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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스페인왕위계승전쟁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2부 - 이탈리아 북부의 서전

by uesgi2003 2017. 12. 19.


지루하고 부족한 제 역사이야기를 인용하시는 매체 그리고 즐기시는 분이 의외로 많아서 다시 속도를 높이고 있습니다. 한동안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이야기가 이어질 예정입니다. 그래도 (미완의) 30년 전쟁보다는 훨씬 재미있어서 다행입니다.

그리고 중간 중간 옆길로 빠져서 다른 이야기를 정리할 생각입니다. 지금은 방글라데시의 통일을 다뤄볼까 합니다. 원래는 멕시코 역사를 다루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초장편의 이야기연재가 다시 시작될 것 같아서 뒤로 미뤘습니다.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2부 - 이탈리아 북부의 서전


루이 14세는 난감했다. 왕위제안이 더 없이 달콤하지만 후폭풍이 염려되어 며칠 고민한 후에 왕비에게 의견을 물었다, 왕비는 앙주가 스페인으로 가야 한다고 간단하게 대답했다. 왕은 ‘어느 쪽으로 결정하건 많은 사람이 비난할 것이오’라고 말했다. ‘유언을 거부하면 왕위는 카를대공에게 넘어 갈 것이오. 우리에게 왔던 전령은 바로 빈으로 향할 것이오'라고 말했다.

루이 14세는 11월 12일, 승락을 알리는 편지를 마드리드로 보내고 외부에도 이 사실을 알렸다. 홀란트공화국대사에게는 이런 편지를 보냈다.


… 스페인대사가 알현을 요청했고 11일 오전에 접견했다. 그는 짐에게 스페인왕비와 국회가 서명한 편지를 내밀었는데 짐의 손자가 계승우선권을 가진다는 내용이었다. 이를 수용하지 않을 경우 카를대공이 후계자가 되며 사부아공이 그 다음 계승권을 갖는다.

스페인대사를 접견한 후에 유언을 수용하기로 결정했다. 대사에게 앙주를 즉시 보내겠다고 알려주었다. 이튿날 섭정회의Council of Regency에게 보내는 편지를 주면서 짐이 영국왕과 통령과 협의하는 며칠 동안은 절대로 누설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영국대사에게는 귀하에게 쓴 편지와 똑 같은 내용을 알려주었다. 짐이 유언을 거부하면 대공에게 스페인제국 전체와 왕위가 넘어갈 것이고 그 때에는 분할령조약을 지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귀하도 통령에게 이 사실을 바로 전하기 바란다…


11월 16일, 스페인대사 카스텔 델 레이Castel del Rey는 베르사이유궁으로 들어가 새로운 왕 펠리페 5세를 알현했다. 스페인어로 장황한 연설을 했지만 앙주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루이 14세가 손자를 대신에 대답했다.  

루이 14세는 왕실예배당에서 앙주에게 왕전용의 무릎방석을 내밀었지만 앙주는 사양했다. 프랑스왕과 스페인왕은 카펫 위에서 나란히 무릎을 꿇고 예배를 보았다. 

루이 14세의 화려한 답신은 이후 유럽역사를 크게 바꾸어 놓았다. 신성로마제국대사가 상황을 전혀 모른 채로 베르사이유를 방문했다가 크게 놀랐다. 마드리드에 있던 폰 하라흐von Harrach도 마찬가지였다.


빈의 당혹과 분노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지만 런던과 헤이그Hague의 반응은 가늠할 수 없었다. 앙주는 할머니의 혈통을 따라 스페인왕좌에 대한 당연한 권리가 있었다. 스페인도 지금의 결정에 만족하고 있었고 빈은 분할조약을 아직 인준하지 않았기 때문에 큰 장애물은 없어 보였다. 

영국이 루이 14세의 의도에 강하게 반발하더라도 과도한 전쟁비용을 부담할 것 같지도 않았다. 1700년 12월 22일, 프랑스대사 탈라르Tallard는 윌리엄 3세와 헤이그의 통령 모두 펠리페 5세를 스페인왕으로 인정할 것 같다는 편지를 보내왔다. 신성로마제국이 왕위를 주장하더라도 외톨이가 될 것이라는 분석도 있었다. 



스페인제국일 당시에 펠리페 2세 다음으로 전쟁을 많이 치룬 펠리페 5세입니다. 국운이 많이 기운 후에 왕위에 올라 많은 영토를 빼앗겼습니다. 퇴임했다가 아들의 요절로 다시 복귀해 왕위에는 2번 오릅니다. 이번에는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에 참전해 영국에게 복수합니다. 


펠리페 5세는 루이 14세가 챙겨준 막대한 지참금과 선물을 가지고 마드리드로 향했다. 24개의 가방 각각에 1,000 루이드오르Louis d’Or 동전이 들어 있었다. 그렇지만 황제와 맺은 분할조약의 비밀조항이 만료되는 2개월의 유예기간 동안은 스페인국격을 넘을 수 없었다. 

레오폴트는 공공연하게 전쟁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루이 14세는 명분을 쌓고 있다고 생각했다. 루이는 매사에 있어서 명분을 중요시 했고 이번에도 그럴 것처럼 보였다. 

펠리페 5세가 베르사이유를 떠나기 전인데도 바바리아 선제후Elector of Bavaria의 인정이 있었고 사부아Savoy, 폴란드, 브룬스비크Brunswick, 말타Malta, 단치히Danzig와 헤세-다른슈타트Hesse-Darmstadt가 그 뒤를 따랐다. 영국과 홀란트도 마지못해 기정사실로 받아들였다. 



루이 14세의 금화동전은 1709년에 발행했기 때문에 이 때에는 선왕의 1643년도 금화를 사용했을 겁니다. 스페인금화를 사용하다가 루이드오르로 대체했고 프랑스혁명과 함께 프랑으로 다시 대체했습니다. 


1701년 2월 18일, 펠리페 5세는 마드리드 외곽의 부엔-레티로Buen-Retiro궁에 도착했고 스페인국민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카를로스 2세의 독일출신 미망인 마리아나 폰 노이부르크Mariana von Neuburg는 강제로 은둔생활 처분을 받았기 때문에 어떤 훼방도 하지 못했다. 

신성로마제국을 지지하던 카탈로냐Catalonia 총독인 헤세-다른슈타트공 게오르그George도 포르토카레로Portocarrero 추기경의 조카로 교체되었다. 프랑스대사 다르쿠르Duc d’Harcourt를 왕의 보좌역 중 한 명으로 임명하고 재정까지 책임지게 해서 프랑스의 영향력을 더욱 보강했다. 

4월 14일, 펠리페 5세는 공식으로 마드리드에 입성했다. 폭우에도 불구하고 프라도Prado에서 부터 푸에르타 델 솔Puerta del Sol을 거쳐 알카사르Alcazar까지 인파가 늘어섰다. 새로운 왕의 출발은 무척 순조로웠다. 전쟁을 원하지 않는 영국의회가 스페인 왕위계승을 축하했다. 



최근의 분리운동으로 화제의 초점이 되었던 카탈루냐 지역입니다. 프랑스-스페인전쟁에서 불거진 저항은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에서 크게 타올랐고 지금의 불씨를 남겼습니다. 



여행을 즐기는 저이지만, 아직 스페인은 근처도 못 가봤습니다. 푸에르타 델 솔입니다. 태양의 광장이라는 뜻입니다. 


왕에게는 왕비가 필요했지만 아직 민감한 시기였고 18살의 나이에 서두를 필요도 없었다. 이번에도 루이 14세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사부아의 빅토르 아마데우스Victor-Amadeus공의 13살 작은 딸 마리아 루이사Maria Luisa de Saboya를 손자의 신부로 선택했다. 

사부아공의 큰 딸은 이미 왕세자의 큰 아들과 결혼해서 미래의 왕비로 예정되었기 때문에 사부아를 프랑스에 더욱 밀착시킬 더 없이 좋은 기회였다. 그렇지만 빅토르 아마데우스는 상당한 야심가이기 때문에 루이 14세의 계획을 순순히 따를 생각이 없었다. 

그의 야심을 아직 알 수 없었던 1701년 9월 11일, 마드리드와 토리노Turin에서 축하연이 열렸고 신부는 13일에 니스Nice로 가서 스페인전함에 올랐다. 펠리페 5세는 결혼이 성사된 것을 알고는 아내를 맞이하려고 아라곤Aragon를 거쳐 카탈로냐로 갔다. 



총을 든 초상화로 그녀의 강한 성격을 엿볼 수 있습니다. 남편의 빈자리를 잘 메워주다가 결혼생활 14년 차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펠리페는 먼저 사라고사Saragossa와 바르셀로나Barcelona를 들러서 그들의 권리와 자유를 재확인해주었다. 신혼부부의 결혼식은 피게라스Figueras에서 진행되었다. 이때부터 문제가 불거졌다. 강한 성격의 신부는 자신의 사부아 수행원이 마드리드로 가지 않는 것을 알고는 남편과의 동침을 거부했다. 

루이 14세는 펠리페에게 신부의 나이가 어리고 어리석은 누군가의 조언을 들은 것 같다며 처음부터 왕비를 사랑하되 고집을 꺽어 놓으라는 조언을 보냈다. 

할아버지의 조언이 효과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신혼부부의 사이는 좋아졌고 왕비는 아버지의 강한 성격을 그대로 유지한 채로 이후에 벌어지는 전쟁에서 펠리페 5세의 든든한 조력자가 되었다. 


1701년 9월, 펠리페는 루이 14세의 종용에 따라 나폴리Naples로 가서 이탈리아 신민을 접견했지만 반응은 미지근했다. 이탈리아는 부르봉Bourbon왕조가 오던 합스부르크Hapsburg왕조가 오던 상관이 없었다. 반대로 스페인은 국내문제가 산적한 때에 해외순방을 하는 왕이 못마땅했다. 그리고 새신랑도 아내가 그리워 바로 스페인으로 돌아갔다. 

프랑스와 스페인 양국이 합병할 가능성이 전무했고 루이 14세가 주변국의 염려에 신중하게 대처하기만 하면, 스페인 왕위 계승은 대체로 순조롭게 마무리되는 것처럼 보였다. 영국과 홀란트도 신성로마제국을 위해 참전할 생각이 없었다. 스페인제국이 양국의 해상교역권을 조금만 더 강화해주면 그만이었다. 스페인은 양국의 희망과 달리 포르투갈이 장악하던 노예교역을 프랑스회사에 넘겨주었다. 이 경우에도 런던은 전쟁을 선택하지 않았다.


루이 14세가 너무 낙관하고 있었지만 펠리페 5세는 빈을 제외한 대부분의 국가에서 인정받았다. 만약 전쟁이 벌어지더라도 프랑스는 스페인, 포르투갈, 사부아, 바바리아Bavaria, 콜롱Cologne과 리에주Liege의 선제후주교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엄청난 대군을 동원하지 않고서는 프랑스 본토를 침공할 수 없었고 이베리아Iberia반도 침공도 쉽지 않았다. 반면에 프랑스를 상대로 전쟁을 벌일 홀란트와 신성로마제국은 국경선이 노출되어 있어서 오히려 취약했다. 

그래서 전쟁위기는 이탈리아 북부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프랑스 대군이 롬바르디Lombardy평원으로 이동하자 황제는 군대를 모아 남부 티롤Tyrol로 통하는 협곡을 막았다. 유럽 전체가 피하고 싶었던 전쟁이 드디어 터졌다. 황제군 일부가 알바레도Albaredo 부근의 병사들에게 총을 쏘았다. 스페인 병사 한 명이 죽고 나머지가 모두 포로로 잡혔다. 

루이는 이 소식을 듣고 즉시 참모와 병력을 이탈리아로 파견했다. 프랑스군은 빅토르 아마데우스 2세가, 스페인군은 밀라노Milanese총독인 보데몽Vaudemont공이 맡았다. 


밀라노는 신성로마제국이 스페인과 이탈리아로 통하는 길목이었기 때문에 프랑스의 중요한 전략지역이었다. 프랑스군의 실제 지휘관 니콜라스 카티나Nicolas de Catinat원수는 만토바Mantua와 포Po강 계곡에 방아거점을 만들었다. 

그렇지만 카티나와 보데몽은 사이가 나빴고 연합작전이 이뤄지지 않았다. 1701년 5월부터 전설적인 사부아의 외젠Eugene이 지휘한 황제군은 리볼리Rivoli 북부의 로베로도Roverodo에 집결했다. 

밀란Milan방면으로 진격할 것처럼 위협해 프랑스군의 신경을 돌린 후에 가파른 협곡을 넘어 비첸차Vicenza로 넘어가 중립도시 베네치아Venetia를 침공했다. 1701년 7월 9일, 아디제Adige강과 포강을 건너 카프리Capri에 도착해 프랑스군이 천혜의 방어물로 여겼던 우측에 자리잡았다.



당대 유럽최고의 지휘관 외젠입니다. 신성로마제국을 지탱하고 프랑스에 결정타를 먹인 외젠은 황당하게도 파리출신이고 어린 시절을 루이 14세의 궁전에서 성장했습니다. 루이 14세가 그를 기용하지 않자 오스트리아로 넘어가 좌충우돌하며 무훈을 남겼습니다. 

그가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당시에 프랑스 지휘관이었다면 아마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겁니다. 


외젠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카티나는 황급히 물러나 민치오Mincio강에 다시 방어선을 쳤지만 외젠은 과감한 기동으로 프랑스군의 좌측으로 돌았다. 루이 14세는 카티나의 곤혹스러운 상황을 듣고는 ‘짐은 내 병사들이 임무를 다했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이제 프랑스군과 밀라노의 보급로가 위험해졌고 카티나는 다시 후퇴하면서 왕의 신임을 잃었다. 1701년 8월 23일, 빌레루아공작Duc de Villeroi 프랑수아 드 뇌빌Francois de Neufville로 교체되었다. 프랑스군의 충격은 대단했다. 프랑수아로는 도저히 난국을 돌파할 수 없었다. 

루이 14세는 자신의 결정에 확신을 갖고 오히려 프랑수아의 안전을 걱정하는 편지를 보냈다.


황제군은 이미 키아리Chiari에 도착한 후에 프랑스군을 상대로 참호를 깊게 팠다. 9월 1일, 프랑스, 스페인과 하부아군은 신성로마제국의 전력이나 대비를 전혀 모른 채로 참호에 틀어박힌 황제군을 공격했다가 심각한 피해를 입고 물러났다. 

프랑스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 프랑스군은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끈질기게 공격했고 가옥, 방앗간과 나머지를 거의 모두 점령했다. 이런 전투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다운Daun(독일지역)군이 우리를 몰아냈다. 내 우측의 참호 뒤에 숨어있던 적이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고 근거리 사격을 퍼부었다. 

빌레루아는 중앙공격을 시도했지만 좌우익이 이미 무너졌기 때문에 성공하지 못했다. 존경스러운 카티나가 병력을 추스르고 다시 전열로 내보내다가 가슴에 심한 상처를 입었고 손도 총탄을 맞았다.



카르피에서 외젠을 막지 못한 카티나는 프랑수아로 교체되었고 루이 14세의 종용으로 벌어진 키아리전투에서는 프랑스연합군이 참패했습니다. 
중장갑기병을 포함한 38,000명의 프랑스연합군은 무리하게 신성로마제국군의 진영을 공격했고 약 3,000명 정도를 잃고 퇴각했습니다. 22,000명 규모의 황제군은 겨우 200명만을 잃었습니다. 
병력만 놓고 보면 프랑스 연합군은 큰 피해가 아니었습니다만 영국과 홀란트가 참전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