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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스페인왕위계승전쟁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최종편 - 위트레흐트조약

by uesgi2003 2018. 6. 3.


처음 시작할 때에는 설마 블렌하임전투까지 갈 수 있을까? 했었는데, 막판 폭풍질주하면서 위트레흐트조약까지 마무리합니다. 

오디오커뮤니티에서 초보자들 상대로 조언하고 시비거는 어그로들 상대하는게 의외로 많은 시간을 빼앗겼군요. 오디오 커뮤니티 몇 군데 떠났더니만 KTX 속도로 읽고 정리할 시간이 됩니다.


다음에는 2차대전으로 가볼까 생각 중입니다. 아무래도 연재보다는 단편이 되겠죠.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최종편 - 위트레흐트 조약


프랑스와 그레이트 브리튼 사이의 비밀협상은 계속 되었다. 루이 14세는 펠리페 5세의 왕위유지, 오스트리아의 이탈리아와 저지대국가 합병, 그레이트 브리튼의 북미교역권, 네덜란드의 국경도시Barrier Towns 유지 등에 합의했지만 신성로마제국과 네덜란드는 당연히 반발했다.

1711417, 34세의 황제 요제프Joseph가 홍역으로 죽으면서 상황이 급반전했다. 황후가 섭정이 되었고 외젠공을 임시 내각에 포함시켰다. 저지대국가에 있던 황제군은 모두 독일영지로 불러들였다.

스페인 카를로스 3세로 즉위했던 카를대공은 이제 신성로마제국의 가장 유력한 후계자였다. 또 다른 후보인 바바리아선제후는 루이 14세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지하는 사람이 적었다.

펠리페 5세는 바르셀로나에 있던 카를대공에게 위로의 편지를 보냈지만 그는 펠리페가 아닌 루이 14세와 이야기해야 한다는 뜻으로 편지를 읽지 않고 그대로 돌려보내는 무례를 저질렀다.

 

스페인국민은 그렇지 않아도 카를대공에 대해 반감이 심했는데, 신성로마제국황제에 오른 카를을 왕으로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요제프가 죽으면서 동맹국의 참전목적 자체가 사라졌다.

1711927, 카를은 배를 타고 빈으로 향했고 102일에 카를 6세로 즉위했다. 아내는 약속의 증거로 카탈루냐에 한동안 남겨두었지만 그는 스페인으로 다시는 돌아가지 않았다.

말버러는 외젠군이 떠나 빌라르원수보다 훨씬 적은 병력으로 프랑스북부에서 전투를 벌여야 했다. 빌라르는 무리하게 야전을 벌일 필요없이 요새라인만 지키면 되었다. 말버러는 빌라르가 아라스Arras일대에 머무르게 한 후에 아를뢰Arleux를 돌파해 부샹Bouchain요새(지도 참조)를 포위했다.

프랑스수비대는 항복하지 않았고 빌라르도 병력을 이끌고 보롱숲Bourlon Wood에 머물며 동맹군의 공성진을 방해했다. 빌라르는 병력의 우위에도 불구하고 포위망을 풀지 못했고 수비대는 912일에 항복하고 모두 포로가 되었다. 말버러는 이전과 달리 반드시 전쟁포로로 잡겠다고 고집했다.




 

스페인전선은 별 움직임이 없다가 9월이 되어서야 움직였다. 이탈리아의 황제군과 지브랄타의 영국군을 지원받은 슈타르함베르크는 15,000으로 프라츠 델 로이Pratz del Roy에 자리잡았다.

916, 방돔은 약간 더 많은 병력을 이끌고 동맹군을 우회하려다가 실패하고 3,000명을 떼어 카르도나Cardona의 요새를 포위했다. 1220, 슈타르함베르크는 구원군을 보내 이틀간 전투를 벌여 연합군을 밀어내고 대포와 군수품을 노획했다.

방돔은 무리하지 말라는 루이 14세의 명령에 따라 세그레Segre강 너머의 겨울숙영지로 들어갔다.

 

프랑스와 그레이트 브리튼은 9월 말에 의견을 상당히 좁혔다. 그레이드 브리튼에게 스페인제국과의 우선교역권을 보장하고 지브랄타와 미노르카의 소유권도 인정한다는 내용이었다. 북미에서는 어업과 털가죽 교역에 대해 독점을 인정받았다. 그 밖에도 교역을 방해하던 덩케르크의 사략선항구요새도 허물기로 했다.

런던의 개신교 왕위계승을 인정했고 프랑스와 스페인의 항구적인 왕위계승분리, 네덜란드남부의 국경도시 복구, 신성로마제국의 저지대와 이탈리아 영토도 인정했다.

비밀회담이 진행되면서 자연스럽게 말버러의 공격적인 태도는 이제 방해가 되었고 런던은 말버러를 협상장에서 제외시켰다. 17111231, 앤여왕은 갑자기 그를 총사령관에서 해임시켰다. 말버러는 여왕폐하께서 손수 쓰신 편지로 해임통보하셔서 무척 기쁘다라고 비통해 했고 루이 14세는 더 없이 기뻐했다.

 

협상단은 위트레흐트Utrecht에 모여 문서화하기 시작했다. 프랑스궁정에 홍역이 퍼지기 시작했기 때문에 황급히 서둘러야 했다. 도팽Dauphin은 이미 지난 해에 죽었고 그 다음 후계자인 부르고뉴공작과 그의 큰 아들도 1712년에 죽었다. 만약 작은 아들도 홍역에 걸려 죽는다면 스페인의 펠리페 5세가 유일한 왕위계승자가 되어 전쟁은 끝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말버러의 후임인 제임스 버틀러James Butler(그림 참조)는 평화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군사행동을 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 네덜란드와 외젠공은 앤여왕의 속셈을 어느 정도는 알아채고 있었다. 외젠이 진영에 틀어박힌 프랑스군을 기습하자고 제안하자 버틀러는 여왕의 명령부터 받아야 한다며 극구 만류했다. 버틀러는 동맹군이 영국군을 무장해제시키고 감금할 까봐 걱정할 정도였다.


 

슈타르함베르크와 방돔은 카탈루냐에서 서로에 대해 신경전을 벌였지만 어느 누구도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17126, 방돔이 식중독으로 죽었지만 동맹군은 병력이 모자라서 헤로나 정도만 포위했다.

11월 말에 마지막 영국군부대가 철수했다. 홀로 남겨진 바르셀로나시민은 영국군에게 욕하며 돌을 던졌다. 1711년 말, 포르투갈에 있던 영국과 네덜란드군은 대부분 철수했고 철수한 영국군은 지브랄타와 미노르카섬 수비대로 증원되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국경사이에서는 무의미한 전투가 계속 벌어졌다.

스페인군은 1712년 가을에 캄포 마요르Campo Mayor(지도 참조)를 포위했는데 수비대가 강하게 저항하고 증원군이 두 번이나 포위망을 뚫고 안으로 들어가 공략이 쉽지 않았다. 1017, 스페인군이 전면공격을 하다가 큰 피해를 입고 물러섰다가 적대행위중단 소식을 듣고 국경을 넘어 퇴각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4개월 마다 휴전협상을 갱신하다가 17152월에 영구적인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프랑스북부에서는 외젠이 프랑스에 대해 계속 압박했다. 동맹군은 171268일에 르께누와Le Quesnoy(지도 참조)를 공격하려고 이동했다. 영국군은 여전히 동맹군과 함께 움직였는데 너무 노골적으로 거부하면 동맹국의 의심을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빌라르는 영국군의 이동에 대해 강하게 항의했다. 버틀러는 외젠에게 르께누와공격을 취소하자고 권했지만 외젠은 반대로 총공격을 주장했다. 그레이트 브리튼은 이미 얻을 것을 모두 얻었기 때문에 동맹군진영에 함께 하더라도 뒤에서 다른 동맹군의 작전을 지켜보는 정도에 머물렀다.  

628, 버틀러는 영국군 휘하의 외국용병들에게 퇴각을 명령했지만 외젠이 미리 손을 쓴 덕분에 외국용병들은 그대로 진영에 머물렀다.

르께누와의 3,000명은 포로가 되었고 영국군은 그대로 북쪽으로 후퇴했다. 네덜란드남부 시민은 싸늘한 반응을 보이며 문을 닫았고 영국군은 덩케르크로 들어갔다.



 

전장에 남은 외젠, 네덜란드, 독일과 덴마크군은 여전히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프랑스군은 승리를 거둔 지가 이미 오래되었고 말버러가 없는데도 르께누와를 구원하지 못했다. 빌라르는 아라스와 캉브레(껑브헤)Cambrai 사이에 굳건한 방어선을 펼쳤고 외젠은 회피기동한 후에 렁드흐씨Landrecies를 공격했다.

그렇지만 대담한 기동은 반대로 두에Douai까지 이어진 보급과 교통로가 그대로 노출되었고 빌라르는 이것을 놓치지 않았다. 722, 북쪽으로 올라가 동맹군이 장악하고 있던 드냉Denain을 공격했다.

유능한 네덜란드 지휘관인 아르놀드 주스트 반 케펠Arnold Joost van Keppel8,000명의 수비대와 함께 지키던 곳이었는데, 빌라르는 2일 만에 외곽수비선을 돌파했다. 케펠은 단 하나의 부교에 의존해 철수하던 중에 다리가 끊어졌고 5,000명이 죽거나 포로가 되었다. 18개 대대병력 중에 겨우 2~3천 명만 살아남았고 케펠도 포로가 되었다.

외젠은 기병선봉대와 함께 강 건너에 도착했다가 이 참극을 그대로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빌라르가 드냉전투에서 병사들을 이끌고 있습니다. 물론 후대에 그린 과장입니다. 


 

프랑스군이 후방보급창을 점령하자 외젠은 렁드흐씨를 포기하고 퇴각했다. 812, 빌라르는 두에를 포위했고 한달도 안되어서 항복을 받아냈다. 외젠은 두에를 구원하려고 했지만 드냉에서 충격적인 참패를 당한 네덜란드군이 움직이지 않았다.

106, 빌라르는 르께누와를 탈환했고 15일 후에는 부샹도 탈환했다. 동맹군이 지난 2년 동안 큰 피해를 입으며 점령했던 요새들을 순식간에 그것도 매우 가벼운 피해만으로 탈환했다.

동맹군은 영국군과 앤여왕의 군자금없이는 더 이상 전투를 벌일 수 없다는 것을 깨닫았다. 이제는 네덜란드도 평화협상을 받아들여야 했다. 만약 1709년의 평화협상에 합의했다면 릴과 에흐슈흐라리스Aire Sur la Lys 등의 요새도시도 국경도시에 포함시킬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1701년 개전당시보다 조금 나아진 정도로 만족해야 했다.

바바리아선제후는 영지만 회복했고 프로이센왕은 헬델르란트북부를 얻었고 사부아의 아마데우스는 니스, 사부아와 시실리를 얻었다. 프랑스와 스페인의 왕위계승은 분리되었다. 포르투갈은 스페인영토를 얻지 못했지만 남미국경을 크게 확장시켰다.

 

1713411일 프랑스와 그레이트 브리튼이 위트레흐트조약에 서명했다. 그 후에는 사부아와 프로이센이 그리고 마지막으로 네덜란드가 서명했다.

신성로마제국은 더 나은 조건을 받아내려고 버텼지만 그레이트 브리튼과 네덜란드가 종전을 선언한 이상 방법이 없었다. 이제 전장은 라인강 중류와 상류로 옮겨졌다.

1713624, 프랑스군은 카이저슬라우테른Kaiserlauten을 점령했고 란다우Landau를 노렸다. 뷔르템베르크Württemberg820일에 항복하고 수비대는 전쟁포로가 되었다. 빌라르는 거점요새를 계속 함락시키며 독일의 황제영지로 들어갔다. 112, 공성전 한달만에 프라이부르크Freiburg 수비대는 성채로 몰렸고 빌라르는 항복하지 않으면 도시자체를 불태우겠다고 협박했다.

 

겨울이 되자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은 본격적인 협상을 시작했다. 외젠과 빌라르는 헝가리에서 오스만 투르크를 상대로 함께 싸웠기 때문에 협상단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17143, 양국은 라슈타트Rastadt조약을 맺으면서 서유럽에 평화가 찾아왔지만 스페인은 수월하게 끝나지 않았다. 카를대공을 지지하며 반란을 일으켰던 카탈루냐시민은 영국여왕의 지원약속을 믿고 다른 동맹국이 이탈할 때에도 스페인왕정에 저항했다.

위트레흐트조약에 따라 동맹군이 카탈루냐를 떠나면 대사면이 예정되어 있었지만 구체적인 절차에 대해서는 합의되지 않았다. 슈타르함베르크는 군대를 이끌고 떠나면서 펠리페 5세의 대리인 포풀리Populi백작이 아닌 카탈루냐시민에게 도시를 넘겼다. 당연히 스페인궁정은 매우 분노했다.



카탈루냐는 바르셀로나, 헤로나, 타라고나, 예이다 4개주 연합지역으로, 그동안 자치권을 행사하다가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에서 카를대공을 지지한 대가로 카스티야왕국에 완전히 합병되었습니다.

이런 배경과 함께 스페인에서 유일하게 산업혁명이 일어났을 정도로 가장 발전된 지역이어서 최근까지 중앙정부와 엊박자를 보이고 있습니다. 

 

카탈루냐는 희망이 없는데도 저항을 계속 이어갔다. 포풀리는 바르셀로나와 몬주익요새를 점령할 병력이 없었고 스페인이 네덜란드와 협상을 마무리하기 전까지는 펠리페와 루이 모두 프랑스군을 투입할 수 없었다.

카탈루냐는 이 기회를 이용해 방어선을 크게 보강했고 포풀리는 프랑스군 도움없이는 절대로 함락시킬 수 없다고 보고했다. 3개월을 기다린 끝에 네덜란드와의 협상이 끝났다.

1713622, 베르윅이 35,000명의 보병과 6,000기의 기병을 이끌고 헤로나에 도착했다. 타라고나Tarragona 부근에는 12,000명이 더 있었다. 바르셀로나에는 16,000명의 시민병과 4,000명의 외국자원병이 있었는데 동맹군이 떠날 때에 그대로 남은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병사였다. 베르윅은 항복하지 않는 카탈루냐에게 자비를 베풀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 반대로 바르셀로나도 절대로 스페인왕정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1714710, 카탈루냐연합은 왕정의 대사면을 거부하고 고대의 권리와 특권을 되찾겠다고 결의했다. 바르셀로나는 바다를 제외하고 봉쇄되었다. 카를을 지지하는 군도와 카탈루냐의 작은 상선단이 바다를 오가며 식량을 날랐다.

펠리페 5세는새로 부임한 영국대사에게 해안봉쇄를 부탁했다가 거절당했다. 대사는 카탈루냐와 계속 협상하라고 조언했지만 이번에는 펠리페가 거절했다.

베르윅은 후방을 괴롭히는 카탈루냐비정규군을 막아내며 공성진을 만들어갔다. 712일에 참호작업이 시작되자 수비대가 바로 반격했다. 2주 후부터 외곽방어선을 포격하기 시작했다. 산타 클라라Santa Clara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지만 함락시키지 못했다.

 

베르윅은 포격으로 방어선을 무너트린 후에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바르셀로나 수비대는 방어선에 7곳이나 구멍이 났는데도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베르윅은 외부의 구원희망도 없는데 무의미한 저항을 이어가는 시민병을 무척 안타까워했다.

1714911, 대대적인 공격이 시작되어 외곽방어진을 계속 함락시켰다. 바르셀로나수비대장 돈 안토니오 비야로엘Don Antonio Villaroel은 대사면을 조건으로 항복을 제안했지만 베르윅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항복을 받아들이고 대사면을 하기에는 너무 큰 피해를 입었다. 6,000명의 프랑스병사와 3,000명의 스페인병사가 죽거나 다쳤다.

베르윅은 도시를 약탈하지 않겠다는 조건을 내밀었고 수비대 거의 대부분이 사라진 바르셀로나는 이 조건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사실 카탈루냐는 반란죄를 적용시킬 수 없었다. 이들이 카를대공을 지지하고 무기를 들었을 때에는 펠리페 5세가 스페인왕으로 완전히 인정받기 전이었고 오히려 카를대공이 더 정통성이 있었다. 타라고나의 경우에는 동맹군함대의 포격을 받아 어쩔 수 없이 카를대공을 지지했다.

카탈루냐는 모든 권리를 잃고 몇 년 동안 군사재판을 받았다. 마지막까지 버티던 마호르카Majorca17156월에 함락되었다.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은 루이 14세의 야심과 달리 스페인제국은 영토가 분할되고 급격하게 몰락했고 프랑스도 유럽절대강국의 지위를 내주게 됩니다. 루이 14세가 부르봉왕가의 스페인왕위계승 정도로만 욕심을 줄였다면 세계역사는 크게 달라졌겠죠. 

영국이 세계역사를 쥐고 흔드는 계기가 됩니다. 


참고로 전쟁당시에는 아무런 주목을 못 받았던 동토의 왕국 러시아는 이후 동유럽을 좌지우지하는 절대강국으로 성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