵직한 사건 중심이라 정리하고 이해하기 쉽습니다만, 같은 이름을 영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독일어 중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하는지 난감합니다.
어쩔 수 없이 해당 인물이나 지역의 국가발음으로 부르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4개국 발음이 혼용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스페인사람이 프랑스로 건너가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이 다시 스페인으로 와서 왕이 된 경우에는 어느 나라 말로 통일해야 할지 갈피를 못잡겠군요. 그리고 수많은 이름과 지명이 나올텐데 30년 전쟁 때에도 그랬지만, 워낙 굵직한 인물들이어서 인물설명에 발목을 잡히면 책 한권 분량이 나오기 때문에 아주 간단한 설명만 하겠습니다.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1부 - 카를로스 2세의 죽음
1659년 11월, 오랜 앙숙이었던 프랑스와 스페인이 피레네스Pyrenees조약과 함께 루이Louis 14세와 인판타 마리아 테레사Infanta Maria Teresa(María Teresa de Austria)의 결혼에 합의했다. 툴롱Toulouse과 마드리드Madrid에서 조약과 결혼의 상세조항을 인준했다.
마리아 테레사와 후손은 스페인 왕좌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결혼식 후 18개월 내에 500,000만 골드 크라운Crown이라는 막대한 지참금을 지불한다는 조건이었다. 양국은 1660년 6월 9일, 프랑스와 스페인 접경의 바욘Bayonne에서 결혼식을 진행했다.
루이 14세는 1년 후에 협의내용을 무시하고 마리아 테레사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후손의 왕위계승을 주장했다. 그리고 누구나 예상했듯이 펠리페Felipe 14세는 지참금을 지불할 수 없었고 사위는 지참금대신에 스페인의 외국영토를 합병하기 시작하면서 최초의 세계대전의 불씨가 심어졌다.
1660년의 결혼식입니다. 신성로마제국의 근친혼으로 마리아 테레사는 유전병을 가지고 있었다는군요. 루이 14세의 여성편력도 대단했습니다. 태양왕 루이 14세에 대해서는 제 블로그에 이미 여러 차례 정리해두었습니다.
1661년 11월 6일, 펠리페 4세와 오스트리아출생의 두번째 왕비 마리아나Mariana 사이에 카를로스Carlos가 태어났지만 병약해서 즉위해도 오래가지 못할 것으로 보였다. 루이 14세는 아내의 권리와 지참금 핑계를 대며 저지대 국가Low Countries를 점령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과 같이 스페인 펠리페 3세의 손자인 오스트리아 레오폴트Leopold 1세와 비밀조약을 맺고 스페인 왕권과 영토분할에 대해 의견을 같이했다.
1665년, 4살에 즉위한 카를로스가 죽는다면 레오폴트는 스페인왕위, 이탈리아와 서인도제도를 갖고 루이 14세는 남부 네덜란드를 가져가기로 했다. 이렇게 되면 프랑스는 더 이상 합스부르크제국의 포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고 플랑드르Flanders, 브라반트Brabant, 겔데르Guelders, 룩셈부르크Luxembourg를 새로 합병할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당사자인 스페인은 이 음모에 대해 개입하지 못했지만 카를로스 2세는 두 사람의 바람과 달리 1700년까지 살아남았다. 루이 14세는 그 사이를 참지 못하고 프랑스 북동부 국경지대를 계속 건드려서 레오폴트가 영국과 홀란트Holland에 도움을 요청하게 만들었다.
오스만 투르크 그리고 프랑스와 국경을 맞대고 있었던 탓에 평생을 전쟁으로 보낸 레오폴트 1세입니다. 동맹국 덕분이지만 어쨌든 그의 통치기간 중 오스만 투르크의 침공을 완전히 좌절시켰고 헝가리까지 확보해 유럽을 지켜냈습니다.
1683년 폴란드군과 오스만군이 벌인 최후의 기병전은 세계역사상 최대규모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스페인제국의 몰락을 함께 한 카를로스 2세입니다. 역시나 마리아 테레사와 마찬가지로 근친혼의 유전병인 긴 얼굴입니다.
국경선이 지금과 달라서 무척 혼란스럽습니다. 저지대국가는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프랑스 북부 일부, 독일 서부 일부를 말합니다.
더치공화국 통령Dutch Stadtholder였던 오라녜공 빌럼William of Orange는 1688년에 제임스James 2세의 뒤를 이어 윌리엄 3세로 영국왕이 되었다. 이듬해 영국과 홀란트는 레오폴트의 스페인왕위 계승을 인정하기로 합의했다.
레오폴트는 처제인 노이부르크Neuburg의 마리아 아나Maria Ana를 병약한 카를로스 2세의 두번째 왕비로 보냈지만 프랑스가 촉발한 국제전은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1697년 프랑스, 신성로마제국, 스페인, 영국, 홀란트는 리스비크Ryswick 조약으로 분쟁을 잠정중단했다.
이번에도 스페인왕가와 국민은 목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했다. 1698년 9월에 프랑스, 홀란트와 영국은 1차 분할조약Partition Treaty를 체결하고 카를로스의 뒤를 이어 바바리아Bavaria의 요제프 페르디난트Joseph Ferdinand가 스페인왕위에 오른다고 마음대로 합의했다.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이 이탈리아와 저지대 영토를 나누어 갖더라도 스페인까지는 갖지 못하게 하려는 견제책이었다.
통령시절에는 오라녜공 빌럼, 영국왕으로는 윌리엄 3세로 불러야 합니다. 즉위 3년 만인 1672년, 네덜란드 공화국 재앙의 해에 영국과 프랑스의 침공을 받아 몰락지경까지 몰렸다가 1688년 11월, 영국에 상륙해 영국왕위에 오릅니다.
루이 14세와 카를로스 2세의 이복누나 마리아 테레사 사이에서 태어난 큰 아들 도팽Dauphin(프랑스의 왕태자)은 시실리Sicily와 나폴리Naples 등의 이탈리아 영토를, 레오폴트의 작은 아들 카를Charles대공은 룩셈부르크와 이탈리아 북부의 밀라노Milanese 일대를 갖기로 했다.
영국과 홀란트는 스페인제국의 서인도 해역에서 교역권을 확대했다. 루이 14세는 1688~97년에 벌인 전쟁에서 워낙 고생했고 재정이 고갈되었기 때문에 대프랑스 동맹과 조심스러운 휴전을 지키고 싶었다.
베르사이유Versailles와 빈Vienna 그리고 해상강국이 인정한 새 왕이 즉위하더라도 스페인은 더 이상 제국이라고 부를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세계최대, 최장, 최고의 제국을 이뤘던 이탈리아는 1871년이 되어서야 다시 통일왕국이 되었습니다. 위는 1494년 당시의 이탈리아입니다.
위는 1796년 당시, 아래는 통일운동이 한창이던 1843년 당시입니다.
이번에는 레오폴트황제가 불만이었다. 윌리엄 3세를 동맹으로 끌어들이면서 제시했던 합의에 비해 너무 많은 것을 내주었다. 스페인귀족층도 스페인제국의 분할을 절대로 바라지 않았다.
1698년 11월 14일, 카를로스 2세는 자신이 죽으면 아예 요제프 페르디난트에게 스페인제국 전체를 넘기겠다고 밝혔다. 스페인정부는 4개국의 양해를 구하지 않고 분할조약을 완전히 무력화시켰다.
프랑스는 더 이상의 분쟁을 원하지 않았고 신성로마제국도 동맹국의 확실한 지원없이는 무력행사에 나설 수 없었기 때문에 카를로스 2세의 결정은 더 없이 좋은 대응으로 보였다. 모사는 재인이지만 성사는 재천이라고 했다.
방대한 제국을 물려 받기로 한 요제프 페르디난트가 아버지가 통령으로 있는 스페인령 네덜란드를 방문하던 중에 홍역에 걸렸고 1699년 2월 6일에 죽었다. 의심의 눈초리는 레오폴트에게 몰렸지만 증거가 없었다.
카를로스 2세가 워낙 병약했기 때문에 후계자 문제가 다시 화제에 올랐고 이후 15년 동안 유럽전역을 뒤흔들었다.
루이 14세와 윌리엄 3세가 주동이 되어 1699년 6월 11일에 2차 분할조약을 맺고 황제의 둘째 아들 카를대공을 후계자로 합의했다. 스페인과 신성로마제국을 합치지 않는다는 조건이었다. 프랑스의 도팽은 시실리, 나폴리와 밀라노를 받기로 했다.
레오폴트황제는 프랑스의 확장을 문제삼아 이 제안을 선뜻 받아들이지 않았고 프랑스, 영국과 홀란트는 1700년 3월 25일에 2차 분할조약을 체결했다. 영국과 홀란트가 레오폴트를 설득했지만 그는 ‘프랑스가 원하는 대로 가져간다면 우리 상황은 무척 심각해질 것이오’라고 대답했다.
레오폴트는 오스만 투르크와 사이가 나쁘지 않았기 때문에 프랑스와 전쟁을 불사할 생각이었다. 루이 14세는 먼 친척인 사부아의 빅토르 아마데우스 2세 Victor-Amadeus II of Savoy에게 프랑스 접경의 니스Nice와 밀라노공국을 바꾸자고 제안했다가 거절당했다. 아마데우스의 할머니 카테리나 미카엘라Catalina Micaela가 펠리페 2세의 딸이었고 신부지참금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도 스페인 왕좌에 오를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레오폴트가 망설이는 동안 루이 14세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마드리드 주재 외교관인 블레쿠르후작Marquis of blecourt는 막대한 뇌물을 뿌려가며 프랑스의 영향력을 넓히고 루이의 두번째 손자 앙주의 필리프Philippe de Anjou를 카를로스 2세의 후계자로 세우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는 프랑스와 스페인 모두에게 최고의 선택이라고 믿었다.
스페인정부의 친신성로마제국파는 왕비의 지지를 받았는데도 세력을 넓히지 못했다. 신성로마제국의 외교관이 너무 고압적인 자세를 내세워 스페인귀족의 자존심을 건드린 것도 원인이었다.
1700년 6월에 스페인 국회Council of State가 프랑스 안을 선택했지만 카를로스 2세가 참석하지 않아 별 효력이 없었다. 7월에는 교황도 서유럽의 안정을 지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며 앙주를 지지했다.
카를로스 2세가 병석에 눕자, 친프랑스파 리더인 톨레도Toledo대주교가 왕의 침실을 장악하고 여왕의 출입을 막았다. 1700년 10월 7일, 앙주를 후계자로 정하고 제국영토를 그대로 유지하는 유서가 새로 작성되었다. 59조항에 이르는 상세한 내용은 바로 루이 14세의 손에 들어갔다. 카를로스의 어머니와 아내의 항의는 모두 묵살되었고 앙주 또는 앙주의 동생인 베리Berry공작이 후계자가 되었다.
레오폴트의 둘째아들은 서열 3번째로 밀려났고 누구도 바라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 그리고 세명이 모두 즉위를 거부하면 사부아공의 차례였는데 그런 일은 절대로 벌어지지 않았다. 섭정이 새왕이 마드리드에 도착할 때까지 조율하기로 했다.
프랑스, 영국과 홀란트가 맺은 2차 분할조약과 유서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분쟁이 생길 수 밖에 없었다.
3주 후인 1700년 11월 1일 모든 성인 대축일All Saints’ Day, 잠시 회복기미를 보여 신성로마제국에 희망을 주었던 카를로스 2세가 세상을 떠났다. 워낙 병약했고 어렸기 때문에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궁전에 모여든 귀족들에게 선왕의 죽음과 새왕을 알렸다. 그리고 루이 14세는 11월 8일 오전에 비밀서신과 공식서신을 거의 동시에 받았다. 루이 14세는 도팽, 외무장관 토르시Torcy, 뽕샤흑뜨항Pontchartrain재상, 보빌리에Beauvilliers공작 등을 불러 스페인왕위에 대해 협의했다.
보빌리에는 다른 국가의 강한 반발을 우려해 거절을 추천했고 토르시는 왕위가 신성로마제국으로 넘어갈 경우 프랑스가 고립된다며 수용을 주장했다. 도팽은 우유부단한 성격과 달리 아들의 즉위를 고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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