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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스페인왕위계승전쟁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7부 - 블렌하임전투

by uesgi2003 2018. 1. 13.


블렌하임전투는 워낙 유명해서 나중에 단독으로 정리할 기회가 있을겁니다. 영어발음으로 블레런전투, 당시 지명인 블라인트하임전투 또는 회흐슈타트 2차전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여기에서는 가장 널리 알려진 블렌하임전투를 사용하겠습니다.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7부 - 블렌하임전투


며칠 후 말버러는 모젤과 라인강이 합류하는 코블렌츠Coblenz에 도착해 하노버와 프로이센 파견대를 기다렸다. 강행군에도 불구하고 영국군의 규율은 조금도 무너지지 않았다. 저지대국가 전역을 책임지는 빌레루이원수는 동맹군의 모젤계곡 기동을 예상하고 있었는데도 말버러군의 속도에 완전히 허를 찔렸다. 

빌레루이는 루이 14세의 결정을 원했고 오버크리크를 견제할 병력을 뒤에 남겨두고 20,000명을 이끌고 말버러공을 따라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5월 27일, 말버러는 라인강 동쪽 강변에 올라섰다. 그대로 알사스의 탈라르를 공격한다면 바바리아의 마르생군을 궁지에 몰아넣을 수 있었다. 프랑스군은 말버러의 계획을 알지 못해 혼란스러웠다. 

6월 7일, 말버러는 네카어Neckar강을 건넌 후에 네덜란드통령에게 실제 목표는 다뉴브강의 연합군이라고 밝혔다. 네덜란드공화국은 의외로 담담히 받아들이고 1년 전부터 라인강 상류에서 작전 중이던 네덜란드군 파견대를 지원했다. 



다시 한번, 말버러의 유명한 다뉴브기동입니다. 마치 장기를 두듯이 프랑스군을 이리 저리 흔들어댔습니다. 


헤센과 덴마크군이 합류하면 연합군은 40,000명까지 불어나 프랑스 야전군 하나 정도는 어렵지 않게 격파할 수 있었다. 탈라르는 검은 숲을 거쳐 마르생에게 탄약과 식량을 보급한 후에 제국군의 추격을 피해 알사스로 무사히 귀환했다. 

빌레루이는 왕의 재촉을 받아 라인강을 따라 말버러를 추격하다가 베드마르를 모젤에 남겨두고 6월 초에 알사스로 들어가 탈라르군과 합류했다. 적이 바바리아를 노리는 것으로 드러나자 두 원수는 무척 난감해졌다. 

마르생군을 그대로 둘 수도 없었꼬 그렇다고 두 야전군이 모두 바바리아로 들어가면 알사스가 무방비로 노출되어 보급을 받을 수 없었다. 말버러의 과감한 기동때문에 프랑스군은 대혼란에 빠졌다. 루이 14세는 탈라르는 마르생과 합류하고 빌레루이는 알사스에 남아 동맹군의 추가지원을 막으라고 명령했다. 

이미 포르투갈과 사부아의 배반을 겪었기 때문에 바바리아도 의심스러웠다. 그래서 동맹군이 하나로 합쳐지지 않으면 탈라르도 프랑스-바바리아연합군과 합류하지 말고 독립작전을 펼치라고 덧붙였다.


블렌하임전투의 주연들입니다. 순서대로 말버러공 존 처칠, 사부아공 외젠, 바바리아선제후 막시밀리안 2세 엠마누엘입니다. 가장 아래 바덴변경백 루이 빌리암은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1704년 6월 10일, 말버러는 처음으로 외젠공과 만났고 4일 후에 바덴변경백과 합류했다. 외젠은 라인강의 슈톨호펜방어선Lines of Stollhofen을 지키며 프랑스지원군의 바바리아진입을 막기로 했다. 말버러와 바덴군은 빈과 프랑스연합군 사이에 끼어들기로 했다. 

동맹군의 세 부대는 서로 멀리 있었지만 프랑스군이 선제공격에 나서지 않을 것이 분명해서 주요 거점을 각개격파하기로 했다. 6월 22일, 말버러군이 바덴군과 합류했고 이제 라인강의 외젠군까지 합쳐 동맹군은 60,000명으로 불어났다. 

프랑스연합군은 40,000명에 불과했기 때문에 야전을 피하고 다뉴브강 북쪽강변의 틸링겐Dillingen에 진영을 차렸다. 


말버러는 다뉴브강을 건너 바바리아로 들어가려면 전진기지를 반드시 확보해야 했다. 뇌르틀링겐Nordlingen은 프랑스군 공격을 받을 위험이 없었고 말버러군의 주보급로를 감시할 수 있어서 전진기지로 알맞았다. 

그렇지만 뇌르틀링겐은 다뉴브에서 너무 멀리 있었고 바바리아선제후는 꽤 능력있는 지휘관으로 말버러의 도강을 틀어막을 수 있었다. 말버러와 바덴변경백이 강 북쪽에서 막히면 증원된 프랑스연합군이 빈을 위협할 수 있었다.

다뉴브와 뵈르니츠Wornitz강이 합류하는 도나우뵈르트Donauwörth라는 작은 마을이 더 좋은 전진기지로 보였다. 남쪽공격을 충분히 막아낼 수 있었고 다뉴브강을 넘어가는 다리도 있었다. 마을 내에는 상당히 큰 창고가 있어서 동맹군의 보급창 역할도 할 수 있었다. 바바리아선제후도 이 점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상당한 수비대를 배치하고 꽤 많은 병력을 계속 보강하고 있었다.


말버러는 난감한 상황이었다. 도나우뵈르트를 통제하는 셀렌베르크Schellenberg언덕에는 12,000명의 연합군(자료마다 병력이나 피해기록이 다릅니다)이 이미 배치되어 있어서 막대한 희생이 예상되었고 남쪽의 다른 도강지점도 이미 바바리아군 수비대가 배치되었다. 그리고 남쪽으로 내려갈 경우 늘어진 보급로가 공격에 노출되었다. 

바덴변경백의 반대를 무릅쓰고 말버러는 신속한 행동을 결정했다. 탈영병에게서 언덕의 방비가 아직 부실하다는 정보를 얻었다. 더구나 탈라르가 외젠공의 봉쇄를 뚫고 검은 숲을 통과해 프랑스연합군을 향해 진군 중이라는 보고가 들어와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1704년 7월 2일, 동맹군은 셀렌베르크언덕을 공격했고 언덕에서 밀려난 연합군은 등 뒤의 다뉴브강에 막혀 전멸했다. 프랑스장교는 이렇게 기록했다.

‘적의 포대가 우리를 쓸어 넘겼다... 포탄은 빗나가지 않고 우리 병사를 맞출 정도로 정확했다. 용감한 병사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보고 있자니 너무나도 고통스러웠다. 




특히 패전군의 경우에는 언제나 제대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확한 피해규모에 대해서는 적당히 감만 잡으면 됩니다.

셀렌부르크전투에서 동맹군은 약 1,300명이 전사, 3,700명이 부상당한 반면에 프랑스연합군은 최대 5,000명이 전사했고 3,000명 정도가 포로가 되었습니다. 


승리의 대가는 컸다. 약 5,000명의 동맹군 피해가 있었고 바덴변경백이 다리에 총상을 입고 네덜란드 파견대 장군이 전사했다. 프랑스연합군 12,000명 중에 3,000명만이 탈출할 수 있었다.

런던의 반응은 차가웠다. ‘독일의 언덕 하나에 그렇게 많은 희생을 치르다니 어쩌자는 것인가? 독일에 언던이 하나 둘인가?’라는 비난이 있었다. 그리고 하노버군의 피해가 특히 컸는데도 승리의 영광은 말버러에게 돌아가자, 하노버선제후는 말버러의 지휘를 상당히 못마땅해 했다. 헤이그에서도 승전을 축하하는 동전을 메달을 제작하면서 말버러를 빼고 바덴변경백만 넣었다.

이제 말버러는 전진기지를 확보했고 바바리아를 침공할 준비가 되었다. 그리고 프랑스연합군이 전력이 더 강력한 동맹군을 두고 빈을 공격할 수 없어서 말버러는 일차 목표를 달성했다. 편지를 직접 쓰는 일이 거의 없었던 레오폴트황제는 말버러에게 손수 편지를 보낼 정도로 기뻐했다. 


말버러는 바덴변경백이 공성무기를 제대로 지원하지 않았는데도 라인Rain요새를 포위했다. 바바리아선제후의 아내는 동맹군에 합류하라고 간청하는데도 선제후의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다. 말버러는 선제후를 압박하기 위해 기병대를 풀어 선제후의 영지 외곽을 불태우고 약탈했다. 

선제후의 영지를 지키기 위해 바바리아군이 대거 이탈해 프랑스연합군의 귀중한 전력이 크게 약화되었고 마르생은 어처구니없는 대처에 불같이 화를 냈다. 

바덴변경백도 너무 야만적이라며 항의했지만 말버러는 듣지 않았고 영국군은 약탈에 개입하지 않았다고 런던에 거짓보고 했다. 어쨌든 말버러의 약탈은 선제후에게 큰 압박이 되었고 겨울을 보낼 거처를 미리 없애는 효과가 있었다. 물론 죄없는 일반인이 가장 먼저 굶어죽었다. 


바바리아선제후는 이런 압박에도 연합군에 남아 있었고 루이 14세는 탈라르의 지원군이 다뉴브강으로 향하고 있다며 위로했다. 8월 6일, 탈라르가 온전한 프랑스군을 이끌고 바바리아에 들어섰다. 이제 동맹군과 연합군의 전력은 비슷해졌고 가을의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말버러는 뉘렘부르크 부근의 보급창이 있는 독일 중앙으로 물러나야 할 판이었다. 네덜란드통령은 저지대국가까지 후퇴하라고 요청할 것이 분명했고 그렇게 되면 막대한 희생을 치르며 빈을 지킨 보람이 사라졌다. 그리고 런던은 무리한 작전을 펼친 이유를 요구해올 것이었다.

탈라르가 빌링겐Villingen요새를 점령하느라 며칠을 지체했는데도 외젠공은 프랑스군을 막지 못했다. 검은 숲을 통과하며 프랑스군을 추격했지만 전투가 벌어지지 않도록 거리를 유지했다. 


8월 6일, 외젠군 18,000명은 다뉴브강 회흐슈타트 부근에 도착했다. 훨씬 큰 규모의 말버러군은 약 40km 떨어진 라인에 주둔 중이었다. 세 지휘관이 모여 다음 작전을 협의했고 바덴변경백이 15,000명을 이끌고 잉골슈타트Ingolstadt를 점령하기로 했다. 연합군이 도나우베르트를 탈환할 경우를 대비해 다른 전진기지를 확보할 셈이었다. 

말버러는 외젠과 합류할 수 없었다. 말버러가 뇌르틀링겐Nordlingen과 뉘렘베르크를 비우면 연합군이 바로 쳐들어와 보급로를 위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잉골슈타트를 포위한 바덴변경백이 오히려 협공당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도 없었다. 탈라르까지 연합군에 가세하면 압도적인 병력으로 외젠군부터 노릴 것이 분명했다. 


실제로 연합군은 8월 10일에 부교로 다뉴브강을 건너 외젠으로 향했다. 외젠은 도나우베르트와 가까운 뮌스터로 급히 병력을 물리고 결전의 순간에 말버러에게 지원요청을 할 생각이었다. 외젠은 말버러에게 급히 전령을 보냈다.

‘적이 접근했습니다. 전군이 라우잉겐Lauingen에서 다뉴브강을 넘어온 것이 거의 확실합니다. 회희슈타트를 정찰하라고 보낸 중령이 쫓겨 왔고 딜링겐 평원은 적으로 가득 찼습니다. 나는 거기에서 낮 동안 버티다가 겨우 18개 대대밖에 없었기 때문에 밤까지 버티는 것은 너무 위험했습니다. 나중에 큰 희생을 내고 되찾을 것을 생각하니 무척 안타깝습니다. 

도나우베르트 부근에 미리 정해두었던 진영으로 보병과 기병 일부를 데리고 들어왔습니다. 기병과 함께 최대한 버틸 생각입니다... 무조건 서둘러서 내일 내게 와주십시오. 너무 늦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 편지를 쓰는 동안에도 적의 전군이 도강했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이제 촌각을 다툽니다. 귀공은 힘들더라도 레흐Lech와 다뉴브강을 건너서 시간을 줄여야 합니다. 도로상태도 좋습니다. 

나는 귀공의 답변을 기다린 후에 이후 행동을 결정하겠습니다.‘



이제는 나이를 먹고 게을러져서 그림편집을 안하니까 여러분이 클릭해서 큰 그림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프랑스연합군이 강 북쪽을 건너온 이상 머뭇거릴 여지가 없었다. 바로 기병 27개 중대Squadron를 보내고 본대는 24시간도 안되어 외젠과 합류했다. 8월 11일 저녁, 동맹군은 뮌스터에서 합류했고 프랑스연합군의 결정적인 기회가 사라졌다. 

바덴변경백군이 잉골슈타트로 이동해서 연합군의 전력이 많이 위축되었는데도 프랑스연합군은 회흐슈타트 평원에 넓게 퍼져 방어태세를 갖췄다. 가을이 오고 있기 때문에 시간은 자신의 편이라고 생각했다. 

다뉴브강과 스바비아 유라Swabia Jura의 고지대를 천혜의 장애물로 양옆에 끼고 프랑스원수와 선제후는 여유롭게 동맹군의 다음 수를 기다렸다. 말버러군이 겨울숙영지를 찾아 독일 중앙으로 후퇴하면 추격해서 요격할 생각이었다. 



1704년 8월 13일, 말버러와 외젠이 과감한 공격에 나서면서 프랑스연합군의 계획과 기대는 산산조각났다. 슈베닝겐Schwenningen의 험로는 쉽게 막을 수 있다고 방심하고 내버려두었는데 동맹군이 그길을 따라 회흐슈터트로 들어섰다. 동맹군이 노린 기습은 그대로 적중했다. 

외젠은 우익에서 마르생군과 바바리아군을 묶어두고 말버러는 좌익에서 강력한 기병대로 블렌하임Blenheim 옆에 있는 탈라르군을 공격했다. 엄청난 격전 끝에, 연합군은 탈라르의 기병대를 격파해 20,000명을 죽이고 13,000명을 포로로 잡았다. 대부분의 프랑스군은 너무 좁은 블렌하임에 갇혀 소총도 제대로 발사하지 못했다. 

바바리아선제후와 마르생은 큰 피해를 입으면서도 위치를 고수하다가 어둠을 틈타 전장을 빠져나갔다. 





블렌하임전투 장면입니다. 아래는 말버러공이 기병대 진두지휘를 하는 모습인데 과장이겠죠. 



이렇게 후방에서 지휘를 한 것이 맞겠죠. 



마을에 갇히 프랑스대군에게 다가서고 있는 영국군입니다. 





탈라르군은 탈라르 자신과 많은 고급장교가 사로잡혔다. 프랑스연합군은 완전히 와해되었고 루이 14세의 원대한 계획도 지도 위에서 사라졌다. 한 프랑스 장교는 ‘끔찍한 상태였다. 전군에서 온전한 장교가 겨우 250명뿐이었다’고 기록했다. 

연합군의 승전은 네덜란드공화국과 영국을 뒤흔들었다. 전멸에 가까운 프랑스연합군의 피해는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레오폴트황제는 다시 한 번 말버러에게 역사상 최고의 승전이라며 극찬의 편지를 보냈다. 

반면에 왕손의 탄생으로 연일 축제를 벌이던 베르사이유는 적막에 휩싸였다. 루이 14세는 6일 동안 상황을 파악하느라 애태웠다. 중구난방으로 들어오는 보고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왕은 직접 보고를 받았지만 정확한 내용이 없었다. 어떻게 해서 야전군 하나가 작은 마을에 갇혔는지 그리고 무기력하게 항복했는지에 대해 속 시원히 알려주는 전령이 없었다. 

명문가문은 모두 사상자 또는 포로피해를 입었고 베르사이유의 적막은 흐느낌으로 바뀌었다.  


동맹군도 12,000명 사상이라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후속조치에 나서는데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바덴변경백이 잉골슈타트를 함락시키자 말버러와 외젠은 패잔병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프랑스연합군은 후퇴하던 길에 강도로 돌변한 농부들의 습격까지 받았다. 

알사스의 빌레루이가 급히 달려 나와 만신창이가 된 아군을 보호하면서 동맹군의 추격을 견제했다. 외젠과 바덴변경백은 란다우를 포위했고 말버러는 모젤계곡을 따라 올라가 트리어Trier와 트라바흐Trarbach를 포위했다. 네덜란드국경을 지키던 오버키르크는 국경을 넘어 말버러와 합류했다. 

11월 29일, 란다우가 70일을 버틴 끝에 항복했다. 여름의 대승에 비하면 의외로 보잘 것 없는 승리였지만 동맹군은 알사스의 란다우요새, 모젤계곡의 트리어와 프라바흐를 함락시켜 라인강 일대의 프랑스군 방어선을 무너트렸고 이듬해에 보다 공격적인 작전을 펼칠 수 있는 좋은 발판을 마련했다. 


말버러가 베를린, 하노버와 헤이그를 방문하자 이전의 비난이 무색하게 온갖 찬사가 쏟아졌다. 영국에서는 프랑스군의 고급장교와 노획깃발을 앞세워 로마시대를 방불케하는 행진을 벌인 후에 웨스트민스터 홀에 전시했다. 

런던도 이전과 완전히 다른 태도를 보였다. 말버러의 궁전을 짓기 위한 모금까지 벌였고 블레넘(블렌하임의 영어식 발음)궁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왕가의 궁전이 아닌데도 영국최대의 궁전으로 건축된 말버러궁입니다. 지금도 말버러의 후손이 살고 있다고 합니다. 



블레넘궁의 벽걸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