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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스페인왕위계승전쟁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12부 - 토리노와 바르셀로나 공방전

by uesgi2003 2018. 4. 19.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이 30년 전쟁과는 달리 꽤 재미있어서 계속 정리하고 싶지만, 방향을 잃은 방문객이 있을 것 같아서 잠시 멈추고 다음에는 짧은 2차대전 이야기를 정리하겠습니다.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12부 - 토리노와 바르셀로나 공방전


외젠이 자리를 비운 사이를 노려 방돔원수는 칼치나토에서 동맹군에게 치명상을 주었고 외젠은 온힘을 다해 부대의 전열을 재정비했다. 루이 14세는 이탈리아북부 전선을 마무리짓기 위해 방돔이 외젠을 상대하는 동안 페이야드Feuillade에게 토리노공격을 맡겼다.

토리노에는 그라프 폰 다운Graf von Daum이 지휘하는 7,000명의 제국군과 사부아의 패잔병이 남아 있었다. 170652주에 들어서면서 프랑스의 토리노 포위망이 완성되었다. 빅토르 아마데우스는 사부아기병 6,000명을 이끌고 바로 빠져나가 프랑스군을 계속 괴롭혔다.

페이야드는 토리노공략을 제쳐두고 사부아공을 추격해 루세르나Luserna계곡까지 들어갔다. 사부아공은 결전을 피하고 페이야드를 계속 끌고 다니며 토리노를 위기에서 구해냈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인물이어서 그런지 해상도 높은 그림을 구하기 힘들군요. 페이야드는 당시에도 어리고 무능력하다는 평가를 받았기 때문에 토리노 공성실패 후에 최전선에서 밀려나 있다가 죽기 직전인 1724년에 원수에 올랐습니다. 



원수승진 후에 플랑드르로 떠난 방돔입니다. 그의 부재는 결국 토리노 참패로 이어졌고 플랑드르에서도 루이 14세의 손자와 극심한 불화를 벌여 영지로 은퇴했습니다.

스페인 펠리페 5세가 그를 다시 불러들여 전세를 뒤집으며 화려한 복귀를 했지만 1712년에 급사했습니다. 프랑스 전사에서 손꼽는 지휘관 중 한 명입니다. 


방돔은 아디제Adige강에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하고 외젠의 토리노구원을 차단했지만 5월 말이 되자 하밀리전투에서 연합군이 궤멸되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곧바로 방돔에게 북쪽으로 올라가 플랑드르전선을 지휘하고 위기를 봉합하라는 명령도 들어왔다.

할미르전투는 베니스와 다른 이탈리아 도시국가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 진영에 가담하지 않고 사태를 관망하기로 했다. 당연히 이탈리아 북부 전황은 소강상태가 되었다. 6월 초, 외젠은 30,000명을 이끌고 아디제를 건넜고 다시 포강을 건너며 프랑스군의 허점을 찔렀다.

방돔은 베르사이유에 이런 보고를 했었는데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되었다.

외젠공은 토리노공성전을 방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군이 주요 길목을 워낙 많이 차단해두어서 구원은 감히 생각도 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는 북부로 급하게 떠나야했고 블렌하임전투에서 분전을 펼쳤던 모젤전선의 마르생원수가 토리노공략을 맡았다. 마르생은 크레모나방향으로 후퇴해서 외젠의 우회를 막으려했다. 제국군은 보급과 군자금이 부족한데도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진격했다.

외젠은 포강 남쪽으로 계속 진격했고 프랑스군은 외젠공이 황제에게 보내는 전령을 잡았지만 암호해독이 늦어서 제국군을 요격할 좋은 기회를 놓쳤다. 그렇지 않아도 마르생은 4,000명의 헤센증원군에 신경을 빼앗겼기 때문에 외젠은 마음대로 남하했다. 170691, 외젠과 사부아의 아마데우스는 토리노 남쪽 30km 지점에서 합류했다. 1704년의 말버러진격에 버금가는 대단한 진격이었다.

부족한 보급과 증원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대군을 찰나의 순간으로 계속 따돌리며 240km나 진격했다. 이제 이탈리아북부 주도권은 연합군에게 넘어갔다.



외젠의 놀라운 회피기동입니다.

 

828, 루이 14세의 조카 드오를레앙d’Orleans이 토리노 공성전에 합류했다. 오를레앙이 총사령관이었지만 실제 지휘는 라 포야드와 마르생이 했고 오를레앙의 의견을 물으려 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방해만 되었다.

프랑스군은 주도권을 잃었기 때문에 이제는 전력차이가 큰 의미가 없었다. 94, 외젠은 포강을 건너 피아네자Pianezza 부근에 자리잡았다. 선봉대는 토리노에 5km 밖까지 접근했다. 외젠은 토리노 서쪽의 아직 완성되지 않은 프랑스 진지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오를레앙은 진지작업을 중단하고 외젠에게 대응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마르생은 그에게 아무런 권한이 없다는 말로 일축했다. 공성전에 앞서 외곽에서 접근하는 구원군을 차단하는 것이 정석이었지만 외젠이 이미 자리 잡았기 때문에 토리노공격은 거의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오를레앙공작입니다. 마르생은 그를 무시했지만 나름 역량이 있는 지휘관이었고 스페인전선에서는 꽤 활약했습니다. 마르생은 토리노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포로가 되었다가 며칠 후에 죽었습니다. 

 

170697, 외젠공은 대대적인 공격을 시작했고 프로이센군은 3번의 시도 끝에 프랑스의 오른쪽 진지를 돌파했다. 외젠공은 이렇게 기록했다.

우익의 첫 번째 공격은 좌익과 속도를 못 맞췄기 때문에 격퇴당했다. 안할트Anhalt(레오폴트 1, 안할트-데사우공)은 용맹한 프로이센보병을 모두 이끌고 우익을 다시 공격했다.

한 시간 반 정도 전세가 계속 뒤집혔다. 전투라기 보다는 학살이었다. 결국 아군은 프랑스진지로 뛰어 들었지만 무질서하게 프랑스군을 추격했다. 프랑스군이 재집결하면서 총을 쏘았고 내 뒤에 있던 시종과 말이 죽었고 나도 진창에 떨어졌다.‘

 

마르생은 스스로 예언했듯이 중상을 입었고 오를래앙도 두 군데 부상을 입었다. 외젠은 마르생이 선공에 나서 제국군을 우회했다면 정말 난감한 상황이었을 것이라고 기록했다. 토리노군도 성문을 나서 프랑스군의 포위진지를 돌파했다.

오후가 되자 아군의 승리가 확실해졌다. 적군이 더 이상의 저항을 포기하고 포강 건너로 달아나서 도시가 완전히 해방되었다. 아직 남아 있는 적을 소탕하느라 나머지 시간을 보냈는데 모두 순순히 포로가 되었다. 폐하(빅토르 아마데우스)는 자랑스럽게 수도에 입성했다.’



토리노전투에서 선두에 서서 적진에 뛰어드는 안할트 데사우의 레오폴트 1세입니다. 프랑스-스페인연합군은 총 42,000명 중 무려 30,000명이 죽거나 포로가 되었다는 분석이 있을 정도로 궤멸했습니다. 

 

토리노전투에서 양측은 큰 피해를 입었다. 프랑스군은 9,000명 이상을 잃었고 동맹군은 5,000명을 잃었다. 마르생원수는 사경을 헤맸고 오를래앙은 롬바르디Lombardy로 가서 프랑스수비대의 도움을 받으려 했지만 도로가 봉쇄되었다.

프랑스 패잔병은 상당한 보급품을 뒤에 남겨두고 프랑스국경으로 향하며 이탈리아전선을 포기했다. 이제 신성로마제국은 이탈리아에서 프랑스나 스페인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다. 외젠공은 말버러공에게 군자금과 프로이센군 지원에 대해 감사하는 편지를 보냈다.

프랑스는 네덜란드남부와 이탈리아북부를 상실하면서 세금원과 전략요충지 모두를 잃었다. 루이 14세는 텅빈 국고를 채울 방법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렇다고 동맹군의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스페인 발렌시아와 카탈루냐에서 간신히 버티는 정도였고 빌라르원수가 라인강 일대를 확고하게 장악하고 있었다. 헝가리는 라코치 페렌츠Rákóczi Ferenc의 반란이 본격적으로 불붙었다.

만약 전황이 불리했다면 황제는 헝가리에 유화정책을 선택했겠지만 하밀리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면서 강경정책을 고수했다. 라코치는 말버러공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편지를 보냈다. 요제프황제는 스페인과 이탈리아는 포기할 수 있어도 헝가리와 트란실바니아Transylvania는 절대로 포기할 수 없다고 공언했다.

신성로마제국은 북과 남부 전선이 동맹군 손에 들어오자 이전과 태도를 바꿔 대동맹보다는 동쪽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헝가리가 라코치 페렌츠를 통치자로 옹립하고 신성로마제국의 통치를 거부했기 때문에 요제프황제에게는 대동맹보다 더 다급한 문제였을 것입니다. 

라코치는 루이 14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가 거부당했고 러시아에도 도움을 요청했지만 표트르대제 자신이 스웨덴의 침공으로 멸망위기까지 몰렸기 때문에 외면당했습니다. 결국 폴란드에 망명했다가 오스만에서 사망했습니다. 

 

네덜란드는 프랑스침공에 대비할 국경도시를 탈환했고 신성로마제국은 이탈리아와 저지대국가를 합병했고 사부아는 안전해졌고 영국은 지브랄타를 점령했다. 동맹군은 스페인 동부의 상당부분을 점령했고 순항함대는 지중해 대부분을 차지했다.

구 스페인제국의 영토는 완전히 분할되었고 프랑스의 꿈은 산산조각났고 루이 14세는 이제 더 이상 국제문제에 간섭할 수 없게 되었다. 군사적 승리를 거둔 대동맹은 외교적 승리로 전쟁을 마무리해야 했다. 전장에서 멀리 떨어져 현지사정에 어두운 정치가와 외교관이 비현실적인 주장을 늘어놓으면서 조속한 종전은 불가능해졌다.

심지어 대동맹조약의 목표가 달성되었는데도 펠리페 5세를 폐위시키고 카를대공이 마드리드의 왕좌에 오를 때까지 종전할 수 없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대동맹과 연합국 모두 종전을 원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전장에 계속 끌려갔다.

 

1706년 봄, 펠리페 5세는 할아버지 루이 14세의 조언을 무릅쓰고 바르셀로나를 탈환하려고 했다. 원수로 승진한 베르윅은 펠리페의 요청으로 312일에 마드리드로 돌아갔다. 프랑스와 스페인군을 바르셀로나에 집결했기 때문에 마드리드 수비병력을 모아야했다.

안달루시아의 비야다리아스후작은 연합군이 카디스를 다시 공격해올 수 있다며 병력을 보내지 않았다. 베르윅은 바다호스Badajoz에 갔지만 수비대 대부분이 바르셀로나로 차출된 상태였다. 그가 상대할 골웨이와 다스 미나스의 연합군은 25,000명을 넘었다.

비야다리아스의 지원군도 없고 수비대도 사라진 판에 새 병력을 모을 군자금이나 보급도 없었다.

 

170641, 프랑스의 툴롱함대가 바르셀로나 앞바다에 도착했고 43일에는 9,000명의 증원군이 펠리페 5세와 테스원수 군대에 합류했다. 연합군은 사라고사Saragossa와 레리다Lerida의 동맹군 수비대를 그대로 둔 채로 진격해 보급로는 노출시키는 결정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노아유Noailles원수가 루시용Roussillion을 지나 진격했고 지로나Gerona의 동맹군 수비대가 퇴각했다. 이렇게 연합군 병력이 속속 합류하면서 21,000명까지 늘어났고 대부분은 무장과 훈련이 잘된 프랑스병사여서 상당한 전력이었다.

바르셀로나 동맹군 수비대는 겨우 3,000명인데다가 절반은 명령을 듣지 않는 비정규군이었다. 5,000명 정도의 민병이 있었지만 워낙 무장과 훈련이 열악해서 예비병력으로 돌려둔 상태였다.

 

토르토사Tortosa와 지로나의 수비대에게 지원요청을 보냈고 영국 해밀톤 보병연대가 봉쇄되기 전에 도시에 들어왔다. 시후엔테스Cifuentes백작은 미켈레츠Miquelets(비정규군)를 데리고 테스군의 보급로와 초소를 습격하며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

동맹군은 상당히 수월하게 바르셀로나는 함락시켰지만 페티트대령이 몬주이크 요새를 크게 보강해서 두터운 방어막을 만들었다. 몬주이크에서 주 방어선을 잇는 교통로도 깊게 파고 방책을 세워서 도시에서 예비병력이 투입될 때에 포격을 맞지 않았다.

44, 테스는 기습으로 외곽방어선을 뚫은 생각이었지만 해밀톤연대가 간단하게 막아냈다. 대신에 부근의 카푸친Capuchin수녀원에 있던 카탈루냐 민병대가 물러나면서 방어선에 구멍이 났다. 테스는 단순한 육탄돌격으로는 함락시킬 수 없다고 판단하고 공성진 작업을 하기로 결정했다.


 

펠리페 5세는 스페인군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지만 반대로 테스원수에게는 무척 귀찮은 존재였다. 마드리드에 그대로 있는 편이 훨씬 큰 도움이 되었다고 루이 14세에게 편지를 보낼 정도였다.

펠리페의 안전도 문제가 되었다. 시후엔테스의 비정규군이 45일에 연합군 후방에서 침투하면서 펠리페 5세가 피납될 뻔한 일까지 있었고 그 후에는 밤마다 툴롱함대로 돌아가 잠을 잤다.

프랑스 공병이 몬주이크 요새를 조금씩 허무는 동안, 57일에 강력한 연합군함대가 나타나 툴롱함대를 몰아냈다. 프랑스 제독은 제노바상선에게서 연합군함대에 대한 소식을 들었기 때문에 해전이 벌어지지는 않았다.

 

연합군 구원부대가 너무나도 손쉽게 도시 안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바르셀로나 공성작전은 실패가 분명해졌다. 바르셀로나 수비병력이 크게 보강된 데다가 후방에서는 카탈루냐 비정규군이 끊임없이 피해를 입혔다.

511, 펠리페 5세는 막대한 군수품과 수백 명의 환자를 뒤에 남기고 후퇴하기 시작했다. 추격을 피하기 위해 프랑스남부를 거쳐 크게 우회했다.

펠리페는 루이 14세에게 낙담의 편지를 보냈다.

바르셀로나의 카를을 그대로 두어야 해서 너무나도 슬픕니다. 그가 어디로 가던 그를 격파하지 않고서는 못 견디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