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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스페인왕위계승전쟁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11부 - 하밀리(라미예)전투

by uesgi2003 2018. 4. 12.


빌레루아원수는 예상을 깨고 저지대국가에 대해 공세로 나서 1705613, 뫼즈가의 동맹군요새를 점령했다. 병력이 부족했던 오버크리크는 마스트리히트Maastricht로 후퇴했고 빌레루아는 리에주Liege로 진격해 동맹군수비대를 포위했다.

네덜란드는 프랑스군의 공세에 맞설 병력이 너무나도 부족했기 때문에 중요거점을 지키기에도 역부족이었다. 말버러가 모젤계곡에서 승리를 거두더라도 스페인령 네덜란드 국경을 모두 잃는다면 네덜란드는 프랑스와 휴전협상에 나설 수 밖에 없었다.

마스트리히트를 출발한 전령이 말버러에게 달려가 지체없이 회군해달라고 요청했다. 말버러는 그렇지 않아도 빌라르의 강력한 대응에 막혀 앞이 보이지 않던 참이었다. 바로 네덜란드 방면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그는 627일에 마스트리히트로 들어갔고 6일 후에는 오버크리크와 합류해 동맹군 병력을 60,000명까지 늘렸다. 빌레루아는 현명하게 리에주 포위망을 풀고 방어선 뒤로 되돌아갔다. 빌라르는 동맹군이 후위가 트리어를 떠난 지 4일 만에 트리어를 점령하고 말버러가 미처 챙겨가지 못한 막대한 군수품을 손에 넣었다.

빌레루아는 말버러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후이Huy를 잃고 지난 몇 년 동안 공들여 구축한 100km 길이의 브라반트방어선도 너무 쉽게 뚫렸다(아래 그림 참조). 718, 프랑스와 바바리아 연합야전군은 엘릭스하임Elixheim에서 말버러를 막지 못했다. 네덜란드군이 말버러의 계획을 의심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따라 한 두시간만 더 빨리 전장에 도착했다면 빌레루아의 프랑스군은 궤멸했을 것이다.


엘릭스하임에서 분전을 펼친 바바리아선제후는 루이 14세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적군은 엘릭스하임 부근의 방어선을 기습공격했고 새벽 4시에 돌파했습니다. 저희는 한 시간 뒤늦게 그 사실을 알았습니다. 보고를 받은 저는 빌레루아원수와 함께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현장에 달려갔지만 이미 너무 많은 적군이 침투해 있어서 반격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아군은 너무 넓게 산개해 있었기 때문에 결전을 벌이지 못했습니다.‘

 

빌레루아는 브라반트방어선을 포기하고 다일Dyle강 너머로 후퇴했다. 루이 14세는 그에게 염려의 편지를 보냈다.

귀관의 수고와 노력을 의심치 않지만 네덜란드 중앙의 방어선을 뚫린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소. 그것도 전략거점 여러 군데를 말이오.’

말버러는 또 다시 빌레루아의 예상을 깨고 프랑스군과 프랑스국경 사이를 파고 들었다. 국경도시가 공격에 노출되었는데도 빌레루아가 움직이지 않자 이번에도 네덜란드가 발목을 잡았다. 말버러는 계획대로 강을 건너 공격했다면 막대한 피해를 입었겠지만 네덜란드의 반대로 공격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프랑스는 한숨 돌릴 수 있었다.

 

네덜란드남부와 달리 사부아와 이탈리아북부의 상황은 동맹군에게 좋지않게 돌아갔다. 1705년 내내 방돔은 상당한 성공을 거둬 투린(토리노)를 위협했다. 신성로마제국군의 뛰어난 지휘관 보데몽Vaudemont백작이 열병에 걸려 죽었고 후임인 그라프 레오폴트 헤르베르슈타인Graf Leopold Herberstein은 방돔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제국군사령관인 사부아 외젠공은 어쩔 수 없이 헤르베르슈타인을 외곽으로 돌리고 자신이 야전군을 직접 지휘했다. 군대는 당연히 외젠공을 지지했고 프랑스군은 이전과 달리 신중한 모습을 보였다.

방돔은 제국군과 투린(토리노) 사이를 갈라놓고 아다Adda강에서 외젠공을 상대하려고 했다. 8월 중순 카사노Cassano에서 격전이 벌어졌지만 승부가 나지 않았다. 방돔은 외젠공의 도강을 막았기 때문에 판정승을 거뒀다.

 

외젠공은 군자금, 군수품과 병력 모두가 부족했기 때문에 후퇴하는 수밖에 없었고 군대의 사기는 날이 갈수록 땅에 떨어졌다. 외젠공은 실패했지만 방돔도 진격을 멈췄기 때문에 투린(토리노)에 있던 제국군은 일단 위기에서 벗어났다.

외젠공은 겨우 40,000명의 동맹군으로 프랑스군 80,000명을 묶어 두었기 때문에 큰 성과를 거뒀다고 생각했다. 그는 중립도시국가의 항의를 묵살하고 베네치아로 들어갔다.

만약 동맹군이 반전의 기회를 잡지 못한다면 베니스와 같은 도시국가는 프랑스 진영에 합류할 가능성이 높았다.

말버러는 1705년 말에 빈으로 가서 황제를 알현하고 솔직한 의견을 알렸다.

 

병사와 군마는 피폐해졌고 이탈리아에 안전하게 머물 곳이 없습니다. 적은 제 앞에 병력을 집결시키고 있습니다.

베네치아는 우리가 나가지 않으면 적에게 합류하겠다고 협박하고 있습니다.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도 적에게 합류하거나 연합할 움직임을 보입니다...

아군에게 군자금과 병력을 보급해야 늦어도 3월 말에는 전장에 다시 나갈 수 있습니다. 빈에서 폐하를 다시 뵐 수 없을 것 같아 심히 염려됩니다.‘

 

신성로마제국은 저지대국가보다 스페인과 이탈리아가 훨씬 중요했다. 때마침 빈을 방문한 덕분에 밀린 급여 100,000크라운뿐 만아니라 보급품을 구입할 250,000파운드도 말버러에게서 빌릴 수 있었다. 말버러는 혹시라도 있을 유용을 염려해 외젠이 베니스에서 자금을 받도록 처리했다.

 

스페인의 카탈루냐를 잃었지만 1705년의 전반적인 상황은 루이 14세에게 긍정적이었다. 루이 14세는 말버러공이 저지대국가와 독일남부에서 거둔 대성공은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빌레루아원수가 네덜란드남부에서 그럭저럭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한동안 문제가 없다고 믿었다.

문제는 군자금이었다. 텅빈 국고를 세금만으로는 채울 수 없었기 때문에 최대한 빨리 전쟁을 끝내야했다. 대대적으로 공세에 나서 프랑스의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고 동맹국을 협상장으로 불러내기로 했다.

모든 전선의 원수는 대대적인 공세를 펼치라는 명령을 받았다. 스페인의 테스에게는 증원군을 보냈다. 빌라르원수는 라인강 상류에서 대공세에 나서 아그노Hagenau에서 제국군을 격파했다. 마르생은 모젤계곡을 헤집고 다녔다. 베르윅은 남부를 공격해 니스를 점령했고 방돔은 1706419일에 이탈리아북부에서 외젠공을 상대로 승리를 거뒀다.


 

그는 칼치나토Calcinato고원에서 외젠군을 공격해 3,000명을 죽이고 20개의 군기와 포 10문을 노획하고 8,000명을 포로로 잡았다.’

 

동맹군 중 가장 취약했던 사부아가 가장 먼저 떨어져나갈 위기였다. 그렇지 않아도 저지대국가 상황처리에 발목이 잡힌 말버러가 남부로 달려가 외젠공을 지원해야 할 판이었다. 이탈리아북부를 잃으면 이탈리아전선에서 풀려날 프랑스군이 저지대국가로 이동할 것이 분명했다.

이번에도 네덜란드는 말버러의 이탈리아 이동을 반대했다.

말버러는 헤이그의 통령에게 칼치나토패전이 가져올 여파에 대해 설명하고 런던에도 긴박한 상황을 보고했다. 동맹군에 합류하기로 한 하노버, 프로이센과 덴마크군은 합류는 고사하고 군자금지원에 대한 협상도 마무리짓지 못했다.

앤여왕은 사촌인 덴맠왕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말버러공이 적을 상대로 중요한 작전을 추진 중입니다. 폐하의 군대가 말버러공의 지휘를 받아 가장 중요한 전장으로 진군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덴마크왕은 앤여왕의 요청에 바로 동의하지 않았고 작전이 시작되었을 때에도 군자금지원에 대해 합의하지 못했다.

 

루이 14세는 빌레루아에게 즉시 공세에 나서라고 계속 재촉했다. 결전을 벌이기 전에 충분한 병력을 모아야 했지만 원수를 할 정도의 지휘관이라면 부족한 병력을 의지와 능력으로 극복해야 한다고 밀어붙였다.

1706519, 빌레루아는 프랑스, 왈룽과 바바리아군 60,000명을 이끌고 뢰번Louvain을 떠나 하밀리(Ramillies, 라미예)마을 부근의 낮은 산등성이에 자리 잡았다. 말버러는 병력이 채 모이지 않았는데도 지체하지 않고 바로 하밀리로 향했다. 그는 연합군이 채 자리 잡기 전에 공격하고 싶었지만 덴마크군을 하루 동안 기다리는 동안 연합군이 먼저 도착해 진영을 펼쳤다. 큰 힘이 될 수 있는 하노버와 프로이센군도 급여문제로 합류하지 않았다.

 

523일 일요일 오전, 말버러군 62,000명은 빌레루아의 진영을 발견했다. 빌레루아는 남쪽 메하인Mehgine 개천의 타비에르Taviers에서 북쪽 페티테 게테Petite Gheete의 오트레 에글리제Autre-Église까지 5km에 걸쳐 진영을 펼쳤지만 패착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타비에르부터 오트레 에글리제까지 병력을 산개시켰을 뿐만 아니라 습지대인 북쪽은 지원을 하거나 받기 힘든 지형이었다. 우월한 기병전력을 생각하면 하밀리마을 남쪽의 평원을 선택하는 것이 맞았다.

반대로 말버러는 동쪽 연합군의 측면을 노리고 접근 중이었는데 빌레루아가 오트레 에글리제 병력을 과감하게 투입했다면 역으로 포위당할 수도 있었다.

말버러는 활시위처럼 펼쳐진 연합군 진영을 가로 질러 끊기로 했다. 보병이 북쪽의 습지대를 별 어려움없이 통과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참모진은 극구 반대했지만 말버러는 지난 가을에 이미 이 지대를 정찰한 적이 있어서 자신의 판단을 확신했다.


 

오후가 되면서 부대가 모두 위치를 잡았고 맹렬한 포격전 후에 오베르커크가 네덜란드군을 이끌고 공격에 나서 남쪽의 타비에르를 점령했다. 말버러는 영국과 덴마크보병을 페티테 게체의 습지로 보냈다.

전투는 치열했지만 오크니Orkney공작이 오프스Offuz 부근까지 접근했다. 말버러는 잡가지 오크니공작을 불러들여 남쪽의 하밀리와 프랑스기병에 대한 공격을 지원하게 했다.

그렇지만 빌레루아원수는 오크니공작(아래 그림참조)의 과감한 공격에 놀라, 이미 적이 퇴각한 북쪽에 예비병력을 대거 투입했다. 그 동안 남쪽의 기병대는 네덜란드와 덴마크기병의 공격에 점차 밀려나고 있었다.

빌레루아는 너무 늦게 동맹군의 공격목표를 깨닫고 초저녁에 예비병력을 우익으로 다시 보내려고 했지만 덴마크기병이 측면을 공격해 연합군을 밀어 올렸다.

아일랜드용병 피터 드레이크Peter Drake는 이렇게 기록했다.

소브 키 퍼sauve qui peut(무질서한 패주)가 벌어지면서 전선이 완전히 무너졌다. 글더니 모든 여단이 무질서하게 달아나는 것이 보였다.’








 

하밀리전투에서 연합군이 입은 피해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60,000명 중 최대 15,000명 사상에 15,000명 포로로 분석되고 있으며 동맹군은 겨우 4,000명을 잃었습니다. 


빌레루아의 정예군대는 만신창이가 되어 다일강 너머에서 목숨을 구하려고 했다. 연합군 지휘관은 뢰번광장에 횃불을 밝혀 신분을 서로 확인했다.

바바리아선제후는 세계최정예였던 아군은 너무 심한 패배를 당해 어느 정도의 피해인지 확인하기 두려울 정도였다고 기록했다.

군수품을 불태우거나 다일강에 투하했는데 너무 많은 양이어서 추격해온 연합군기병대에 빼앗기기도 했다. 패잔병은 무질서하게 서쪽으로 달아났다. 빌레루아는 베르사이유로 간단한 편지를 보냈다.

‘23일에 벌어진 불행을 폐하께 알려드립니다... 아군 우익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한 번의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모든 것을 잃었다. 병력, 포와 총, 군수품, 영토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위신과 사기도 모두 사라졌다.

 

말버러군이 지체하지 않고 맹추격에 나섰기 때문에 연합군은 정비할 시간도 없이 마구 밀려났다. 뢰벤, 브뤼셀, 안트워프, 겐트, 브뤼헤와 오슈텐트Ostend항까지 내주었다. 연합군은 마치 자물쇠가 없는 문을 박차고 들어가는 기세와 같았다.

연합군은 몇 주만에 스페인령 네덜란드를 거의 모두 점령한 후에 프랑스북부 국경을 위협했다. 플랑드르 지역에 참전했던 존 블렉케이더John Blackader소령은 이렇게 기록했다.

상당히 어렵다고 생각했던 도시들이 포탄 한 발 쏘지 않았는데도 투항했다... 프랑스군이 스페인왕의 죽음을 틈타 밤에 몰래 점령했던 도시들을 낮에 모두 되찾았다.’ 연합군의 진격속도와 범위는 말러버 자신도 놀랄 정도였다.


 

프랑스와 스페인은 단순히 병력과 영토를 잃은 정도가 아니었다. 스페인령 네덜란드는 전쟁수행에 반드시 필요한 세금과 병력원이었다. 이제 겨우 나무르 등의 극히 일부만 남았다. 연합군의 공격을 받지 않은 도시도 자연스럽게 카를대공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국가재앙의 원인인 빌레루아는 지휘관을 사임하지 않고 버티다가 오랜 친구인 루이 14세에게 해임되었다. 루이 14세의 자비덕분에 베르사이유궁으로 돌아갔지만 다시는 군대를 지휘하지 못했다. 이탈리아전선에서 능력을 발휘한 방돔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네덜란드는 5년 전 프랑스에게 잃었던 모든 지역을 되찾았을 뿐만 아니라 스페인령 네덜란드까지 합병해 그동안 지출한 군자금을 세금으로 회복하려고 했다. 신성로마제국도 빚으로 몹시 곤혹스러운 상태였기 때문에 지분을 주장했고 말버러는 오슈텐트항만큼은 영국령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네덜란드는 국경도시를 합병하고 카를대공은 스페인령 네덜란드를 차지했다.



군인으로서는 불명예스러운 기록을 남겼지만 정치가로서는 상당히 화려한 말년을 보냈습니다. 루이 14세 사후에 리용총독으로 임명되어 궁전에서 추방당했지만 루이 15세는 다시 그를 중용했습니다. 

 

프랑스는 블렌하임에서 야전군 하나를 잃은 후에 오히려 더 강력한 전력을 복구했지만 이번은 완전히 달랐다. 프랑스군은 이제 더 이상 대대적인 공세에 나설 수 없게 되었고 프랑스와 스페인왕가의 합병은 고사하고 스페인에 있는 손자를 챙길 여유도 사라졌다. 최대한 방어하면서 연합군이 협상을 제의해오기를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