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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스페인왕위계승전쟁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14부 - 툴롱공방전

by uesgi2003 2018. 5. 24.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14부 - 툴롱공방전


뼈아픈 패전을 계속 겪은 루이 14세는 대동맹과의 평화협상을 기다렸을 수 있다. 그렇지만 표면상으로는 자신, 손자와 프랑스를 위해 좀처럼 굽히지 않았다. 아직 상당한 병력이 남아있고 빌라르, 벵돔, 베르윅과 같이 뛰어난 지휘관이 반전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동맹국이 협상에 나오지 않는다면 끌어내야 했다. 

프랑스 국경은 안전했고 포르투갈, 사부아, 독일영주국 하나 또는 둘에게 치명타를 입히면 꽤 유리하게 협상을 진행할 수 있었다. 오스만제국을 설득하면 신성로마제국은 등뒤를 걱정해야 할 판이었다. 

북쪽의 스웨덴왕이 문제였다. 만약 동맹국에 가담한다면 이 모든 희망이 사라질 수 있었다. 


당시 25세였던 스웨덴의 카를 12세는 호전적이고 변화무쌍해서 폴란드왕이자 작센Saxony선제후인 아우구스트Augustus에게 끊임없이 싸움을 걸며 발트해 패권을 노렸다. 1706년 2월에는 프라우슈타트Fraustadt에서 폴란드군을 깔끔하게 격파했다. 

40,000명의 용감하고 잘 훈련된 스웨덴군은 최절정기였다. 카를은 알텐슈타트Altenstadt에 사령부를 차리고 아우구스투스에게 폴란드왕위를 자신이 지명하는 사람에게 넘기고 러시아 차르 표트르Peter와의 동맹을 끊으라고 요구했다. 러시아의 대외관계를 봉쇄한 후에 동쪽으로 세력을 확장시킬 욕심이었다. 

대동맹국은 스웨덴왕이 세력확장보다는 남쪽으로 내려와 대프랑스전선에 참여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전사왕 카를 12세입니다. 당시 스웨덴은 무역을 통해 유럽최강의 정예군대를 양성한 후에 대륙진출을 시도하면서 폴란드와 충돌했고 더 나아가 러시아 차르 표트르대제와 대대적인 전쟁을 벌입니다. 본문과 같이 카를 12세가 대동맹이나 연합 중 한 곳에 참전했다면 세계역사는 완전히 달라졌겠죠.


카를 12세와 표트르대제가 벌인 대북방전쟁에 대해서는 이미 매우 자세하게 정리해두었습니다. 근대의 대북방전쟁편을 잘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고보니 러시아가 있었네? 왜 참전하지 않았지? 하는 분이 있다면, 러시아는 유럽에 비해 상당히 낙후된 동토의 왕국이었습니다. 표트르대제가 개혁에 성공하고 스웨덴의 침공을 이겨내면서 유럽의 또다른 강대국으로 성장합니다. 

아래는 스웨덴의 몰락을, 그리고 러시아의 등장을 알리는 폴타바Poltava전투입니다. 



1706년 11월 23일, 헤이그의 영국대사 조지 스텝니Geroge Stepney는 런던의 친구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 스웨덴왕은 지난 24일에 알트 라슈타트에서 아우구스트와 조약을 맺었소. 아우구스트는 폴란드왕위를 스타니스와프Stanislaus에게 이양하고 차르에게 어떤 지원도 하지 않는다는 조건이오…

카를은 겨울동안 군대를 작센에 주둔시켰는데 신성로마제국이 슐레지아Silesia의 개신교를 탄압하는 일 때문에 일촉즉발의 분위기였다. 양국이 전쟁을 벌인다면 프랑스에는 더 없이 좋은 일이었다. 더구나 개신교인 스웨덴이 구교진영을 공격하는 꼴이 되면 대동맹조차 분열될 수 있었다. 대동맹에게 제3의 전선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1707년 2월, 말버러공은 카를이 봄에 벌일 작전에 대해 크게 걱정하며 편지를 보냈다. ‘

…필요하다면 작센까지 가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을 참이오. 왕을 만나 그의 생각을 바꾸거나 최소한 우리가 놀라지 않을 정도로 그의 계획을 바꾸려 하오…

4월 3주차, 말버러는 마차를 타고 하노버를 거쳐 알텐슈타트에서 카를을 만나 전쟁에 참전하지 말라고 설득했다. 특히 신성로마제국과 전쟁을 벌이지 말라고 강조했다. 우아한 영국신사와 거친 스웨덴왕은 서로에게 큰 매력을 느꼈다. 검소하고 단순한 카를은 말버러의 지나치게 화려한 복장이 마음에 안 들었지만 그의 명성을 들었기 때문에 장시간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영국과 네덜란드는 스웨덴의 작센침공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카를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내 사촌인 여왕을 안심시키시오. 짐은 원하는 바를 이루면 이곳을 떠날 것이오. 그렇지만 조만간은 아니오.’ 

말버러는 스웨덴왕을 설득하는 동시에 궁정대신에게 후한 뇌물을 선사해 분위기를 바꾸었다. 그리고 당연히 스웨덴군의 조직과 무장에 대해서도 조사했다. 스웨덴군은 전통적인 개념을 완전히 깨트렸다. 대포, 야전병원, 군수창 등과 같이 진격속도를 늦추는 모든 요소를 없앴다. 그만큼 신속하게 이동하고 전개할 수 있는 반면에 장기전에서는 심각한 상황을 맞이할 수 있었다. 

말버러는 ‘현지에서 자급자족하는 군대로 전쟁이 백중세로 늘어진다면 순식간에 궤멸될 것이다’라고 분석했는데 마치 예언처럼 들어맞았다. 


말버러와 카를은 회담을 마치고 라이프치히Leipzig로 가서 작센선제후 스타니스와프를 폴란드왕으로 임명했지만 앤여왕은 반대했다. 말버러는 스타니스와프에게 축하인사만 전하고 공식인증은 하지 않았다. 

말버러는 돌아오는 길에 프로이센왕 프리드리히 빌헬름Frederick Wilhelm을 만났고 브뤼셀로 돌아왔다. 그의 순방은 대성공을 거뒀다. 카를 12세는 신성로마제국과의 갈등을 봉합하고 막강한 군대를 돌려 러시아국경을 넘었다. 그의 러시아원정은 2년 후에 폴타바Poltava에서 끝났다. 


신성로마제국 요제프황제는 밀라노를 장악한 후에 이탈리아 남부로 시선을 돌렸고 당연히 스페인원정과 네덜란드 전선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귀국 후 플랑드르Flanders일대 안정화에 정신이 없던 말버러는 본국으로 편지를 보내 황제가 나폴리로 병력을 보내지 않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요제프는 나폴리를 목표로 상당한 병력을 보내기로 이미 결정한 상태라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신성로마제국의 헤이그전권대사는 알만사참패 소식이 전해진 후에도 병력 대부분이 바르셀로나로 무사히 퇴각했고 바다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언제라도 보급을 받을 수 있다고 장담했다. 가을에는 증원군을 보내겠다는 약속도 했다. 

전권대사의 말은 황제가 이탈리아 남부와 헝가리 다음에 스페인을 생각하겠다는 뜻이었다. 증원군이 필요하면 네덜란드와 영국이 군자금을 대라는 요구였다.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은 프랑스가 이탈리아 북부에서 병력을 빼는 조건으로 북부에서 적대행위를 하지 않기로 했다. 1707년 3월 13일, 밀라노에서 비밀리에 맺은 합의에 따라 20,000명의 프랑스 정예병을 다른 곳으로 전개할 수 있었고 황제군도 나폴리로 진격할 수 있게 되었다. 

앤여왕은 5월 6일에 뼈가 있는 편지를 보냈지만 소용이 없었다. 황제군은 정작 중요한 전선에서 먼 곳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만약 황제군이 프랑스의 툴롱Toulon공격에 합류했다면 루이 14세는 스페인에 있는 병력도 빼냈을 것이다. 

바덴변경백Margrave of Baden은 1704년의 부상이 악화되어 사망했고 라인강전선에서 황제군을 이끄는 바이로이트Bayreuth변경백은 병력이 부족했다. 루이Louis요새에서 검은 숲Black Forest의 미로까지 이어진 전선을 지킬 병력이 없었다. 

그가 상대하는 빌라르원수는 프랑스 최고의 사령관이었고 5월 22일에 기습공격으로 간단하게 황제군 방어선을 뚫고 후방으로 밀어냈다. 


빌라르군은 독일에서 원거리 작전을 펼칠 상황이 아니었지만 어쨌든 황제의 영지인 슈바벤Swabia과 프랑켄Franconia가 공격에 노출되었다. 빈이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 있는 동안 몇 년째 공들여 구축한 라인강전선이 무너졌다. 

빌라르는 황제군이 구축한 방어선을 허물 병력만 남기고 내륙으로 진격했다. 바이로이트변경백은 솔적없이 밀려났고 프랑스군은 슈투트가르트Stuttgart로 입성해 군자금과 보급품을 약탈했다. 빌라르는 보급로를 크게 이탈했기 때문에 황제군의 보급품을 노획하거나 도시를 약탈하는 수 밖에 없었다. 

빌라르는 프랑스군이 1704년에 뼈아픈 패배를 당해 아직도 잔해가 그대로 남은 회흐슈타트Höchstädt 평원을 지났다. 만약 황제군이 빌라르의 배후를 차단한다면 무척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바이로이트변경백은 자신의 위기만 생각했다. 


말버러는 독일 남부의 상황에 좌절하며 이런 편지를 보냈다. ‘황제께서 모든 병력을 집결시킨다면 최소한 적과 동일한 전력일 것입니다. 적은 더구나 절반이 민병수준입니다. 아군이 프랑스국경을 넘었다면 적은 슈트라스부르크Strasbourg에 6,000명을 놀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빌라르는 아직 작센에 있는 카를 12세에게 군대를 이끌고 자신과 합류해 독일 중심부를 점령하자고 권했지만 그는 다른 원대한 계획이 있었다. 스웨덴군이 없더라도 빌라르는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고 기병대가 다뉴브Danube의 남쪽강변을 넘었다. 말버러에게 다급히 요청했지만 플랑드르에서 떠날 수 있는 사정이 아니었고 대신에 하노버선제후인 게오르크George가 선택되었다. 그는 괜찮은 지휘관이었고 다른 선제후나 공의 협조를 이끌어낼 영향력이 있었다. 

빌라르는 이제 작센, 하노버, 프로이센, 팔츠 연합군을 상대해야 했고 퇴각로가 위협받았다. 이미 신성로마제국에게 큰 피해를 입혔고 원래 목표를 충분히 달성했기 때문에 라스슈타트 북부로 병력을 빼내고 루이 14세가 지시한대로 라인강을 건너 겨울숙영지로 들어갔다.


사부아Savoy의 아마데우스Amadeus 2세는 황제와 마찬가지로 이탈리아 남부를 노리고 있었기 때문에 황제군의 이동이 몹시 불편했다. 오랜 협의 끝에 외젠Eugene공의 병력과 합쳐 툴롱을 공격하기로 했다. 영국관 네덜란드는 지중해를 지배하고 싶었기 때문에 툴롱을 공격해서 프랑스해군의 본거지를 없애는데 동의했다. 

동맹군 사이가 벌어지고 제노바에서 군수품을 사들이다가 프랑스대사가 동맹군의 정보를 입수했다. 1707년 6월 말이 되어서야 유진과 아마데우스는 35,000명을 이끌고 해안가의 망통Mentone으로 향했고 일주일 후에 도착했다. 테스Tesse원수가 동맹군을 추격했다.  

동맹군은 7월 11일에 니스Nice앞바다의 순항함대와 합류했고 바르Var강을 건넜다. 함대의 근접지원덕분에 당분간은 보급문제가 없었다. 1704년 블렌하임전투에서 포로로 잡아 황제군에 강제편입했던 프랑스와 바바리아병사는 툴롱에 가까워질수록 대거 탈영하기 시작했다. 



툴롱은 프랑스남부에 있는 프랑스 최대의 해군기지였습니다. 당시 프랑스는 적에게 전함을 넘겨주지 않으려고 무려 46척의 전함을 파괴했습니다. 




외젠과 아마데우스의 진격로입니다. 


테스원수는 간발의 차이로 툴롱에 먼저 도착했고 동맹군이 7월 26일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요새 안에 들어가 있었다. 해군은 바로 공격할 것을 강하게 주장했지만 유진은 현명하게 결정을 미뤘다. 그렇다고 그냥 있을 수 없었다. 프랑스가 라인전선과 스페인에서 병력을 불러들이면 테스군의 병력이 압도적으로 불어날 것이 분명했다. 이 자리에 함께 있어야 할 황제군은 대신에 나폴리로 간 상태였다. 

막대한 피해가 예상되는데도 동맹군은 공격을 결정하고 7월 30일에 외곽요새를 공격했다. 병력이 계속 불어나고 있는 테스의 병력은 툴롱 북쪽 바로 위의 언덕에 참호를 파고 대기 중이었기 때문에 성공가능성이 낮아 보였다. 

쇼벨Shovell제독은 8월 5일에 빈으로 이런 편지를 보냈다. 

… 도시 전체의 많은 대포 때문에, 내부의 강력한 수비대 때문에, 도시 주변의 다양한 장애물때문에 툴롱은 매우 강력한 요새도시로 변신했습니다. 더구나 테스원수의 병력은 매일 불어나서 이제는 아군과 맞먹습니다. 이번 작전성공 여부가 무척 염려됩니다…



해군제독 클라우데슬리 쇼벨Cloudesley Shovell입니다. 툴롱공략에 실패하고 귀국하던 중에 실리Scilly제도에서 측량실수로 전함 4척 1,550명과 함께 목숨을 잃었습니다. 



프랑스군은 8월 14일 밤에 툴롱외곽요새를 탈환했다. 동맹군은 탈영, 질병과 보급문제로 사기가 계속 떨어졌고 반대로 프랑스군은 병력이 계속 늘어났다. 조만간 테스가 대대적인 반격에 나서 동맹군을 몰아낼 것이 분명했다.



툴롱의 외곽요새중 하나인 성 루이Louis요새입니다. 

 

일주일 후, 동맹군은 아직 기회가 있을 때에 후퇴하기로 결정하고 부상병과 야포는 순항함대에 싣고 나머지는 긴 여정에 올랐다. 테스는 추격에 나서지 않았다.

툴롱을 함락시키지는 못했어도 동맹군은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 프랑스는 적의 손에 넘어갈까봐 지중해함대를 불태우거나 자침시켰다. 루이 14세는 지중해함대를 재편할 예산과 시간이 모두 부족했다. 설사 재편하더라도 동맹국함대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리고 스페인에 있던 베르윅의 병력을 급히 빼내 프랑스남부로 보냈기 때문에 베르윅은 알만사전투 후에 적극적인 공세에 나서지 못했다. 나중에 병력을 되돌려 받았지만 피로에 지치고 규율이 무너진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