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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스페인왕위계승전쟁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10부 - 바르셀로나 함락

by uesgi2003 2018. 3. 25.

여러분도 지치고 저도 지쳐가기 때문에 이쯤에서 다시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지도를 보며 지난 이야기를 살피는 것이 좋습니다.
종이책만 있을 때에는 그 당시 지명에 정통하지 않다면 누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지 모르고 서서히 시들어갔죠. 

이제는 인터넷으로 관련자료를 그 때마다 확인할 수 있어서 너무 편합니다.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9부 - 바르셀로나 함락

9월 14일 월요일, 동맹군 1,000명이 지역주민의 도움을 받아 어둠을 뚫고 요새 근처로 접근했다. 영국척탄병이 요새와 외부로 연결되는 길목을 차단했다. 요새에 있던 나폴리병사들은 접근하는 동맹군을 향해 총을 쏘기 시작했다. 

게오르크공은 스페인지원군이 오기 전에 요새를 공략하려고 앞장섰다가 허벅지에 총탄을 맞는 중상을 입었다. 연합군이 주춤거리자 수비대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달려 나와 동맹군을 아래로 밀어냈다. 

본대를 이끌던 피터버러가 다시 전면에 나서 요새의 외곽방어선을 점령했다. 피터버러는 아내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오후 1시에 1,000명이 앞으로 나가 사다리를 바위에 걸치고 올라갔소... 헤센공가 함께 그들을 이끌었는데 헤센공은 전사했다오.’




좌측의 몬주이크 고지를 잃는 순간부터 바르셀로나의 운명은 결정되었습니다. 

저는 아직 못 가봤는데, 몬주이크 요새의 요즘 모습이라는군요.



수비대가 동맹군을 밀어내기에는 역부족이었고 미켈레트민병대가 요새로 접근하는 지원군을 저격했다. 전함에서 내린 포를 거치하고 요새를 포격하기 시작했다. 2일 후에 행운의 포탄 한 발이 탄약고를 맞춰 하필이면 그 때에 저녁을 먹던 나폴리군 지휘관과 부관을 몰살했다. 수비대는 더 이상 저항하지 않고 백기를 들었다.

이제 경사로에 포대를 설치하고 바르셀로나의 주방어선을 포격할 수 있게 되었다. 중포 58문을 거치하고 9월 20일부터 포격하기 시작했다. 수병은 공성전에 서툴렀지만 주방어선 일부에 구멍을 냈고 돈 벨라스코는 10월 8일에 항복권유를 받아들이고 6일 후에 빠져나갔다. 

날씨가 갑자기 악화되어 폭우가 쏟아졌기 때문에 만약에 항복을 며칠만 미뤘다면 연합군은 바르셀로나를 함락시키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동맹군은 항복협상에 앞서 약탈협박을 했는데 바르셀로나 일대는 카를대공에게 우호적이었기 때문에 그럴 가능성이 무척 낮았다. 



바르셀로나를 포격하는 피터버러입니다. 당시 동맹군은 11,000명, 바르셀로나 시내의 수비대는 5,800명이었기 때문에 충분히 방어할 수 있었습니다만, 동맹군의 병력규모를 알 수 없었던 벨라스코는 명예항복을 선택했습니다. 


벨라스코는 며칠 후의 기상조건을 알 수도 없었고 시민의 지원을 받지도 못했다. 부족한 전력으로 나름대로 잘 버텨주었다. 항복 후 철수하는 동안 시민의 공격을 받았고 오히려 연합군의 호위를 받아야했다. 피터버러는 포풀리공작부인을 직접 구해내는 일까지 있었다(그림 참조).  

카를대공은 광장에 서서 카를로스 3세를 자칭했고 바르셀로나는 그를 받아들였다. 뒤를 이어 게로나Gerona, 타라고나Tarragona, 토르토사Tortosa와 레리다Lerida가 지지를 밝혔다. 카를대공은 무르시아Murcia와 발렌시아Valencia에서도 스페인왕을 자칭했고 전쟁을 스페인왕권이 아닌 합스부르크와 보르봉왕가의 권력투쟁 차원으로 확전시켰다. 

카를대공이 유리한 것처럼 보였다. 시푸엔테스Cifuentes백작이 카를을 지지하며 카탈루냐의 상당부분을 연합군에게 넘긴 후에 사르디니아Sardinia총독에 임명되었다. 민병대가 그를 따랐기 때문에 규율회복에 큰 힘이 되었다. 



동맹함대는 지중해에 머무를 수 없었기 때문에 미노르카의 마혼항을 점령하려고 했지만 역풍에 가로 막혀 다시 리스본과 영국으로 귀환했다. 이제 바르셀로나의 동맹군은 해상지원이 끊겨 자력으로 버텨야했다. 

지역의 우호적인 분위기덕분에 많은 군마를 구입할 수 있었다. 피터버러는 발렌시아에서만 한 마리에 9파운드를 주고 521마리를 구입해 용기병 1개연대를 새로 무장시켰는데 영국이나 네덜란드에서 구입해 수송하는 것과 비교도 안되게 저렴한 비용이었다. 

그렇더라도 군자금이 턱없이 부족했다. 카를대공은 영국에게 군자금을 의존했는데 앤여왕이나 금고 모두 날이 갈수록 인내심이 줄어들었고 결국에는 카를대공에게 한탄의 편지를 보냈다.

‘공에게 지급하기로 했던 40,000스털링만으로 부족해 또 요구하는구려.’

카를대공은 군자금을 자체조달할 방법이 없었다. 신성로마제국의 재무상태는 붕괴직전이었고 많은 수행원에게는 일단 왕위에 오르면 후하게 보상하겠다고 미뤘다. 문제는 군대였다. 급여를 제대로 지급하지 않으면 사기와 규율이 크게 떨어졌다. 


어쨌든 피터버러는 겨울이 다가기 전에 발렌시아를 연합군 진영에 합류시켰고 마드리드의 펠리페 5세는 서쪽 포르투갈의 겔웨이와 다스 미나스 그리고 동쪽의 바르셀로나와 발렌시아의 연합군과 민병대에게 몰리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스페인의 신대륙교역로는 동맹함대에 큰 피해를 입고 있는데도 프랑스함대는 툴롱에서 좀처럼 나오려 하지 않았다. 펠리페 5세는 바르셀로나를 다급하게 탈환하고 싶었지만 1706년 1월 말, 테스원수가 아라곤Aragon국경에서 400명을 잃고 물러났다. 

산 마테오San Mateo의 발렌시아 수비대는 프랑스군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냈고 동맹군이 토르토사에서 나와 프랑스 포위망을 풀었다. 


루이 14세는 세벤느Cevennes지역의 반란 때문에 골치가 아프던 차에 스페인까지 위기에 몰렸다. 종교분쟁이 원인인 세벤느의 위그노Huguenot반란군은 프랑스정규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지만 다른 곳에서 귀중하게 쓰일 전력을 소모시켰다. 

1703년에는 제1 원수 몽트흐벨Montrevel의 발목을 잡더니 1705년에는 바바리아에 있어야 할 빌라르원수를 불러 들였고 나중에는 스페인의 베르윅공공까지 소환되었다. 베르윅공이 투입되고서야 연합군의 지원을 받지 못한 반란군이 마침내 진압되었고 베르윅공은 무자비하게 위그노 지도자를 처형해 많은 원성을 샀다. 그렇지만 종교분쟁 특유의 반란군만행도 만만치 않았다. 


사부아의 빅토르 아마데우스 3세의 상황도 난처해졌다. 프랑스를 배신한데다가 충분하지 않은 병력이 지켜야 할 곳이 너무 많았다. 벵돔Vendome은 이탈리아 북부에서 기세를 올리고 있었다. 베르윅공은 반란진압 후에 니스Nice의 사부아령으로 진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니스는 전통적으로 막강한 방어도시인데다가 공성전을 벌이기에는 병력이 너무 모자랐다. 베르윅공은 툴롱의 해군창의 중포를 해군 갤리선에 싣고 니스로 향했다. 1705년 10월 31일, 약 8,000명이 바르Var강을 건넜고 11월 14일에는 니스총독에게 항복을 권했다. 위그노패잔병까지 합류한 수비대는 도시를 버리고 요새안으로 피신했다. 


니스요새는 암반지대 위에 자리잡아 쉽지 않은 목표물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부족한 병력을 차출하고 악천후까지 겹쳐 12월 8일에야 포대를 가동시킬 수 있었다. 수비대는 포대작업을 방해하려고 계속 요격에 나서 프랑스군 공성책임자를 죽이는 성과도 올렸다. 

그렇지만 성벽이 무너지자 총독은 1706년 1월 6일에 명예항복을 선택하고 요새에서 무사히 빠져나갔다. 사부아 구원군이 겨우 16km 밖까지 접근했기 때문에 만약 총독이 며칠만 더 버텼다면 베르윅공은 공성작전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베르윅공의 단호하고 빠른 결정과 행동덕분에 니스는 프랑스군의 손에 들어왔다. 

루이 14세는 매우 기뻐하며 즉시 니스의 성벽을 무너트리게 했고 베르윅공은 영국인으로는 처음으로 프랑스원수로 진급했다. 



니스의 옛 성터입니다. 



척탄병Grenadier은 선두에서 수류탄을 던지며 적진에 가장 먼저 돌격하는 정예병을 말합니다. 그림과 같이 원시적인 수류탄에 불을 붙이고 적진에 투척했습니다. 나중에는 거대한 도끼 등을 들고 적 방어선을 두들겨 부수는 공병역할도 했습니다. 


1704년 여름, 블렌하임에서 말버러와 외젠공에게 참패를 당한 프랑스군은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전력을 회복했지만 사기는 예전과 같지 않았다. 두 천재사령관에 대한 두려움이 따라 다녔다. 

1705년 5월 5일, 레오폴트황제가 죽자 빈의 궁정은 혼란스러웠고 외젠은 전장을 떠나 빈의 궁정에 머물러야했다. 황제의 장손 요제프Joseph가 투표를 거치지 않고 예상대로 황위에 올랐다. 레오폴트의 오랜 숙적인 루이 14세는 그의 죽음을 보고받고는 바르세이유와 마드리드 궁정을 모두 애도 분위기로 바꾸었다. 

외젠을 존경하던 새 황제는 자연스럽게 동맹군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심지어 황제만 아니었다면 함께 참전했다는 편지까지 보낼 정도였다. 


루이 14세와 펠리페 5세는 당분간 수비태세를 갖출 수 밖에 없었다. 블레인하임, 지브랄타, 바르셀로나를 잃었고 카탈루냐 일대가 동맹군에 가담했다. 이탈리아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스페인은 탈진했고 프랑스도 이제는 병사와 군자금 모두 탕진했다. 종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이제는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루이 14세는 여전히 스페인제국의 영토에서 방앗간 하나도 내줄 생각이 없었다. 국민의 불만과 법을 무시하고 민병대를 해체해 정규군을 늘렸고 스위스에서 군마를 대거 수입하고 세금을 크게 늘렸다. 북유럽에 3개 군을 전개할 수 있게 되었다.

빌레루이는 스페인령 네덜란드에 60,000명, 빌라르는 모젤계곡에 50,000명, 마르생은 알사스에 30,000명을 전개했다. 브라반트Brabant 일대에는 긴 방어선을 구축해 연합군의 공격에 대비했다. 

그리고 이탈리아에는 방돔의 65,000명이 더 있었고 대단한 전력은 아니지만 스페인의 테스 병력과 프랑스 남동부의 베르윅공 부대가 있었다. 프랑스 북부와 북동부 주둔부대는 상황변화에 따라 야전군을 도와줄 수 있었지만 그 정도까지 상황이 악화될 것 같지 않았다. 


1705년 2월 2일, 빌라르원수는 모젤계곡에 도착해 병력을 점검해보니 의외로 무장과 사기가 훌륭했다. 자신감을 얻는 그는 연합군진영을 선제공격하려다가 악천후가 이어져 4월 3주차에 포기하고 수비태세로 전환하고 연합군의 다음 작전을 지켜보기로 했다.

말버러공은 1704년 말에 알사스에 교두보를 마련한 후에 모젤을 통해 프랑스국경을 넘어 란다우에서 출발한 바덴변경백의 황제군과 합류할 생각이었다. 바덴변경백은 말버러공에게 협조하라는 새황제를 명령을 받았다. 

이렇게 되면 빌라르는 모젤계곡에 발이 묶인 상태에서 허를 찔릴 수 밖에 없었다. 두 군대와 별도로, 오베르커크가 네덜란드 군단으로 네덜란드 국경을 수비하기로 했다.



당시 오스트리아군의 모습입니다.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당시에는 무장과 전술이 정규화되었기 때문에 국기없이는 각 국가의 군복과 무장을 구분하기 상당히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계획은 진행되지 않았다. 말버러공이 코블렌츠Coblenz에 60,000명을 집결시켰지만 바덴변경백은 좀처럼 나오려 하지 않았다. 말버러공이 5월 3주차에 라슈타트Rastadt로 가서 바덴변경백과 작전에 대해 협의했다. 

바덴변경백도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었다. 이전 전투에서 입은 부상에서 회복하지 못했고 황제가 약속한 것과 달리 겨우 15,000명만 모았고 무장도 전투를 벌일 수준이 아니었다. 신성로마제국은 상황이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헝가리의 반란에도 병력을 급히 투입해야 했다. 

두 사람은 6월 12일에 트리어Trier에서 합류해 모젤계곡으로 진격하기로 했다. 


이번에는 말버러공에게 사정이 생겼다. 원정보급품을 책임진 장교가 군자금을 횡령한 후에 프랑스군에 투항하는 일이 벌어졌다. 트리에에 그대로 머무를 수 없게 된 말버러공은 6월 3일에 시에흑그Sierck에 있는 빌라르에게 싸움을 걸었지만 빌라르는 현명하게 대응하지 않았다. 동맹군은 주변에서 마초를 구하기 힘들었고 코블렌츠와 트리에까지 길게 이어진 보급로가 발목을 잡아 방어진지에 틀어박힌 프랑스군을 공격하지 못했다. 

말버러공은 모든 곡식과 마초를 보내라고 다급한 전령을 보냈고 그 사이에 마르생의 지원군이 도착해 프랑스군은 70,000명까지 늘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