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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스페인왕위계승전쟁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8부 - 말라가해전

by uesgi2003 2018. 2. 23.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8부 - 말라가해전


1703년 말, 루이 14세는 스페인왕좌에 있는 손자의 입지를 보강하기 위해 영국출신의 베릭공Duke of Berwick, 제임스 피츠제임스James Fitzjames에게 프랑스기병과 용기병 8개 연대와 보병 20개 대대를 맡기고 이듬해 2월에 스페인으로 보냈다. 

베릭공은 야전사령관의 경험이 부족했지만 충분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고 훗날 프랑스군 원수까지 진급한 자크 프랑수아 드 샤스트네Jacques François de Chastenet의 보좌를 받고 있었다. 

샤스트네는 펠리페 5세의 재무고문과 불화를 빚다가 재무고문을 공금유용과 횡령혐의로 고발하기 직전까지 간 적이 있었다. 지원군은 국경부터 마드리드에 이르기까지 보급을 제대로 받지 못했고 재무고문의 서류는 조작투성이였다. 다행히도 양쪽의 오해라는 것이 밝혀져서 해프닝으로 끝났다. 



영국출생으로 프랑스원수까지 오른 제임스 피츠제임스입니다. 아버지인 제임스 2세가 영국왕위에서 축출될 때에 함께 프랑스로 건너가서 프랑스군에 입대했습니다.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에서는 프랑스군을 이끌고 프랑스인이 지휘하는 동맹군을 격파하는 희한한 전과를 올리기도 했습니다. 

사국동맹전쟁(1718~1720)에서는 입장이 바뀌어 스페인을 상대했고 유럽각국의 전쟁에 참전했다가 1734년에 전사했습니다. 


베릭공은 2월 15일, 마드리드에 입성해 프랑스-스페인연합군의 사령관 임무를 맡았다. 상황은 비관적이었다. 스페인군의 용맹은 나무랄데가 없었지만 무장과 훈련도가 너무 낮았고 급여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었다. 

프랑스장교를 투입해 훈련시키려고 해도 자존심이 강한 스페인장교가 가만히 있지 않았다. 마드리드궁전도 문제였다 일부는 펠리페 5세 주변을 맴돌았고 일부는 루이 14세에게 추파를 보냈다. 일부는 프랑스영향력을 극도로 경계했다.

베릭공은 스페인과 포르투갈 원정군 훈련과 준비보다 궁전의 정쟁에 더 많은 시간을 빼앗겼다. 


베릭공과 샤스트네는 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짧은 시간 내에 스페인군을 놀라울 정도로 개혁시켜 40,000명(기병 10,000명)의 전력을 만들어냈다. 의심을 샀던 재무고문도 전력을 다해 월급을 지불했는데 당시 스페인군 상황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포르투갈의 페드로왕은 동맹군으로 진영을 바꾸고 1704년 3월 6일 리스본에 영-네덜란드 4,000명 병력을 받아들였다. 포르투갈의 최종의사를 확인한 프랑스외교관은 포르투갈에서 최대한 말을 사들여 스페인으로 보낸 후에 리스본을 떠났다. 

동맹군병력이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리스본에 들어갔고 함대가 지브랄타해협을 장악했지만 이후의 상황은 지지부진했다. 네덜란드는 약속했던 군자금을 군대에 지급하는 대신에 포르투갈이 자국상선단에 진 채무와 상계처리했고 영국만이 약속했던 몫을 제시기에 내놓았다. 


영국원정군을 맡은 마인하르트는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귀중한 시간을 계속 흘려보냈다. 영국남부와 네덜란드에서 실은 군마가 살아남지 못한데다가 포르투갈은 원래 말이 부족했기 때문에 많은 기병이 말을 타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프랑스대사의 방해까지 겹쳤다.

현지에서는 조랑말 정도가 고작이어서 본국에서 군마를 계속 수송해왔고 손실이 계속 커졌다. 동맹군은 해상을 여전히 장악했고 발견하는 프랑스상선을 모두 노획했다. 한줌밖에 안되는 스페인함대라도 프랑스 지중해함대와 합류해 지브랄타해협을 봉쇄한다면 사부아가 고립될 위험이 있었다.      

동맹함대는 육군과 달리 먼지역까지 지원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프랑스남부의 반란군을 지원하고 북아프리카의 무어Moor인도 끌어들이라는 명령이었다. 작전지역에 상륙할 병력이 부족하다는 점이 아쉬웠다.


페드로왕이 포르투갈 2개 대대를 약속했지만 루크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브레스트Brest에서 오는 프랑스함대를 요격하려 급히 출항했다가 발견하지 못했다. 지브랄타해협을 쉽게 통과한 후에 발렌시아해안으로 갔지만 해병을 오랜 동안 상륙시킬 수 없어서 북쪽으로 향해 카탈루냐 상황을 보기로 했다. 

페드로왕은 동맹함대가 사라지자 약속을 어겼다며 항의했고 동맹군사절은 항구에 머무는 것보다 프랑스함대를 찾아 요격하는 것이 오히려 포르투갈의 안전을 지키는 최고의 전략이라고 설득했다. 브레스트에서 나온 프랑스함대가 포르투갈항구나 상선을 노리지 않고 그대로 남진하면서 사실로 드러났다. 

어차피 동맹함대는 포르투갈항구를 지킬 생각이 없었다. 다른 소함대도 6월 말에 단 한 척의 전함도 남기지 않고 모두 떠났다. 


포르투갈이 동맹군에 합류하면서 상황이 크게 악화되자, 베릭공은 우선 포르투갈부터 동맹군진영에서 이탈시키려고 국경을 넘었다. 본대 14,000명과 함께 타구스Tagus강의 오른쪽 강변을 따라 빌라 벨랴Villa Velha로 내려가 왼쪽강변을 따라 내려가는 5,000명과 합류할 계획이었다. 그리고 돈 프란시소 데 론쿠이요Don Franciso de Ronquillo의 부대가 뒤따르고 있었다.

연합군 전력은 총 28,000명이었고 대부분은 프랑스병사였다. 겔웨이Galway와 포르투갈 안토니오 루이스 데 소우자Antonio Luis de Souza의 동맹군은 21,000명에 불과했고 끊임없이 탈영하고 있는데다 군마를 먹일 마초가 부족했다. 

베릭의 손쉬운 승리가 예상되었다. 


니콜라스 파겔Nicolas Fagel후작이 네덜란드군 2,500명으로 연합군의 진격로를 막아섰지만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았다. 포르투갈의 작은 요새들은 별다른 전투없이 항복했고 몬산토Monsanto(사진 참조)는 무력으로 점령당했다. 

지형이 워낙 험악해서 연합군 부대가 서로 협력하지 못했고 보급부대가 뒤쳐졌는데도 베릭의 진격은 매우 위협적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리스본은 함락될 것만 같았다. 

알메이라Almeira에 있던 다스 미나스Das Minas후작이 포르투갈군을 이끌고 나왔고 파겔은 네덜란드병사 수백 명을 지원했다. 페드로왕은 타구스로 가서 연합군의 진격으로 막으라고 명령했지만 부교장비가 없었다. 반면에 연합군은 부교를 설치하고 마음대로 강을 건너 요새를 계속 공략했다. 



연합군의 보급문제가 발목을 잡았는데 그 중에서도 마초가 심각했다. 군마는 병들고 굶주려 쓰러졌다. 연합군의 진격속도가 눈에 띄게 느려졌다. 

다스 미나스는 몬산토Monsanto까지 진격해 6월 11일 돈 론쿠이요의 연합군 별동대와 전투를 벌였다. 포르투갈기병대는 공격을 받고 물러섰지만 보병은 제자리를 지켰고 론쿠이요는 황급히 물러났다. 

다스 미나스는 몬산토를 함락시키고 프랑스군 120명을 포로로 잡았다. 베릭은 다스 미나스를 추격하는 대신에 4,000명을 이끌고 오는 비야다리아스Villadarias와 합류했다. 그는 카스테요 데 비데Castello de Vide를 포 몇 발만 쏘고 점령했다. 항전하면 모든 주민을 죽이고 도시를 잿더미로 만들겠다는 협박이 통했다. 


여름의 엄청난 기온, 늘어진 보급로, 후송대나 낙오병을 노리는 게릴라공격이 빈번해졌고 연합군기병의 상태는 날로 악화되었다. 동맹군은 여전히 20,000명의 병력을 보유한데다가 결전을 피하고 수비태세로 일관했다. 

1704년 7월 1일, 베릭은 점령한 요새 대부분을 파괴하고 국경에서 철수했다. 펠리페 5세는 마드리드로 돌아갔고 베릭은 살라만카Salamanca에, 비야다리아스는 남쪽으로 돌아갔다. 연합군의 첫 번째 원정은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만 국경일대를 황폐하게 만들어서 동맹군도 주둔하기 힘들게 만들었다. 


동맹함대는 지브랄타해협을 안전하게 통과했지만 발렌시아에 병력을 상륙시키거나 프랑스지중해함대를 요격하지 못했다. 사부아의 지원이 없었기 때문에 툴롱Toulon을 공격하지 못했다. 대신에 1704년 5월 30일, 루크는 1,700명의 해병을 카탈루냐의 바르셀로나Barcelona 부근에 상륙시켰다.

중앙정부에 적대적인 카탈루냐가 동맹군의 상륙을 반길 것으로 기대했지만 반응은 미지근했다. 심지어 바르셀로나총독은 카를대공의 편지를 거절했다. 도시를 포격한다고 협박했다가 오히려 큰 반발을 샀다. 

바르셀로나를 공략하기에는 병력이 너무 부족했기 때문에 6월 1일 병력을 태우고 프랑스함대를 찾아 나섰다. 심한 역풍 때문에 전함이 크게 손상되어 포르쿠갈로 되돌아갔다. 카디스Cadiz나 미노르카Minorca의 마혼Mahon 공략을 협의하던 중에 지브랄타의 스페인수비대가 의외로 허약하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1704년 7월 30일, 동맹함대는 해협을 다시 지났고 영국해병 1,800명이 좁은 모래사장에 상륙했다. 전함 몇 척이 항구에 들어섰다가 포탄을 맞았고 HMS 라넬라프Ranelagh의 돛대를 날렸다. 

지브랄타총독 돈 디에고 데 살리나스Don Diego de Salinas는 항복요구를 당당하게 거절했지만 상황은 암담했다. 이미 방어막은 거의 무너졌고 수비대는 30살을 넘긴 56명과 민병대가 전부였다. 

2일 후부터 맹포격이 시작되었고 무장병력이 정박해있던 프랑스사략선을 나포했다. 스페인포대는 포격을 받고 침묵했고 해병은 손쉽게 공격을 이어갔다. 탄약창이 폭발하면서 몇 명을 잃은 것이 전부였다.


데 살리나스는 한줌밖에 안되는 수비대가 40,000발의 포탄을 맞았는데도 사상자가 거의 없었지만 더 이상의 저항이 무의미하다고 판단했다. 총독은 바로 항복권유를 받아들였고 카디스에서 벌인 만행을 두려워한 주민도 모두 터전을 버리고 본토로 넘어가 지브랄타가 보이는 곳에 새 터전을 마련했다. 

지브랄타에 있던 극소수의 프랑스인은 포로가 되었다. 동맹군은 겨우 300명의 손실만으로 지브랄타를 점령하고 영국령으로 만들었다. 런던은 스페인d 보유한 요새 중에 가장 막강한 요새를 점령했고 적의 교역로를 차단했다고 과장 섞인 축하를 했다.  

마드리드는 의외로 차분하게 지브랄타 상실을 받아들였고 툴롱의 프랑스함대는 해협에 있는 동맹함대를 향해 출항했다. 동맹함대의 네덜란드전함 4척은 본토의 병력을 수송하기 위해 떠났고 프리깃 3척은 브라질에서 오는 포르투갈상선단을 보호하기 위해 아조레스Azores로 갔지만 전력은 거의 그대로였다.



말라가해전은 벨레스Velez-말라가해전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말라가는 표시보다 약간 왼쪽입니다. 


루크는 세우타Ceuta에서 물을 싣고 온 소함대를 합류시켰다. 프랑스함대는 해협에 들어서지 않고 선수를 돌렸다가 결국에는 1704년 8월 24일 오전에 말라가Malaga 앞바다에서 결전을 벌였다. 

루크는 전함 59척과 화공선 5척이 있었고 툴롱함대는 전함 57척, 화공선 6척과 쾌속갤리선 28척이 있었다. 갤리선은 바람이 잦아들면 전함을 끌어 전열을 갖추는데 큰 힘이 되었고 선수의 중포도 매우 위협적이었다. 

동맹함대는 바람을 등지고 있어서 유리했고 격전을 벌이며 막대한 화약과 포탄을 사용했는데도 양쪽 모두 심한 손상만 입었을 뿐이고 한척도 침몰하지 않았다. 

‘툴루즈백작은 말라가 앞바다에서 루크의 함대와 오전 10시부터 밤 8시까지 전투를 벌였다. 해전으로는 보기 드문 격전이었다.’ 

동맹함대는 2,718명을 잃었고 툴롱함대는 3,048명을 잃었는데 그 중에는 2명의 제독이 있었다. 



루이 14세는 오래 전에 지적한대로 과도한 여성편력으로 많은 자식을 낳았습니다. 툴루즈백작, 루이 알렉상드르 드 부르봉Louis Alexandre de Bourbon도 정부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서자입니다. 

공직에도 몸담아 해군상까지 승진했고 비록 순위가 상당히 멀지만 왕위계승권도 가지고 있는 서자였습니다. 


이튿날 툴롱함대는 바람을 등졌지만 전날의 피해 때문에 동맹함대와의 결전을 피했다. 툴루즈백작은 연합함대의 사정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연합함대는 몇 주 전에 지브랄타를 포격하느라 탄약을 낭비했고 보급을 받지 못했다. 시간만 끌면 연합함대는 말라죽을 판이었다. 

툴루즈백작은 다시 연합함대와 결전을 벌이겠다고 결심했지만 다른 함장들이 이미 너무 큰 피해를 입었다며 절대로 동의하지 않았다. 툴롱함대는 그날 밤에 툴롱으로 되돌아갔고 전멸위기에서 벗어난 연합함대는 지브랄타만 안으로 피신했다. 네덜란드기함 알베마를Albemarle이 사고로 폭발하면서 수병 모두와 함께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

루이 14세는 과장된 전공을 기록한 보고를 받고 매우 기뻐하며 추기경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짐이 지중해에 모아 아들 툴루즈백작에게 맡긴 함대가 영국과 네덜란드연합함대의 카탈루냐해안작전을 방해하는 동시에 대회전에서도 유리한 전과를 올렸다. 적의 수가 더 많고 바람도 유리했지만 우리 해군의 용맹과 집중력으로 격퇴했다.’



외국은 이런 재미있는 시뮬레이션을 합니다. 위가 프랑스-스페인연합함대입니다. 



양측에서 110척이 넘는 전함이 10시간 동안 포격전을 벌였는데도 단 한 척도 침몰하지 않았습니다. 130년 전의 스페인무적함대 영국원정 당시에도 치열한 포격전이 벌어졌지만 무승부였던 것처럼 아직은 대포의 화력이 전함의 방어력을 뛰어넘지 못했습니다. 

해병이나 보병이 보트를 타고 넘어가 제압하는 방식이 아직 유효하던 시절입니다. 


루이 14세의 대만족에도 불구하고 전투는 무승부였다. 툴루즈백작은 다시 나서려하지 않았고 동맹함대는 작전을 계속할 상태가 도저히 아니어서 9월 중순에 타구스로 갔다가 본국으로 모두 귀환했다. 

그리고 프랑스-스페인연합함대는 두 번 다시 동맹함대와 결전을 벌이지 않았다. 사실 동맹함대의 판정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