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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스페인왕위계승전쟁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4부 - 카디스전투

by uesgi2003 2018. 1. 3.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4부 - 카디스전투


대프랑스동맹군 지휘관이 서로 제대로 협력한다면 대단한 전력이 분명했다. 영국, 네덜란드공화국과 신성로마제국은 하노버, 브란덴부르크(이후 프로이센), 덴마크, 뮌스터Munster, 뷔르츠부르크Wurzburg, 팔츠, 마인츠, 메클렌부르크 슈베린Mecklenburg Schwerin, 트리어Trier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홀슈타인-고토르프Holstein-Gottorp, 헤세-다름슈타트Hesse-Darmstadt, 헤세-카셀Hesse-Cassel과 같은 독일영지도 어느 쪽에 노골적으로 가담하지 않았지만 동맹군이 얼마든지 용병을 고용할 수 있었다. 

반면에 루이 14세는 사부아, 바바리아, 리에주 그리고 포르투갈의 지원이 전부였다. 스페인군의 무장과 훈련은 열악했고 사부아와 포르투갈도 나중에 대프랑스동맹으로 변절하면서 바바리아 정도만 남았다.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은 유럽뿐만 아니라 북미와 중미에서도 전쟁이 벌어진 0차 세계대전이었습니다. 총력전 개념이 없었던 당시로서는 엄청난 인명피해인 최대 700,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루이 14세가 과도한 욕심을 줄이고 적당한 줄타기를 했다면 세계역사는 프랑스를 중심으로 다시 씌였을겁니다.

바로 위의 서인도제도 지도는 움직이는 GIF입니다. 클릭하면 1700년 당시의 지도를 보실 수 있습니다.


루이 14세는 대군을 전장의 중심에 배치할 수 있었기 때문에 초반을 유리하게 끌어갔다. 바바리아와 사부아도 프랑스군을 그대로 받아들여 빈과 신성로마제국 중소영주에게 큰 위협이 되었다. 영국과 네덜란드공화국의 해군력이 걱정되는 대서양은 포르투갈덕분에 당장은 안전한 편이었다. 

프랑스 북동부는 보방Vauban의 감독 하에 요새를 구축해두었고 동과 남동쪽 국경은 험준한 산과 지형이 방어선 역할을 했다. 스페인도 북아프리카를 마주보는 남쪽 방면은 안전했다.

루이 14세는 마음대로 목표를 골라 선공할 수 있었다. 



프랑스는 인구와 경제력뿐만 아니라 보뱅과 같은 인재가 풍부했기 때문에 스페인이 누리던 유럽최강국의 지위를 물려 받았습니다. 포병이 주력이 되면서 성채의 중요성이 크게 떨어졌다가 보뱅의 독특한 설계덕분에 사진과 같은 성채가 다시 중요한 방어시설이 되었습니다. 


라인강은 프랑스와 독일 모두에게 천혜의 방어선으로 상류 상당부분은 신성로마제국의 유능한 지휘관인 바덴변경백Margrave of Baden 루이스 기욤Louis Guillaume이 막고 있었다. 그는 다소 구시대적이었지만 동유럽에서 오스만군을 상대로 상당한 전공을 세운 지휘관이었다. 

슈톨호펜Stollhofen 부근 16km 길이의 당당한 방어선이 구축되어 있어서 프랑스군은 쉽게 도강할 수 없었다. 바덴군은 병력이 모자랐기 때문에 참호 안에서 꼼짝하지 않았고 프랑스군은 바덴군을 견제하는 소규모 병력을 남기고 다른 방면으로 전환했다. 

이탈리아전선에서 수치스러운 교체를 당했던 카티나가 라인강일대의 프랑스원정군 지휘를 맡았다. 왕의 신임을 잃었다고 생각한 카티나는 임무를 거부하다가 3월 11일 루이 14세와 깊은 대화를 나눈 후에 지휘권을 받아들였다. 그렇지만 전쟁상 미셸 샤미야르Michel de Chamillart의 음해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전력을 다할 생각이 없었고 바로 은퇴했다.


네덜란드공화국이 가장 좋은 목표였다. 프랑스군이 이미 스페인령 네덜란드 국경도시를 점령했고 윌리엄 3세가 죽은 후에 영국과의 관계가 예전만 못했다. 그리고 네덜란드 국민은 1670년대에 둑을 무너트려 프랑스군을 간신히 막았던 끔찍한 기억을 기억하고 있었다. 

프랑스연합군이 남쪽에서 밀고 올라간다면 네덜란드공화국은 대동맹에서 가장 먼저 탈락할 것이 분명했다. 베테랑 부플레르Boufflers가 60,000명을 이끌고 북진했다. 

이탈리아 북부에서는 빌레루아가 외젠공을 여전히 상대하고 있었다. 외젠은 이제 보급과 군자금이 떨어졌고 교황 클레멘스Clement 11세가 프랑스쪽을 편들면서 지역 상인이 협조를 거부했다. 




1672년에 시작된 프랑스-네덜란드전쟁은 스페인 왕위계승전쟁과 정반대로 프랑스와 영국이 연합해 네덜란드-스페인-신성로마제국을 상대했습니다. 

네덜란드연합국은 일부러 둑을 무너트려 홍수를 내 프랑스군의 진격을 막았을 정도로 궁지에 몰렸습니다. 


외젠은 그대로 시들기보다는 오히려 역공으로 프랑스 진영의 중심에 있는 크레모나Cremona 요새도시를 점령하고 밀라노까지 밀고 가기로 했다. 1702년 2월 1일, 외젠은 사용하지 않는 상수도교로 특공대를 침투시키고 동시에 정문을 공격했다. 앞뒤에서 협공당한 수비대는 순식간에 무너졌고 빌레루아는 옷도 제대로 걸치지 못한 상태로 포로가 되었다. 

그렇지만 기습충격에서 정신을 차린 프랑스군이 대대적인 반격을 펼쳐 다리를 무너트리고 외젠군의 침투를 막았다. 외젠은 성당첨탑에 급하게 올라 도시 반대편의 아군 상황을 확인했는데 포강의 다리가 무너져 강 반대편의 아군이 무용지물이 되었다.

10시간 동안 치열한 시가전이 벌어졌고 외젠군은 탄약이 모두 떨어져서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후퇴하면서 수백 명의 프랑스군 포로를 끌고 갔는데 그 중에는 프랑스군 원수 빌레루아도 있었다. 프랑스는 급하게 루이-조세프Louis-Joseph를 지휘관으로 파견해 위기를 수습했다. 


프랑스군은 해상에서도 영국과 네덜란드공화국을 상대로 유리했다. 지중해에서 스미르나Smyrna(현재의 터키 이즈미르Izmir)수송단이 레반트Levant(현재의 중동)에서 귀중한 화물을 실어왔고 대프랑스동맹군은 스페인과 이탈리아항구를 이용할 수 없었다. 

서인도제도 교역로도 프랑스함대에 막혀 프랑스와 스페인상선만 오갈 수 있었다. 영국의 캐리비안Caribbean 전초기지, 귀중한 설탕과 향신료농장도 공격대상이었다. 다행히 윌리엄 3세가 1701년에 파견한 존 벤바우John Benbow의 소규모 정예함대가 프랑스군을 잘 견제하고 있었다.

1702년 6월, 뒤늦은 전쟁발발 소식과 함께 프랑스함대가 멕시코의 베라크루즈VeraCruz에서 출발하는 스페인의 엄청난 보물선을 엄호한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7월 중순, 샤토흐노Châteaurenault후작의 전함 30척의 호위를 받는 보물선함대가 유럽으로 향했다. 벤바우가 상대할 전력이 아니어서 카르타헤나Cartagena에 남은 장 뒤카스Jean Ducasse의 프랑스 소함대를 공격했다. 

1702년 9월 4일, 산타마르타Santa Marta 앞바다에서 맞대결이 벌어졌고 벤바우는 HMS 브레다Breda 후갑판에 있다가 프랑스군의 쇠사슬탄에 중상을 입었지만 의자에 몸을 묶고 계속 자리를 지켰다. 

프랑스함대는 벤바우의 장교들이 몸을 사리는 틈을 타 탈출해 전멸을 피했고 벤바우는 자메이카로 귀환해서 세상을 떠났다. 두 장교는 총살형이 선고되었고 앤여왕도 사면을 거부했다. 뒤카스는 브레다를 노획하지 못해 아깝다면서 적 장교의 처형에 대해 당연하다고 편지를 보냈다. 


사슬탄은 포병을 대대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육군이 사용했고 점차 해군의 주력무기가 되었습니다. 적함선의 돛을 부러트리거나 갑판 위의 병력을 쓸어버리는 대단한 위력이었습니다. 


대프랑스동맹군은 지중해를 그대로 프랑스군에 넘겨줄 수 없었고 스페인 남서쪽의 카디스Cadiz를 무력화시켜야 했다. 프랑스연합함대의 중요기지였고 지브랄타Gibraltat해협의 항로를 통제하는 전략요충지였다. 그리고 신대륙과 교역하는 주요기지였다. 

헤세-다름슈타트의 게오르크공은 윌리엄 3세가 낙마사고를 당하기 전에 미노르카Minorca의 마혼Mahon항, 카르타헤나와 바르셀로나항을 장악해야 지브랄타해협을 확보하고 나폴리 등의 이탈리아항구를 대프랑스동맹군 항구로 사용할 수 있다고 조언한 적이 있었다.

그렇지만 바르셀로나와 마혼항은 프랑스 남부의 툴롱Toulon(프랑스함대의 본거지)과 너무 가까웠다. 반면에 카디스는 프랑스해군기지에서 멀리 있어서 구원군을 중간에서 충분히 요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카디스를 무력화시키면 포르투갈의 페드로Pedro 2세를 프랑스연합전선에서 빼내올 수 있었다. 



게오르크입니다. 카디스공략은 게오르크의 뛰어난 계책이라기 보다는 누구나 머리에 떠올리는 최우선 전략요충지였습니다. 

카디스는 스페인무적함대의 영국원정에 앞서 1587년 기습을 받은 후부터 1810년 반도전쟁까지 영국과 프랑스의 공격을 번갈아가며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카디스가 무기력하게  공격받은 것을 보면 당시 스페인 국력을 알 수 있습니다. 


1702년 7월, 게오르크가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Lisbon으로 향했고 새로 부임한 영국대사 존 메수엔John Methuen도 포르투갈왕정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페드로 2세는 당장 프랑스와 동맹을 끊기 어렵기 때문에 동맹군의 우위를 확인하는 대로 진영을 바꾸겠다는 뜻을 비쳤다. 

윌리엄 3세가 죽기 직전에 카디스 공격이 확정되었고 게오르크가 계획을 세웠다. 헤이그에 있던 말버러공도 공격계획을 지지하는 편지를 보냈다.  

동맹군은 프랑스연합군에 비해 해상력이 훨씬 우세했기 때문에 마음대로 목표와 시기를 정할 수 있었고 프랑스연합군에게 고통스러운 새 전선을 열 수 있었다. 해상으로 프랑스와 스페인 본토를 위협할 수 있었고 교역로를 막아 경제기반을 갉아먹을 수 있었다. 

동맹군이 지중해를 지배하면 사부아의 빅토르 아마데우스도 프랑스연합진영에서 탈퇴하고 스페인의 카탈루냐, 발렌시아Valencia와 안달루시아Andalusia 해안선도 그대로 노출되었다. 


서인도제도에서 엄청난 보물선함대 그리고 프랑스 호위함대가 출발하자마자 영국-네덜란드동맹함대의 전함 50척이 병력수송선과 함께 영국해협을 떠나 포르투갈 해안선을 따라 남진했다. 포르투갈에서는 일부러 장대한 함대를 노출시켰고 페드로왕은 동맹군에 대해 깊은 인상을 받았다. 

수송함대에는 14,000명의 병력이 타고 있었다. 동맹함대는 카디스의 모든 것을 점령하고 파괴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만약 코루냐Coruna에 주둔하고 있다는 프랑스함대를 마주치면 섬멸하라는 명령도 받았다. 

영국함대제독 조지 루크George Rooke는 카디스의 모든 것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프랑스함대를 만나지 못한 동맹함대는 1702년 8월 23일에 카디스 앞바다에 닻을 내렸다. 

일부 지휘관이 카디스 남쪽방면 상륙을 주장한 반면에 다른 지휘관은 항구를 봉쇄하고 포격하자고 주장하면서 며칠을 흘려 보냈다. 마침내 로타Rota와 산타 카테리나Santa Caterina 사이를 공격하는 것으로 합의했다. 


8월 26일, 거친 바람이 불어 일부 보트가 뒤집히고 병사가 익사했지만 동맹군은 카디스 북쪽에 상륙했다. 카디스 방어는 무척 허술했기 때문에 근처 포대의 산발적인 포격과 소규모 스페인기병대가 전부였다. 기병대장 돈 펠릭스 바예로Don Feliz Vallero는 막 상륙한 동맹군과 원거리 사격전만 벌였다. 

바로 다음날 로타를 점령하고 본격적인 상륙을 시작했다. 게오르크는 스페인왕위에 대한 카를대공의 권리를 주장하는 포고문을 붙이고 황제기를 게양했다. 지역주민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겨우 2일 만에 14,000명과 보급품이 모두 상륙했지만 카디스 방면으로 진격하는데에는 다시 일주일이 더 걸렸다. 민심확보가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에 약탈을 금지했고 범법자는 처형했다. 


산타 카레리냐 요새도 바로 점령했고 산타 마리Santa Mary항에서는 스페인군 200명을 포로로 잡았다. 일부 동맹군병사가 버려진 마을에서 와인창고를 찾아냈고 바로 약탈로 이어졌다. 장교들도 술취한 병사를 제지하지 못했다. 당연히 민심은 펠리페 5세쪽으로 돌아섰다. 

카디스로 향하는 길은 습지와 개울물의 연속이어서 많은 시간이 걸렸다. 카디스총독은 부족한 병력을 미리 잘 배치해두어 산타 크루즈를 점령하지 못했다. 9월 2일, 산타 카탈리냐를 점령한 루크는 카디스로 함대를 몰고 들어가 정박하고 있던 프랑스군 갤리선 8척을 공격하기로 했다. 

카디스총독은 진입구역에 상선 3척을 미리 침몰시켜 막았고 루크의 계획은 무산되었다. 마타고르다Matagorda를 3일 동안 포격했지만 습지에 배치된 포대가 가라앉았고 효과도 크지 않아서 포기했다. 선원과 해병이 해안부터 포대이동 도로를 만들다가 속도가 붙지 않아 이것도 포기했다. 




카디스전투는 스페인정규군 1,000명이 동맹군 14,000명 이상의 공격을 막아낸, 당시 스페인군으로서는 보기 드문 대승리였습니다. 


규율이 무너지고 약탈이 빈발하자 스페인시민은 원정군에 등을 돌렸다. 게오르크는 지지부지한 작전 그리고 육군과 해군지휘관의 불화를 비난하며 더 이상의 작전은 무의미하다는 편지를 보냈다.  

9월 26일, 원정을 포기하고 병력을 다시 수송하기로 결정했다. 카디스를 마지막으로 포격하자는 제안이 있었지만 화풀이에 불과했기 때문에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까지 약탈이 끊이지 않았고 장교들은 사병에게 약탈품을 빼앗아 상관에게 상납했다. 

9월 28일, 일부 영국보병대가 스페인군의 추격을 막는 동안 본대가 철수하는 수송선에 올랐다. 게오르크와 메수엔은 리스본으로 들어갔고 나머지 병력은 북쪽으로 귀환했다. 



당시 카디스를 수비하던 비야다리아스후작 프란시스코 카스티요 파하르도Francisco Castillo Fajardo입니다. 

겨우 1,000명의 정규군과 숫자미상의 시민병으로 동맹군의 대대적인 침공을 막아냈을 뿐만 아니라 후퇴하는 동맹군을 추격하고 요새들을 탈환했습니다.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에서 많은 활약을 했습니다. 

  

동맹함대에게 대역전의 기회가 저절로 찾아왔다. 동맹함대의 요격을 성공적으로 피한 스페인 보물선함대가 비고Vigo만에 들어갔고, HMS 펨브로크Pembroke 군종장교가 길거리대화를 우연히 듣고는 바로 루크를 찾아갔다. 

이런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10월 22일, 루크는 서인도제도파견용 소함대를 이끌고 비고만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