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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2차대전

독일조종사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회고

by uesgi2003 2020. 1. 10.


2차대전 종전 후 얼마 지나지 않은 1950년대의 회고기록이기 때문에 지금의 시각과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2차대전 발발 원인 그리고 사상에 대한 개념도 혼란스럽고 주장 중 일부는 상당한 편견에 사로 잡혀 있습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독일군 조종사의 회고기록 정도로만 참조하시면 됩니다. 용어도 독일군 시각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어서 어떻게 통일시킬 지 고민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노르망디 상륙이라고 부르지만 독일군은 노르망디 침공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2차대전도 영국제국, 미국은행과 소련중앙당을 상대로 독일제국이 분투하고 있다고 착각했습니다. 



토마스 바이크Thomas Beike는 노르망디 에브뢰Evreux 북부지역 전투비행대 Jagdabschnittführer 5의 중위였다. 


우선 대중의 오해에 대해 설명하고 싶다. 루프트바페Luftwaffe가 구경만 해서 노르망디에서 패전했다는 속설은 사실이 아니다. 1944년 6~7월, 우리는 구경만 하지도 않았고 하늘에서 사라지지도 않았다. 비열한 연합국기자와 영화제작자가 사실을 호도했다. 

노르망디상륙 전부터 우리 공군은 엄청난 고난을 겪고 있었다. 도저히 제 역할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우리가 배치된 구역은 에브뢰-리시유Lisieux(지도 참조)로 해안에서 상당히 가까이 배치된 작은 기지 중 하나였다. 평원의 대저택에서 조종사와 고급장교들이 지냈다. 동부전선에서는 얼어붙은 헛간의 침대에서 지내다가 프랑스에서는 당번병이 부츠를 닦고 음식을 가져오는 대접을 받았다. 

저택에는 와인창고도 있었고 지역음식도 아주 훌륭했다. 육근처럼 음식을 지역민과 교환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잘 먹었다. 고향에서는 식품사정이 아주 안 좋았기 때문에 프랑스음식을 독일의 친지에게 정기적으로 보냈다. 국가의 험담이 될 수 있어서 이웃에게는 조용하라고 신신당부했다. 음식소포가 종종 분실되었다. 



다른 생활은? 우리 조종사는 프랑스여성에게 인기있었다. 프랑스여성과 진지한 관계를 맺지 말라는 공식적인 명령이 있었지만 조종사, 지상요원, 대공포병 중에 상당히 깊은 관계를 가진 사람들이 꽤 있었다. 

이 여성들은 계산적이었는데 남성들이 집단노동으로 차출된 동안 지역 마을이나 도시를 운영했다. 어쨌든 표면상으로는 우리 생활은 아주 훌륭했다고 말할 수 있다. 


여러가지 면에서 상황이 안 좋았다. 절망적이었다. 전투비행대는 국민이 기대하는 수준이 될 수 없었다. 1939~1942년에 보여주었던 공군의 이미지나 전설이 아니었다. 1942년 이후 조국의 상공에는 대규모 폭격기가 나타났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연합군항공대가 받는 엄청난 자원에 비해, 우리는 충분한 항공기, 부품, 연료, 새 조종사를 보급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전투기를 계속 가동시키려면 상당히 많은 교체부품, 오일, 냉각제, 윤활유 등이 필요한데 1944년에는 제대로 보급되지 않았다. 

전투기의 엔진냉각제가 없어서 무장과 급유를 마치고 조종사가 탑승한 채로 격납고에 대기하는 일이 많았다. 냉각제가 도착하면 특수공기필터가 없었고 이런 식으로 언제나 한가지 이상이 부족하거나 수리할 수 없는 일이 이어졌다. 비행대는 정상이 아닌 상태로 이륙해서 대규모 연합군 비행대를 상대해야 했기 때문에 손실이 많아졌다. 


조종사의 경우, 전사한 동료를 대체할 우수한 신참이 없었다. 아무나 끌고가서 조종하라고 윽박지를 수 없었고 결국에는 고참이 24시간 내내 전투비행임무를 벌여야 했다. 몸과 정신이 버틸 수 없었다. 우리 비행대는 늘 정상전력이 아니었고 개인도 너무 혹사당해서 정신적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아무리 대저택에서 광나는 부츠를 신고 맛있는 음식을 먹더라도 이면을 들여다보면 고통받는 한 사람에 불과했다. 


강한 정신력으로 버티거나 종교에서 위안을 찾았다. 군종신부는 상담과 조언을 하면서 심리학자가 되었다. 여성에게서 위로를 찾는 사람도 있었고… 일부는 술에 의존했다. 술은 꽤 쉽게 구할 수 있었다. 암페타민혼합제나 코카인 같은 화학약품을 사용하기도 했다. 

바이엘Bayer헤로인이라고 부르는 자극제가 있었다. 공군최고사령관 헤르만 괴링Hermann Goering이 헤로인을 탐닉했다는 것은 비밀도 아니었다. 이런 자극제는 처음 효과가 다하면 상태를 더 악화시켰다. 



독일공군 재건에 큰 역할을 했지만 그 이후에는 현실을 외면하고 히틀러 개인에 대한 충성으로 패전의 일등공신이 되었습니다. 


1930년과 40년대는 자극제사용이 일반적이었고 1950년대인 현재보다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마도 바이엘은 여전히 독일최대 제약회사일텐데, 그들은 1930년대에 경이로운 약을 2개 만들어냈다. 아스피린(희망)과 헤로인(영웅심)이다. 헤로인은 아스피린처럼 약국에서 아무렇지 않게 살 수 있었다. 

현재는 헤로인을 금지한다는 말이 많은데 개인적으로 그 의견을 지지한다. 전쟁기간 동안 이 약을 사용하고 중독된 장교를 몇 명 봤다. 괴링도 헤로인 과다사용으로 죽어서 뉘렘베르크Nuremberg재판의 교수형을 피했다고 했다. 

이제 본론으로 돌아가서, 우리 전력은 계속 줄어든 반면에 연합군항공대는 국제금융기관의 지원을 받아 갈수록 강력해지고 거대해졌다. 1944년 6월, 노르망디침공(상륙)이 터지면서 우리의 상황이 그대로 드러났다. 썩어가던 상처를 햇빛에 노출시킨 것처럼 갑작스레 모든 문제가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그 당시 프랑스 상황이었다. 


연합군비행대는 잠깐도 쉬지 않았다. 영국공군(RAF)은 야간에도 날아와 프랑스철로와 도로를 파괴했다. 내 편대는 야간전투장비가 없었기 때문에 RAF 항공기가 새벽에 돌아갈 때에 요격했다. 미군은 낮에 공습을 감행했고 우리는 미군전폭기와 트윈엔진폭격기를 자주 상대했다. 

항공기 숫자와 기체가 항상 발목을 잡았다. 우리 비행대에도 최신형이 일부 도착했지만 우리 편대는 엔진과 장비를 교체한 2년전 구형기를 타야 했다. 미군기를 만나면 공장에서 바로 나온 것이 한 눈에 들어왔다. 노르망디 침공 전에 미군 머스탱Mustang를 본 적이 있다. 해안부근 들판에 추락한 것이었는데 캐노피에 흠집 하나 없는 완전 신형기였다. 조종석의 모든 페달은 자국도 없었다. 

우리 기체는 삐걱거렸고 빗물이 샜다. 내가 불평한다고 생각하면 안된다. 그냥 당시 우리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어쨌든 머스탱 조종사가 끌려가기 전에 엉망인 영어로 말을 해봤다. 이렇게 좋은 기체를 타서 행운아라고 말해주었더니 아주 정중한 독일어로 대답했다. 얼마나 놀랐던지! 나중에 헌병대에서 들었는데 그는 독일성을 가지고 있었고 미국에 이주한 독일마을 출신같다고 했다. 



5월에 연합군의 폭격이 더욱 심해졌기 때문에 무언가 일어나고 있다고 확신했다. 작은 목표물에도 엄청난 폭탄을 퍼부었다. 아마 4월 초인가에 루앙Rouen의 철로를 폭격했는데 며칠 후에 그 위를 날면서 보니까 모든 것이 흙더미로 변해 있었다. 철로옆 민가도 모조리 사라졌다. 

프랑스는 독일이나 영국과 같은 방공호가 없었다. 이 폭격 한 번으로 5백명 이상이 죽었다고 들었다. 매일 그런 폭격이 있었다. 

우리 기지도 계속 폭격당했는데 전투기 주변에 튼튼한 방호벽을 쌓아서 안전했다. 반면에 우리들 방공호는 낮은 참호가 고작이어서 라이트닝Lightning과 썬더볼트Thunderbolt가 활주로를 폭격하는 동안 참호로 뛰어들곤 했다. 

폭격이 다 끝나기도 전에 정비병들이 밖으로 나가 피해를 보수했다. 인력과 장비만 있다면 활주로 구멍은 메울 수 있지만, 엔진오일이 불타거나 엔진부품이 파괴되면 치명적이었다. 다시 보급받기까지 긴 시간이 걸렸고 그때까지는 전투기를 공중에 띄울 방법이 없었다. 



6월 6일 말인가? 대저택은 너무 눈에 띄는 목표물이었기 때문에 숙소를 농부집으로 변경했다. 기지에서 몇 km나 떨어져서 차로 이동해야 했다. 5일은 동료의 생일이었고 작은 파티를 열었다. 나는 축하한다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전쟁 중에 축하할 일은 아예 없었다. 

저녁 9시에 고급장교가 평소 잘 아는 프랑스여성 몇 사람이 합류했다. 프랑스에서는 흔한 일이었다. 그들과 함께 늦은 밤까지 와인을 마셨는데 자정 무렵에 갑자기 엄청난 비행기엔진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밖으로 나갔는데 북쪽 바다쪽에서 들리는 굉음이었다. 아군기는 높낮이가 다른 엔진음을 냈기 때문에 이렇게 일정한 엔진음은 연합군밖에 없었다. 프랑스여성이 ‘빌어먹을 영국놈들에게서 지켜주세요’라는 식으로 말했다. 일단 그들을 차에 태워 집으로 돌려보냈다. 


돌아가는 상황을 전혀 알 수 없어서 일단 몇 시간이라도 잠을 자기로 했다. 몇시간이라도 자야 결정적인 순간에 시력과 근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생각과 달리 잠들지 못했다. 조종사가 하늘에서 들리는 엔진음을 무시할 수 없었고 대공포가 포문을 열면서 자연스럽게 고도, 숫자와 방향을 계산하게 되었다. 연합군폭격기는 네덜란드 방향에서 접근했기 때문에 야간전투기도 대부분 그 방향에 배치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이 비행기들은 프랑스 서부에서 뭘 하는 것이지? 지금은 공수부대가 수송기를 타고 침투해서 심각한 문제를 일으켰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당시에는 알 방법이 없었다. 


당번병이 동이 트자 나를 깨웠고 차를 타고 기지로 갔다. 이상하게도 거의 모든 비행기가 멈춰 있었다. 그리고 간밤의 굉음이 완전히 사라져서 뭔가 불길한 징조같았다. 기지에 다가가자 놀라운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연합군 글라이더가 뒤집혀 있었다. 해안에서 내륙으로 향하던 것 중 하나였다. 병사들이 접근해서 수색 중이었고 공수부대를 조심하라고 주의를 주었다. 

서쪽 꺄헝떵Carentan 부근에 적 공수부대가 내렸다고 했다. 당시 우리가 아는 전부였다. 

기지를 지키기 위해 병력이 증원되었고 지상요원은 연합군이 공격해오면 건물을 폭파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날이 완전히 밝자 연합군 폭격기가 날아왔는데 다행히도 가짜 기지를 폭격했다. 



폭격 때문에 기지 근처에 가짜 구조물을 만들어 두었다. 공중에서 보면 활주로와 건물이 있는 기지같지만 실제 기지는 그물망으로 잘 위장되어 있고 항공기는 여러 곳에 분산시켜 나무로 가려 두었다. 

미국 라이트닝과 같은 폭격기가 미끼 기지를 폭격했다. 공격성공을 만끽하면서 날아갔다. 그렇다고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문제는 우리였으니까. 



메셔슈미트Messerschmitt 109 구스타프Gustav형은 1930년대 설계이지만 신형 수퍼차저 엔진을 장착해서 여전히 위력적인 기체였다. 원래 가능한한 소형기체로 설계했었기 때문에 연료탱크가 너무 작았다. 그렇더라도 능숙한 조종사가 타면 머스탱이나 신형 스피트파이어Spitfire만큼 괜찮은 기체였다. 그렇게 모든 가능성을 합쳐야 연합군만큼 괜찮아지는 것이 문제였다. 

그날 오전 6시 30분경에 조종석에 들어가 위장포를 덮은 상태로 대기했다. 전령이 계속 달려와서 구두통지를 하거나 쪽지를 전해주었기 때문에 상황변화를 계속 알 수 있었다. 여전히 아무런 명령도 없었다!





분노, 긴장, 흥분, 염려로 복잡한 심경이었다. 그런 날에 비행기 안에서 공포를 느끼지 않는 조종사가 있다면 분명히 거짓말쟁이다. 나는 상당히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본격적인 침공이 아니어도 연합군의 대대적인 작전이 분명했기 때문에 어떤 적을 만날 지 상상조차 안되었다. 

머리 위로 항공기가 많이 지나갔다. 그날 오전은 다소 흐렸는데 적기의 배기연이 매우 밝게 남았다. 전령이 드디어 달려와서 해안지역의 적을 요격하라는 명령을 전했다. 적 수송선이 최우선이고 폭격기가 그 다음이었다. 

오전 9시 정도에 바로 명령이 취소되어 엔진을 다시 껐다. 사령관에 대해 변명하자면 상황이 파악되지 않는데 전투기를 투입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결국 한참 지나서 우리 중 3기가 캉Caen 부근으로 날아가 무력정찰을 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우리가 정찰기라니! 심각한 모욕이었지만 어쨌든 하늘을 날게 되었다. 


메셔슈미트는 정찰을 할 수 없는 기체였다. 엔진 카울링이 내 턱 아래를 바로 막고 있어서 전방시야가 너무 좁았다. 강하해야 뭔가를 볼 수 있었다. 기포캐노피Bubble Canopy가 아니어서 후방은 아무 것도 볼 수 없었고 측면도 날개 때문에 거의 안 보였다. 

어쨌든 명령이니까 최선을 다해 뭔가를 발견하기로 했다. 그런데 공중에서 우리끼리는 통신할 수 있었지만 기지와 통신할 무선장비가 없었다… 정찰용이 아닌 기체로 어떻게 든 뭔가를 발견하고 격추되지 말고 기지로 전속력으로 돌아와 보고를 하는 임무였다. 

지상요원이 캐노피를 닫고 있는데 상관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와 중요한 임무라고 소리질렀다. 공중정보가 있어야 적을 다시 바다로 밀어낼 수 있다고 했다. 내게 자신의 라이카Leica 항공카메라를 주며 공중사진을 찍어 달라고 했다. 손으로 사진을 찍는 일은 불가능했는데, 그만큼 상황이 절박하다는 뜻이었다. 카메라를 좌석 아래에 넣었다. 이후 상황이 급박해서 카메라는 아예 잊어버렸다. 

내가 두번째 이륙순서였다. 우리는 고도와 경도를 나누어 캉을 향해 북서진했다. 우리가 수평비행을 하자 머스탱 2대가 후방에서 달려들었다. 우리가 대형을 맞추기도 전에 파고 들었다…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수치스럽다. 어떻게 그렇게 단순한 공격을 당했는지. 


메셔슈미트는 날개 양쪽에 20mm 기관포, 엔진 카울링 위에 기관총 2정, 프로펠러 축에 기관포가 있었다. 20mm 기관포는 매우 강력하고 정확해서 무장만 따지면 연합군 전투기보다 훨씬 나았다. 내 기억이 맞다면 머스탱은 기관총 6정을 장착했다. 이런 머스탱이 우리를 잡았다… 우리가 피하려고 할 때에는 이미 우리를 지나 선회 중이었다. 

나는 괜찮았지만 동료 한 명이 맞았고 회색 연기를 뿜어내며 멀어져갔다. 내 아래로 떨어져가며 엔진에서 오렌지 화염이 번지기 시작했다. 어떤 상황인지 잘 알기 때문에 저절로 신음이 나왔던 것 같다. 잠시 후에 카울링이 조각나 떨어져 나갔고 화염이 조종석을 덮쳤다. 

머스탱 때문에 제대로 지켜볼 여유가 없었지만, 그가 팔로 얼굴을 가리는 것이 보였고 바로 화염에 사라졌다. 전날 밤에 생일파티를 열었던 동료였다. 25살인데, 프랑스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고도를 높여 가속했다. 전투가 아니라 정찰이 먼저였다. 다른 동료도 해안으로 향했다. 뒤를 볼 수 없어서 몇 차례 기체를 뒤틀어서 머스탱을 보려고 했는데 대공포화가 올라왔다. 아군 포화였다. 

대공포병은 공포에 질려서 마구잡이로 쏘고 있었다. 캉 부근의 철로를 건넜는데 머스탱이 보이지 않아서 바로 해안으로 날아갔다. 시속 600km 최대속력이었다. 갑자기 해안이 눈앞에 튀어나왔는데 엄청난 함선을 볼 수 있었다. 눈 한번 깜박이는 동안 캐노피 유리가 함선으로 가득 찼다. 

환상을 보거나 꿈꾸는 것은 아닌지 의심했을 정도였다. 이런 규모의 선단은 처음이었다. 인류 역사상 최초의 장관이 아닐까 한다. 과장을 하지 않고 강철로 만든 바다였다. 

몇 초 후에 서쪽으로 해안을 따라 날면서 오른쪽 아래를 볼 수 있었다. 해변을 보기 위해 날개를 기울였다. 영국과 캐나다군이 공격한 해변이었는데 그들이 사용한 암호명이 골드Gold와 주노Juno였다. 


우리는 그냥 캉 구역이라고 불렀다. 그 구역이 차량으로 가득 찼다. 수송선에서 전차도 내리고 있었다. ‘이거 본격적인 침공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설명은 불필요했다. 해변 전체에서 차와 보트가 불타고 대포의 포격이 있었다. 화염방사기도 봤는데 넓은 지역을 화염으로 뒤덮었다. 

적은 내륙으로 침투하고 있었고 모래사장 위에 엄청난 병력을 모아 이동준비 중이었다. 내륙에 폭탄과 포탄의 섬광을 볼 수 있었다. 일부 평원은 물에 잠겼는데 포화에 물결치던 것도 기억난다. 

그 일대에는 연합군 항공기도 무척 많았다. 해변 위를 전투기가 엄호하고 있었고 바로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3대가 따라왔다. 나는 전속력으로 고도를 낮춰 아군 대공포를 나를 오인사격하지 않게 했다. 내가 해변을 벗어나면 머스탱이 구역을 엄호하기 위해 돌아갈 거라고 생각하고 남서쪽으로 남은 연료를 모두 사용하며 날아갔다. 

생로Saint Lo까지 날아가다가 추격이 없어서 동쪽으로 선회해 에브레로 향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함선의 규모를 파악하고 싶었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다. 수천척은 분명했다. 



아마 공중에서 그 광경을 본 몇 안되는 독일군 중 한 명이었을 것이다. 기지로 돌아가는 중에 도로의 긴 장갑차 대열이 보였다. 다행히 내 기체의 검은 십자가와 노란색 기수덕분에 오인사격을 당하지 않았다. 


활주로에 접근하자 다른 동료의 기체가 불타는 것을 보았다. 그는 엔진에 불이 붙은 채로 귀환하다가 폭발했다고 들었다. 내가 유일하게 살아 남았다. 기체의 화염과 연기 때문에 미군기가 늑대떼처럼 날아들었다. 

그들의 기총소사를 받으며 착륙했고 내리자 마자 참호 속의 지상요원 위로 뛰어들었다. 적은 이전에 폭격한 목표물이 미끼 기지였다는 것을 알아채고 계속 날아왔다. 폭격이 잠시 잠잠해진 틈을 타서 상관에게 달려가 보고를 했다. 방공호 속에서 상관과 함께 몇 시간 동안 갇혀 폭탄세례를 받았다.

기지는 심각한 피해를 입었고 중구난방의 명령이 계속 떨어졌다. 해변을 폭격하라고 했다가 취소되었고 전투기를 내륙으로 이동시키라고 했다가 다시 명령을 기다리라고 했다.


6월 7일에 다시 이륙했지만 해안으로는 가지 않았다. 연합군전투기 엄호가 너무 두터웠다. 남동쪽으로 기지를 이동해 저공비행으로 적 목표물을 포착해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전투기에게 맞지 않는 임무였다. 캉 부근에 집결하는 아군 기갑부대를 보호하라는 명령도 받았다.

우리는 숫자가 너무 적었고 새 기지의 보급은 더욱 심각해졌다. 6월 6일에 잃은 두 명의 조종사 대신에 몇 시간 비행훈련을 받은 초보와 40살 먹은 교관을 받았다. 신참은 첫 번째 비행에서 스피트파이어에게 격추당해 다리 부근에 추락했다.

신형 스피트파이어는 놀라운 기체였다. 최신형 포케불크Focke-Wulf보다 빨랐다. 음속이라는 소문도 있었는데 당시 기술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지상공격 명령이 계속 있었는데... 침공이 있던 주에 처칠Chuchill전차대열을 공격했었다. 전차병들은 낮은 관목 뒤로 숨었는데 위장흉내만 낸 상태였다. 프랑스 지역주민이 연합군위치를 계속 알려주었다.

우리는 연합군조종사들처럼 정찰한 후에 목표물을 찾아 공격할 여유가 없었다. 숫자가 너무 적어서 그럴 수 없었다. 그렇지만 특정 목표물이 특정 지역에 있다는 확실한 정보를 받으면 바로 날아가 한 차례만 공격하고 귀환했다. 2차 공격은 없었다.

우리와 친한 프랑스인이 많았기 때문에 연합군정보를 자주 얻을 수 있었다. 침공 초기 프랑스인은 침공의 성패를 알지 못했다. 침공이 본격적인지 임시작전인지 알지 못했다. 디에프Dieppe공격이라는 이상한 작전을 기억할 것이다. 캐나다군은 몇 시간 만에 다시 떠났었다.



1942년 8월, 독일교란작전의 일환으로 프랑스 북부 디에프항구를 기습공격했다가 6천명 중 4천 명을 잃고 참패로 끝난 디에프기습작전입니다. 

연합군지역에 있던 프랑스인도 양쪽 모두에 의지했다. 연합군을 반기면서도 우리에게 정보를 주었다.


어떤 여성이 처칠전차대열이 접근하고 있다는 귀중한 정보를 주었다. 기지가 파괴되기 전에 딱 한차례만 공격할 수 있었기 때문에 바로 이륙했다. 나무가 보이고 처칠전차가 보였다. 위장을 할 생각도 없었다. 뒤쪽 초원에는 전차병이 잔뜩 모여 있었다. 아마도 브리핑 중이었을 것이다.

내가 하강하자 달아나기 시작했고 그들 사이에 기관총을 퍼부었다. 딱 일초였다. 그들에게 총탄이 쏟아졌고 그들이 쓰러지기도 전에 나는 날아갔다.


아군이 아흐정떵Argentan에서 궤멸된 후에 포로가 되었다. 연합군은 팔레스Falaise포켓이라고 불렀다. 7월 동체착륙하면서 부상을 당했고 야전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다. 원래는 독일로 가야 했지만 부상이 심하지 않은 조종사는 기지 부근에서 치료를 받고 바로 복귀시켰다.

이른 아침에 미군이 병원에 들이닥쳤다. 엔진소리가 들리더니 3명의 거대한 미군병사가 톰슨Thomson총을 어깨에 걸친 채로 간호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미군 모두 그렇게 거인인지 모르겠지만 모두 2m 가까운 키였다.

포로가 되는 수밖에 없었다. 트럭을 타고 서쪽으로 갔다. 학살이 벌어진 아흐정떵-팔레스 지역을 지나갔다. 도중에 끔찍한 광경을 봤다.



팔레스와 아흐정떵 사이의 전장에서 퇴각하다가 수많은 아군이 공중폭격으로 죽었다. 병목지역에 많은 병력을 집결시켰는데 연합군항공기가 날아와 학살했다. 일부는 무장전투병이었지만 많은 병사가 후방지원요원으로 비무장상태였다.
일부러 우리를 데려가 보여준 것이 분명했다. 아주 천천히 지나가다가 폭격이 일어난 지역에서는 일부러 멈추기도 했다. 냄새가 여전히 나는 것을 보니 전날 폭격이 있었던 것 같았다. 잔해와 사체가 그대로 있었다. 아무리 전쟁을 오래 겪었어도 충격을 받았다.
한쪽에 폭격맞은 전차가 죽 늘어서 있었는데 아름다운 판터Panther전차도 있었다. 6대였는데 모두 포탑이 날아갔고 바퀴도 날아갔고 금속트랙이 사방에 나뒹굴고 있었다.
마차나 수레에 묶인 채로 죽은 말이 많이 있었고 수십 대의 타와 오토바이도 있었다. 파리가 덮은 사체는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다. 그 들판에만 2~300명이 있었는데 화염에 그을려 만신창이였다. 몇 km 계속 이어졌다. 무한지옥이었다.

폭격에서 살아남은 병사들도 지나쳤다. 폭격의 충격으로 정신이 나가 있었다. 마치 구식 요양소의 무기력한 정신병자들처럼 무의미한 동작을 보였다. 무장친위대도 있었고 정예사단 병사들이었는데 모두 비참한 상태였다.
히틀러 유겐트Hitler Jugend 소년병들도 봤는데 16살 정도를 전장에 보내다니 어리석은 짓이었다. 소년병들은 마치 행진하듯이 죽어 있었다. 도대체 왜 그렇게 죽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분명히 우리에게 뭔가를 노리고 일부러 보여주었다. 우리 모두는 참상에 무너졌고 그 이후 며칠 동안 말을 잃었다.
내가 팔레스와 아흐정떵전투를 학살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원래 전쟁이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큰 의문덩어리였다. 처음에는 6월 6일에 있었던 공군의 상황과 임무에 대해 설명하고 싶었는데 결국에는 참상의 기억을 떠올리게 되었다. 회고는 이 정도에서 멈추는 편이 낫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