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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스페인왕위계승전쟁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3부 - 대동맹체결

by uesgi2003 2017. 12. 26.


원자료는 더치, 홀란트와 네덜란드공화국을 혼용하고 있습니다만 저는 방향이 잡힐 때까지 네덜란드공화국을 사용하겠습니다.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3부 - 대동맹체결


프랑스연합군 지휘체계는 외젠을 상대로 손발이 맞지 않았다. 패전소식에 충격을 받은 루이 14세는 오랜 친구인 빌레루아를 부드럽게 책망했다.

‘짐은 적을 찾아서 최대한 견제하되 신중하라고 명령했다. 당신을 진심으로 믿고 있소. 모든 면에서 뛰어난 사람이 참호에 틀어박혀 있다면 각별히 주의하고 위험을 무릅쓰면 안되오’

겨울이 코 앞에 다가왔기 때문에 빌레루아는 크레모나Cremona에 겨울 숙영지를 만들었다. 프랑스연합군은 점차 위축된 반면에 황제군은 세력을 넓혀갔다. 외젠은 만토바를 완전히 장악하고 프랑스연합군을 이탈리아 북부에서 밀어냈다.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은 반 프랑스동맹에 가담하거나 중립에 남았다. 


서전에서는 황제군이 확실히 우위에 있었다. 이대로 스페인령 이탈리아 북부를 황제군에게 내준다면 스페인제국의 분할은 기정사실이 되었다. 그리고 브란덴부르크Brandenburg선제후Elector도 대프랑스 동맹에 동참할 수 있었다. 

북부에서 영국-홀란트군을 지휘하던 말버러공Duke of Marlborough 존 처칠John Churchill도 이탈리아의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기록했다.

‘왕(윌리엄 3세)은 프랑스가 홀란트를 공격할까봐 크게 염려하시는데 외젠공의 활약도 신경써야 한다.’



1대 말버러공 존 처칠입니다. 외젠과 함께 당대 최고의 명장으로 제대로 설명하려면 책 한권이 됩니다. 가톨릭진영에서 개신교진영으로 변절(?)한 후에 대단한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말년은 순탄치 않았지만 왕가와의 관계를 회복하고 왕궁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1701년 2월 초, 프랑스군이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주요 국경도시를 점령하려고 했다. 그 지역의 통령인 바바리아Bavaria선제후 막시밀리안 2세 엠마누엘Maximilian II Emanuel의 묵의가 없으면 절대로 이뤄질 수 없는 일이었다. 

겉으로는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했지만 실제로는 루이 14세와 비밀조약을 맺고 있었다. 프랑스군의 저지대국가 침공을 묵인하겠다는 조항이 있었다. 그리고 신성로마제국, 영국, 네덜란그공화국과의 충돌이 계속된다면 통령자리를 베드마르 후작Marquis de Bedmar에게 넘겨주고 바바리아는 프랑스군을 받아들이겠다는 조항도 있었다,

대신에 루이 14세는 프랑스와 스페인이 레오폴트를 퇴위시키면 바바리아선제후를 황제로 추대하겠다고 약속했다. 바바리아선제후는 나름 전공이 있는 유능한 군인이었지만 황제는 물론이고 정치가로서도 실격이었다. 



1700년대 당시의 저지대국가 상황입니다. 리에주와 콜롱 교구위치 정도만 잘 봐두면 됩니다. 


프랑스군은 가톨릭의 지주 펠리페 5세의 재산을 보호한다는 명목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그 정도를 훨씬 뛰어넘었다. 통령에게 국방을 위임했던 도시들은 조금도 저항하지 않고 프랑스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지역 스페인관리는 프랑스군을 환영했고 룩셈부르크, 나무르, 몽스, 뉴포르트 등의 네덜란드 수비대 15,000명이 무기력하게 수감되었다. 

리에주Liege주교-공이 프랑스연합에 가담하면서 리에주, 위이Huy와 루르몬트Ruremonde도 프랑스 영향권에 들어갔다. 전쟁물자를 막대하게 비축한 마스트리흐트Maastricht는 프랑스의 요구를 완강히 거부했찌만 네덜란드 공화국의 남쪽 국경선은 순식간에 그리고 무방비 상태로 열렸다. 

스페인령 네덜란드는 향후 군사작전뿐만 아니라 경제활동에도 매우 중요했기 때문에 루이 14세는 스페인군에게 쉽게 넘겨줄 생각이 없었다. 지금 당장은 루이 14세가 막대한 이익을 얻은 것처럼 보였지만 이후의 대가는 상상을 초월했다. 


도대체 루이 14세는 왜 그렇게 서둘러서 그리고 엉망으로 국경도시를 점령했을까? 네덜란드공화국은 물론이고 주변국가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고 루이도 민감한 상황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해가 안 되는 결정이었다.

루이 14세가 당시 자신, 가문과 프랑스에 이익이 되면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않는 오만함이 있었다. 손자가 이미 스페인왕위에 올랐고 영국과 다른 국가의 인정을 받았기 때문에 스페인제국의 영토를 조기에 장악하고 싶어 했던 것으로 보인다.  

국경도시가 무방비로 열렸다고 해도 그 너머의 네덜란드공화국은 물론이고 윌리엄 3세도 불만스러웠다. 루이 14세는 자신에게 알리지 않고 그 지역을 점령했다. 


헤이그와 런던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갔다. 영국과 네덜란드공화국의 스페인제국 해상교역권이 프랑스에게 넘어갈 수도 있었다. 두 나라는 그런 면에서 같은 입장이었고 의회는 적극적인 대응을 결의하고 윌리엄 3세에게 네덜란드공화국과의 동맹을 요청했다. 

윌리엄 3세는 직접 헤이그로 가서 공동전선을 협의했다. 영국, 네덜란드공화국과 신성로마제국은 1701년 9월 1일에 대동맹Grand Alliance을 맺었다. 3개국은 이후 몇 개월 동안 설득, 매수와 황제에 대한 충성심을 이용해 덴마크와 독일 영주의 동맹과 지원을 이끌어냈다. 스웨덴의 카를Charles 12세도 루이 14세와의 협력을 단절하고 스칸디나비아Scadinavia 이웃나라에 대한 공세를 중단했다. 

영국과 네덜란드공화국이 약속한 돈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하노버Hanover선제후 게오르그George는 개신교도가 영국왕위를 계승한다는 조건에, 브란덴부르크선제후는 프로이센Prussia왕으로 인정한다는 조건에 따라 동맹에 가담했는데 스웨덴대사가 이 모든 기밀사항을 11월 10일에 베르사이유로 전달했다. 

본격적인 전쟁이 벌어지기 전에 스페인왕위계승과 스페인제국의 영토분할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지만 루이 14세는 충돌을 선택했다.  

영국에서 추방당한 제임스James 2세가 생제르맹앙레Saint-Germain-en-Laye에서 병들어 죽어가고 있었는데, 루이 14세는 그의 아들 제임스 에드워드 스튜어트James Edward Stuart(일명 늙은 왕위요구자Old Pretender)를 영국의 정식 왕위계승자로 발표했다.  



무리한 종교갈등과 왕권신수설로 의회와 대립하다 명예혁명으로 추방당한 제임스 2세입니다. 프랑스는 제임스 2세에게 원정군은 제안할 정도로 사이가 가까웠습니다. 제임스 2세의 몰락으로 영국은 절대왕정이 폐지되었습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루이 14세의 결정은 1697년 리스비크Ryswick조약을 위반했을 뿐만 아니라 영국, 아일랜드, 스코틀랜드에 대한 노골적인 내정간섭이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당연히 의회와 영국국민은 몹시 흥분했다. 

루이 14세는 제임스 2세가 죽자 아들을 영국,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왕위계승자로 공식발표했다. 그렇다고 실제 왕위에는 변화가 없었고 윌리엄 3세가 죽을 경우 재커바이트(제임스의 라틴어발음) 복귀가 이루어져 영국의 영향력을 줄이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대동맹조약이 체결되고 있는 판에 프랑스의 영국공산품 수입을 금지시켜 전쟁을 할 수 밖에 없는 지경으로 몰아갔다. 런던과 베르사이유 주재 외교관도 모두 소환되었다.


루이 14세는 병약한 윌리엄 3세가 죽으면 대프랑스 반감도 소멸될 것으로 생각했다. 네덜란드공화국은 프랑스연합군을 막을 국경도시를 모두 잃었기 때문에 평화조약을 요청하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바바리아선제후도 황제에 반기를 들 예정이었다. 

레오폴트황제는 이탈리아 북부에 확고한 발판을 만들고 싶어 했지만 헝가리의 반란이 발목을 잡고 있었다. 그리고 동쪽의 오스만투르크는 언제라도 국경을 넘을 수 있었다. 

루이는 이런 사실을 바탕으로 너무 크게 낙관하고 영국의 분노를 간과했다. 영국은 루이 14세가 개신교도의 왕위계승을 인정할 때까지 전쟁을 중단하지 않는다는 조항을 대동맹조약에 추가했다. 대동맹이 체결된 원래 목적과 상관없는 조항으로, 영국은 절대로 전쟁을 중단하지 않는다는 결의였다. 


그리고 의회는 제임스 스튜어트를 범죄자로 선포했다. 주화파인 토리당Tories은 1697년 9년 전쟁이후에 세력을 크게 잃어서 의회의 참전의지를 막지 못했다. 개신교도의 평화적인 왕위계승, 내전과 종교전쟁 방지, 영국의 교역권 보호 등, 영국의 참전명분은 차고 넘쳤다. 

덕분에 윌리엄 3세는 프랑스를 상대로 병력과 군자금을 동원할 수 있었다. 비로 육군과 해군을 징병하기 시작했다. 내전종료와 함께 해산되었던 연대를 다시 창설했고 독일과 덴마크에서도 모병했다. 

문제는 프랑스의 속전속결이었다. 신성로마제국군은 이탈리아에서 바로 철수할 수 없었고 연합군의 충분한 병력을 모으기 전에 프랑스가 국경을 넘어 네덜란드연합국을 공격하면 대프랑스연합국의 한축이 무너졌다. 

그리고 이탈리아 북부도 위험했다. 프랑스연합군이 병력을 모아 외젠을 공격한다면 고립무원 상태인 아무리 외젠이라고 해도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영국도 이런 위험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루이 14세는 북부로 병력을 보냈다. 1701년 11월, 프랑스군은 리에주와 콜롱Cologne으로 향했고 아직 저항 중인 마스트리히트는 고립되었다. 콜롱선제후는 프랑스지지를 결정했지만 의회는 그 결정을 따르지 않고 대프랑스연합군에게 구원요청을 보냈다.

루이는 개전을 앞두고 병력을 늘리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다. 왕의 독촉에도 불구하고 충분한 병력을 모으기 힘들었고 새로 징집한 병력의 무장과 훈련은 당연히 엉망이었다. 


1702년 3월 19일, 윌리엄 3세가 낙마사고의 부상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제임스 2세의 막내딸이자 윌리엄의 처제인 앤Anne공주가 왕위에 올랐다. 의회는 ‘위대한 왕을 잃었다. 그렇지만 가장 자애로운 여왕을 얻었다’고 발표했다. 

프랑스가 기대한 영국의 태도변화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다. 앤은 첫 번째 첫 번째 각료회의에서 개신교도의 왕위계승은 당연하며 프랑스를 반드시 견제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녀는 윌리엄과 같이 결심이 확고했고 루이 14세에 대한 증오가 대단했다. 

앤은 말버러공을 헤이그 특사로 보내 확고한 참전의지를 전달하고 헤이그의 프랑스대사가 더 이상 말도 못 꺼내게 만들었다. 어차피 네덜란드공화국이 대동맹에서 탈퇴하면 평화조약을 맺겠다는 프랑스의 제안은 전혀 효력이 없던 참이었다. 



앤여왕과 남편 게오르크입니다. 


1702년 5월 15일 오후 10시, 런던 세인트 제임스궁 앞에서 대프랑스 선전포고가 발표되었다. 헤이그와 빈에서도 선전포고가 있었다. 앤여왕은 대동맹조약에 따라 발표했지만 헤이그는 1697년 리스비크조약에 따라 발표했다. 리스비크조약에는 프랑스가 네덜란드영토를 위협할 수 없다는 조항이 있었다. 무엇보다 국경도시 점령은 명백한 도발이었다. 

레오폴트는 이미 이탈리아 북부에서 한창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일부러 선전포고를 할 필요도 없었지만 신성로마제국의 선제후, 공과 영주에게 공식적으로 알렸다. 루이 14세는 선전포고문을 책상에 내려놓고는 아가씨(앤 여왕)가 덤빌 정도이니 자신이 늙은 것은 분명하다는 농담을 했다. 


이제 대동맹군 지휘관 문제가 남았다. 앤여왕은 영국원정군 지휘관으로 말버러공을 임명했지만 네덜란드공화국은 자신이 전장이었고 병력도 훨씬 많았기 때문에 총지휘관을 임명할 권리가 있었다. 

앤여왕은 남편인 덴마크의 게오르크그George공을 총지휘관으로 추천했다가 거절당했다. 전쟁을 이끌기에는 무능력했다. 신성로마제국의 중요한 인물인 하노버선제후 게오르크도 물망에 올랐고 네덜란드 측의 전쟁경험과 명성이 높은 오버크리크Overkirk백작 나사우의 헨리Henry of Nassau도 거론되었다. 

장기전에서는 영국의 군자금이 반드시 필요했고 말버러공의 역량과 연령이 연합군을 책임지기에 가장 무난했기 때문에 총지휘관으로 합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