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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스페인왕위계승전쟁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15부 - 아우데나르데전투

by uesgi2003 2018. 5. 26.


이제 길고 길었던 스페인 왕위계승전쟁도 끝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15부 - 아우데나르데전투


영국과 네덜란드는 카를대공과 조약을 맺어 영국-스페인무역회사를 설립하고 전쟁이 끝나면 신대륙과의 교역에서 프랑스를 배제한다고 약속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승전해야 했는데 알만사패전 후에 동맹국 상황이 좋지 않았고 카를은 지나치게 영국에게 군자금을 요구했다. 

네덜란드는 양국의 협의에서 얻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불만이 많았다. 더구나 대동맹조약에 따르면 특정국가가 일방적인 혜택을 못 누르게 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지중해에서 활약하는 해군전력은 영국해군이 절대적이었고 포르투갈은 아예 대동맹조약을 지키지 않았다. 


말버러는 플랑드르에서 난처한 상황이었다. 이전보다 훨씬 무서운 상대인 방돔은 좀처럼 맞대결을 벌이려 하지 않았다. 신성로마제국 황제군은 당분간 유럽 남부에 집중했기 때문에 유럽 북부에서는 프랑스군의 전력이 우세했다. 그렇지만 루이 14세는 이전과 달리 무리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고 방돔은 장블루Gembloux 일대를 요새로 만들고 말버러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말버러는 병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방돔을 포위할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방돔을 무시한 채로 다른 곳을 공격할 수도 없었다. 네덜란드도 1706년에 얻은 것을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개전 초부터 그랬던 것처럼 말버러의 발목을 잡았다. 말버러가 ‘우리 친구는 확실하게 유리하기 전까지는 모험을 하지 않지’라는 편지를 보낼 정도였다. 

네덜란드 통령도 툴롱공격의 승패가 알려지기 전까지는 절대로 위험을 무릅쓰지 말라는 명령을 내린 상태였다. 툴롱이 함락되어 방돔이 서둘러 본국으로 향하기 전까지는 움직이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양쪽 모두 다른 전선에서 변수가 생기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8월 첫 주, 동맹군이 바라던 대로 루이 14세는 툴롱 때문에 방돔에게 10,000명을 보내라고 명령했다. 말버러는 프랑스군의 전력약화를 눈치채고 후방의 통신과 보급로를 노렸다. 방돔은 장블루에 더 이상 주저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방돔은 말버러가 후방으로 돌자 바로 퇴각하기 시작했고 양쪽은 5km 거리까지 좁혀 들었다. 

말버러가 프랑스군의 후위를 공격하려고 했지만 갑작스런 기상악화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틸리Tilly백작의 덴마크기병대를 발견한 프랑스 후위대는 도로를 차단하고 깔끔하게 달아났다. 동맹군은 진격 중에 프랑스 낙오병 수백 명을 사로 잡았다. 

방돔은 몽스Mons와 아트Ath요새를 양쪽에 끼고 새 방어선을 펼쳤다. 말버러는 프랑스 남부 공격이 실패했다는 소식을 받았지만 계속 방돔을 노리고 회피기동했다. 방돔은 말버러와 대회전을 벌일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프랑스 국경으로 넘어가 마흐끄Marque강을 방어선으로 삼았다. 말버러는 군대를 겨울숙영지로 보내는 것 말고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여지가 없었다.


1708년이 열리자, 루이 14세는 20살의 제임스 스튜어트James Stuart를 앞세워 영국Kingdom of Great Britain을 기습해 동맹국의 관심을 분산시키려고 했다. 덩케르크Dunkirk에 병력, 대포와 선박을 모은 후에 교황의 축복까지 받았다. 그렇지만 이런 대규모 작전은 비밀이 유지될 수 없었고 빙Byng제독의 전함 18척이 1708년 2월에 항구를 봉쇄했다. 앤여왕은 만전을 기하기 위해 네덜란드함대까지 준비시키고 스코틀랜드에도 군대를 집결시켰다. 

루이 14세의 야심만만한 기획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을 뿐만 아니라 영국과 네덜란드의 의지를 더욱 굳히는 더 나쁜 결과를 가져왔다. 



영국에서 명예혁명이 일어나자 어머니가 하녀로 위장하고 아들인 제임스 스튜어트를 프랑스로 탈출시켰습니다. 

루이 14세는 윌리암 3세가 그랬던 것처럼 제임스 스튜어트를 영국에 잠입시키고, 스튜어트왕가를 복권시키려는 스코틀랜드의 자코바이트(제임스의 라틴어 발음)의 지지반란을 일으킬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1715년과 1719년에도 상륙을 시도해 자코바이트 반란을 일으켰지만 모두 실패했습니다.  


프랑스 포르방Forbin제독은 봉쇄를 뚫고 빙의 추격을 뿌리치고 스코틀랜드 북쪽 해안으로 향했다. 포르방이 3월 23일에 포스만Firth of Forth에 들어섰지만 기대했던 자코바이트Jacobite의 환영은 없었고 빙은 계속 추격해왔다. 포르방은 1703년에 노획했던 솔즈베리Salisbury를 잃고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프로방은 북진하면서 상륙지점을 찾았지만 거센 역풍이 불어서 어쩔 수 없이 덩케르크로 향했다. 3주의 항해 끝에 육지에 내린 병력은 군인이라기 보다는 생쥐꼴이었다. 

말러버는 병력을 급히 본토로 보냈다가 해프닝으로 밝혀지자 다시 플랑드르로 병력을 전개했다. 루이 14세는 두 번 다시 자코바이트운동을 노골적으로 지원하지 않았다.


방돔은 프랑스 앙리Henry 4세의 서자가문 출신으로 뛰어난 지휘관이었지만 워낙 독단적이어서 다른 사람의 조언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원수들은 그와의 협력을 꺼렸고 마티뇽Matignon원수를 그를 따랐다. 

루이 14세의 장손이자 실질적인 후계자인 브르고뉴공작Duc de Bourgogne의 저지대국가 병력과 합동작전을 벌이면서 문제가 복잡해졌다. 루이는 장손이 전과를 올려서 병사들의 존경을 받게 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브르고뉴 공작은 군대에 아무런 매력을 느끼지 못한 데다가 지휘능력은 형편없었는데도 고집이 상당했다. 프랑스왕국의 실질 후계자가 함께 있으니 자연스럽게 지휘계통이 흔들렸고 두 고집쟁이는 서로를 혐오해서 심각할 정도로 사이가 벌어졌다. 



지나친 자식사랑은 큰 일을 망치기 마련입니다. 브르고뉴공작은 멋진 갑옷을 입고 있지만 군사재능은 수준이하여서 북부전선에서 프랑스군의 궤멸을 부릅니다. 그것만으로도 모자라서 릴Lile을 구원하지 않아서 연합군이 처음으로 프랑스 도시를 점령합니다. 

프랑스에게는 다행스럽게도 1710년 29살의 나이로 병사해서 프랑스왕위계승권을 둘째 아들에게 넘겨줍니다. 아내가 홍역으로 죽자 그 옆을 떠나지 않고 슬퍼하다가 자신도 홍역에 걸려 병사했다는군요. 


루이 14세는 장손에게 당부의 편지를 보냈다. ‘네가 방돔과 협력하지 않는다면 성공할 수 없을 게다.’ 루이 14세의 예언은 그대로 들어 맞아서 방돔은 참패를 당하고 프랑스 북부 상당지역이 동맹군의 손에 떨어지는데 그건 몇 개월 후의 일이다. 

대동맹군의 상황도 마찬가지로 어두웠다. 툴롱공략에 실패하자, 동맹군 사이에서는 외젠공이 스페인 카탈루냐로 가서 상황을 반전시키거나 말버러공작이 포르투갈에서 병력을 이끌고 올라가 카탈루냐에서 나오는 외젠군과 합류해야 한다는 황당한 의견까지 나왔다. 외젠은 스페인으로 갈 생각도 없었고 네덜란드도 말버러를 절대로 내보내고 싶지 않았다. 신성로마제국도 스페인으로 병력을 보낼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대신 1708년 4월에 유능한 오스트리아 지휘관인 기도 폰 슈타르헴베르크Guido von Starhemberg(그림 참조)가 바르셀로나로 갔다. 카를대공의 측근 지휘관이 최근에 죽었기 때문에 그의 부임에 반대하는 분위기는 없었다. 



골웨이는 부상이 크게 악화되어 포르투갈로 돌아갔다. 포르투갈의 새로운 왕 주앙John 5세는 카를대공의 장녀인 마리아 안나Maria Anna와 결혼했다. 마리아 안나는 영국 남부에서 영국 전함을 타고 왔기 때문에 양국의 관계가 더욱 긴밀해질 것 같았지만 알만사전투에서 참패를 당한 후에 포르투갈은 별 의욕이 없었다. 

5월, 스탠호프Stanhope백작이 골웨이의 후임으로 카탈루냐에 왔다. 폰 슈타르헴베르크가 3,300명의 병력을 데리고 오고 스탠호프가 이탈리아를 건너 3,000명의 기병과 보병을 데리고 와서 동맹군의 전력이 크게 보강되었다. 

그렇지만 병력을 먹이고 급여를 주는 문제가 훨씬 심각했기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규율이 무너졌다. 토로토사Tortosa가 공격당하자 황제군의 팔츠병사는 별다른 저항없이 쉽게 항복했다. 연합군이 발렌시아를 탈환하면서 보급로가 차단되었다. 다행히 연합함대가 바다를 지배했기 때문에 보급품을 나르고 스페인 해안 아무 곳이나 공격하고 약탈했다. 


연합함대는 겨울을 보낼 항구가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에 말버러는 스탠호프에게 마혼Mahon항을 공략해달라고 부탁했다. 마혼항을 점령하려면 미노르카Minorca(현재 메노르카. 지도참조)섬을 점령해야 했다. 

리크Leake의 함대가 8월 11일에, 사루데냐Sardinia의 수도 칼리아리Cagliari 앞바다에 도착해서 총독인 하마이카Jamaica후작을 불러 항복을 권유했지만 거절당했다. 이튿날 동맹군이 상륙하자 총독은 바로 항복했고 수비대는 명예항복했다. 

새로 부임받아 야심만만한 스탠호프는 1,700명의 병력과 10문의 대형공성포를 가지고 미노르카섬을 점령하려고 했다. 9월 3일, 일부 해군장교의 반대를 묵살하고 전함 밀포드Milford와 요크York의 호위를 받으며 마호르카Majorca에 도착했다. 총독과 협의한 후에 수비대 300명을 빌리고, 리크를 설득해 해병 600명을 지원받았다. 

리크는 사르디냐만으로 자신의 임무를 다했다고 생각하고 스탠호프의 원정을 지원하지 않았다. 



마노르카의 프랑스와 스페인병력 1,000명은 모두 마혼항에 집결해 있었다. 1708년 9월 14일, 스탠호프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병력과 대포를 섬에 올려 놓았다. 9월 28일이 되자 항구진입로를 방어하는 성 필리페Phillipe요새 반대편에 공성포 배치를 완료했다. 몇시간 만에 요새벽이 무너졌고 한 번의 항복권유 후에 선두에 서서 부대를 이끌고 돌격해 들어갔다. 

수비대의 거센 저항에 밀려 공격이 실패하자 스탠호프는 수비대에게 다시 한 번 항복을 권유했다. 스페인군은 가족과 함께 있었는데 1,000명의 가족이 공포에 떨며 울자 마음이 흔들렸고 9월 30일에 총독이 항복했다. 

카를대공을 지지하지 않는 스페인병사는 무르시아Murcia로, 프랑스병사는 툴롱으로 돌려보냈다. 4년 전의 지브랄타와 마찬가지로 미노르카도 카를대공의 이름으로 점령했지만 영국은 돌려줄 생각이 없었다. 1708년 말, 영국은 페티트Petit대령을 마혼항의 총독으로 임명하고 영국군만 수비대로 배치했다. 


스탠호프는 카를에게 전쟁비용의 보상으로 미노르카를 영국이 통치한다고 설득했지만 네덜란드는 영국의 일방적인 주장에 분노했다. 스탠호프는 네덜란드의 항의를 묵살했다. 

말버러는 플랑드르에서 외젠과 병력을 합쳐 방돔이 증원받기 전에 결전을 치루기로 했다. 하노버선제후 게오르크는 라인강전선을 맡아 그 일대의 프랑스군이 북쪽으로 이동하지 못하게 잡아 두기로 했다. 그렇지만 작전에 대해서는 게오르크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게오르크는 대동맹을 확실하게 지원했고 상당한 병력을 모았는데도 말버러는 그를 믿지 않았다. 

방돔과 모젤계곡을 맡은 베르윅은 외젠의 북진을 눈치채고 있었다. 방돔이 먼저 움직여 7월에 헨트Ghent와 브뤼허Bruges를 점령해 먼저 기세를 올렸다. 말버러의 보급로를 끊고 영국과 네덜란드의 통신도 차단할 수 있었다. 


대동맹은 2년 전 여름으로 되돌아갈 위기였다. 아우데나르데Oudenarde를 점령하려고 했지만 연합군 총독이 함락되기 전에 도시를 모조리 불태우겠다며 결사항전을 공언했다. 

말버러는 선제공격을 받은 후에 외젠을 만났다. 외젠은 25년 만에 모친이 사는 브뤼셀을 짧게 방문했다. 말버러는 외젠의 조언에 따라 7월 11일에 아우데나르더 바로 아래 스헬더Scheldt강을 건너는 프랑스군을 따라 잡았다.

말버러와 외젠은 치열한 백병전을 벌여 방돔과 브르고뉴공작에게 심각한 피해를 입혔다. 두 사람은 서로 협력하지 않았고 방돔은 심지어 백병전에 휘말리는 지경이었다. 외젠은 연기가 자욱한 습지에서 방돔을 발견했다. 

‘말도 없이 손에 창을 들고 병사들을 격려하고 있었다.’ 





지휘를 하는 말버러입니다. 



아우데나르데전투는 프랑스의 두 지휘관이 협력만 잘 했어도 거꾸로 연합군을 궤멸시킬 수 있는 전투였습니다. 

방돔이 프랑스 좌익을 맡고 있는 브르고뉴공작에게 공격을 요청했지만 왜 그랬는지 모르게 브르고뉴공작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거절하는 전령을 보냈다고 하는데 방돔에게 전달되지 않았고 방돔은 좌익도 함께 공격에 나서는 줄 알고 혼자서 연합군좌익과 중앙을 상대했습니다. 


당연히 프랑스군의 공격은 막혔고 프랑스군은 85,000명 중 약 15,000명 이상(포로 8,000명 포함)을 잃었습니다. 반면에 무리한 도발에 나섰던 연합군은 80,000명 중 겨우 3~4,000명만 잃었습니다. 








네덜란드와 덴마크군도 프랑스군의 우익으로 돌아 대승을 노렸지만 어둠이 내려 프랑스군은 전멸위기에서 벗어났다. 말버러는 이렇게 기록했다.

‘햇빛이 두 시간만 더 있었다면 정말 행복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이 전쟁을 끝낼 수 있었다,’

방돔은 참패를 당한 후에 나머지 병력을 이끌고 헨트-브뤼허운하 뒤로 후퇴한 후에 부대를 정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