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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2차대전

기적의 무기전문가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회고

by uesgi2003 2020. 1. 24.


2차대전 종전 후 얼마 지나지 않은 1950년대의 회고기록이기 때문에 지금의 시각과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주장 중 일부는 진실여부를 알 수 없기 때문에 그냥 재미있는 자료정도로만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기적의 무기는 Wonder Weapon이라고 독일이 패망하기 직전에 의미없는 희망을 걸었던 그렇지만 무기기술을 외계인 고문수준으로 앞당겼던 무기입니다. 그리고 내용이 무척 깁니다. 여유를 가지고 즐기시기 바랍니다. 




K.L. 베르크만Bergmann은 1941~45년 독일국방군Wehrmacht에서 복무한 특수무기 전문장교였다.


독일어 타이푼Taifun(Typhoon)은 2차대전 당시 여러 종류의 무기의 암호명이어서 지대공미사일, 독일국방군 전투공병Wehrmacht Sturmpioner의 전투방식, 강습무기 등을 타이푼으로 불렀다. 

그리고 동부전선과 1944년 바르샤바Warsaw무장봉기에 사용된 폭약입자Explosive Particles를 말하기도 한다. 공교롭게도 영국공군 전폭기 중에도 타이푼이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누군가가 나를 찾아내서 노르망디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밝혀 주기를 원했다. 내가 아는 것을 밝힐 수 있어서 기쁘다. 

내 이름, 독일국방군 직무와 전쟁 중 내 행위에 대해 숨기려 하지 않았다. 세상은 노르망디 상황에 대해 극히 편향된 내용만 듣고 있다. 

연합국 역사사가 노르망디상륙부터 7월 말 코브라Cobra작전에서 기갑부대가 방어선을 돌파할 때까지 정리한 역사는 실제와 많이 다르다. 독일군은 노르망디에서 영-미군을 격파할 뻔했었다. 7월 당시 독일군이 상당히 열세였고 연합군이 하늘을 지배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연합군은 바다로 밀어 넣을 수 있는 굉장한 무기를 여러가지 가지고 있었다.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을 뿐이다. 



V1, V2 미사일이 아니다. 1944년 여름, 이 미사일을 더 효과적이고 전술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사령부는 여름과 겨울에 런던상대의 전략무기로 사용했다. 영국정부를 무너트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헛된 기대였고 귀중한 무기를 낭비했다. 상륙해안에 사용했어야 했다! V1은 즉시 가용전력이었는데 노르망디상륙 일주일 후에야 런던에 발사했다. 제대로 사용했다면 멀버리Mulberry항구나 연합군이 영국해저에 매설한 연료수송체계를 파괴할 수 있었다. 연합군이 상륙해 사용할 차량을 무력화시킬 수 있었다. 

V2 로켓도 마찬가지다. 몇 개월만 더 빨리 투입했다면 6월에 멀버리항구를 확실하게 파괴시켰을 것이다. 전쟁이 완전히 달라졌겠지… 

어쨌든 내가 말하는 무기는 우리가 사용하던 것과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무기였다. 폭발력은 V 로켓과 맞먹는데 타이푼급 폭탄이다. 




독일이 기대했던 기적의 무기 중 하나인 V1/V2 로켓입니다. 영국을 폭격했는데 순항미사일인 V1은 대공포나 항공기로 막았지만 V2 로켓은 막을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효과에 비해 막대한 자원을 소비했기 때문에 오히려 내부의 적에 가까웠습니다. 공군이 사용할 연료를 마구 낭비했습니다.


이 폭탄에 대해 먼저 설명하겠다. 프랑스에 배치되기 전에 크림Crimea반도에 기술장교로 있었다. 그곳에서 타이푼 초기버전을 사용했다. 세바스토폴Sevastopol의 소련방어선(사진 참조)에 사용했다. 상당히 단단하게 구축된 콘크리트 거대요새에 러시아군이 버티고 있었다. 

프랑스 마지노Maginot선 벙커와 같이 거대한 구조물이었는데, 프랑스에서는 우회하면 그만이었지만 세바스토폴에서는 우회로가 없었다. 폭격으로 무력화시키려면 몇 주 동안 조금씩 부숴야 했다. 콘크리트가 너무 두터워서 집중폭격을 거뜬히 버텼다. 

타이푼을 사용하자 거대한 벙커가 완전히 반쪽으로 갈라졌다. 충격파로 뜯겨 나갔다. 몇몇 벙커는 충격파를 견뎠지만 러시아군은 충격파로 큰 피해를 입었다. 처음으로 보는 엄청난 폭발이었다. 당시 가장 강력하다고 알려진 영국 그랜드 슬램Grand Slam 폭탄(사진 참조)보다 더 강력했다고 자신한다. 




항공기에서 투하하는 폭탄이 아니었다. 타이푼 초기버전은 매우 조악했다. 산소와 석탄가루를 벙커나 터널 안에 불어넣어야 했다. 공병이 구조물에 구멍을 내고 그 안으로 철제통의 혼합물을 펌프로 불어넣었다. 


지하 석탄광산의 폭발사고와 같은 조건을 만들었다. 석탄광산에서는 공기 중에 석탄가루가 가득한데 인화성이 매우 높아서 조건만 맞는다면 불꽃만으로도 엄청난 대폭발을 일으킬 수 있다. 인화성 높은 먼지와 산소로 가득 차 있으면 그냥 폭발하는 것이다. 

19세기와 1920년대에 독일 석탄광산에서는 끔찍한 폭발사고가 여러 번 발생했었고 석탄광산의 공기 자체가 폭발물질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광산 전체에 폭발가스를 불어넣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간단한 석탄가루와 산소 혼합물에 점화하면 재앙과 같이 터졌다. 

동부전선 크림반도에서 화염방사기로 점화시켰다. 폭발력은 앞에서 설명한 그대로였다. 

러시아군은 타이푼을 화학가스무기로 착각했고 대응으로 크림반도에 겨자가스와 다른 화학무기를 모으기 시작했다. 소련의 화학가스 반격을 우려해 타이푼을 더 이상 동부전선에서 사용하지 않은 것 같다. 소련이 화학가스로 반격하면 동부전선은 교착상태로 빠질 수 있었고 어느 누구도 원하는 상황이 아니었다. 

바르샤바 반란에 다시 사용했다. 러시아군은 전혀 신경쓰지 않았는데 터널과 밀폐된 건물에 치명적이었다. 


내가 1944년 노르망디에 배치된 것은 타이푼때문이었다. 우리는 1943년에 훨씬 강력한 타이푼 버전을 개발했고 타이푼 B로 불렀다. 나는 무기전문가로 설계와 개발에 참여했다. 타이푼 B는 효율성 면에서 비교도 안되게 발전했다. 시대를 훨씬 앞선 무기였다. 


우리는 폐쇄공간 안에서 폭발먼지나 가스를 공기와 혼합해서 폭발력을 얻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타이푼 B는 공중투하폭탄과 비슷하게 야외에서 지상목표물을 대상으로 설계되었다는 점에서 달랐다. 


야외 공기 중으로 폭발가스가 방출되는 방식이었다. 항공유와 비슷한 기름에 석탄가루, 알루미늄분말을 섞었다. 석탄과 알루미늄 분자 자체가 폭발물이었기 때문에 폭발력을 배가시켰고 가스를 무겁게 만들어서 바람에도 흩어지지 않았다. 

부르프라멘 40Stuka Zu Fuss와 같은 로켓발사차량으로 저속로켓을 발사했다. 로켓이 목표물에게 하강하면서 가스를 방출했다. 로켓 안의 기름에 불이 붙을 수 있기 때문에 무척 어려운 설계였다.

그래서 진공으로 사전폭발을 막았다. 여러 발을 발사하면 공기에는 폭발가스가 가득차고 그 양은 100 평방미터 정도였다. 목표물 위에는 폭발가스층이 만들어졌다. 

두번째로 발사하는 로켓으로 점화했다. 폭발가스층에 불을 지르기만 하면 되었다. 상당히 먼 거리까지 폭발파장이 퍼졌기 때문에 그 효과는 상상을 뛰어 넘었다. 

동부전선에서 설계버전을 소규모로 시험했었다. 지상 위의 효과를 직접 관찰했는데 정말 엄청났다. 충격파는 가스층 아래의 모든 구조물을 뒤흔들었고 목표지점 안이나 반경 수박 미터 안의 러시아군은 모조리 죽었다. 충격파는 폐안의 공기를 없애고 심장근육을 멎게 만들어서 외상없이 즉사했다. 



실전에서는 사용된 적이 없었다. 제한된 시험에서만 사용했었다. 러시아군 포로를 상대로 시험했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다. 

나는 타이푼 B의 기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문제는 사용하기 너무 어렵고 안정성이 너무 낮았다. 지역기상조건이 평온해야 했다. 바람이 불면 공기 층의 폭발가스가 너무 희석되어서 원하는 효과를 전혀 얻을 수 없었다. 

일단 조건만 맞으면 그 효과는 성경에 나오는 대파괴 수준이었다. 한여름 프랑스 북부의 기상은 러시아 스텝의 거친 기상보다 훨씬 좋았다. 이 무기를 사용하기 알맞았다. 


이런 무기를 가지고 있는데도 전쟁 흐름을 바꿀 수 있는 주요 전투에서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면 믿기지 않을 것이다. 마치 타이거 전차를 가지고 있는데도 투입하지 않기로 했다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타이푼 B는 계속 진화하고 있었고 1944년 중반에는 상당히 개량되었다. 밀도가 높은 가스를 개발했기 때문에 산들바람 정도로는 흩어지지 않았고 자체점화 탄이 가시를 모두 방출한 후에 빈 상태로 지면과 충돌하면 점화가 되었다. 

1943년 말부터 약 9개월 동안 내가 직접 참여했던 무척 정교한 탄약이었다. 내가 과학자는 아니지만 기술장교로 신형 탄 설계의 발사시스템과 도화선 연결을 책임졌다. 


우리는 1944년 3월, 시험단계에서 동부전선에서 프랑스로 배치되었다. 포병부대가 이동했기 때문에 우리라고 했다. 총 30명인 2개 분대였는데 파모-하노마그Famo-Hanomag 반궤도 차량을 운용했다. 반궤도 차는 부르프라멘 로켓발사대를 장착했다. 그리고 네벨베르퍼Nebelwerfer 로켓 발사대도 여러 개 가지고 있었다. 

타이푼 B 탄은 두 발사대 모두에서 사용할 수 있었는데 우리는 반궤도 발사대를 더 선호했다. 조준간은 원시적이었지만 워낙 강력한 무기였고 근거리에서는 초정밀일 필요가 없었다. 생토메르Saint Omer에 주둔했는데 연합군이 프랑스를 침공할 경우 가장 가능성이 높은 지역으로 예상되었다. 

우리는 명령을 받으면 6시간 후에 칼레Calais 반경 100km 이내를 포격할 수 있게 준비했다. 그래서 연합군 상륙 초기단계에 대응무기로 사용할 것이 분명했다. 



해안의 강한 바람 때문에 해변 목표물에는 사용할 수 없었다. 연합군은 대형 항구를 점령해서 차량과 보급품을 내릴 것으로 예상했다. 대규모 작전에는 항구시설이 반드시 필요했다. 전차와 트럭 등을 바로 해변에 상륙시킬 것으로는 절대로 예상하지 못했다. 1942년 디에프Dieppe에서 그랬던 것처럼 항구도시를 공격할 것으로 생각했다. 

칼레가 영국에서 겨우 30km 거리였기 때문에 여기를 노릴 것으로 믿었다. 우리가 못하면 적도 못한다고 생각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연합군이 침공해변에 인공항구를 만들 것으로는 상상도 못했다. 


타이푼 B는 명령만 받으면 어디라도 전개할 수 있었다. 칼레와 주변을 철저하게 정찰했다. 타이푼 B를 3차례 포격할 수 있는 충분한 탄을 모았기 때문에 동부전선 시험보다 훨씬 큰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약 5km 범위에서 탄을 발사한다는 계획이었다. 우리는 방호소에 피신해서 충격파를 피할 수 있는 거리였다. 반궤도 차는 가스 탄을 6발 발사할 수 있었다. 마지막 탄의 탄두에 점화 탄을 장착했다. 

인화탄두가 동작하지 않으면 베넬베르퍼 발사대에서 인화탄을 목표지점으로 발사한다. 가스층을 터트려서 폭발효과를 확실하게 얻을 수 있다. 


항구시설을 완전히 파괴할 수 있었다. 콘크리트 부두를 박살내고 거기에 정박만 모든 선박을 침몰시켰을 것이다. 충격파가 창고지역을 대부분 파괴했을테고 도시의 절반 정도인 주거지역도 대부분 파괴되었을 것이다. 

기름 베이스에 석탄과 알루미늄을 섞었지만 인화폭탄이 아니라 충격폭탄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충격파는 음속으로 360도 퍼져나갔을 것이다. 


원자폭탄과는 완전히 다르다. 당시에는 원자폭탄에 대해 아예 몰랐다. 어쨌든 인류가 개발한 폭탄 중 최강이었다. 사용했다면 항구는 아예 사용하지 못했을 것이다. 폭발에서 살아남은 연합군은 내륙에서 반격하는 우리군에게 전멸당했을 것이다. 

이 무기의 심리효과도 엄청났기 때문에 연합군은 침공을 더 이상 시도하지 않았을 것이다. 


도시 거주민을 미리 대피시켜야 한다는 주장은 비현실적이다. 칼레 내의 독일 수비병도 타이푼 폭탄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 미리 알려줄 수도 없었다. 항구가 점령당하면 항구를 파괴시켜야 했다. 

칼레 주둔부대는 최소한 2년 이상 거기에 있었다. 일부 고급장교는 지역여성과 관계를 맺었고 아이를 낳은 경우도 있었다. 

부대가 한 지역에 너무 오래 주둔하면 이런 일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둔부대가 타이푼 폭탄에 대해 비밀을 지킬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말은 퍼지기 마련이다. 


연합군도 매일 밤낮을 가리지 않고 프랑스시민을 폭격했다. 6월 6일까지 강도가 더 해져서 중폭격기가 철로, 도로와 야적지를 집중 폭격했다. 1940년 폴란드나 프랑스에서 경험한 것보다 훨씬 심각했다. 2월부터 6월까지 이어졌다. 

연합군 폭격으로 얼마나 많은 프랑스인이 죽었는지 모르겠지만 당시 40,000명 정도 죽은 것으로 추산한다. 영국이 1940년 당시 런던폭격으로 죽었다고 말하는 숫자보다 많다. 

타이푼 B로 칼레를 파괴해도 연합군이 프랑스를 해방시키겠다는 허울로 프랑스를 파괴시키는 것과는 비교가 안된다. 타이푼 B는 유럽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무기였다. 그리고 우리에게 퍼부어지는 공격을 막아 병사와 시민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탄을 사용한 구실이지 않은가? 장기적으로 더 많은 인명을 구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번졌으니 다시 주제인 노르망디로 돌아가겠다. 내 승인없이는 가까운 미래에 출판하지 말라고 요구한다. 

침공당일, 우리팀은 칼레 부근에 주둔했다. 5월 5일 밤에 매우 시끄러웠던 기억이다. 칼레 부근을 집중 폭격했다. 평소에도 야간 폭격이 심했기 때문에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나는 로켓분대와 함께 지냈고 땅이 꺼진 곳에 반궤도 차와 타이푼 B 탄을 보관하고 있었다. 

5얼 5일 밤, 포병 지휘관과 하급 장교들과 앉아있었다. 천정등이 흔들리고 전기가 나가서 암흑속에서 기다렸다. 담배가 간절했지만 피울 수 없었고 프랑스 레드와인을 마시며 조용히 버텼다. 

새벽 2시 정도에 전령이 오토바이를 타고 와서 우리 무기를 준비하라는 명령을 내밀었다. 야전헌변과 보안대에 가서 모든 협조를 받아내라는 문서도 받았다. 탄약고로 가서 로켓을 반궤도 차에 실었다. 실제로 사용하게 되어 흥분되었다. 


오래 기다렸기 때문에 흥분되었다. 결국 사용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안타깝기도 했지만 무기에 대해 확신했다. 

무전기를 켜고 칼레를 내려다볼 수 있는 고지로 향했다. 로켓을 실은 반궤도 차 3대와 보급품을 실은 트럭 2대였다. 본대와 독립적으로 최소한 10일은 버틸 수 있는 보급품이었다. 병력도 신형 MP44 자동소총, MG42, 판처파우스트Panzerfaust로 중무장했다. 

막강한 전투대와 함께 고지에 도착해서 향후 상황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칼레부터 남서쪽 불로뉴Boulogne까지 보였다. 노르망디 침공지점보다는 훨씬 동쪽에 있었지만 하늘에 연합군 항공기가 마치 격자를 그려 놓은 것처럼 대규모로 날고 있었다. 대공포는 미약했고 남쪽의 폭격이 분명하게 보였다. 사방으로 퍼지는 충격파도 볼 수 있었다. 

우리 무기는 폭탄 1,000개를 동시에 터트리는 정도의 충격파를 만들 수 있었다. 사령부와 무선교신을 하며 명령을 기다렸다. 밤새 대기했다. 새벽이 밝자 다시 머리 위에 대규모 항공대가 나타났다. 검은색의 랭카스터Langcaster 폭격기가 한 눈에 들어왔다. 

루프트바페는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그렇게 아침까지 대기했다. 


6월 6일 정오가 되자 모든 것이 혼란스러워졌다. 무선교신을 중단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가 다시 매 30분마다 보고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마지막으로 타이푼 B를 대기시키라는 명령을 받았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사령부는 노르망디상륙을 기만작전이고 칼레가 진짜 목표라고 오판했다. 

로켓 조준은 간단했고 반궤도 차마다 6발씩 완전장착했다. 6일 오후, 아군의 차량이 대거 서쪽으로 향하는 것이 보였다. 도중에 연합군 전폭기에게 마구 당했다. 미군의 썬더볼트Thunderbolt는 최악의 전폭기였는데 둥글고 큰 엔진룸으로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영국군의 타이푼도 지상군에게 치명적이었다. 

늦은 오후 쌍안경으로 서쪽 도로를 관측하고 있었는데 4호전차 3대가 서쪽으로 이동 중이었다. 서로 100m 정도 떨어져 있었고 그 뒤에는 대공포 반궤도 차와 지원트럭이 따르고 있었다. 서쪽에서 썬더볼트가 나타나서는 하나씩 아군 대열을 훑고 지나갔다. 로켓을 발사했는데 탄착지점에 화염파편이 휘몰아쳤다. 


나는 2km 거리에 있었지만 도로위 끔찍한 광경을 분명하게 봤다. 도로를 따라 갑자기 거대한 붉은 꽃이 차례로 피어 오르는 것 같았다. 아군 4호 전차를 뚫고 지나가면서 부쉈다. 장갑판이 튀어나오고 트랙이 튀어나오더니 로켓이 엔진룸으로 파고 들어가 산산조각 냈다. 

트럭과 대공포차도 맞았다. 대공포는 한 발도 쏘지 못했다. 운전병이 탄 채로 차량 운전석과 바퀴가 날아가며 박살났다. 겨우 5초 밖에 안되는 시간이었는데 모든 전차와 트럭이 불타고 있었다. 

우리도 끔찍한 공습을 받을 것 같아서 위장포와 나뭇가지로 차량을 단단히 위장했다. 6월 11일 또는 12일에 서쪽 해변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고 공습을 피해 밤에 이동했다. 


정보장교와 이야기를 통신했는데 연합군이 노르망디 교두보에 상당한 전력을 강화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기만작전이 아니었다. 그들은 셰르부르Cherbourg를 향해 북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채널제도Channel Islands를 점령해서 항공모함처럼 중간 기지로 사용한다는 소문도 돌았다. 그렇지만 여전히 프랑스는 기만이고 주공격은 네덜란드라는 주장도 있었다. 

일부 보병장교는 기만상륙작전에 병사들에게 가서 싸우다 죽으라고 할 수 없다고 말했다. 6월 12일이 되자 해변상륙이 실제 주공격로로 확실해졌고 우리는 적을 다시 바다로 돌려보내야 했다.

아군은 해변교두보 부근에 상당한 기갑부대를 집결시키고 있었다. 21전차와 SS기갑사단이 연합군을 포위하고 있었다. 전차는 연합군공군을 속이기 위해 포탑을 뒤로 돌리고 길을 따라 전진 중이었다. 그리고 포탑 뒤에 나무판과 지붕을 얹어서 마치 건물인 것처럼 위장했다. 나도 우리 부대에게 철저한 위장을 명령했다. 


연합군폭격은 엄청났다. 1941~42년에 루프트바페가 러시아를 이렇게 폭격했다면 훨씬 좋은 결과를 만들었을 것이다. 

전방으로 향하자 북쪽에서 조명탄이 터졌고 우리는 건물 사이에 숨었다. 차에서 내려 건물 위로 올라가 쌍안경을 전장을 관측했다. 모든 것이 파괴되었다. 모든 것이. 

민간열차가 철로 위에서 마치 괴물애벌레처럼 솟구쳐 있었다. 들판에는 하늘로 발을 뻗고 뒤집어진 가축사체가 널려 있었다. 들판에는 포탄구덩이 천지였다. 5~60채의 집이 산산조각났다. 시내가 있었는데 불이 흐르고 있었다. 


랭카스터 폭격기가 추락해 불타고 있었다. 꼬리쪽 기관총수가 불에 붙은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우리 구축전차가 포탑을 아래로 내리고 포탄구덩이에 박혀 있었다. 승무원은 정신이 나간 채로 땅에 앉아 있었는데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 사방이 불붙은 잔해로 가득했다. 

아버지가 1914년 전쟁에서 겪었던 일을 말해준 적이 있었는데 바다처럼 펼쳐진 평원이 불타는 포탄구덩이 천지였다고 했다. 노르망디를 회상해보면 인류는 더 한층 발전했다. 불타는 포탄구덩이말고도 보이는 모든 것이 부숴졌다. 


우리 무기는 집결하는 적의 전차집단에게 사용할 예정이었다. 남쪽으로 가서 한주동안 예비대와 함께 숨어있다가 결정적인 순간을 기다리라는 명령을 받았다. 북쪽에서 일어나는 전투소음을 들을 수 있었고 매시간 지도를 보며 상황변화를 알았다. 7월 3주차까지 대기했다. 결국 3주 차에 부대를 이끌고 전방으로 향했다. 

미군이 셔먼전차 수백대를 모아서 생뢰지역을 돌파하고 남하하려 한다고 했다. 코브라Cobra작전이었다. 적이 돌파한다면 남과 동쪽으로 신속하게 전선을 확대시킬 수 있는 중대한 위기였다. 영국과 캐나다군이 캉Caen을 돌파하려고 집결한다는 정보도 있었다. 이렇게 되면 아군은 프랑스북부에서 밀려날 수 밖에 없었다. 

타이푼을 적시적소에 사용한다면 단 한 방에 기갑사단 전체를 날려버릴 수 있다고 판단했다. 코브라작전이 시작되기 전에 막을 수 있었다. 


타이푼 무기는 반경 1km 내의 모든 전차를 부술 수 있었고 반경 3~4km 내의 전차도 손상을 입힐 수 있었다. 충격파가 전차를 강타해서 엔진을 멈추고 연료선을 끊어 화재를 일으킨다. 포신이 틀어지고 트랙을 파괴하고 내부의 전차병도 다친다. 탄약이 터질 수도 있다. 

연합군은 작전을 시작하기 전에 병력을 밀집대형으로 모으는 경향이 있었다. 노르망디 당시의 타임이나 다른 잡지의 셔먼사진을 보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너무 밀집해서 마치 주차장같기도 하다. 공중폭격이 없기 때문에 무방비상태로 집결하는데 우리에게는 더없이 좋은 목표물이었다. 

전차집결지는 내륙으로 많이 들어와 있었고 기상조건은 훨씬 좋았다. 한여름 프랑스 날씨는 매우 덥고 바람이 거의 불지 않는다. 


생로 부근으로 이동해서 무기를 잘 위장해 두었다. 해가 저물자 전령이 장갑척탄병 소대와 함께 와서 연합군집결지에 접근하라는 명령을 가져왔다. 현장에서는 정보부대가 우리에게 상세한 설명을 했다.

프랑스인과 공중정찰 정보에 따르면 연합군이 아리엘Ariel이라는 곳에 전차를 대거 집결시켰다. 신의 사자라는 뜻이 있어서 좋은 징조로 생각했다. 약간 땅이 꺼진 지역이었고 연합군은 은폐하기 좋다고 판단했겠지만 실제로는 타이푼을 사용하기 더없이 좋은 환경이었다. 

밤새 바람도 전혀 불지 않고 기온도 15도 아래여서 기상조건도 이상적이었다. 연합군전차가 새벽에 움직이기 시작할 것 같아서 밤에 무기를 사용해야했다. 자정을 넘어 1시에 행동에 옮기기로 했다. 


다양한 전차 400대가 집결했던 것 같다. 타이푼을 동시에 퍼붓는다면 최소한 절반은 파괴시킬 수 있었다. 연합군사령관은 우리가 그런 무기가 더 가졌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우리는 여유분이 없었지만 7월 말이 되면 독일에서 더 만들어낼 수 있었다. 타이푼이 적중하면 연합군은 진격을 멈출 것이 분명했다. 아군 전차부대가 아리엘에 들어가 나머지 패잔병을 바다로 밀어냈을 것이다. 그 다음에 만들어지는 타이푼은 영국군부대에게 사용하면 되었다. 정보장교의 말대로 ‘연합군은 우리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고 생각하겠지만, 집이 머리 위로 무너져내려 깔리는 꼴’이었다. 

우리는 장갑척탄병의 엄호를 받으며 목적지로 이동했다. 아군 전차는 모두 충격파 지역에서 빠져나왔다. 전방에 아군 보병부대가 남아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들이 후퇴하면 연합군이 바로 밀고 나와 우리 발사지점을 위협했을 것이다. 우리도 충격파에 희생당할 각오였다. 죽지는 않더라도 청각이나 폐손상으로 중상을 입었을 것이다. 

프랑스를 잃으면 독일이 포위되고 결국에는 제국을 잃게 된다. 사소한 희생은 감수해야 했다. 

프랑스에서 타이푼이 성공하면 동부전선에서도 사용할 수 있었다. 적군은 수천대의 T34로 우리를 공격하고 있었는데 여러 번 사용하면서 개선하면 바람이 불거나 추운 날씨에도 사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동부전선은 다시 우리 것이 될 수 있었다. 생로에서 반궤도차 3대를 준비시키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내가 역사를 바꾸고 있다고 말이다. 


밤 12시 45분, 모든 장비가 준비되었다. 아리엘을 향해 조준했고 적외선 거리측정기로 최대한 정확하게 로켓각도를 맞췄다. 엄호 병사들에게는 방호참호를 3m 이상 깊게 파게 했다. 참호에서 전기점화선을 연결했다.

바람이 완전히 멈춘 밤이었다. 실전에서는 처음 사용하기 때문에 얼마나 큰 충격파가 일어날 지 상상이 안되었다. 12시 55분, 예정보다 빠르게 발사할 생각이었다. 역사가 바뀌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이런 망상은 반드시 어그러지기 마련이다. 결국에는 발사하지 못했다.


그냥 운이 나빴다. 적이 갑자기 포격하기 시작했다. 우리를 알고 있었던지 아니면 작전시작 전에 제압포격을 했던지 초원을 가로질러 포화가 쏟아졌다. 

참호에서 잠망경으로 보고 있었는데 한발이 반궤도차 근처에서 터졌고 한 대가 뒤집히면서 타이푼 탄이 갈라졌다. 기름이 새어 나와 불이 붙었고 석탄가루가 화약역할을 했다. 큰 화재가 발생하면서 반궤도차 3대가 모두 불탔다. 

100m 높이의 화염이 터졌으니까 전장에 있던 모든 사람이 봤을 것이다. 연합군은 아마 연료창이나 탄약창을 건드렸다고 생각했을테고 아군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잠망경이 녹아내렸고 우리는 참호에 엎드려 있었는데도 심한 화상을 입었다.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 더 이상 타이푼을 제작하지 못했다. 연합군은 재앙의 입구에서 벗어났다. 

실제로 사용했다면 연합군에게 물리적으로 심리적으로 큰 타격을 주었을 것이다. 그들은 우리의 현대식 무기를 두려워했다. 특히 판터전차, 메셔수미트 262. 로켓기술도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1944년에 프랑스를 넘겨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 이후 근거리 차량발사는 너무 불안정하고 적의 공격을 받기 쉽다고 생각했다. 다른 방법으로 공격하는 시험을 거쳤다. 타이푼을 효과적으로 사용할 여러 무기체계를 마련했다. V2 로켓은 초음속이어서 너무 빨라서 안되고 V1 로켓은 아주 훌륭한 공격무기가 될 수 있었다. V1이 런던에 떨어지는 뉴스영상을 보면 가스혼합물을 터트리기에 아주 좋았다. 

메셔슈미트 262와 같은 항공기에서 타이푼폭탄을 투하하는 시험도 했다. 연합군이 대처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항공기였다. 1943년 루프트바페가 이탈리아전함에 제대로 사용했던 무선원격조종의 글라이더 폭탄도 있었다. 



공대지미사일인 헨셀Henschel Hs 293입니다. 이탈리아가 연합군으로 넘어가자 전함 2척을 공격해 한 척을 침몰시켰습니다. 


원격조종이 가능한 글라이더폭탄에 적외선장치를 결합하면 무시무시한 미사일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1944~45년 상황이 워낙 안좋아서 개발속도가 매우 느렸다. 그리고 순도높은 알루미늄분말을 구하기도 힘들었다. 타이푼폭탄을 제대로 개발하고 사용했다면 원자폭탄이 그랬던 것처럼 전쟁흐름을 바꿨을 것이다. 미국은 원자분야에서 훨씬 앞섰으니까 어떻게 바뀌었을 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우리는 원자폭탄에 대해 알지 못했다. 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원자학에 관심있는 다른 기술장교와 종종 의견을 나눴다. 

1930년대 이후 라듐과 같은 반응물질을 사용해 강력한 폭탄을 만드는 이론이 있었다. 나나 그 장교나 원자폭탄은 핵물질을 광범위하게 뿌려서 황폐화시키는 것으로 생각했지 라듐 자체를 폭탄으로 만드는 것은 생각도 못했다. 


1945년 8월, 미군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탄을 투하했다는 뉴스를 듣고 ‘우와, 미국이 우리와 같은 타이푼폭탄을 만들었구나’라고 생각했다. 공중에서 맹독성 라듐을 대거 퍼트리는 거대한 타이푼폭탄인 것으로 착각했다. 

신문이 원자력을 이용한 폭탄이라고 보도했는데 우라늄과 같은 물질을 몰랐고 이게 어떻게 터질 수 있는지도 이해하지 못했다. 완전히 새로운 경지라는 것만 알았다. 


1945년 8월, 나는 독일군 차량을 농업용 트랙터로 개조하는 공장에서 일했다. 미군이 1945년 4월에 엘베Elbe강에서 서부독일 전체를 점령했을 때에 항복했다. 일반 포병장교로 평범한 신분이었다. 7월까지 독일내 포로수용소에 있다가 아일랜드 북부의 영국군 수용소로 이감되었다. 

북부 아일랜드인은 상당히 활기찬 사람들이었다. 모든 것이 농담거리였는데 전쟁도 그들에게는 농담거리였다. 

공학기술이 있었기 때문에 8월에 독일로 귀국해 공장에서 일할 기회를 얻었다. 공장은 경전차, 반궤도차, 비슷한 차량을 농업용 트랙터로 개조했다. 농업이 우선이었기 때문에 수천대의 궤도차량이 대기 중이었다. 


포로심문 중에는 타이푼폭탄을 말하지 않았다. 간단한 취조를 거쳤는데 숨겨 놓은 폭탄이나 무기를 물었다. 나를 그냥 포병장교로만 생각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미군은 타이푼 같은 무기에 관심도 없어졌다. 나도 시민으로 돌아갔다. 이제는 타이푼에 대해 숨길 이유도 없고 잘못한 것도 없다. 

내 이야기를 사전허락없이 신문과 같은 대중매체에 내지 말기 바란다. 대중의 관심을 끌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