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1년 전만 해도 하루 하루, 매일 저녁 뉴스시간이 놀라웠는데 이제는 다른 의미로 하루 하루가 놀랍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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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왕위계승전쟁 9부 - 동맹군의 양동작전
동맹군은 2,300명의 해병, 70명의 선원과 카탈루냐 비정규군으로 지브랄타를 수리하고 지켰다. 루크는 카를대공에게 해병을 돌려달라고 요구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다행히 세우타의 스페인주둔군을 싫어하는 북아프리카 탕헤르Tangier총독이 큰 도움을 주었다. 총독은 지브랄타주둔 동맹군에게 군마, 옥수수와 마초 심지어 무어족용병까지 제공했다.
비야다리아스는 8,000명의 스페인군, 4,000명의 프랑스군, 40문의 공성포와 12문의 구포를 데리고 지브랄타에 접근했다. 10월 21일, 랜드포트Landport성문 앞에 참호를 파고는 6일 후부터 포격을 시작했다.
11월 9일, 존 리크John Leake함대가 카디스의 프랑스함대를 피해 지브랄타에 나타나 만에 정박한 프랑스선박에 불을 질렀다. 피해는 24문의 프리깃함 한 척이 전부였다. 수비대 사이에 병이 돌고 포격에 장군 한명이 중상을 입었는데도 11월 11일에 있었던 스페인군의 강습은 큰 피해를 내고 실패했다.
리크는 보급품과 병력을 수송한 후에 프랑스함대가 다가오자 먼 바다로 나가 동맹군수송선의 항로를 보호하고 결전을 준비했다. 연합군은 지브랄타방어선을 계속 두들기고 참호를 조금씩 앞으로 접근시켰다.
12월 첫 주가 되자 수비대는 겨우 1,000명 정도만 제자리를 지킬 수 있었지만 기상악화로 연합군의 참호구축작업도 크게 느려지고 사기가 크게 떨어졌다. 36파운드 공성포가 거치되면서 방어선은 큰 구멍이 뚫리기 시작했다.
12월 14일, 구원함대가 리스본을 출발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스파르텔곶Cape Spartel (지도 참조) 앞바다에서 프랑스함대와 전투를 벌여 몇 척을 잃은 구원함대는 12월 19일, 전함 13척과 수송선 4척을 지브랄타만으로 진입시켰다. 영국보병 1,700명이 상당한 보급품과 함께 상륙했다.
12월 23일, 수비대가 거꾸로 강습에 나서 연합군의 포위망을 돌파했고 일주일 후에도 돌파했다. 연합군의 사기는 크게 떨어져서 이제는 포격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연합군의 병력은 6,400명으로 줄어들었다.
해안선은 강력한 해군이 필요했고 동맹함대가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지브랄타요새 뒤의 절벽을 공격하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다리 등을 설치하고 올라갔지만 오히려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스페인-프랑스연합군은 10,000명을 잃는 반면에 동맹군 수비대는 겨우 400명만을 잃는 대승을 거뒀습니다.
12월 25일, 리크의 함대가 다시 동쪽에 나타났고 지브랄타만에 있던 여러 척을 나포해 리스본으로 갔다. 테스Tesse원수(그림 참조)가 비야다리아스후작을 대체했지만 공성작전은 진전이 없었다. 2월 5일, 맹렬한 포격 후에 프랑스군이 돌격했다가 오히려 네덜란드군의 반격에 밀려났다.
3월 말, 리크는 수비대에 보급품을 전하고 프랑스함대와 전투를 벌여 3척을 나포하고 2척은 불태웠다. 프랑스제독 푸앙티Poitis후작 베르나르드 데장Bernard Desjean은 부상을 입고 더 이상 함대를 지휘하지 못했다(그림 참조).
4월 초, 테스는 대규모증원없이는 더 이상의 강습작전이 무의미하다고 판단하고 봉쇄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연합군이 카디스를 공격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펠리페 5세는 지브랄타를 포기했고 4월 3주차에 테스는 병력을 철수시켰다. 18,000명이 투입되었던 공성작전에서 12,000명이 병들거나 죽었다. 반면에 수비대의 희생은 상당히 가벼운 편이었다.
카를대공의 입지는 크게 강화되었고 동맹군은 스페인남부에 머무르며 이후의 작전을 노렸다. 반면에 프랑스 스페인연합군은 주도권을 잃었고 향후 포르투갈국경을 넘어올 연합군에 대응할 귀중한 전력만 잃었다.
다스 미나스는 베이라Beira에서 스페인으로 진격하기 위해 준비 중이었는데 베르윅은 전투피해와 병으로 병력이 크게 줄었기 때문에 펠리페 5세의 지브랄타로 증원군을 보내라는 명령을 거부했다. 그는 이렇게 기록했다.
‘적병력은 37개 대대이며 그 중 10개 대대는 영국이나 네덜란드군이다. 그리고 기병 50개 중대도 있다. 내가 대응할 병력은 프랑스군 18개 대대뿐이고 기병 37개 중대는 군마가 병들어 심각한 상태다. 시우다드 로드리고에는 스페인 5개 대대가 있다.’
사령관과 마드리드궁정 사이에는 심상치않은 분위기가 흘렀다. 프랑스대사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로 중재에 나서 도움이 되지 않았다. 베르윅은 동맹군의 알칸타라Alcantara와 톨레도Toledo침공이 정말로 위험하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포르투갈왕과 대공이 공격해올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도 내 모든 요청은 무시되고 있다. 마드리드의 대사는 오히려 방해가 되고 있다. 그는 적이 충분한 병력을 모을 수 없다고 고집부리고 있다.’
실제로 다스 미나스 등이 지휘하는 동맹군이 이동 중이었다. 9월 23일, 20,000명이 알메이다Almeida에 도착했고 2일 후에 페드로왕과 카를대공이 군대의 무장과 훈련상태를 사열하며 기뻐했다.
다스 미나스는 시우다드 로드리고를 함락시키면 가을에는 마드리드를 압박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카스티야제독Almirante of Castile도 이 경로를 이동하면 지역민의 호응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영국과 네덜란드 지휘관이 반대했고 카를대공도 이질에 걸려 좀처럼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마드리드는 뒤늦게 위협을 알아채고 스페인이 보류한 기병을 서둘러 베르윅에게 넘겨주었다. 대신에 결전을 벌이지 말고 물러나라는 조건을 붙였다.
베르윅은 당연히 명령을 무시하고 바다호스Badajoz에 있는 틸리Tilly의 병력을 불러들이고 아게다Agueda강을 지키기로 했다.
‘강을 지키지 못하면 스페인전체를 잃게 된다. 포기하고 전부 잃는 것보다 전투에 희망을 거는 편이 낫다.’
베르윅의 판단이 옳았다. 동맹군은 보급을 기다리느라 예정보다 훨씬 늦은 10월 7일에야 강에 도착했다. 다스 미나스는 맹렬한 포격전을 벌이며 베르윅의 방어선을 탐색했지만 너무나도 단단해보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날씨가 험악해지고 마초를 구할 수 없는데다 아게다강을 건널 수 있는 기회를 찾지 못하자 동맹군은 포르투갈 국경으로 되돌아갔다.
동맹군은 서로를 비난하며 실패의 책임을 돌렸고 페드로왕의 건강은 크게 악화되어 더 이상 원정길에 나설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베르윅도 마드리드의 항의 때문에 프랑스로 소환되었고 마드리드와 관계가 부드러운 테스원수가 지휘권을 잡았다. 베르윅은 동맹군의 공격을 조기에 차단한 공을 인정받아 스페인을 떠나기 전에 펠리페 5세의 훈장을 받았다.
지브랄타는 뼈아픈 실책이었지만 반대로 그렇지 않아도 동맹군에 우호적이지 않던 안달루시아Andalusia주민이 완전히 돌아서는 계기가 되었다. 덕분에 병력과 물자를 옮기기 쉬운 지브랄타를 통한 진격로는 처음부터 거론되지 않았다.
네덜란드의 파겔과 영국의 갤웨이Galway의 불화는 심각한 수준이었다. 페드로왕이 갤웨이를 다스 미나스 수준으로 승급시키면서 두 사람 사이는 더욱 벌어졌다. 1704년 말, 봄원정계획을 페드로왕에게 제시했지만 왕이 쓰러지면서 영국 찰스 2세의 미망인이자 페드로의 여동생인 브라간사 디 카타리나Catherine of Braganza가 섭정이 되었다.
당연히 원정준비는 계속 늘어졌다. 왕이 조금 회복하면서 혼란이 그나마 진정되었고 주공은 마드리드로 향하고 남부에서 안달루시아로 교란진격을 한다는 계획이 결정되었다.
갤웨이는 1705년 4월 초에 군대를 검열하고는 무척 실망했다. 기병용 군마와 무장이 심각하게 부족했다. 그렇더라도 프랑스와 스페인군의 상태는 훨씬 더 심각했기 때문에 서둘러 나서기만 하면 충분한 승산이 있었다. 사기가 정말 큰 문제였다. 영국 용기병장교는 이렇게 기록을 남겼다.
‘신이시여 당신은 이 지옥같은 나라를 못 보셨을 겁니다. 모두가 진절머리를 내고 있다.’
포르투갈장교는 왕의 병세 때문에 위축되었고 영국에서 오는 물자가 계속 지연되자 의심을 하기 시작했다. 증원병력이 도착해도 곧바로 지브랄타로 보내졌다. 공성포는 바다호스를 공격하려고 엘바스Elvas로 보냈다가 다시 가져오느라 엄청난 인력과 시간만 낭비했다. 포탄의 뇌관은 성능이 의심스러웠고 중포를 지탱할 목재도 부족했다.
1705년 4월 말, 결국에는 17,000명의 동맹군이 원정에 다시 나섰고 5월 3일에는 타구스강 남쪽의 발렌시아 드알칸타라Valenciad’Alcantara요새를 함락시켰다. 동맹군은 이전의 실패에 대한 보상을 받겠다며 도시를 약탈했는데 다행히도 인명피해는 크지 않았다.
동맹군의 약탈을 겪은 지역주민이 동조할 리가 없었다. 다음 공격목표인 알부케르케Albuquerque는 단호하게 펠리페 5세를 위해 죽겠다며 저항하다가 5월 21일에 함락되었다. 초반기세가 순조롭자 갤웨이는 바라호스로 진격하자고 주장했고 파겔은 타구스 남쪽강변의 알칸타라를 점령하자며 의견이 나뉘었다.
리스본은 바다호스진격을 받아들였지만 테스원수가 이미 수비대를 크게 보강시켰기 때문에 7월 5일에 공격을 취소했다. 그렇지 않아도 이글거리는 여름태양과 기온 때문에 모든 작전을 중지시킬 판이었다.
9월, 바다호스진격이 다시 시작되었다. 동맹군은 요새주변을 탐색하다가 동쪽부터 공격로를 만들기 시작했다. 테스는 동맹군을 괴롭힐 생각으로 출격했지만 재미를 보지 못했고 공성포가 요새에 구멍을 내기 시작했다.
갤웨이는 팔에 프랑스군의 총탄을 맞았고 테스는 프랑스의사를 보내 팔 절단수술을 도와주었다. 10월 14일, 테스는 탈라베라 라 레알Talavera la Real을 나와 동맹군의 포위망을 뚫으려 했다. 약간의 전초전 후에 오랜 동안 장거리 포격전이 벌어졌고 동맹군 지휘관은 이번에도 서로를 비난하며 후퇴하기로 결정했다.
동맹군이 스페인국경도 돌파하지 못하고 지지부진하는 동안 영국에서는 피터버러Peterborough공작 찰스 모던트Charles Mordaunt(그림 참조)가 이끄는 증원군이 도착했다. 지중해로 진격해서 사부아공을 응원하거나 스페인해안선의 전략거점(카탈루냐)을 점령하는 역할이었다.
앤여왕은 모던트와 클라우데슬리 쇼벨Cloudesley Shovell제독에게 이런 명령을 내렸다.
‘바르셀로나와 카디스를 점령하는 것보다 카를 3세를 스페인왕으로 추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두 사람은 최선을 다해 협력하고 전략거점을 무력화시켜야 한다...
카탈루냐해안에 도착하면 지역주민의 협력을 최대한 이끌어내서 프랑스의 굴레를 벗어나 카를 3세에게 충성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을 북돋아서 우리의 도움을 바라지 않고 스스로 자유를 지킬 수 있게 해야 한다.
만약 그들이 우리의 권유를 따르지 않고 카를 3세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면 무력으로 스페인 해안도시를 무력화시켜도 좋다.‘
쇼벨은 굵직한 해전을 거친 후에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에서 급승진했지만 1707년 10월, 영국남서쪽 실리Schilly제도 부근에서 항해사의 실수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대형전함 4척과 2,000명을 잃어 영국해군 역사상 최악의 사고로 꼽힙니다.
쇼벨은 보트를 타고 침몰하는 기함에서 탈출했지만 결국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명목상 총사령관인 카를대공은 합스부르크신하와 함께 쇼벨의 함대에 올랐고 1705년 7월 26일에 원정군이 타구스를 떠났다. 카를은 리오 데 자네이로Rio de Janeiro에서 나포한 스페인상선의 은으로 포르투갈에 진 빚은 청산했다. 지브랄타에 들러 게오르크공과 수비대 일부를 더 태우고 북쪽으로 향했다.
게오르크는 발렌시아에 상륙해 마드리드로 바로 진격하자고 주장했지만 격론 끝에 바르셀로나를 점령하고 카탈루냐의 동조를 이끌어내기로 했다. 총독인 프란시스코 돈 벨라스코Francisco Don Velasco백작이 상당히 뛰어난 지휘관인데다가 비카탈루냐 병력도 상당한 것이 걸림돌이었다. 벨라스코는 지역유지를 가택연금하고 게오르크공의 오랜 지인은 모두 수감해서 철저하게 감시했다.
이런 난관이 있었지만 카탈루냐는 오래 전의 권리를 되찾을 수 있다면 기꺼이 외국군에 협조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프랑스에서 온 외국인이 마드리드의 왕좌에 앉아 있는 상황은 카탈루냐에 좋은 것이 없었다.
동맹원정군은 공성포가 없었기 때문에 쇼벨의 함대 포대를 떼어내야 했다. 동맹함대는 8월 2주차에 알테아Altea 앞바다에 정박했고 데니아Denia항은 순순히 그들을 받아들였다. 모던트는 알리칸테Alicante에 상륙하자고 제안했지만 카를대공은 카탈루냐의 반란을 이끌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드리드로 진격하는 것도 좋았고 카탈루냐에 거점을 만드는 것도 좋은 생각이었다.
1705년 8월 22일, 7,000명 정도의 해병과 보병이 바르셀로나 북쪽 해변에 상륙했다. 대공은 영국전함에서 내려 해변에 모인 지역주민의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산 마르틴San Martin에 사령부를 설치했다.
대규모 지원병이 모여든다는 소문과 달리 미켈레트Miquelet라고 부르는 소수의 지역민병만이 지원했지만 워낙 독립적이어서 명령에 따르지 않아 오히려 방해가 되었다.
카탈루냐는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을 계기로 스페인중앙정부와 극심한 갈등을 빚어왔고 2005년에는 아예 (민간인 중심의) 미켈레트연대를 재창설했습니다. 최근에 있었던 분리독립시도가 이해되는 대목입니다.
아래는 카탈루냐 민병이 프랑스진지를 습격하는 재현이벤트입니다.
원정군은 상륙 후 3주 동안 다음 작전에 대해 협의하면서 너무나도 귀중한 시간을 흘려보냈다. 심지어 바르셀로나를 포기하고 함대에 올라 이탈리아로 가자는 헛소리까지 나왔다. 이미 9월에 접어들어서 이탈리아로 향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모던트는 다시 한 번 발렌시아의 중요성을 언급했지만 대안으로 타라고나Tarragona와 토르토사Tortosa라는 보다 손쉬운 목표가 거론되었다. 결국 원점으로 돌아가 바르셀로라를 어떻게든 점령하기로 했다.
신도시에서 남서쪽으로 900m 떨어진 몬주이크Montjuich라는 요새가 관건이었다. 지역주민의 정보에 따르면 몬주이크요새는 예상과 달리 수비병력도 부족하고 허술한 상태라고 했다.
몬주이크는 바르셀로나 시내를 통제하는 전략요충지입니다.
게오르크공은 자신이 알고 있던 정보와 달라 회의적이었지만 지금까지 연합군은 바르셀로나 남쪽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고 실제로 벨라스코는 전력 대부분을 북과 서쪽에 집중시키고 있었다.
모던트는 다시 한 번 전력을 걸기로 했다. 9월 13일, 타라고나는 잊어버리고 포병지휘관 존 리차드John Richards에게 요새공격을 맡겼다. 출발 직전에야 연대장들에게 작전계획을 알려줄 정도로 적과 아군 모두에게 기밀을 유지했다. 카를대공도 뒤늦게 보고받고는 기분이 상해 행운을 빈다는 전령만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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