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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스페인왕위계승전쟁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13부 - 베르윅의 대반격

by uesgi2003 2018. 5. 23.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13부 - 베르윅의 대반격


골웨이Galway와 다스 미나스Das Minas17064, 프랑스군이 바르셀로나를 공격하느라 자리를 비운 틈을 노려 타 영--네덜란드동맹군을 이끌고 캄포 마요르Campo Mayor를 떠나 마드리드Madrid방면으로 진격했다.

베르윅Berwick원수가 동맹군을 막아야 했지만 정예병이 모두 빠진 겨우 15,000명의 스페인병력이 전부였다. 포르투갈군은 간단한 전투 후에 알칸타라Alcantara를 점령했고 스페인군의 결사적인 반격을 모두 물리쳤다.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져서 다스 미나스와 베르윅은 둘다 포로가 될 뻔 했다가 간신히 달아났다.

동맹군은 알칸타라를 점령한 후에 알마레스Almarez로 향했다. 베르윅의 반격을 겪은 다스 미나스는 진격속도를 일부러 늦추었고 영국대사 존 메수엔John Methuen은 페드로왕에게 항의편지를 보냈다.



익숙하지 않은 스페인지명이 계속 나오기 때문에 화면을 키워서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영국의 협박에 효과를 발휘해 동맹군은 526일에 시우다드 로드리고Ciudad Rodrigo를 점령했다. 바르셀로나 방어성공 소식에 힘을 얻은 동맹군은 67일에 살라망카Salamanca를 점령한 데다가 막대한 군수품까지 노획했다. 지역유지들이 마중을 나와 환영했지만 일반시민은 외국군의 주둔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베르윅은 시에라스Sierras 길목에서 수도로 향하는 길을 막으려 했다. 6우러 18, 골웨이는 말버러의 대승소식을 들었고 동맹군의 사기는 더욱 높아졌다. 베르윅은 일주일 후에 마드리드로 퇴각했다.

펠리페 5세는 수도로 귀환했고 바르셀로나에서 참담한 실패를 겪었기 때문에 수도를 방어할 의지가 없었다. 620, 여왕은 베르윅의 조언을 따라 부르고스Burgos로 피신했고 펠리페도 바르셀로나공격에서 돌아온 패잔병을 이끌고 그 뒤를 따라갔다.

 

베르윅은 중과부적의 전력을 가지고 동맹군의 진격을 최대한 지연시키는 지연전을 훌륭하게 펼쳤다. 그렇지만 발렌시아Valencia의 증원군을 받고도 주요거점의 수비대를 떼어내고 나면 14,000명이 고작이었기 때문에 반전시킬 기회가 없었다.

동맹군도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긴 행군에서 발생하는 탈영과 질병손실 때문에 비슷한 숫자까지 줄어들었지만 훈련이나 무장은 스페인군에 비해 좋았다. 624, 골웨이는 베르윅이 알칼라Alcala로 퇴각했다는 것을 알고는 비야베르데Villaverde후작의 선봉대를 보내 마드리드를 점령하게 했다.

동맹군 본대는 3일 후에 마드리드에 입성했다. 부르봉왕가의 왕위계승을 막고 합스부르크왕가로교체한다는 동맹군의 최종목표가 이제야 달성되었다. 72, 카를Charles대공은 카를로스Carlos 3세로 즉위했지만 마드리드 시민의 반응은 냉담했다. 거리를 행진하는 포르투갈군대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당시 사용하던 총검입니다. 소총도 크고 긴데다가 총검도 길어서 보병의 훌륭한 대인무기였습니다. 

 

선왕 카를로스 2세의 미망인 마리아 아나 노이부르크 Mariana von Neuberg는 톨레도Tolredo 유배지에서 카를로스 3세의 즉위를 인정했고 일부 왕족도 즉위를 축하했다. 대부분의 왕족은 마드리드를 떠나 피신했고 자신의 영지에서 사태를 방관하며 입장을 유보했다.

어쨌든 동맹군은 대성공을 거뒀다. 3개월 만에 골웨이와 다스 미나스는 베르윅을 마드리드에서 몰아냈고 대포 100문을 비롯해 막대한 군수품을 손에 넣었다. 알칸타라와 시우다드 로드리고를 점령하면서 스페인군 8,000명을 포로로 잡았다. 무엇보다 펠리페 5세와 그 군대를 마드리드에서 멀리 내쫓았다.

그렇지만 스페인은 원래 외국에 배타적이었고 동맹군 지휘관이 상당수 개신교였기 때문에 환영받지 못했다. 소규모 병력은 가는 곳마다 기습을 받거나 쫓겨났다. 도시를 벗어난 외곽은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바르셀로나에 있는 카를대공에게 전령이 달려갔다. 펠리페 5세가 위기를 수습하기 전에 빨리 마드리드로 들어와 최대한 장악하라는 권고였지만 카를대공은 바로 행동에 옮기지 않았다. 그 동안 베르윅은 마드리드에서 90km 떨어진 과달라하라Guadalajara로 물러나서 단단한 방어선을 구축했다.

711, 골웨이는 알칼라로 진격해 보급창을 만들었는데 베르윅이 다시 물러났다는 보고를 받고 진격했다. 베르윅은 바르셀로나에서 귀환한 병력을 받아 20,000명까지 병력을 불렸다. 그 중 절반은 프랑스군이어서 이제는 동맹군의 전력을 능가하기 시작했다.

동맹군은 2주 후에 소페트란Sopetran으로 진격해 프랑스군이 지키는 다리를 공격했다가 실패했다. 730, 동맹군은 질병, 전사와 탈영으로 숫자가 12,000명까지 떨어져서 과달라하라를 내주고 물러났다. 양쪽 모두 상대의 전력을 과대평가해서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지만 동맹군이 누렸던 기세는 빠르게 사라지고있었다.

 

카를대공은 느긋하게 마드리드로 향했고 발렌시아와 아라곤Aragon 중 어디를 통과할 것인지로 귀중한 시간을 낭비했다. 카를은 중요하지 않는 부분에서 형식과 자존심을 내세우며 막무가내로 고집을 피웠고 정작 중요한 부분에서는 쉽게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86일 카를대공의 부대와 마드리드의 동맹군이 만났다. 카를대공은 고작 4,000명만 데리고 왔기 때문에 동맹군의 전력회복에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88, 동맹군이 발렌시아 해안의 알리칸테Alicante를 접수하고 프랑스수비대의 명예항복을 받아들였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동맹함대도 마호르카Majorca와 이비사Ibiza의 군도를 장악했다.

그렇지만 동맹군이 베르윅을 공격하려고 수도를 비우면 마드리드시민이 바로 봉기할 것이 분명했다. 포르투갈국경까지 이어진 톨레도와 살라망카도 프랑스 스페인연합군에게 함락되었다가 포르투갈군이 다시 탈환한 후에 프랑스군에 협조한 시민들에게서 상당한 벌금을 징수했다.

 

동맹군은 마드리드시민의 호응없이는 방어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남쪽 30km 아래의 타후나Tajuna강으로 내려갔다. 대신에 최근에 알리칸테와 카르타헤나Cartagena를 점령한 덕분에 보급로가 더 안전하고 짧아졌다.

814, 골웨이는 다스 미나스와 카를의 측근인 노예예스Noyelles백작과의 지휘권공유가 불편했기 때문에 4,000명만 이끌고 타후나 교차로 부근에 진영을 마련했다. 주변 민심이 워낙 사나웠기 때문에 탈영병은 거의 없었다.

베르윅군은 26,000명까지 늘었고 기병전력은 압도적이었지만 결전을 벌일 필요가 없었다. 레갈Legal장군에게 기병 3,000기를 주고 알칼라 외곽을 공격해 동맹군 진영을 교란시켰다. 베르윅은 대규모 전투를 벌이지 않고 주도권을 잡았다.

 

170694, 드 발레de Vallee장군의 프랑스 기병대가 마드리드에 입성했다. 끝까지 버티던 오스트리아-스페인 수비대는 구타당한 후에 프랑스 갤리선의 노예처분을 받았다. 이번에는 동맹군이 남긴 막대한 군수품이 연합군의 손에 들어왔다.

99, 동맹군은 기상이 악화되자 발렌시아로 퇴각했다. 타구스강을 건너 발베르데Valverde로 이동했고 골웨이는 영국증원군 1,400명과 긴급한 보급품을 받았다. 베르윅은 동맹군을 추격했지만 전투는 피했다.

925, 베르윅이 갑자기 가브리엘Gabriel강에서 동맹군의 퇴각로를 막으려고 했다가 동맹군의 후위가 용감하게 맞서서 실패했다. 동맹군 12,000명은 101일에 발렌시아로 무사히 퇴각했다. 부대는 숙영지를 마련하고 겨울맞이를 준비했다.

 

104, 펠리페 5세가 마드리드로 돌아왔고 시민은 그를 환영했다. 카를을 지지했던 왕족은 수도에서 추방되었지만 처벌은 관대한 편이었다. 마리 아나는 바요네Bayonne로 추방되어 더 이상 정치에 간여하지 못하게 했다.

베르윅은 동맹군이 발렌시아에 틀어박힌 틈을 노려 주요 거점을 탈환했다. 11월에는 카르파헤나를, 12월에는 알칸타라를 탈환해 연말까지 상당부분을 되찾았다. 그렇지만 이탈리아에서 내준 영지는 되찾지 못했다.

1707313, 신성로마제국황제는 루이 14세와 이탈리아에서의 적대적 행위를 중단하기로 비밀약조를 맺었다. 밀라노와 만투아에서 물러난 프랑스군은 대신에 다른 곳에서 동맹군을 상대할 수 있었는데 스페인도 그 중 하나였다.

 

골웨이와 다스 미나스는 발렌시아와 카탈루냐에서 겨울을 보낸 후에 프랑스 스페인연합군이 크게 보강되기 전에 공세에 나서기로 했다. 1707410, 포르투갈, 영국, 네덜란드, 위그노와 독일병사로 구성된 15,000명은 예클라Yecla방면으로 진격해서 베르윅이 모아둔 보급품을 노획했다.

보급을 챙긴 동맹군은 비예나Villena의 요새를 포위했다가 베르윅이 알만사Almanza라는 작은 마을로 진격한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대로 두면 루이 14세의 조카 오를레앙d’Orleans의 병력과 합류해 전력이 크게 불어날 수 있었다.

골웨이는 연합군이 서로 합류하기 전에 베르윅을 곧바로 공격하기로 했다.

 

동맹군은 알만사까지 40km를 이동했다. 베르윅의 병력은 25,000명까지 불어나 동맹군이 불리했지만 골웨이는 그 사실을 몰랐고 알았다고 해도 시간이 갈수록 병력차이가 벌어지기 때문에 결전을 벌일 수 밖에 없었다.

425, 골웨이는 결전을 각오하고 진격했지만 치밀한 정찰없이 너무 서둘렀다. 험지를 건너면서 대열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정오 정도에 시작된 동맹군보병의 공격은 무산되었다. 한 병사는 이렇게 기록했다.

우리 선봉근위대가 적에게 용감하게 다가가 멋지게 격파했다. 우리군도 전열대형으로 전진했다. 우리는 하루 종일 물을 먹지 못해서 몹시 지친 상태였다. 기운을 차리고 적과 교전을 벌여 승리를 거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기병대가 너무나 차이났다

 

골웨이는 보병과 기병대가 서로를 지원할 수 있도록 교차시켰는데 포르투갈기병대가 베르윅의 대규모 반격에 놀라 보병을 그대로 두고 전장에서 이탈했다. 처음부터 전력이 크게 부족했던 보병은 위기에 몰렸다.

골웨이와 다스 미나스는 부상당했는데 골웨이는 바로 말에 다시 올라 전투를 지휘했다. 도나Dohna와 쉬림프톤Shrimpton의 네덜란드와 영국보병 2,000명이 숲에 고립되었다가 이튿날에 항복했다.

동맹군은 수송마차와 대포를 대거 빼앗겼는데 베르윅은 20문 이상의 야포, 3,000명의 포로, 부대기 120개 이상을 노획하는 대전과를 올렸다. 6,000명으로 줄어든 동맹군은 무질서하게 발렌시아로 되돌아갔지만 더 이상 버티기 힘들었다.


알만사전투 전황입니다. 스페인어라 번역하기 힘들어서 그냥 병력이동만 눈여겨 보시기 바랍니다. 위가 동맹군 아래가 연합군입니다. 




알만사전투는 프랑스출신(골웨이)이 영국군을, 영국출신(베르윅)이 프랑스군을 지휘해 양쪽 지휘관의 국전이 뒤바뀐 세계최초의 전투입니다. 

동맹군은 약 16,000명의 병력 중 4,000명 사상, 3,000명 포로의 참패를 당했고 연합군은 약 26,000명 중 3,000명을 잃었습니다. 



스페인의 자랑스러운 전투 중 하나이기 때문에 정기적으로 재현쇼를 진행합니다. 올해는 4월 20~22일에 벌어졌군요. 311주년 행사입니다. 


 

카를대공과 측근은 토르토사, 레리다, 데니아와 알리칸테에 수비대를 배치하고 10,000명으로 줄어든 병력을 이끌고 카탈루냐로 되돌아갔다. 리스본은 프랑스 스페인연합군의 공격에 대항할 병력이 없었기 때문에 구실을 찾기 시작했다.

베르윅은 오를레앙과 합류했지만 알만사에서 입은 피해가 상당했기 때문에 골웨이와 다스 미나스를 바로 추격하지 않았다. 대신에 레퀘나Requena와 발렌시아로 병력을 돌렸고 일부는 데니아Denia항으로 향했다.

레퀘나의 오스트리아총독은 적을 보는 순간에 바로 항복했고 발렌시아도 58일에 항복했다. 베르윅은 성벽을 무너트리고 동맹군을 지지한 대가로 벌금을 징수했다. 아직은 동맹군의 저항이 거셌다. 사티바Xativa519일에 치열한 시가전 끝에 탈환했지만 성채로 들어간 병력은 여전히 항복하지 않았다. 베르윅은 525일에 에브로Ebro강을 건너는데 실패해서 어쩔 수 없이 100km 상류로 올라가 도강했다.

 

526, 오를레앙이 사라고사Saragossa를 탈환했고 알시라Alcira61일까지 버티다가 명예항복했다. 사티바 성채의 병력은 39일이나 버티다가 612일에 항복했다. 프랑스군은 사티바를 대부분 불태운 후에 이동했다. 동맹군 수비군은 명예항복 조건을 받았지만 카탈루냐로 가는 길에 심각한 보복을 받았다.

골웨이는 패잔병 수습에 나서 병력을 모았고 동맹군은 기병과 보병을 합쳐 14,000명까지 늘어났다. 레리다Lerida10월 초순까지 버티다가 항복했다. 시우다드 로드리고도 내주었지만 데니아는 동맹군의 사기를 크게 올려주었다.

후안 라모스Juan Ramos6월 말에 흙벽을 쌓아 올리고 프랑스군의 공격을 막아냈다. 76, 방어선이 포격을 받아 일부 무너지자 이튿날에 프랑스군이 공격했다가 300명을 잃고 물러났다. 두번째 공격이었던 야습도 마찬가지였다. 프랑스군은 포대를 더 가져와 포격해 방어선을 계속 무너트렸다.

 

710, 프랑스 지휘관은 라모스에게 세번째 공격이전에 항복하지 않으면 관용을 베풀지 않겠다고 위협했다. 라모스는 반대로 프랑스군을 용서하지 않겠다고 대답했다. 때마침 HMS 랭카스터Lancaster가 도착해 해병과 선원 400명을 지원했다.

프랑스군의 세번째 공격도 큰 피해만 내고 실패하자 더 이상의 공격을 단념하고 봉쇄망을 좁혔다. 프랑스군은 알리칸테도 공격했는데 방어선이 워낙 단단해서 별 진전이 없었다. 도시는 항복했지만 성채에 있던 영국과 위그노군은 격렬하게 저항했다.

곳곳에서 분전이 계속되었지만 동맹군은 주도권을 잃었고 데니아와 알리칸테도 외부의 지원을 받지 못하면 결국에는 항복할 운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