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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기타

중세해전 이야기 (5부) - 시실리해상제국

by uesgi2003 2019. 5. 31.


1084년 늦여름이 되자, 로베르는 영지를 안정시켰다. 그는 칸나에의 노르만반란을 진압하고 로마에서 황제를 몰아낸 후에 다시 비잔틴제국을 노렸다. 120척의 함대를 모아 9월에 코르푸탈환에 나섰다.

노르만함대는 카시오피 앞바다에서 그리스-베네치아연합함대를 만났고 베네치아해군은 노르만갤리선을 상대로 전통적인 해상성채 진형을 만들었다. 노르만함대는 이번에도 손실을 입고 물러섰다.

베네치아군은 노르만함대가 더 이상의 작전을 중단하고 케르키라Kerkyra항구에서 겨울을 보낼 것으로 방심했지만 로베르는 정박한 베네치아함대를 기습해 노르만족 역사상 전무후무한 대승을 거뒀다. 


로베르는 북부 이피로스Epirus의 강에서 겨울숙영지를 만들었다가 홍역에 걸렸고 봄 원정에서 결국 쓰러졌다. 1085년 7월 17일, 로베르는 세상의 공포Terror Mundi라는 묘비 아래(사진 참조)에 뭍혔다. 

비잔틴제국은 위기에서 벗어났고 노르만족은 지중해 패권장악을 뒤로 미뤄야했다. 



형 로베르가 동쪽 원정에 나선 동안, 동생 로제Roger(로제 1세 또는 루제루 1세)는 시실리Sicily(시칠리아)공략에 주력했다. 시실리에는 라틴혈통이 극소수에 불과했기 때문에 로제는 병력보충에 시달렸고 시실리는 완전히 정복하는데 30년이나 걸렸다. 



시실리는 다양한 민족이 거쳐갔기 때문에 이 그림과 같이 무슬림, 그리스, 라틴인종이 혼재해 있었습니다. 이번 이야기 시대는 무슬림지배였기 때문에 무슬림과 그리스인 인구가 절대적이었습니다. 


로제는 1068년 초에 지리드Zirid-시실리연합군을 미실메리Misilmeri에서 격파하고 1072년에는 팔레르모를 함락시켰지만 해군력없이는 시실리를 정복할 수 없었다. 



973~1148 기간 동안 북아프리카 일부를 지배한 지리드 왕조의 영토입니다. 




전사에서 가장 빛나는 대승인 케라미Cerami전투(1063)입니다. 로제는 겨우 150명 정도의 기사로 최대 5만명으로 알려진 무슬림군을 격파했습니다. 물론 승자의 기록이라 굉장한 과장이 있습니다. 


1075년 무슬림은 150척의 선박으로 마자라Mazara를 습격했다. 로제가 급히 달려가 무슬림을 바다로 돌려보냈고 무슬림은 서쪽해안을 계속 위협했다. 로제는 1077년에 알렉산더대왕이 모은 함대 수준의 해군력을 모아 트라파니Trapani를 포위했다. 아들 요르단Jordan이 몇 척의 선박으로 도시의 생명줄이었던 보급로를 끊었다. 


로제는 1079년에 다시 함대를 투입해 타오르미나Taormina를 포위했고 굶주린 시민이 항복했다. 영주는 로제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무슬림전함 14척도 노르만함대에 귀순했다. 

시라쿠스Syracuse에미르Emir 이븐 엘 웨르드Ibn el-Werd는 1083년에 로제의 본거지 근처를 습격해 수도원과 수녀원을 약탈했다. 로제는 1085년, 함대전체를 동원해 시라쿠스항구로 쳐들어갔고 직접 이븐 엘 웨르드의 기함과 맞붙었다. 

웨르드는 중상을 입고 바다에 떨어졌고 사기를 잃은 시라쿠스가 바로 항복했다. 1091년, 시실리의 마지막 무슬림요새가 항복하면서 로제는 위대한 백작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마디아Mahdiyah의 지리드함대 정도가 걸림돌이었지만 1087년에 제노바와 피사함대가 처리해주었다. 로제도 참전을 권유받았지만 이전에 맺었던 평화협정을 이유로 들어 거부했다.

그는 1091년 시실리 남동쪽에 함대를 모아 손쉽게 말타Malta의 항복을 받아냈다. 상륙 후에 벌인 소규모 기병전초전이 전투의 전부였다. 로제는 기독교포로를 구출하고 시실리에 데려갔다. 노르만족은 이탈리아 남부와 시실리를 완전히 정복했다. 



팔레르모를 넘겨 받는 로제 1세입니다. 


실제로 중앙 지중해를 장악한 것은 아들 로제 2세(루제루 2세. 그림참조)부터였다. 그는 시실리를 중심으로 해양제국을 건설했고 독일황제와 비잔틴제국의 반격을 물리쳤다. 



시실리는 중앙 지중해의 핵심이었다. 시실리의 북동쪽 구석에 있는 메시나Messina해협은 이탈리아 본토에서 불과 3km 거리였고 남서쪽 끝의 시실리 해협은 튀니지 걒봉Cape Bon에서 150km 떨어져있었다. 

로제는 이탈리아 남부와 북아프리카 마그레브Maghreb해안을 장악하면 중앙 지중해를 지배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든 선박은 그의 제국의 항구나 해안을 들려 비용을 지불할 수 밖에 없었고 시실리는 초대형 톨게이트인 셈이었다. 메시나의 라틴상인은 제노바와 피사를 아크레와 알렉산드리아까지 연결하는 교역로를 열었다. 무슬림은 전세계의 모든 선박이 몰린다고 기록했다. 


신성로마와 비잔틴황제는 해군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제노바, 피사, 베니스와 같은 이탈리아 해양국가와 동맹을 맺어야했다. 당연히 로제는 도시국가와 반 노르만세력의 분열을 시도했다. 자신에게 우호적인 도시국가는 동쪽이나 아프리카 해안 교역로를 유리한 조건으로 이용할 수 있었다. 

로제는 해군력이 더 필요했고 안티오크(안티오키아)의 게오르그George of Antioch에게 팔레르모와 메시나를 주축으로 함대를 보강하라고 지시했다. 게오르그의 직함은 아라비아어 에미르를 라틴어로 옮긴 아미르투스Amirtus였고 당시에는 관료직함이었지만 나중에 함대사령관으로도 활약하면서 현대의 제독Admiral이라는 말이 되었다. 



성모 마리아 앞의 게오르그입니다. 


로제는 아미르투스가 함대를 건조할 수 있도록 나무, 송진과 철을 왕실이 독점했고  주력전함 갈레아Galea선을 건조했다. 갈레아는 비잔틴 드로몬의 이탈리아버전으로 앉아서 2단 이상의 노를 젖는 대신에 시실리 갈레아는 주 갑판의 벤치에 두 사람씩 배치해 서있다가 앉는Stand and Sit 방식을 사용했다. 

더 큰 추진력으로 속도와 선적부하가 높아져서 원양항해와 작전에 효과적이었다. 제보나, 피사와 베니스 등도 시실리 갈레아를 채택했다. 


로제는 6살이던 1101년에 아버지가 죽었기 때문에 어머니 아델라이드 델 바스토Adelaide del Vasto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녀는 1105년에 장손 시몬Simon이 죽자 바로 성채에 있던 가재도구를 시실로 옮겨 로제가 섬생활을 익히게 했다. 

덕분에 로제는 노르만귀족의 간섭에서 벗어나 시실리의 실질적인 주민인 그리스와 무슬림의 생각과 문화를 몸에 익혔다. 로제의 첫 번째 아미라투스는 그리스인으로 비잔틴제국과 북아프리카 모두에서 유명한 사람이었다. 로제는 아마도 그에게서 그리스어와 아랍어를 배운 것으로 보인다. 

1108년에 로제의 궁정에 합류해 가장 큰 힘이 되었던 안티오크의 게오르그는 그리스인이었지만 마디야 타밈에서 재무상을 지낼 정도로 아랍어에 능숙했다. 그는 무슬림 북아프리카에 대한 귀중한 정보원이었다. 



아델라이드 델 바스토는 시실리의 첫번째 여성 지도자였습니다. 


겨우 4년 만에 로제는 첫 번째 남쪽원정에 나섰다. 가베스Gabes(지도참조)총독 라피 이븐 마칸Rafi ibn Makkan이 마디야에 빈기를 들자 24척의 함대를 보냈다. 마디야에미르 아부 알 하산 알리Abu al-Hasan Ali는 바로 함대를 보내 시실리함대를 쫓아내서 원정은 아무런 성과없이 끝났다. 

로제는 단념하지 않았다. 1123년, 300척에 3만 명과 군마 1,000기를 태워 다시 공격에 나섰지만 이번에는 훨씬 심한 실패로 끝났다. 일등대신 크리스토도울로스Christodoulos와 게오르크는 기본적인 군사원칙도 지키지 않았다. 도시 16km 북쪽의 황무지에서 야영하면서 경계를 게을리 했다. 

무슬림군이 기습하자 공포에 질린 병사는 마구 배로 달아났고 모든 보급품, 군마와 낙오병은 적의 손에 떨어졌다. 



이번에는 아프리카원정을 단념할 수 밖에 없었다. 1127년, 말타를 완전히 장악하자마자 조카이자 아퓰리아공작인 윌리암이 죽었다는 보고를 받았다. 로제는 자신이 아퓰리아를 합병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7척을 이끌고 살레르노로 갔다. 

살레르노시민은 어쩔 수 없이 그를 영주로 받아들였고 베네벤토, 아말피, 캄파니아, 트로이아, 멜피와 아퓰리아 대부분도 그 뒤를 따랐고 로제는 공작이 되었다. 

교황 호노리오Honorius 2세는 아버지 로베르가 교황에게 복종했다며 로제를 인정하지 않았고 카이아초Caiazzo의 라눌프Ranulf와 카푸아의 로베르 2세를 부추겨 반기를 들게 했다. 


로제는 영지를 진정시키는데 10년이 걸렸다. 적이 연합해 공격해오면 시실리로 물러나 병력을 모으고 적의 연합전선이 붕괴하기를 기다렸다. 무슬림병사를 배에 태워 해협을 건너 영지를 회복했다. 

로제가 60척의 전함으로 바리를 봉쇄해 내부반란을 모두 진압하자 결국 호노리오 2세는 1128년 8월 22일에 로제를 아퓰리아공작으로 인정했다. 

로제는 교황궁정의 후원이 필요했고 1130년에 호노리오 2세가 죽자 아나클레토Anacletus를 교황후보로 지지하면서 시실리왕을 인정해달라고 요구했다. 경쟁후보 인노첸시오Innocent 2세는 영향력이 높은 베르나르 드 클레보르Bernard of Clairvaux의 지지를 받아 유럽군주의 지지까지 끌어냈다. 

아나클레토는 로제의 요구를 들어줄 수 밖에 없었고 로제를 시실리, 칼라브리아와 아풀리아의 왕으로 인정했다. 인노첸시오를 지지했던 신성로마제국 로타리우스Lothair 3세는 로제의 즉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로제가문과 2대에 걸쳐 전쟁을 벌였던 이노첸시오 2세입니다 로제 3세에게 포로가 되는 수모를 겪기도 했습니다. 


로제는 제국의 공격을 예상하고 영지를 지킬 방법을 찾아야했다. 항구도시 캄파니아Campania가 가장 취약하다고 판단하고 게오르그에게 함대를 주어 아말피로 보냈다. 게오르그는 아말피를 봉쇄해 항복을 받아내고 카프리, 트리벤토, 라벨로 등도 합병했다.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터졌다. 사촌인 카이아초의 라눌프가 카푸아의 로베르와 결탁한 후에 나폴리의 세르기우스Sergius와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로제는 바리와 브린디시를 함락시켰지만 노체라Nocera에서 라눌프에게 패배했다. 시실리로 퇴각해 병력을 모아 1133년에 60척의 함대로 아풀리아를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나폴리, 카푸아와 베네벤토 정도가 저항하다가 로제가 1134년에 나폴리를 봉쇄하자 성문을 열었다. 

카푸아의 로베르가 피사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로제게 이미 피사의 경쟁도시인 제노바를 동원해 피사를 위협했기 때문에 아무도 응답하지 않았다. 



당시 이탈리아의 복잡한 상황입니다. 로마제국으로 세계역사를 열었던 이탈리아는 1871년에야 완전독립을 합니다. 


잠시 숨을 죽인 캄파니아영주들은 로제가 중병에 쓰러지자 다시 반란을 모색했다. 앞의 세 사람은 피사까지 끌어들여 20척의 갤리함대와 8,000명의 병력을 모았다. 건강을 회복한 로제는 병력을 모아 60척으로 나폴리를 봉쇄했다. 피사는 26척의 전함을 더 투입해 로제에게 충성한 아말피를 공격해서 이중전선을 만들려고 했다. 아말피함대는 나폴리봉쇄에 투입되었기 때문에 도시가 무방비상태였다. 

피사함대는 잔인하게 경쟁도시를 약탈했다. 피사가 부근의 프라타Fratta를 약탈하자 로제는 병력을 이끌고 강행군해서 피사군 1,500명을 죽이며 궤멸시켰다. 남은 피사군은 바로 퇴각했고 해군력을 상실한 반란군은 왕의 자비를 바랄 뿐이었다. 


1136년, 이노첸시오 2세가 로타리우스에게 도움을 요청하면서 상황이 반전되었다. 신성로마제국황제는 아드리아해안을 따라 진군하며 트라니에서 33척, 브린디시에서 25척의 시실리선박을 노획했다. 

황제군은 바리를 4주간 공략한 끝에 함락시켰고 피사함대 100척이 다시 아말피를 공격했다. 7월에 황제군과 피사함대가 연합해 살레르노를 포위했다. 전력이 크게 모자란 로제는 현명하게 시실리로 물러나 적의 연합전선이 무너지기를 기다렸다. 황제군, 교황군, 이익만 노리는 피사군, 노르만 반란군은 하나로 유지될 수 없었다. 

황제군은 소렌토의 항복을 받아내 피사함대는 아무 것도 손에 넣지 못했고 로제에게 교역승인을 조건으로 협상을 제안했다. 피사의 해군력이 사라지자 이번에는 황제군과 교황군 사이에 균열이 생겼다. 


로타리우스는 귀국하던 중에 병에 걸려 죽었다. 라눌프가 아풀리아 리그나노Rignano에서 로제군에게 승리를 거뒀지만 1139년에 갑자기 죽어 이노첸시오 2세 혼자만 남았다. 로제는 교황을 궁지로 몰아넣고 왕권을 인정받았다. 

로제는 바리의 항복을 받아내 본토의 문제거리를 모두 제거했다. 이제 다시 지중해로 전력을 돌릴 차례가 되었다. 

그는 본토의 반란과 위기를 수습하는 동안에도 마그레브해안공략을 포기하지 않았다 1135년, 게오르그를 보내 악명높은 해적소굴 제르바Jerba섬을 점령했었다. 


1139년, 위대한 무슬림 지리학자 알이드리시al-Idrisi에게 세계전도를 만들게 했다. 로제는 시실리가 얼마나 중요한 전략요충지인 지를 깨달았다 그는 이미 이탈리아남부를 장악했기 때문에 북아프리카해안만 장악하면 단 한 척의 배도 그의 허락없이는 동서를 오갈 수 없었다 게오르그도 영주들에게서 걷은 세금을 이 목표를 위해 쏟아 부었다. 

1142년, 로제는 게오르그와 25척의 전함을 남쪽으로 보냈고 이듬해에는 겨우 300명의 기사를 보내 트리폴리Tripoli를 공격했다가 실패했다. 1144년에는 알제리Algeria의 해안을 점령하고 이듬해에 튀니지해안까지 진출했다. 

1146년, 게오르그는 200척의 함대로 트리폴리를 손쉽게 함락시켰다. 


트리폴리부터 튀니지까지 남은 지역이 도미노처럼 무너졌다. 1148년 초에 무슬림군이 가베스Gabes를 공격해 로제에게 영지를 바친 총독을 죽였지만 6월 22일에 게오르그의 250척 함대가 나타나자 무슬림군은 도시를 버리고 달아났다. 

수사Susa와 스팍스Sfax가 항복해 시실리해군은 지중해 중앙을 완전히 지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