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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스페인왕위계승전쟁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16부 - 펠리페 5세의 위기

by uesgi2003 2018. 5. 29.


한동안 많은 시간을 빼앗겼던 오디오 커뮤니티에서 발을 빼면서 제 온라인 서재정리 속도가 붙었습니다. 초보자들이 엄한 곳에서 시간과 예산을 낭비하지 않게 도와주고 싶지만 블로그마케팅 등의 업자 공격이 엄청나더군요. 

오디오 경력이 30년 넘다보니 한분에도 업자라는 것이 보입니다만, 굳이 나설 필요는 없겠죠.

제 온라인서재에서 정리하는 정도로도 충분하겠죠. 그리고 저도 읽고 정리해서 공유해야 할 자료가 줄지어있으니까요.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16부 - 펠리페 5세의 위기


수천 마리의 가축이 마구간 안에서 얼어 죽어서 엄청난 피해가 발생했다. 행군하던 병사들도 갑자기 쓰러졌고 누군가 도와주지 않으면 그대로 얼어 죽었다. 

프랑스는 마지막까지 몰렸다. 병사들은 급여는 물론이고 보급도 받지 못했고 북부지역은 점령당했고 농장과 곡식은 흉작이었고 국민은 중과세에 신음했고 이제는 혹한이 뒤덮었다. 



1708-1709년 겨울의 혹한은 유럽, 특히 프랑스를 심하게 덮쳤습니다. 프랑스는 그 여파로 1710년 말까지 60만 명이 굶어죽었다는군요. 운나쁘게도 이 무렵에 러시아원정에 나선 스웨덴군은 원래 추위에 강한데도 불구하고 하루에 무려 2,000명이 얼어죽었습니다. 

아래 그림은 이탈리아인데 추워죽는데 이상하다 싶죠? 호수가 얼어붙는 천재지변이 생겨 사람들이 얼음을 즐기는 장면입니다. 기록에 따르면 500년 만의 추위였습니다. 이래 저래 전쟁나면 국민만 괴롭습니다. 



스페인도 흉작에 이어 이례적인 폭우가 봄에 쏟아져서 스페인국민은 오래 전부터 굶주렸다. 펠리페 5세는 모든 항구를 개방해서 심지어 영국과 네덜란드선박까지 받아들이며 옥수수를 수입했다. 카탈루냐의 프랑스군은 지역 주민에게서 곡식을 징발해서 버텼기 때문에 농부가 반란을 일으켜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루이 14세는 동맹국과 종전협상을 모색할 수 밖에 없었다. 협상은 전쟁상황에 따라 조건과 분위기가 계속 바뀌고 있었지만 이제는 동맹군의 조건을 먼저 받아들일 차례였다. 동맹국은 참전한 이유와 목표 이상을 달성했지만 최근의 승전과 점령으로 요구조건을 계속 늘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스페인제국의 분할없이 펠리페 5세의 폐위와 카를대공의 즉위 정도가 요구조건이었다. 협상단은 이제 동맹국의 이익을 최대한 반영시키라는 지시를 받았다. 


안전한 응접실에서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최전선의 병사들은 피를 흘려가며 한발이라도 더 나아가려고 애쓰고 있었다. 1708년 11월, 프랑스군은 발렌시아항을 점령한 후에 알리칸테Alicante로 바로 진격했다. 

알리칸테의 존 리차드John Richards장군은 겨우 700명만으로 14,000명의 프랑스와 스페인군을 막아내고 있었다. 요새가 워낙 단단해서 포격만으로 무너트리지 못하자 땅굴을 파고 1,200개의 화약통을 묻었다. 

리차드가 거듭 항복권유를 거절하자 1709년 3월 3일에 땅굴을 터트렸다. 리차드와 50명의 병사가 즉사했지만 나머지 병사들이 계속 저항했고 4월 16일에는 빙Byng제독의 함대가 만으로 들어와 연합군을 포격했다. 

기상악화와 구원군이 보이지 않자 수비대는 5개월의 처절한 저항 끝에 항복했다. 연합군은 겨우 700명 밖에 안되는 수비대를 무너트리느라 귀중한 시간과 병력을 허비했다.


땅굴파기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성을 공략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 중 하나였습니다. 화약이 없던 시절에는 동물의 사체를 쌓아두고 메탄가스가 가득한 땅굴에 불을 질러 성벽을 무너트렸습니다. 


카를대공과 달리 펠리페 5세는 마드리드뿐만 아니라 스페인국민의 확고한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렇지만 루이 14세가 스페인전선의 병력을 빠르게 프랑스북부로 빼내고 있었다. 6월 초에는 스페인 전역의 병력을 모두 이동시킬 수 있다는 편지를 보냈다. 

펠리페는 어떤 상황이 되더라도 마지막까지 흔들리지 않겠다고 답변했고 루이는 손자의 결의를 칭찬하며 프랑스가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할 수 없기 때문에 어떤 대가를 치루더라도 종전해야 한다는 편지를 다시 보냈다. 교황 클레멘스Clement 6세는 교황령이 황제군에게 공격당하자 카를대공의 스페인왕위계승을 지지했다. 


골웨이는 15,000명을 이끌고 다시 한 번 포르투갈의 캄포 마요르Campo Mayor를 나와 전진했지만 1709년 5월 7일, 카야Caya강에서 바이Bay후작의 스페인군과 일전을 치뤘다가 참패당했다. 원래는 스페인군이 카야강 일대의 봄작물을 망치지 못하게 막으려고 했던 것인데 기병대가 보병지원없이 강을 건넜다가 무질서하게 퇴각했고 중앙의 영국과 카탈루냐보병은 고립되어 항복했다.

양쪽의 피해는 500명에 불과했지만 연합군은 900명이 포로가 되었고 야포 5문도 잃었다. 엘바스Elvas로 후퇴해 전열을 가다듬었는데 이상하게 바이는 더 이상 추격하지 않았다. 여름이 가까워 지면서 스페인전선은 소강상태가 되었다. 

후안왕은 헤이그Hague로 사절을 보내 협상장에서 포르투갈의 이익이 무시되지 않도록 신경썼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국경 일대에서는 비공식적인 휴전이 벌어져서 양쪽이 교역을 시작했다. 


루이 14세는 전략거점을 포기하고 손자가 2개월 안에 스페인왕위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2개 조항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동맹국은 심지어 펠리페 5세가 양위에 동의하지 않으면 프랑스군도 동맹군을 도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말버러가 지적했듯이 프랑스는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을 내걸었고 오히려 프랑스를 화나게 만들었다. 

루이 14세가 펠리페 5세를 상대로 참전하라는 동맹국의 조건은 말이 안되었다. 동맹군은 스페인전선에서 지리멸렬한 상태였고 루이 14세의 지원 없이는 펠리페 5세를 왕좌에서 몰아낼 수도 없었다. 

빌라르는 루이 14세에게 군대를 믿어도 좋다는 장담을 했고 새로 전쟁상에 임명된 부아쟁백작Comte de Voysin은 군대에게 전쟁을 계속할 탄약을 반드시 보급하겠다고 약속했다.


프랑스궁정은 당연히 이 조건을 거부했고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갔다. 나중에 동맹국은 루이 14세에게 두 조항을 반드시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설명했지만 냉담한 답변만 돌아왔다. 이제는 양쪽 모두 혈전을 벌일 차례였다. 

말버러와 외젠은 6월 27일에 투르네Tournai요새를 포위하고 빌라르원수를 서쪽으로 유인했다. 투르네는 또 다른 보방 스타일의 단단한 요새였고 상당히 유능한 지휘관이 방어하고 있었다. 수비대는 상당히 공격적이었고 연합군은 대포를 견인하는 데만 10일 넘게 걸렸고 겨울혹한으로 마초를 구하지 못했다. 

말버러가 영국의회에서 군자금을 받아내려면 반드시 투르네요새를 함락시켜야 했다. 


프랑스군은 8월 말에 루메르스하임Rummersheim에서 황제군을 깔끔하게 격파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던 사기를 끌어 올렸다. 전투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연합군이 프랑스북부의 요새방어선을 공격하는 동시에 동부를 협공한다는 계획이 가로막혔다. 

루이 14세는 이 소식에 매우 기뻐하며 빌라르에게 확실하지 않으면 전투를 벌이지 말라고 당부했다. 빌라르가 한 번만 패전해도 프랑스북부는 완전히 열리기 때문이었다. 

빌라르의 투르네를 최소한 4~5개월 동안 지켜낼 수 있다는 장담과 달리 연합군은 외곽방어선을 무너트리고 7월 말에 도시를 점령했다. 프랑스수비대는 성채로 들어가 계속 저항했다. 양측은 땅굴전투를 벌였는데 아무래도 연합군이 더 유리했다. 



위 사진은 릴요새입니다. 투르네도 천재설계가 보방이 공들여 구축한 요새입니다. 아래 그림은 투르네 방벽 중 일부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 그림부터는 공성전작업입니다. 워낙 성과 요새가 단단하기 때문에 엄청난 인력을 동원해 참호를 파며 접근해 포격이나 땅굴로 공략했습니다. 

참호가 바로 앞까지 접근해 대형구포(초기 박격포)를 설치하는 순간부터 성은 운명을 다합니다. 










9월 5일, 프랑스수비대는 땅굴폭파공격을 받은 후에 항복했다. 말버러는 다음 해의 공세를 위한 발판으로 몽스를 공격했다. 투르네가 항복하던 날, 헤센-카셀Hesse-Cassel공의 기병대가 몽스를 포위했다. 

루이 14세는 이전의 신중함을 버리고 빌라르에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몽스를 구원하라고 명령했다. 빌라르는 방어선에서 나와 말플라크Malplaquet마을 부근의 숲에서 말버러 외젠군과 격돌했다. 

빌라르는 1709년 9월 11일에 강력한 수비태세를 갖추고 연합군의 공격에 맞서다가 결국에는 물러났다. 야포 35문을 버리고 전장에서 밀려났지만 패배하지 않았다. 연합군은 약 20,000명을 잃었고 외젠이 총상을 입은 반면에 프랑스군은 13,000명 정도를 잃었다.

빌라르도 무릎에 중상을 입었고 후임인 부를레원수는 몽스를 구원할 수 없었다. 몽스는 10월 20일에 항복했다. 부플레는 연합군의 보급로를 위협해 몽스를 구원하려고 했지만 프랑스군은 굶주리고 급여를 받지 못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베르사이유는 이제 패전에 익숙해졌다. 



말플라크전황입니다. 위가 동맹군 아래가 프랑스군입니다. 아래 그림에서는 푸른색이 프랑스군, 붉은색이 동맹군(영국군)입니다. 숲에서 몰아내는 중입니다만 실제 전투 피해는 동맹군이 2배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펠리페 5세는 직접 군대를 이끌기 위해 스페인근위대와 함께 마드리드를 떠났다. 스페인전선의 프랑스군은 수비에만 전념했다. 펠리페 5세는 폐위당하느니 차라리 전장에서 죽겠다는 의지를 밝혔고 스페인병사는 그를 엘 아니모소El Animoso(용감한 자)라고 부르며 따랐다. 

루이 14세가 스페인전선에서 손을 뗄수록 펠리페 5세는 전장으로 다가가고 헤이그협상장에도 직접 개입해 동맹국의 구체적인 조건을 알고 싶어했다. 저지대국가의 스페인 재무상을 시켜 네덜란드에게 프랑스와 스페인의 요구조건이 다르며 스페인국민은 프랑스와 협력을 원하지 않는다고 알렸다. 


1710년의 스페인전선은 아라곤Aragon에서 시작되었다. 동맹군지휘관은 증원받고 새로 보급받은 병력이 있었다. 영국의회는 무려 110만 파운드의 엄청난 군자금을 스페인전선에 지원했다. 반면에 스페인은 프랑스의 원조를 거의 받지 못했다. 

알만사패전의 원인이었던 포르투갈기병도 이제는 당당한 전력을 갖췄다. 스탠호프는 발렌시아진격을 주장했지만 카를대공의 지지를 받는 슈타르헴베르크는 아라곤을 선택했다. 헤세-다름슈타트공 헨리는 슈타르헴베르크와 의견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진영을 이탈해 이탈리아로 떠났다. 그는 카탈루냐에서 인기가 높았고 최고의 야전지휘관이었기 때문에 연합군에게는 뼈아픈 손실이었다. 



위가 스페인군, 아래가 포르투갈군입니다. 



5월 초, 펠리페 5세는 비야다리아스Villadarias군과 합류했는데 기병전력은 상당한 반면에 보병전력은 취약했다. 스페인군은 세그레Segre강을 건너 발라귀에르Balaguier를 공격하려고 했지만 폭우가 쏟아져서 포기하고 후퇴했다. 

스탠호프와 슈타르헴베르크는 5월 말에 합류해서 레리다Lerida에서 다가오는 스페인군을 상대했다. 양측은 7월 27일 늦은 오후, 노게라Noguera강의 알메나라Almenara에서 격전을 벌였다. 동맹군은 과감한 기병돌격으로 스페인군에 큰 피해를 입히고 승리를 거뒀다. 

펠리페는 간신히 포로신세를 피했는데 카를대공도 현장에 있었기 때문에 스페인왕을 자임하는 두 왕이 서로의 얼굴을 볼 뻔 했다. 펠리페는 군대를 이끌고 레리다로 후퇴한 후에 바이후작을 불러 비야다리아스와 교체했다. 



펠리페는 칸다스노스Candasnos에서도 포로가 될 뻔 했는데 슈타르헴베르크는 이번에도 버려진 왕의 텐트에서 식사를 즐겼다. 스페인군은 사라고사Saragoss로 후퇴했고 그곳에서 바이가 합류했다. 

8월 20일에 또 한 차례의 전투가 벌어졌다. 이번에도 기병전술이 문제였다. 스페인기병은 피해를 무릅쓰고 동맹군을 밀어붙였는데 너무 멀리 추격하는 바람에 스탠호프가 중간을 차단했다. 그리고 구식전술을 고집했다. 스페인기병대는 적진 앞에 멈춰서 권총과 기병총을 뽑아 들고 사격하는 구식전술을 썼는데 동맹군기병대는 처음부터 칼을 뽑아 들고 돌격했다. 동맹군 용기병이 기록했듯이 부정확한 일제사격 후에 바로 반격을 받았고 미처 대응하지 못했다. 

스페인은 4,000명을 잃었고 6,000명이 포로가 되어 치명상을 입었다. 만약 스탠호프가 기세를 몰아 맹렬하게 추격했다면 스페인군은 궤멸했을 것이다.



그림은 영국내전 당시입니다. 기병사격은 보병의 밀집대형을 격파하는 전술이었습니다. 

대기병전에서는 아래 그림처럼 되면 좋을텐데, 흔들리는 말 위에서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적기병을 기다렸다가 사격해야 했기 때문에 역습에 당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당시의 권총손잡이는 백병전용 무기였습니다만 긴 칼이나 창에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동맹군은 카를대공을 앞세우고 사라고사에 입성했다. 펠리페는 알메나라보다 훨씬 심각한 피해를 입었고 아라곤 대부분은 동맹군이 장악했다. 이제 마드리드로 향하는 길이 열렸다. 방돔원수는 사령관에서 해임되었다가 펠리페의 간청으로 프랑스에서 급하게 달려가던 도중에 패전소식을 들었다. 만약 그가 있었다면 무참한 패배는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스탠호프는 마드리드로 직진하려고 했지만 카를대공은 속셈이 달랐다. 아내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만약 영국의 계획대로 된다면 모든 공은 그들 차지가 되오. 실패한다면 반대로 내 책임이 되겠지.’

슈타르헴베르크도 성급하게 진격하기 보다는 펠리페를 추격하자고 힘을 실었다. 방돔과 증원군이 합류하기 전에 펠리페를 다시 한 번 야전으로 끌어내 마지막 일격을 가하자는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무방비상태의 마드리드는 너무나도 매력적인 먹이였다. 펠리페는 스페인귀족을 이끌고 바야돌리드Valladolid로 피신했고 카를은 9월 28일에 마드리드에 입성했다. 마드리드시민의 반응은 여전히 차가웠다. 창문을 닫고 거리는 인적이 끊긴 반면에 펠리페는 피신처에서 열렬한 환영인파를 만났다. 

펠리페는 ‘영국인이 대공을 마드리드로 데려 가서 천만다행이다. 그는 내 국민의 반응을 직접 겪게 될 것이다’라고 기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