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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스페인왕위계승전쟁

해적이 바다를 지배하던 전성기

by uesgi2003 2022. 2. 7.

 

우리는 해적이라는 통칭을 사용하는데, 시대와 지역에 따라 용어가 달랐습니다. 부카니에(그림 참조)와 해적Pirates가 가장 혼란스러운데 이렇게 구분하면 됩니다. 

 

부카니에와 해적
어원
부카니에 – 스페인어 부카네로bucanero와 카리브해 부칸buccan에서 파생
해적 – 바다도적이라는 라틴어 피라타pirata에서 파생

 

정의
부카니에 - 17~18세기 카리브해 특유의 해적으로 지금은 소멸 
해적 - 상선이나 도시를 습격해 사람을 납치하고 재물을 약탈. 지금도 활동 중.

 

활동범위
부카니에 - 카리브해 스페인상선에 집중
해적 - 전세계 교역로가 대상

 

활동근거
부카니에 - 일부는 국가의 보호와 후원을 받는 애매모호한 근거
해적 - 전세계에서 비난하며 체포시에 중형처벌

 

 

근대해적 전문가인 레베카 사이먼Rebecca Simon박사가 해적이 대서양, 특히 카리브해Caribbean, 북미, 영국, 유럽과 아프리카 서부해안을 지배했던 시기를 설명한다.

 


해적 황금기는 크게 3개로 나눌 수 있다. 1670년대와 1680년대에는 카리브해 부카니에buccaneer, 주로 프랑스해적이 바다보다는 육지를 공격했다. 
1890년대에는 영국해적이 인도양을 장악했다. 헨리 에브리Henry Every와 캡틴 키드Captain Kidd와 같은 인물이 등장하는데 두 사람은 영국과 인도무굴제국의 교역을 방해했다. 
1713~1730년은 우리가 가장 흔하게 떠올리는 바로 그 시기였고 해적함대가 판을 쳤다. 검은수염Blackbeard, 찰스 베인Charles Vane, 잭 래컴Jack Rackham, 앤 보니Anne Bonny, 메리 레드Mary Read, 캡틴 호니골드Captain Hornigold처럼 악명높은 해적이 등장했다. 그리고 바하마 프로비덴시아섬 나사우Nassau에 해적공화국을 세웠다. 

 


1600년대 해적은 카리브해의 식민농장을 놓고 영국과 스페인이 계속 충돌하면서 생겨났다. 자메이카Jamaica가 분쟁의 중심지였는데 사탕수수재배로 서인도West Indies에서 가장 성공한 식민농장이었다. 
두 나라는 서로에게 모든 전력을 기울이느라 이전처럼 해적을 통제할 수 없게 되었다. 

스페인왕위계승전쟁Spanish Succession (1701–14)이 벌어지면서 두 나라는 해적을 고용해 사략선으로 동원했다. 사략선은 적의 상선공격을 공식적으로 허가받은 무장상선이었다. 해적은 노획한 전리품으로 부를 챙겼지만 전쟁이 끝나자 해고되었고 다시 해적행위로 돌아갔다.

 

루이 14세가 손자에게 스페인왕위를 물려주려고 하면서 벌어진 스페인왕위계승전쟁은 최초의 세계대전이라고 할 정도입니다.



해적 황금기 연대표: 공포의 세기
다음은 해적의 황금기로, 범죄자들이 횡재를 노려 바다를 지배했던 시기다.

1630년. 스페인상선을 습격하던 프랑스와 영국 부카니에가 카리브해 이스파니올라Hispaniola해안의 바위섬인 토르투가Tortuga에 본거지를 마련했다. 이후 해적과 밀수꾼의 천국이 되었다. 

 


1655년 5월. 영국과 스페인의 이권다툼으로 1654년에 벌어진 영-스전쟁 중 영국군이 자메이카를 점령했다. 자메이카 신임총독이 부카니에를 동원해서 스페인의 공격을 막고, 포트 로얄Port Royal에 기지를 만들었다. 

1660년. 영국에서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공화국 시대가 끝나고 찰스 2세가 즉위하면서 영-스전쟁이 끝났지만 평화조약이 체결되지 않아 카리브해에서는 충돌이 계속 일어났다. 

1662년. 웨일스출신Welsh 부카니에 헨리 모건Henry Morgan이 영국해군 크리스토퍼 밍스Christopher Mings함장을 따라 스페인령 쿠바수도 산티아고Santiago를 습격했다. 자메이카총독 윈저Windsor경이 이 습격을 후원해 스페인의 분노를 샀다. 

 

소수의 콩키스타도르가 중남미를 정복했던 시절과 달리, 스페인식민지는 너무나도 무기력하게 해적에게 무너졌습니다. 

1668년 7월 11일. 모건과 선원이 포르토벨로Portobelo(현재 파나마의 일부) 거주지를 점령했다. 금화와 은화 10만 페소를 받아냈고 의기양양하게 자메이카에 귀환했다. 모건의 악명이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1670년. 마드리드조약The Treaty of Madrid이 체결되었고, 영국은 카리브해의 해적을 소탕하기로 합의하고 스페인은 영국의 자메이카 점유를 인정했다. 

1674년. 찰스 2세가 헨리 모건에게 작위를 내리고 자메이카 부총독에 임명했다. 해적질로 본국 소환신세에서 영웅으로 승격되었다. 

1687년 12월 6일. 프랑스해적 입항기록에 따르면 해골과 뼈교차 깃발을 게양했다. 해적의 졸리 로저Jolly Roger 문양이 첫 번째 기록이다. 

1688년 8월 25일. 헨리 모건이 자메이카에서 죽었고 장례식에 참가하는 해적은 체포하지 않는다는 보장을 받았다. 

1692년 6월 7일. 지진으로 포트 로얄이 파괴되었고 영국의 교역거점이자 해적의 천국으로서의 위상을 되찾지 못했다. 

1695년 9월. 영국해적 헨리 에브리는 무굴황제소유로 60만 파운드(현재의 2000억 이상)의 보물을 실은 간지이사와이Ganj-i-Sawai를 노획해 역사상 최대액을 손에 넣었고 역사상 최초의 국제현상범이 되었지만 아무도 찾지 못했다. 

 


1701년 5월 23일. 스코틀랜드 사략인 윌리엄 키드William Kidd는 인도양 해적소탕임무 후에 해적으로 복귀했다가 런던에서 교수형당했다. 

1713년. 벤자민 호니골드, 헨리 제닝스, 찰스 베인과 에드워드 티치Edward Teach(검은 수염)가 바하마 프로비덴시아의 나사우에 해적공화국을 세웠다. 

 


스페인왕위계승전쟁에서 전쟁을 벌였던 영국, 프랑스, 스페인이 첫 번째 조약을 합의했다. 영국해군에서 해고된 수천 명의 선원이 해적이 되었다.

 

검은수염은 일부러 수염에 불을 붙여 무서운 모습을 보였습니다. 

 


1715년 7월 30일. 동전, 은화, 비단과 향신료를 운반하던 스페인 보물선단이 플로리다 인근에서 난파되었고 존 래컴, 찰스 베인과 검은수염 등이 약탈에 나섰다. 

1717년 9월 5일. 영국왕 조지 1세는 해적소탕령을 선포하며 이듬해 같은 날까지 자수하는 해적에게 관용을 약속했다. 

1718년 5월. 검은수염은 사우스 캐롤라이나South Carolina 찰스타운Charles Town항을 일주일 동안 봉쇄하며 의약품을 요구하고 지나는 배를 모두 약탈했다. 

1718년 9월 5일. 조지 1세는 검은수염과 호니골드를 포함한 해적 600명을 사면했다. 

1718년 11월 22일. 사면을 받은 검은수염은 바다로 돌아갔다가 노스 캐롤라이나 부근에서 영국해군과 해적사냥꾼에게 죽었다. 그의 머리는 해군전함의 선수에 전리품으로 꽂혔다. 

 


1718년 12월 12일. 호니골드는 해적사냥꾼으로 변신한 후에 해적함장 9명을 잡아 처형했고 나사우의 해적공화국도 막을 내렸다. 

1721년. 영국에서 해적법이 통과되었다. 영국해군은 해적소탕에 박차를 가했고 법원도 불법수화물운송에 중벌을 내렸다. 

1722년 3월. 서아프리카 케이프 코스트 캐슬Cape Coast Castle에서 바솔로뮤 로버츠Bartholomew Roberts의 선원 수십 명에 대해 400척 이상을 약탈한 혐의로 재판이 열렸다. 52명이 교수형 선고를 받았고 17명은 런던의 악명높은 마셜시Marshalsea교도소에 수감되었다. 이제 황금기는 완전히 끝났다. 

1724년 5월. 찰스 존슨Charles Johnson은 최악의 해적질과 살인에 대한 개략사A General History of the Robberies and Murders of the Most Notorious Pyrates를 출간했다. 신비에 가까운 해적의 실제를 알 수 있는 자료가 담겨 있다. 


1. 해적이 노리는 물품과 항로는?
해적은 다영한 지역의 항로를 노렸는데, 특히 바하마, 리워드제도Leeward Islands, 자메이카와 미국항구로 향하는 주요 항로가 대상이었다. 비단이나 향신료처럼 팔 수 있는 물품과 자체보급품이 약탈대상이었다. 럼주와 포르투갈의 마데이라Madeira 포도주도 더 없이 좋은 노획물이었다. 

2. 육지사람은 해적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해적과 육지와의 관계는 좀 복잡했다. 카리브해와 남미식민지 일부, 특히 1600년대에는 해적과 공존했다. 
농장식민지를 두고 영국과 스페인이 각축을 벌이면서 영국은 1650년대에 항해법을 통과시켜 스페인경제를 파괴하려고 했고 프랑스와 포르투갈도 여기에 동참했다. 영국은 스페인과의 교역을 금지시켰는데 식민지는 교역의 자유를 빼앗기고 생필품을 구하기 어려워졌다. 그래서 해적을 통해 불법으로 물품을 반입하고 판매했다. 

일부 해적은 그 지역사회에서 존경받는 계층이었다. 그들은 가족을 만들었거나 총독이나 다른 특권층의 후원을 받았다.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상황이 역전되었고 해적과 교역하거나 돕는 사람은 해적으로 간주되어 처벌을 받았다. 메릴랜드, 뉴저지, 델라웨어, 뉴욕과 뉴잉글랜드처럼 카리브해 북쪽의 대서양식민지는 상업중심이었고 해적은 상인에게 가장 위험한 존재였기 때문에 해적을 증오했다. 뉴잉글랜드는 바다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고 해적의 공격에 시달렸다. 

카리브와 남미식민지는 해적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해도 나머지 절대 다수는 해적을 두려워하고 꺼렸다. 해적은 인질을 일부러 풀어주어서 지역사회에 해적에 대한 공포를 심어주었다. 

가장 악명높은 해적으로는 검은수염이라고 부르는 에드워드 티치가 있었는데, 마치 지옥문에서 나온 것처럼 묘사되었다. 그는 일부러 긴 수염에 초나 심지를 대고 연기가 나게 만들어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꾸몄다. 
해적은 악명이 높을수록 상선을 습격할 때마다 쉽게 항복을 받아낼 수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공포를 즐겼다. 

3. 해적은 어떤 질병을 앓았을까?
그 당시 해적선은 다른 선박과 마찬가지로 비슷한 질병을 겪었다. 비타민 C가 부족해서 잇몸이 붓고 피가 나고 관절염을 앓다가 죽을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해적은 그래도 다른 선원보다 좀 더 건강했다고 한다. 상선을 약탈할 때마다 식료품을 채울 수 있어서 상대적으로 잘 먹었다.

그리고 해적은 섬이나 육지에 가깝게 항해했기 때문에 보급품을 쉽게 구할 수 있었다. 대양을 횡단하는 상선과 달리 항해시간이나 거리가 길지 않아서 건강문제가 심각하지 않았다. 

그리고grog라는 술을 마셔서 괴혈병을 치료했다. 그로그는 럼주, 물, 갈색설탕, 라임주스를 섞어 만들었는데 라임주스는 괴혈병에 반드시 필요한 비타민 C가 들어 있어서 치료제로 사용했다. 

카리브해에서는 말라리아가 흔했다. 해적은 언제부터인가 중남미와 카리브해 제도에 흔한 기나나무cinchona 껍질에서 만든 키니네quinine액을 마셔 말라리아를 치료했다.
그리고 당연히 전투에서 부상을 당했다. 상처감염이 흔해서 손발 절단도 흔했다. 

매독Syphilis도 흔한 질병이었다. 해적은 사창가를 즐겼고 신대륙식민지와 유럽에는 매독이 창궐했다. 실제로 검은수염은 매독에 걸려 심각한 자신과 선원의 약을 구하려고 1718년,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찰스턴항을 봉쇄했다고 한다. 

수은이 증상을 완화시키기 때문에 매독에 가장 흔하게 사용했다. 실제로는 병을 치료하지 않고 수은중독으로 더 심각해졌지만 일단 경련과 고통을 완화시키기 때문에 치료제로 사용했다. 해적은 매독, 괴혈병, 말라리아, 부상과 감염의 위험에 시달렸다. 

4. 소수민족은 어떤 대우를 받았을까?
해적선은 상당히 다국적과 다문화였다. 해적 황금기 시절 대서양의 해적 중 50% 정도가 영국이나 미대륙식민지 백인이었다. 나머지 50%는 다양한 지역출신이었다.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 서인도 해적이 있었고 드물게 동남아시아 해적도 있었다. 

아프리카흑인도 있었고 노예신세에서 탈출했거나 해방되었거나 해적이 노예선을 약탈한 후에 강제로 해적으로 만들기도 했다. 

해적선에서 소수민족이 어떤 대우를 받았는 지는 알 방법이 없다. 노예였던 흑인은 인종차별이거나 기술부족 때문에 아무래도 조리실과 같이 낮은 일을 맡았을 것이다. 

노예선에서 노획한 흑인은 학대를 받거나 다른 식민지에 다시 노예로 팔리기도 했다. 실제로 사람이 아닌 수화물 취급을 받았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해적은 노예거래를 하지 않았고 풀려난 노예는 선원으로 합류시켰다. 

검은수염은 노예 14명을 선원으로 받아들였다가 나중에 여러 명을 다시 노예로 팔았다. 그래서 해적마다, 해적선마다 상황이 달랐다. 

다른 선박에서는 유색인종의 승선을 절대로 허용하지 않았지만 해적선에서는 가능했기 때문에 해적선은 궁지에 몰린 사람들이 피할 수 있는 도피처였고 전투할 힘과 의지만 있다면 피부색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종교적 신념으로 박해를 받은 신자도 해적선에 승선할 수 있었다. 가톨릭이 가장 흔했지만 유대교인도 있었다. 그래서 해적선은 다문화였다. 

5. 해적 황금기는 언제부터 쇠락하기 시작했나? 
해적의 황금기는 1720년대 말에 저물기 시작했다. 역사가 마커스 레디커Marcus Rediker는 1726년, 윌리엄 플라이William Fly가 처형되면서 황금기가 끝났다고 주장했다. 그는 해적으로는 공개처형된 마지막 사례였다. 
그리고 스페인왕위계승전쟁 후에 해적을 대대적으로 소탕해서 1713년부터 10년 동안 4,000명이 처형당했다. 

1720년대 말까지, 벤자민 호니골드, 바솔로뮤 로버츠, 잭 래컴과 같이 이름이 널리 알려진 해적이 처형되거나 종적을 감췄다. 1718년, 사략인 출신의 우드스 로저스Woodes Rogers를 바하마총독으로 임명하면서 해적은 이전에 누렸던 정부의 후원을 모두 빼앗기고 쫓겨났다. 

오스트리아왕위계승전쟁War of the Austrian Succession (1740-48)과 젱킨스 귀전쟁War of Jenkins’ Ear (1739–48)으로 유럽국가들이 전쟁을 벌이면서, 해전을 벌일 능숙한 선원의 수요가 급증했다. 해적을 사략선으로 고용했고 위험한 해적으로 남아 있을 이유가 사라졌다.  

 

국운이 크게 기운 스페인에게 일부러 트집을 잡아서 말도 안되는 전쟁을 벌였고, 영국은 카리브해 일대를 완전히 장악하게 됩니다. 

 

영화 마스터 앤 커맨더는 나폴레옹시대로 본문보다 많이 멀기는 해도 사략선의 활동과 해군의 추적을 즐길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