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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2차대전

정비장교가 본 셔먼 VS 판터 (1부)

by uesgi2003 2020. 5. 26.

정말 오래간만에 이야기를 정리하는군요. 원래는 한스 루델 이야기를 정리하려고 했는데 그의 회고록이 지루해서 잠시 뒤로 미루고 벨톤 쿠퍼Belton Y. Cooper가 실전에서 경험한 셔먼과 판터의 비교 이야기를 연재하겠습니다. 

 

아마 온갖 반박을 제시하는 분들이 많을텐데... 2차대전에는 수많이 사건과 자료가 있고 그 중의 한 자료와 시각에 불과하다는 점을 기억해두어야 합니다. 

 

벨톤 쿠퍼는 포병 ROTC였다가 원래 전함설계와 제조를 위해 해군으로 이동하고 싶었지만 거부되고 3기갑사단 정비장교로 배치되었습니다. 1944년 노르망디상륙부터 1945년 독일패전까지 최전선에서 복무했고 미군전차의 회수, 수리와 유지보수를 맡았습니다. 

최전선에서 격파된 셔먼전차를 직접 조사했기 때문에 아군의 피해에 대해 상당히 민감하게 받아들였고 독일전차에 대해 과장한 면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기술적이고 객관적인, 당시 최전선을 달린 정비장교의 시각으로 2차대전 전차전을 볼 수 있는 귀한 자료입니다. 

 

 

우리가 노르망디에 투입한 M4 셔먼Sherman은 32톤 무게에 45도 경사의 전면장갑은 63.5mm(2.5인치) 두께였다. 75mm 주포는 단포신에 탄속은 초속 625m였다. 
유럽에서 전쟁이 발발하자 병기창의 전차설계부서와 지상군 고급장교은 서로 다른 주장을 고집했다. 1939년 여름, 나는 애버딘 프루빙 그라운드Aberdeen Proving Ground에 근무 중이었고 37mm 주포의 M2A1 중전차가 주력전차였다. 9월,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양측의 의견은 더욱 혼란스럽게 대립했다.
기갑과 기병장교는 대구경, 고속 대전차포 장착을 선호했다. 보병장교는 여전히 전차를 보병지원용 중화기로 생각했다. 포병장교는 전차에 37mm 이상의 포를 장착한다면 7,500발 이상을 견뎌야 한다는 포병기준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75mm 이상은 비교적 저탄속이어야 했다. 7,500발을 견딜 주포는 있을 수 없었다. 이렇게 해서 M3전차가 탄생했다. 

 

애버딘 전차박물관에서 직접 찍은 판터입니다. 이날 폭설때문에 무척 고생했었는데 덕분에 눈치 안보고 마음껏 전차를 즐겼습니다. 그 후에도 출장길에 땡땡이치고 몇차례 갔었는데 지금은 다른 곳으로 옮겼고 아마 일반인은 방문하기 어려운 모양입니다. 

 

M3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 못했지만 북아프리카와 동부전선에서 귀중한 전력이었습니다. 북아프리카에서는 단포신 3호전차에게 무척 버거운 상대였고 동부전선에서는 전차전력이 바닥난 소련군이 미군에게 공여받아 무너지는 전선을 복구했습니다. 당시 소련군의 평가는 어쩔 수 없어서 탄다는 식의 평가였습니다. 


위원회가 신형전차의 기본기능을 선택했다. M2A1의 차체하부와 트랙체계를 그대로 가져가고 R975C1 400마력 레디알엔진, 구형 M2A1과 비슷한 변속기와 드라이브를 장착했다. 측면과 전면장갑을 늘리고 각이 꺽인 차체는 리벳으로 연결했다. 63.5mm의 장갑은 전면장갑 중간까지 45도였다가 그 위부터는 60도 경사였다. 
일부 장교가 장갑용접은 견고하지 않다고 주장해서 리벳으로 연결했는데 결과는 참담했다. 소구경의 철갑탄이 리벳을 때리면 머리가 부서졌고 몸통부분은 전차안으로 들어와 튕기면서 승무원을 죽였다. 
포탑에는 37mm 대전차포와 30구경 동축기관총을 장착했다. 37mm는 이미 무용지물에 되었는데 특히 독일전차의 전면장갑에는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포탑에는 50구경 다목적기관총도 장착되었다. 포병기준에 따라 저속 75mm M2 포를 전차 차체 오른쪽 폐쇄형 포탑에 장착했다. 보병위원도 신형전차를 훌륭한 지원전차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높이가 동급 독일전차보다 훨씬 높아서 상당한 거리에서도 쉽게 포착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미국인이 장악한 위원회는 그랜트Grant라는 이름을 붙였다. 북군장군이자 대통령 이름이었기 때문에 남부출신의 반발을 샀다. 심지어 M4는 셔먼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셔먼은 조지아Georgia로 향하는 길을 불태웠던 북군장군이었다. 

우리는 3가지 유형의 독일전차를 상대했다. 마크 4Mark IV라고 부르는 4호전차는 23톤의 무게, 4인치 수직전면장갑, 초당 914m의 고속 75mm 주포를 장착했다. 5호판터Panther는 53톤, 3.5인치의 38도 경사전면장갑, 초속 1km의 고속장포신 75mm 주포를 장착했다. 마지막으로 6호킹타이거King Tiger는 64톤, 6인치의 45도 경사전면장갑, 초속 960m의 고속장포신 88mm 주포를 장착했다. 독일전차 한 대는 M4 셔먼 5대에 맞먹는 성능우위를 가졌다. 
독일전차는 우수한 화력과 두터운 장갑덕분에 장거리에서 M4와 교전을 벌여 격파할 수 있었다. 셔먼이 판터나 타이거의 전면을 여러 번 명중시켰지만 아무런 효과없이 튕겨 나간 경우가 많았다. 반대로 독일 고속주포는 장거리에서 단 한발로 셔먼의 장갑을 관통할 수 있었고 벽돌 뒤에 숨은 셔먼도 격파할 수 있었다. 심지어 셔먼을 관통해 뒤에 있는 셔먼을 맞춘 경우까지 있었다. 
셔먼이 판터를 상대하려면 550m로 근접해 측면을 노려야 했지만 판터는 1.8km 거리에서 셔먼을 정면을 관통할 수 있었다.

 

야크트타이거 전면장갑에 난 상처입니다. 그것도 무려 2발입니다. 그리고 포신에도 한발이 낸 상처가 있습니다. 셔먼으로는 격파할 방법이 없었죠. 이것도 제가 에버딘에서 직접 찍은 사진입니다. 

저 상처를 직접 만져봤다는 사실!

 

노르망디상륙 이전, 미군기갑지휘관 일부는 셔먼이 판터보다 가벼워서 기동력이 더 좋을 것으로 예상했는데 그 예상은 빗나갔다. 전차의 험지기동력은 지반지지압력Ground Bearing Pressure이 관건이었다. 판터의 트랙은 셔먼보다 넓었기 때문에 지반지지압력이 낮았고 셔먼이 갈 수 없는 지형을 이동할 수 있었다. 특히 셔먼의 좁은 트랙은 진흙탕이나 눈 위를 달릴 수 없었다. 
M4 셔먼의 열세는 다른 무기체계의 압도적인 우위로 상쇄했다. 미국은 20년 동안 전쟁이 없었기 때문에 4년 만에 우수한 소총, 대포, 트럭과 항공기를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었다. 

나는 정비대대에서 포트 녹스Fort Knox 전차정비학교를 다닌 유일한 장교이기 때문에 전차, 특히 기술성능에 대해 알고 있었다. 전차학교에서는 늘 실무매뉴얼과 복사노트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독일전차에 대한 G2 분석보고서도 읽었다. 
안타깝게도 그 내용은 제한적이었다. 단포신 75mmdml 3호와 4호전차가 고작이었다. 판터전차에 대해 전혀 몰랐고 북아프리카에서 1기갑사단이 타이거전차를 상대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M4 셔먼은 포탑에 75mm를 장착하고 있었기 때문에 M3 구형에 비해 상당히 우수했고 독일전차에 대한 지식이 부족해서 M4가 우수한 전차라고 생각했다. 
독일은 4호전차의 단포신 75mm를 고속 장포신으로 교체하고 있었고 판터와 타이거도 개발하고 있었다. 셔먼은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미군전차설계자는 소련전차의 기술발전에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T34와 중전차 요세프 스탈린Josef Stalin전차는 M4 셔먼보다 더 강력한 주포, 두 두터운 장갑과 넓은 트랙을 장착했다. 

미군은 결국 M4보다 90mm 장포신에 더 두텁고 더 넓은 트랙의 M26 퍼싱Pershing전차를 개발했다. 셔먼보다 훨씬 강력했고 독일전차와 비슷한 수준이 되었을 텐데, 일부 고급장교의 오만함때문에 우선순위에서 밀렸고 M4 셔먼생산에 주력했다. 
당시의 많은 전문가들은 우리가 1944년 11월 아헨Aachen 동부공격에서 M26 퍼싱을 투입했다면 지그프리드Siegfried의 마지막 방어선을 뚫고 콜롱Cologne평원으로 진출해 아르덴느Ardennes에 집결하던 독일군의 허를 찌를 수 있었다고 믿었다. 
그렇게 되었다면 벌지Bulge전투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을테고 몇 개월 더 일찍 전쟁을 끝낼 수 있었다. 

 

볼튼은 패튼 등의 일부 전차지휘관의 오판으로 M26 퍼싱의 투입이 크게 지연되었다고 비난합니다. 그렇지만 확실한 근거가 없고 어쨌든 뉘늦게라도 투입되기는 했습니다. 한국전쟁에서 제대로 활약했습니다.

용산 전쟁기념관을 가면 M4, M26, T34 등 2차대전 주역을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 위는 에버딘 박물관으로 기억합니다. 

1943년 11월, 영국에 있을 때에 M4 셔먼의 장갑문제를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애링콘Arrington소령은 모든 M4 셔먼전차에 추가장갑판을 붙일 야전키트가 준비되었고 내가 그 프로젝트의 책임자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영국 병기창인 워민스터Warminster로 결정되었다. 애버딘에서는 장갑용접 전문가인 기술고문TO을 파견했다. 그는 제네럴 모터스General Motors직원이었고 용접기술에 대해 경험이 많았다. 
나는 영국병기창지휘관과 협력해서 필요한 노동력과 시설을 확보했다. 기술고문관은 영국인부와 함께 용접순서를 파악했다. 몇번의 실수와 참담한 실패를 겪은 후에 문제를 해결했고 만사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북아프리카, 시실리, 이탈리아의 실전경험으로 M4 셔먼의 장갑이 부족하고 몇 군데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추가장갑으로 이런 취약점을 보강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전차는 75mm 탄을 89발 장착했다. 오른쪽 2열 랙과 왼쪽 1열 랙에 16발씩 보관되었다. 포탑 아래의 랙에도 32발이 보관되었고 9발은 포탑 응급Ready 랙에 보관되었다. 
전차가 이 부근에 포탄을 맞아 파편이 75mm 탄의 부드러운 청동탄피를 건드리면 연쇄폭발을 일으킬 수 있었다. 탄약통 바로 밖에 1인치 철판을 덧붙였다. 랙 내부와 포탑 아래에 0.25인치 장갑판으로 탄약을 감싸는 작은 상자를 만들어 파편을 막았다. 
포탑에도 2인치 두께의 곡선형 장갑을 용접해서 덧붙였다. 주조장갑형 M4 셔먼은 운전석과 보조 운전석 앞에 1.5인치 철판을 용접했다. 
몇차례 실험을 거쳐 조립라인을 완성했다. 다행히 넓은 공간, 천정 크레인, 가열로를 갖춘 거대한 철공소가 있었다. 우리는 늘 비, 진흙, 오물 속에서 엉덩이까지 젖으며 작업했기 때문에 이런 환경은 익숙하지 않았다. 

 

미군뿐만 아니라 독일과 소련군도 전차의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독일의 주력전차 4호는 중세장갑을 두른 것처럼 멋진 모습으로 진화했지만 큰 효과는 없었습니다. 

 

 


전차를 9m 간격으로 정렬하고 정비공이 전차로 들어가 포탑과 연결된 모든 전선과 유압장치를 분리했다. 포탑 링에서 볼트를 풀고 크레인으로 포탑을 통째로 들어올려 전차 옆 작업대에 놓았다. 
용접공 3명이 초반 작업을 마치면 전문용접공이 마무리를 지었다. 장갑판 용접은 난감한 작업이었지만 TO 용접전문가가 효율적인 절차를 마련하고 영국용접공을 제대로 교육시켰다. 
첫번째 조립라인의 전차 중 한 대가 6인치 두께의 쐐기나무를 넘다가 크게 흔들렸고 전면장갑의 용접이 떨어졌다. 영국용접공이 너무 많이 용접해서 과도한 스트레스를 주었고 장갑판에 균열이 간 상태였다. 문제점을 해결한 후에는 더 이상의 사고가 없었다. 
장갑판을 덧대는 동안 다른 기술자가 차체와 포탑에 미리 준비된 탄약상자를 설치했다. 내부작업이 끝나면 안팎에서 동시에 재도색했다. 포탑을 설치하고 배선과 유압장치를 연결했다. 작업이 진행되면서 하루에 8대까지 완성할 수 있었다. 24시간 내내 작업해 한달 만에 1개 사단 전체의 작업을 마쳤다.


내가 무지했기 때문에 일부 영국인부와 마찰을 빚었다. 거의 국제사건으로 비화될 뻔했다. 작업초기, 오전 10시 정도에 영국인십장이 작업중단 신호를 보냈다. 리버풀Liverpool에서 병력을 하선시키던 인부들이 파업을 일으키고 작업을 거부한 일이 생각났다. 
영국십장이 30분간 차 마시는 휴식시간을 가진다고 대답했다. ‘이 전차들을 내보내느라 24시간 작업하고 있는데 당신들은 휴식시간 따위를 갖는다고? 전쟁이 장난인 줄 알아?’
이제 막 해외에 나온 젊은 미군중위가 벌써 4년째 전쟁을 겪고 있는 영국인에게 전쟁에 대해 아는 척을 하고 있었다. 일부는 아들이 덩케르크Dunkirk와 북아프리카에 참전했었고 일부는 폭격으로 가족을 잃었다. 
내가 바보짓을 하면서 분위기가 폭발직전으로 변했다. 해결책이 없다고 생각하고 영국병기창지휘관에게 파업을 보고하러 갔다. 영국십장은 인부들에게 돌아가 휴식시간을 그대로 가졌다. 

영국은 노동력이 부족해서 미국처럼 3교대할 수 없었고 10~12시간을 일했다. 오전 7시에 출근해서 저녁 7시에 퇴근하면 야간근무조가 교체했다. 영국인은 하루에 아침, 아침 차, 점심, 오후 차, 저녁, 5끼를 먹었다. 그들은 저녁 8시 이후에 저녁을 먹었기 때문에 차가 정식식사였다. 내 오해가 풀리면서 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영국십장에게 사과하지 않았지만 서로를 이해하게 되었고 프로젝트가 끝날 때에는 친구가 되었다. 
232대의 전차가 한달만에 추가장갑을 달았다. 우리가 워민스터를 떠날 때에는 2기갑사단 전차가 조립라인에 들어왔다. 티드워스 다운스Tidworth Downs에 설치한 조립라인에도 수천대의 전차가 작업 중이었다. 티드워스 다운스에는 60,000번대의 전차가 하역되었다. 디트로이트Detroit공장은 그 전차 안에 60,000 숫자를 크게 그려 넣었고 이렇게 많은 전차가 생산되었다는 것이 놀라웠다. 
추가장갑 용접프로젝트에서 얻은 지식은 나중에 실전에서 더없이 귀중한 지식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