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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스페인왕위계승전쟁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5부 - 네덜란드군의 자중지란

by uesgi2003 2018. 1. 7.


미완의 30년 전쟁보다는 정리하기 훨씬 편하군요.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5부 - 네덜란드군의 자중지란


17척의 상선, 15척의 프랑스전함과 3척의 스페인전함으로 이루어진 보물선함대는 비고만 안에 잘 정렬해있었다. 루크는 통풍 때문에 선장실에서 나오지 않았지만 해병이 상륙해 란다Randa요새를 점령하고 HMS 토베이Torbay부터 진입했다. 

보물을 미처 다 하역하지 못한 수송선 6척을 노획했고 스페인전함 3척과 수송선 11척을 불태웠다. 뒤늦게 대응에 나선 프랑스전함도 10척이 침몰되고 6척이 노획당했다. 

그렇지 않아도 전함과 자금이 부족했던 프랑스는 치명타를 입었다. 동맹군의 공격을 받기 전에 은화상자를 대부분 하역했기 때문에 그나마 다행이었다. 700만 은화페소Peso는 무사히 펠리페 5세의 궁전에 들어갔다. 



엄청난 대승을 거둔 루크제독입니다. 





동맹군은 겨우 200명 내외를 잃은 반면에, 기습을 당한 프랑스연합함대는 2,000명의 병력과 모든 선박을 잃었습니다.

프랑스전함도 대부분 6~70문의 전열함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일방적인 전투는 이해가 안 갈 정도입니다.

프랑스전함 10척은 노획되었는데 5척은 좌초되어 폐기되었고 다른 5척은 그대로 영국에 끌려갔습니다. 


1990년 비고만에서 발견된 산토 크리스토 데 마라카이보Santo Cristo de Maracaibo입니다. 스페인수송선은 말 그대로 보물수송선이었기 때문에 태풍으로 가라앉은 잔해를 찾으면 엄청난 부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비고만의 대승리는 카디스 공략실패와 산타마리항 약탈의 추태를 충분히 만회했다. 약탈병사는 해외에서 벌어진 일이었다며 가벼운 처벌만 받았고 2명의 장군에게는 작전과 부대통제실패 책임을 물어 군사재판에서 해임 후 복귀하는 형식적인 처벌을 내렸다. 

루크는 포르투갈항에서 겨울을 보내며 페드로왕을 압박했지만 페드로는 동맹군에 가담하지 않았다. 영국, 네덜란드공화국과 신성로마제국 대사가 모두 리스본에 몰려들어 각자 자국의 이익을 대변했기 때문에 큰 효과가 없었다. 

1702년 10월, 카스티야제독 후안 루이스 엔리케 데 카브레라Juan Luis Enrique de Cabrera가 펠리페 5세를 버리고 리스본에 도착했다, 그는 카스티야뿐만 아니라 안달루시아와 카탈루냐, 시실리에서도 상당한 실력자였는데 신성로마제국에 목소리를 보탰다. 


그는 프랑스출신의 왕을 의심하고 기존의 특권을 지키려는 세력을 대변했기 때문에, 펠리페 5세는 일부러 그를 프랑스주재 스페인대사로 보내 음모를 꾸미지 못하게 하려고 했지만 선수를 쳐서 리스본으로 가서 카를대공을 지지했다. 

포르투갈이 동맹가입 여부를 두고 고민한다는 것 자체가 프랑스연합 해군이 힘을 크게 잃어가고 있다는 증거였다. 연합해군은 서인도와 비고만 참패 후에도 상황이 좋지 않았다. 영국은 영국과 프랑스 해협을 철통같이 지키면서 반대로 스페인 남부해안에 마음대로 병력을 내리고 다시 실을 수 있었다. 

포르투갈은 점점 동맹군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페드로왕의 고문은 중립을 강력하게 추천했지만 페드로왕은 자국의 상선과 교역로가 염려되었다. 영국이 언제라도 심각한 타격을 입힐 수 있었다.



태평왕이라는 별명이 붙은 페드로 2세입니다. 문무양면으로 두드러졌고 세밀한 부분까지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이런 장점은 반대로 단점이 되었는데 모든 사람의 의견을 경청하느라 결단력이 부족했다는 평가입니다. 

페드로 2세는 나중에 신성로마제국 레오폴트황제의 처제와 재혼했고 친영국정책을 선택했습니다. 

아래는 영국산 페드로 2세의 기병장갑입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에서 이런 류의 기병장갑을 자세하게 즐길 수 있습니다. 



1702년 10월 4일, 영국대사는 이스트레마두라Estremadura와 갈리시아Galicia에 대한 포르투갈의 권리를 인정하고 상당한 자금지원을 내밀며 동맹참여를 강권했다. 프랑스의 영향력은 땅에 떨어졌고 페드로는 현명하게 양진영 심지어 동맹국 사이를 오가며 이익을 얻어냈다. 

12월 13일, 두 영토대신에 필리핀, 카나리제도와 부에노스 아이레스Buenos Aires(현재 아르헨티나의 수도로 모두 당시 스페인의 식민지)를 포르투갈에게 양도하겠다고 다시 제안했다. 1703년 5월 16일, 포르투갈이 동맹군으로 변절했다. 

포르투갈, 영국, 신성로마제국과 네덜란드공화국은 카를대공을 스페인의 카를로스Carlos 3세로 옹립하고 무력으로 왕위를 되찾기로 합의했다. 


페드로는 15,000명의 정규군, 13,000명의 비정규군을 참전시키고 영국과 네덜란드공화국은 보급과 자금을 지원하는 조건이었다. 동맹군은 12,000명의 병력을 보태고 프랑스연합함대를 물리칠 수 있는 12척의 전함을 상주시키기로 했다. 

동맹군은 포르투갈의 영토를 모두 인정하는 동시에 신대륙의 아마존과 라플라타La Plata의 국경도 포르투갈에 유리하게 인정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카를대공이 스페인왕위에 올라야 가능한 조항이었다. 

레오폴트황제는 언제나 그랬듯이 가장 마지막에 동맹조약을 인준했다. 


1702년 봄, 루이 프랑수아 드 부플레르 프랑스원수는 영국의 원정군이 합류하기 전에 네덜란드를 치기로 했다. 만약 이 작전이 성공하면 동맹군의 협력은 처음부터 무산될 수 있었다. 부플레르는 적을 관측할 수 있는 크산텐Xanten에 병력을 집결시켰다. 

네덜란드군은 선수를 쳐 라인강의 카이저스베르트Kaiserswerth를 포위 중이었고 루이는 탈라르 공작 카미유 도스튄 드 라 보메Camille d'Hostun de la Baume, duc de Tallard와 13,000명으로 보내 네덜란드군을 요격했다. 

6월 초, 루이는 장손자와 서자를 부플레르에게 보내 응원했고 부플레르는 클레베Cleves로 진군했다. 아직 동맹군이 합류하지 않았기 때문에, 네덜란드군은 허둥지둥 네이메헌Nijmegen으로 후퇴해 시민병과 함께 방어했다. 


이 순간 구원의 손길이 보였다. 네덜란드의 기술장교 메노 판 쿠호른Meinheer van Coehorn이 민병을 모아 플랑드르 서부를 가볍게 찔렀는데 프랑스군은 병력을 따로 보내 막아야 했고 이 순간부터 부플레르는 귀중한 시간과 동력을 잃어갔다. 프랑스군은 카이저베르트와 플랑드르로 병력을 분산시켜서는 안되었다.

더구나 그는 자신의 보급과 통신로를 위협하는 뫼즈Meuse강의 마스트리히트Maastricht요새를 내버려두는 실수를 저질렀다. 프랑스군은 카이저베르트와 플랑드르로 병력을 분산시켜 

1702년 6월 30일, 말버러공이 도착해 60,000명 규모의 영국네덜란드동맹군을 지휘하기 시작했다. 힝켈 등의 격렬한 반대가 있었지만, 말버러공은 초반부터 동맹군을 잘 통제하며 천재의 자질을 보였다. 



기발한 군사장비를 개발한 쿠호른입니다. 그는 박격포의 원시적인 형태인 공성용 구포를 개발하기도 했습니다. 

아래는 프랑스군의 구포입니다. 영화 모히칸족의 최후에서 엄청난 위력을 뽐냅니다. 



말버러는 프랑스군이 분산되어 있기 때문에 동맹군의 숫자를 믿고 부플레를 바로 밀어내기로 했다. 동맹군은 2일 후에 뫼즈강의 그라브Grave로 이동했다. 프랑스군 본대에서 겨우 10km 떨어진 곳이었다. 

부플레르는 프로이센Prussia왕(이전의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레드리히 빌헬름Frederick Wilhelm을 동맹군전선에서 이탈시키는 노력 중이었다. 빌헬름은 프랑스군을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리에주와 콜롱전체를 약속받았지만 오히려 이 사실을 동맹에게 알리며 더 좋은 조건을 받아내려고 했다. 

부플레르가 뒤늦게 빌헬름의 속셈을 알아차렸을 때에는 이미 훨씬 위급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브란덴부르크는 폴란드의 영향에서 벗어나면서 1701년 프로이센왕국으로 지위를 격상합니다. 프리드리히 2세가 신성로마제국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어 독일통일의 기초를 마련합니다. 


동맹군의 하노버와 프로이센군은 뫼즈강을 넘어가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말버러는 프랑스군의 통신로위협 정도라고 설득하고 7월 26일에 강을 건너 남진했다. 방심하다 기습당한 부플레는 뫼즈강의 펜로Venlo와 루르몬트Ruremonde 방면으로 후퇴해 위기를 수습하려고 했다. 

8월 2일, 말버러는 후퇴하는 프랑스군을 피어Peer에서 치명상을 입히는데 실패했다. 베르비크공 제임스 피츠제임스James FitzJames는 ‘정말 운이 좋았다. 도저히 전투를 벌일 수 없는 지리멸렬한 상황이었다’고 기록했다. 

위기를 모면한 프랑스군은 라인강 하류로 계속 밀려났고 카이저베르트를 포위하고 있던 탈라드가 급히 소환되었다. 프랑스는 네덜란드를 위협하던 유리한 입장에서 국경밖으로 밀려나는 참담한 상황으로 역전되었다. 동맹군은 이제 프랑스군을 상대로 마음대로 작전을 펼칠 수 있는 공간과 시간 모두를 얻었다. 


루이 14세는 뫼즈강 일대의 요새를 반드시 고수해서 동맹군의 보급로를 차단하라고 명령했다. 8월 16일, 동맹군의 보급마차 700대를 요격하려고 했지만 말버러가 먼저 프랑스군을 막았다. 만약 네덜란드장군 옵담Opdam이 제대로만 병력을 배치했다면 프랑스군은 참패를 당했을 것이다. 

말버러의 기록에 따르면 ‘우익의 10,000명이 내 명령에 맞춰 진군하지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프랑스군은 이미 무너진 상태였기 때문에 낙승을 거뒀을 것이다... 내일이면 펜로를 점령할 수 있었다.’

루이는 부플레르에게 ‘적이 펜로를 점령하면 겔더즈Guelders는 그 다음 차례가 될 것이고, 결국에는 콜롱 전체에서 밀려날 것이오’라고 염려하는 편지를 보냈다. 


동맹군은 펜로, 스테벤슨베이르트Stevensweert와 루르몬트를 포위했다. 리에주를 잃을 위기에 빠지자 루이는 다시 편지를 보냈다. ‘리에주를 잃으면 콜롱선제후가 적과 협상할 것이오... 적은 내년부터 룩셈부르크 포위에 나서고 그 다음은 우리 국경이 될 것이오.’

루이의 재촉에도 불구하고 리에주는 10월 말에 함락되었고 부플레르의 구원노력은 물거품이 되었다. 프랑스군의 탄약창 하나가 폭발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말버러는 1,700명의 수비대를 포로로 잡은 후에 런던에 보고했다.

콜롱선제후는 중립을 선포했지만 이미 영토는 동맹군에게 넘어간 후였다. 상황이 이렇게 악화되자 루이의 장손자와 서자는 서둘러 베르사이유로 달아났다. 프랑스군의 사기는 더욱 떨어졌다. 


신성로마제국군이 9월 중순에 란다우Landau 요새를 점령했다. 루이 14세는 라인강과 알사스로 병력을 더 보내라며 고집을 피워 부플레르를 더욱 힘들게 만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밀리는 프랑스군을 나누라는 명령이었다. 

‘우리는 독일로 병력을 나누어 보냈고 이제는 결전을 피할 정도로 약해졌다.’ 동맹군 전력은 프랑스군을 압도했고 결전이 벌어지면 프랑스군이 참패할 것이 분명했다. 다행히도 네덜란드 지휘관은 자국의 안전이 직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한사코 결전에 반대했다. 

프랑스군은 다시 방어선 뒤로 피신했고 말버러도 병력을 겨울숙영지로 돌려보냈다. 

 

말버러는 프랑스군을 상대로 공적을 인정받아 공작직위를 받았지만 동맹군으로는 전체적으로 실망스러운 첫해였다. 펠리페 5세는 국내입지를 단단하게 다져갔고 귀족과 평민 모두의 지지를 받았다. 동맹국은 뭔가 확실하게 보여주어야만 했다. 

말버러는 본Bonn 수비대를 공격하면서 1703년 군사작전을 시작했고 프랑스군은 12일동안 버티다가 5월 15일에 항복했다. 이제 안트베르펜Antwerp와 오스텐더Ostend가 다음 목표였다. 

네덜란드장군 옵담의 상당한 병력이 이미 출발했지만 외곽에서 불필요한 강제징수(용병의 급여와 부대의 보급을 위해 허가받은 약탈의 일종)를 벌이는 바람에 전체 전선에서 고립되는 위험을 자초했다. 말버러는 옵담이 지나친 사욕을 부리고 있다고 질책하는 편지를 썼다. 


말버러는 네덜란드 선봉대와 합류하기 위해 뫼즈강을 떠났고 쿠호른도 스헬더Scheldt강을 6월 26일에 떠났다. 3일 후, 옵담은 안트르베펜 바로 북쪽마을에 도착했다. 프랑스군은 동맹군이 서로 합류하지 못한 것을 잘 알고 있었고 부플레르는 20,000명을 이끌고 급히 안트르베펜의 베드마르Bedmar 수비대와 합류했다. 

말버러의 강행군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군을 따라잡지 못했고 7월 2일에 편지를 보냈다. ‘옵담이 촉각을 곤두세우지 않는다면 우리가 가기 전에 패할 수 있소. 병력이 나뉘고 적이 중간에 끼어들면 늘 벌어지는 일이오.’

그리고 미처 보내지 못한 편지 아래에 다시 이런 내용을 더 적어 넣었다. ‘편지를 봉인하자 옵담이 패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말버러가 그렇게 염려했듯이, 부플레르는 6월 30일에 안트르베펜에 입성한 후에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수비대와 함께 옵담의 선봉대를 공격했다. 프랑스장교는 그 날의 전투를 이렇게 기록했다.

‘우리는 길을 나누어 적에게 진격했고 적은 무방비 상태였다. 오후 4시 정도에 공격하기 시작했고 맹렬하게 사방에서 돌격해 들어갔다. 베드마르후작은 선봉에서 우리를 이끌었고 부플레르원수도 함께 있었다. 이처럼 날카로운 공격은 한번도 없었다.’


옵담은 자신의 짐을 보내는 것말고는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다. 프랑스군이 접근한다는 보고를 받고는 정신을 못차리고 브레다Breda로 달아나 프랑스군이 너무 많다는 소리만 지껄였다. 이 보고가 말버러에게 들어간 것인데 실제는 상당히 달랐다.

슐란겐베르크Slangenberg남작은 옵담이 사라지자 남은 병력을 지휘하기 시작했다. 병사들을 모아 마을교회 안팎에서 절망적인 전투를 벌이다가 몸을 움직일 수 있는 병사들만 이끌고 후퇴했다.

스페인 휘하의 왈롱Walloon기병장교가 전장에 버려진 적군을 노획했다고 빈정거렸듯이 네덜란드군은 부상병을 모두 전장에 버리고 떠나서 프랑스군이 부상병을 수습했다. 

네덜란드군은 4,000명을 잃었고 야포 6문, 쿠호른구포 44문, 보급마차 150대도 프랑스군에게 넘겨주었다.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전반부는 네덜란드, 벨기에와 독일의 주무대입니다만 이후에는 스페인본토와 신대륙까지 확장됩니다. 


 

왈롱은 벨기에의 스페인령 주로 그림과 같은 병사가 스페인 국왕을 위해 참전했습니다.


루이 14세는 승전소식을 듣고 적의 원대한 목표를 깨트렸다고 매우 기뻐했다. 말버러는 7월 5일에 계획대로 안트르베펜의 프랑스군에게 접근했지만 네덜란드군은 여전히 패전의 책임을 두고 자중지란 상태여서 전력에 전혀 보탬이 안되었다.

1703년 7월 23일, 말버러는 안트르베펜공를 포기하고 뫼즈로 되돌아가 위이Huy를 포위하고 더 나아가 나뮈르Namur의 프랑스군 요새도 위협했다. 프랑스군이 두 곳을 잃으면 뫼즈강 전체가 동맹군에게 무방비상태로 넘어가고 동맹군은 보급을 마음껏 받을 수 있었다. 

루이 14세는 위이를 잃으면 나뮈르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고 부플레르에게 전령을 보냈다. ‘귀관은 위이의 의미를 잘 알고 있소. 아군이 적을 가까이서 견제한다면 위이를 노릴 수 없을 것이오.’


8월 21일부터 말버러는 공성포를 동원해 위이를 맹렬하게 포격하기 시작했다. 프랑스군의 탄약창 하나가 대폭발을 일으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자 8월 26일에 프랑스군은 항복을 선택했다. 

포로로 잡은 프랑스군 900명은 통에런Tongres를 잃었을 때에 포로로 잡혔던 동맹군 2개 대대와 맞교환했다. 말버러는 빌레루이 휘하의 프랑스야전군과 대치하다가 프랑스군이 응전하지 않자 9월 27일에 륌부르흐Limburg요새를 점령했다. 

동맹군은 악천후 때문에 펜로와 라인베르크Rheinberg 사이의 겔더스만 점령하고 다시 한 번 겨울숙영지로 들어갔다. 동맹군은 이 작은 마을을 봄부터 포위하고 있었고 그대로 두고 갈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