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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2차대전

정비장교가 본 셔먼 VS 판터 (2부)

by uesgi2003 2020. 5. 29.

다양한 시각과 주장 중 일부에 불과합니다. 당연히 오류나 편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 생활에 아무런 도움이 안되는 잡상식이기 때문에 재미로만 즐기시기 바랍니다. 

 

벨톤 쿠퍼는 포병 ROTC였다가 원래 전함설계와 제조를 위해 해군으로 이동하고 싶었지만 거부되고 3기갑사단 정비장교로 배치되었습니다. 1944년 노르망디상륙부터 1945년 독일패전까지 최전선에서 복무했고 미군전차의 회수, 수리와 유지보수를 맡았습니다.

최전선에서 격파된 셔먼전차를 직접 조사했기 때문에 아군의 피해에 대해 상당히 민감하게 받아들였고 독일전차에 대해 과장한 면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기술적이고 객관적인, 당시 최전선을 달린 정비장교의 시각으로 2차대전 전차전을 볼 수 있는 귀한 자료입니다. 

 

 

M4 셔먼전차의 참담한 열세

그 당시에 온갖 피해를 입은 전차가 대거 전차회수지점VCP에 들어왔다. 생장드데Saint Jean de Daye-생뢰Saint-Lo 고속도로에서 회수한 전차들은 대부분 전차와 대전차포에 파손된 반면, 아리엘-퐁 에베흐Airel-Pont Herbert 고속도로에서 회수한 것들은 대부분 판처파우스트Panzerfaust에게 당했다. 독일 판처파우스트는, 우리가 측면 탄약상자와 운전석에 보강장갑을 추가했어도 아무런 문제없이 전차를 관통할 수 있었다. 판처파우스트는 우리 바주카Bazooka보다 확실하게 더 강력했다. 
내부에 시신이 그대로 있는 전차와 기갑차량이 들어오면서 전쟁의 참상을 직접 목격하기 시작했다. 전차병이 관통충격을 그대로 뒤집어쓰면, 특히 머리가 터져서 피, 골수, 살조각이 내부전체로 튀었다. 끔찍한 장면이었다. 
정비병은 안으로 들어가 시신조각을 치워야 했다. 시신조각을 최대한 모아서 전사처리병에게 넘겨주었다. 강한 세척제, 소독약, 물로 내부를 씻고 소독한 후에 본격적인 수리작업을 시작했다. 
전차가 관통되면 파편조각이 전선을 끊어 놓았다. 전선을 철판으로 보호했지만 파편에 끊어지며 화재가 발생했다. 전차병이 탈출하기 전에 소화스위치를 잡아당기면 불이 꺼지고 내부는 일부만 불탔다. 그렇지 않으면 전차는 전소되었고 엄청난 열 때문에 장갑이 녹아서 수리할 여지가 없었다. 
수리를 마치면 내부를 새로 도색했다. 그래도 죽음의 흔적이 스며 나오곤 했다. 새 전차병은 아군이 죽은 전차는 불길하다며 피하려고 했다. 

 

복장과 무장이 뭔가 이상하죠? 핀란드군이 1944년 6~7월에 러시아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이 정도로 판처파우스트가 흔한 무기였습니다. 

전차손실이 급증하자 우리 기갑군이 커다란 함정에 빠졌고 우리 정비병도 그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었다. 1939년 에버딘 프루빙 그라운드Aberdeen Proving Ground에서 여름을 보내는 동안, 전차연구개발비가 고작 85,000달러였다. 고립주의를 선택한 의회는 육군의 기술발전, 특히 기갑군의 발전가능성을 완전히 없애 버렸다.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엔지니어는 새 아이디어가 떠올라도 예산한계때문에 바로 좌절했다. 
월터 크리스티J. Walter Christy라는 뛰어난 전차설계자는 30년대 초에 완전히 새로운 차체와 서스펜션 설계를 만들어냈다. 트랙을 지지하는 보기 휠Bogey Wheel에 토션 바 서스펜션(그림 참조)을 장착한 천재적인 아이디어였다. 이 서스펜션체계는 굴절범위가 넓어서 M4의 헬리코일Helicoil체계에 비해 거친 지형에서도 훨씬 쉽게 주행할 수 있었다. 
그리고 트랙을 빠르게 벗겨내서 고속도로에서는 마치 자동차처럼 최대시속 72km로 달릴 수 있었다. 그 당시에는 매우 혁신적인 설계였는데 고지식한 상관 때문에 에버딘의 엔지니어는 그런 시도를 할 수 없었다. 
미군이 관심을 보이지 않자 크리스티는 러시아로 갔고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독일전차도 크리스티 서스펜션을 많이 활용했다. 크리스티체계는 굴절범위가 넓을 뿐만 아니라 보기 휠을 겹쳐서 더 넓은 트랙을 사용할 수 있었다. 덕분에 독일전차는 미국전차보다 험한 지형을 더 쉽게 이동할 수 있었다. 여러 전투에서 이런 단점 때문에 참담한 피해를 입었다. 전쟁이 거의 끝나갈 때가 되어서야 우리의 실수를 깨닫고 신형 M24와 M26에 크리스티 서스펜션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1936년에 크리스티 서스펜션을 테스트 중인 러시아군 전차입니다. 

이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M4는 북유럽에서 만날 독일전차와 비교하면 좋은 전차라고 말했다. 미국과 영국에서 독일전차, 주로 4호전차PzKw IV에 대해 다양한 평가를 했다. 4호전차 원형은 M4의 75mm M2 주포와 비슷한 단포신 주포를 장착했다. 포속은 초당 457m였다. 그 후에 75mm KwK41로 교체했고 찬속은 초당 914m로 훨씬 빨라졌다. 
4호전차는 M4의 37.5톤에 비해 겨우 22톤 밖에 안되었고 차체가 작고 낮았다. 전면장갑은 4인치 직각이었고 M4에 비해 트랙이 더 넓어서 부드러운 지형을 더 쉽게 이동할 수 있었다. 우리도 초속 807m의 장포신 76mm를 장착한 M4A1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포탄의 관통능력을 비교하면 4호전차가 M4A1을 능가했다.  
독일 PzKw V 판터Panther는 우리를 압도했다. 52톤의 무게, 38도 경사의 3.5인치 전면장갑, 초속 1,006m의 더 강력한 75mm KwK42 주포로 무장했다. 우리 전차가 어느 정도는 독일전차와 비슷하다고 믿었던 생각은 착각이었다. 우리의 어떤 전차보다도 훨씬 우수한 독일전차를 상대로 싸우고 있었다. 미국의 많은 젊은이가 전장에서 죽어갔다. 

 

 

M4 전차의 공격력이 상대적으로 너무 약했기 때문에 전폭기용 튤립Tulip 로켓을 양옆에 달거나 아예 영국군 장포신 17파운더 포를 달기도 했습니다. 파이어플라이Firefly라고 불렀는데 판터와 타이거를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했기 때문에 독일전차는 파이어플라이부터 공격했습니다. 

 


지휘부의 오판으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1944년 1월 영국에 도착한 아이젠하워Eisenhower장군은 일부 사단장과 참모들에게 유럽전선 기갑장비의 주 정비창인 티드워스 다운스Tidworth Downs를 방문해서 최신 장비를 확인하라고 명령했다. 
미국, 영국과 캐나다 장성과 고급장교가 대거 참석했다. 3기갑사단의 정비대대는 바까운 코드포드 세인트 메리Codford Saint Marydp 주둔 중이었다. 전시장비의 정비지원을 위해 파견갔던 사람들이 겪은 일을 우리에게 말해주었다. 내가 50년 후에 티드워스 다운스를 방문했을 때에 목격담 외에는 어떤 기록도 남아있지 않았다. 
가장 먼저 소화기, 기관총, 박격포 등의 보병무기가 선을 보였다. 1차대전의 유물인 독일 마우저Mauser에 비해 M1 개런드Garand소총이 훨씬 인상적이었다. 반대로 우리의 1차대전 유물인 30구경 기관총은 독일기관총에 비해 발사속도가 너무 느렸다. 
그렇지만 독일군은 우리의 50구경 기관총이 없었다. 60mm와 81mm 박격포는 독일군과 비슷한 것으로 평가되었고 4.2인치 박격포는 백색연막탄을 쏘기에 우수한 무기였다. 

다음으로 대포가 평가되었다. 사거리가 안나와서 실제 발사는 없었지만 포 방열과 같은 다양한 요소를 비교 평가했다. 105mm, 155mm, 8인치, 240mm 곡사포는 최신설계에 고속이동을 위한 타이어를 장착하고 있어서 완전히 기계화되어 있었다. 독일군은 여전히 군마견인 포대를 사용하고 있어서 독일군에 비해 최소한 동등 또는 우수했다. 
마지막으로 기갑무기체계 차례였다. 먼저 자주포 M7이 등장했다. M3 전차를 개수해 105mm 곡사포와 50구경 기관총을 장착했고 우수한 무기로 평가받았다. 1차대전 유물인 155mm를 장착한 M12 자주포는 신형 155mm 롱톰Long Tom에 비해 포속이 낮았지만 매우 효과적이었다. M12 자주포를 갖춘 991야전포대대는 종전까지 3기갑사단에 편제되었다. 
다음으로 대전차포였다. 이제는 무용지물인 소형 37mm 대전차포는 57mm로 교체중이었지만 여전히 독일 PAK41에 비해 열세였다. 90mm 대전차포는 원래 대공포로 개발되었지만 수평으로 낮춰서 대전차포로 사용할 수 있었다. 독일 88mm와 비슷했다. 88mm보다 포속이 느려서 상대는 되지 못했다. 

 

4,200대 이상이 생산된 M7 프리스트Priest 자주포입니다. 이탈리아 전선의 모습입니다. 

전차 차례였다. M5 경전차가 먼저 등장했다. 45경사의 1.5인치 전면과 1인치 측면장갑, 37mm 주포, 30구경과 50구경 기관총을 장착했다. 캐딜락Cadlilac 엔진 2개로 꽤 괜찮은 기동력을 보였다. M5는 우수한 경전차였지만 독일전차와 교전을 벌이기에는 너무 가벼워서 도움이 되지 않았다. 
M24(그림 참조)로 교체되고 있었는데 유럽중부로 전선이 넓어진 후에야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실물은 없고 영상으로 평가되었다. M24는 M5와 독일 4호전차 중간크기이지만 트랙이 더 넓고 미국전차로는 최초로 크리스티 서스펜션을 장착했다. M5보다는 장갑이 두텁고 75mm 주포였지만 포속이 너무 느려서 독일전차에는 상대가 안되었다. 
주력전차 M4는 30구경 기관총을 주포 옆 동축과 보조석 전면에 장착했다. 50구경은 포탑 위 링마운트에 장착했다. (포속과 장갑두께는 이전 설명과 동일해서 생략합니다.) 좁은 트랙은 2.54제곱 cm 당 3.2kg여서 남성의 도보압력과 거의 같았다. 이론상으로는 남성이 부드러운 지면을 걸을 수 있다면 M4도 이동할 수 있었다. 
M4A1 차례가 되었다. M4 기반으로 거의 같았고 개량형 고속 76mm를 장착하기 위해 포탑이 달랐다. 화력이 크게 강화되었어도 독일 KwK41에는 못 미쳤다. 노르망디 상륙 당시, 전차 중 10~15%가 76mm를 장착했다. 
북아프리카의 경험으로 볼 때, M4와 M4A1 모두 방어력이 심각하게 부족했다. (이후 보강장갑 작업은 전편에서 설명했기 때문에 생략합니다.) 이후 미국에서 생산된 모든 전차는 보강작업을 마친 후에 영국으로 수송되었다. 

 



M26 퍼싱Pershing은 막 개발되어서 생산직전이었기 때문에 영상으로 대체했다. 신형전차는 철저하게 테스트되었고 정비와 기갑군 모두의 승인을 받았다. 최고사령부의 승인이 떨어지면 디트로이트Detroit에서 대량생산에 들어갈 준비가 되었다. 워낙 중요한 프로젝트였기 때문에 고위층이 승인하면 전쟁물자생산위원회가 최우선으로 생산해서 노르망디상륙에 투입할 수 있었다. 
M26은 구형차체를 개수하지 않았고 모든 것을 새로 설계했기 때문에 이전의 이전의 약점이 없는 완전히 새로운 신형전차였다. 47.5톤의 무게에 45도 경사의 4인치 전면장갑, 2인치의 측면장갑, 6인치의 포탑장갑을 장착했다. 30구경 동축기관총과 50구경 링마운트 기관총, 초속 868m의 90mm M3 주포, 머즐 브레이크, 특수 반동흡수 장치를 갖췄다. 
이중 보기 휠, 넓은 트랙과 신형 크리스티 토션 바를 장착해 구형 M4에 비해 지압이 절반 밖에 안되었고 험지주행은 독일전차와 비슷했다. 
M4가 톤당 10마력이었던 반면에 M26은 톤당 12마력으로 가파른 경사로와 험지에서 훨씬 빨랐다. 트랙이 더 길어서 M4보다 더 넓은 참호를 통과할 수 있었다. 모든 면에서 M4보다 훨씬 우수했고 포속이 독일 판터나 킹타이거보다 많이 느렸지만 당시 우리가 가장 최고의 전차였다. 

 

M26 퍼싱은 1945년 2말에야 전선에 투입되어 독일전차와 소규모 전차전을 벌였습니다. 대신 한국전쟁에서 북한군 T-34/85를 상대로 무적에 가까운 전과를 올렸습니다.  

북아프리카에서 독일전차를 직접 경험했던 일선 지휘관은 M26을 열렬히 환영했다. 시실리에서 2기갑사단 CCA를 지휘했고 처음으로 타이거와 전투를 벌인 여단장 모리스 로즈Maurice Rose는 최대한 빨리 M26을 보급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그렇지만 북아프리카와 시실리에서 미군을 지휘했고 유럽전선 최고위 기갑지휘관인 조지 패튼George Patton은 M26에 대해 반가워하지 않았다. 그는 기갑사단의 전차로 다른 전차를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한 우회해서 목표물을 배후에서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인용한 교리에 따르면 전차부대를 둘로 나눠야 했다. 중전차의 GHQ(본부)전차대대는 보병사단과 함께 요새화된 적진을 돌파하고, 기갑사단은 전선 후방으로 깊숙이 침투해서 적의 포대를 파괴하고 예비대와 보급로를 교란시키는 역할이었다. 
패튼은 M4전차가 더 가볍고 연료도 적게 사용하기 때문에 기갑사단임무를 수행하기에 더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M4가 더 가볍고 연료를 적게 사용한다는 주장은 맞지만 M26이 더 높은 출력으로 기동력이 훨씬 더 좋고 화력과 장갑이 더 강력하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그는 GHQ전차대대가 적진돌파를 할 수 있다고 믿지 않았다. GHQ전차대대는 단 한번도 중전차로 임무를 수행해본 적이 없고 보병사단과 전차대대가 협동작전을 연습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럴 만했다. 
패튼은 강인하고 고집이 엄청났기 때문에 설득하기 너무 힘들었다. 그는 직업군인으로 빛나는 전적을 쌓았다. 1차대전에서는 미군전차군단을 지휘했는데 경전차를 타고 전투를 지휘했다고 한다. 나중에 2기갑사단을 맡아 최고의 부대로 만들었다. 그를 따르는 장교들은 교주처럼 추종했다. 
3기갑사단은 2기갑사단 장교가 대거 합류했고 패튼과 함께 복무했던 장교는 그와 같은 신념과 열정을 보였다. 패튼은 북아프리카와 시실리에 참전한 최고위 기갑지휘관이었다. 

로즈와 다른 일선지휘관은 패튼의 의견과 달랐다. 카셀린협곡Kasserine Pass과 시실리에서 우수한 독일전차에 고전했고 중전차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패튼은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M26의 우선순위를 낮추고 M4 생산에 집중해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패턴의 계급과 권위가 경험많은 일선 지휘관의 반대를 눌렀고 패튼의 주장대로 결정되었다. 연합군최고사령부는 즉시 M26중전차의 생산을 미루고 M4전차의 증산을 요구했다. 2차대전 최악의 결정 중 하나였다. 이 결정으로 서유럽전투는 끔찍한 결과를 가져왔다. 

 

튀니지에 투입된 타이거 전차 6대가 미 1기갑사단의 전차 20대를 가볍게 격파해서 미군전차병 사이에 타이거 공포증이라는 말이 생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