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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러시아

튜톤기사단의 흥망(1부) - 러시아침공

by uesgi2003 2020. 7. 8.

발트해의 상황
발트해에서의 십자군원정은 중동십자군과 같은 명예는 없었지만 훨씬 큰 영향을 미쳤고 현재까지 발트해민족 대부분이 가톨릭 또는 개신교 신자로 남아 있다. 독일과 스칸디나비아 상인이 시장을 위해 무력개척에 나섰고 그 다음에 검의 형제단Sword Brethren, 그 다음에 독일, 덴마크, 스웨덴 십자군이 새 영지를 찾아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그들이 분열을 일으킨 틈을 타 튜톤기사단Teutonic Knights이 나타났다. 
북부십자군에 동참한 독일은 황제와 교황의 갈등 때문에 12세기 말~13세기에 무정부상태였고 덴마크와 스웨덴도 러시아, 비잔틴제국, 무슬림과 멀리하면서 급격하게 유럽화되고 있었다. 
북부십자군은 4차십자군에 비해 소규모였다. 교황 인노첸시오Innocent 3세가 리보니아Livonia의 교회를 지키겠다며 북부독일인을 소집하면서 시작되었다. 북부십자군이 본격적인 진격을 할 때에도 발트해와 핀란드 이교도가 목표였다. 교황에게는 지중해의 이슬람이 최우선이었다. 

 

이야기의 무대가 되는 발트해 주변의 부족국가입니다. 아직 도시국가 수준이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덴마크, 스웨덴, 러시아로 통일해서 사용하겠습니다. 

덴마크는 1191년부터 발트해연안을 약탈하다가 13세기 초에는 아예 발트해 전체에 덴마크제국을 만들려고 했다. 1219년, 리가Riga주교는 러시아의 압박에 놀라 덴마크가 점령한 모든 이교도땅을 가져도 좋다고 허락했다.
1년 후, 덴마크는 현재의 에스토니아Estonia수도인 탈린Talinn에 요새를 건설했다. 검의 형제단도 에스토니아를 탐내고 있었기 때문에 분쟁이 시작되었다. 1227년, 덴마크군이 보른회베트Bornhoved전투에서 참패를 당해 발트해제국 건설은 무산되었지만 1346년까지 에스토니아 북부를 소유했다. 이 지역의 패권은 점차 검의 형제기사단으로 그리고 다시 튜톤기사단Teutonic Knights로 옮겨갔다. 
덴마크가 발트해를 장악하려고 하자 리보니아Livonia의 독일영주들은 인근의 이교도영지를 점령해 이에 대항하려 했다.

 

1219년 덴마크가 에스토니아 부족을 정벌한 린다니세Lyndanisse 전투입니다. 덴마크국기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전형적인 민족화입니다. 

알브레히트 폰 북스회프덴Albert von Buxhoeved주교도 독일황제에게서 토지귀족Territorial Prince 인정을 받았다. 그와 에스토니아 주교는 검의 형제기사단(그림 참조)을 설립하고 기독교 리보니아를 방어하려고 했다. 그렇지만 검의 형제기사단이 덴마크 그리고 자신의 동생과 결혼동맹 중인 러시아 프스코프Pskov에게 약속한 에스토니아 지역을 노리면서 사이가 벌어졌다. 
페이푸스Peipus호수 서쪽 운간니아Ungannia의 이민족 에스트Est의 타르투Tartu요새가 걸림돌이었다. 이 요새는 프스코프에 복종하고 공물을 보냈기 때문에 러시아인 수비대도 있었다. 검의 형제기사단은 대놓고 타르투를 노렸고 알브레히트주교는 형제인 헤르만Hermann주교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엉뚱하게 헤르만과 검의 형제기사단은 제비를 뽑아 정복할 땅을 나누기로 했다. 헤르만은 운간니아를, 검의 형제기사단은 서쪽의 사칼리아Saccalia를 뽑았다. 1224년, 격전 끝에 타르투를 점령하고 러시아로 소식을 전할 단 한 명만 남기고 모두 죽였다. 

 



헤르만주교는 이제 형제와 같이 권력을 가진 영주작위를 노렸다. 광활한 영지를 친척에게 나누어주고 독일인과 신부를 초대해 정착하고 선교하게 했다. 헤르만은 주교후Pice-Bishop 인정을 받아 덴마크인과 검의 형제기사단에게 압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십자군활동이 성과를 보이자 교황은 이제 북부십자군에 관심을 가졌고 중동의 십자군처럼 독립영주의 난립을 막으려 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지역주민을 개종시켰다. 


튜톤기사단의 상황
1189~90년, 아크레Acre공성전에서 만들어진 병원기사단Order of Hospital(튜톤기사단)은 1198년에 군사기사단으로 재편성되었다. 13세기 초, 튜톤기사단은 헝가리 동부방어를 도왔지만 자체 영지를 노리다가 추방당했다. 튜톤기사단은 처음부터 자체 영지를 간절히 원했고 기사단장 헤르만 폰 살사Hermann von Salza는 1226년에 프로이센Prussia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기로 했을 때에도 독립을 요구했다. 
튜톤기사단은 자체 영지를 확보한 후에 지역 주교와 리가Riga의 상인과 충돌을 빚었다. 튜톤기사단은 형제기사단이나 독일정착인처럼 원주민을 악마의 노예라 부르며 학대했다. 2차대전 당시 나치는 튜톤기사단의 프로이센점령을 독일의 탄생으로 미화시켰다. 

튜톤기사단이 프로이센의 이교도와 전쟁을 벌이는 동안, 리보니아에서는 형제기사단, 헤르만주교, 덴마크인의 갈등이 격화되었다. 1234년, 교황은 대리인을 파견해 헤르만의 영지를 타르투로 제한했다. 그래도 리가의 형제와 함께 일대에서는 가장 강력한 권력을 유지했다. 
2년 후, 사울레Saule강 전투에서 십자군과 형제기사단이 참패를 당했다. 형제기사단은 단장까지 전사해 조직이 와해되었고 어쩔 수 없이 튜톤기사단에 합류했다. 덴마크는 형제기사단의 영지를 노리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튜톤기사단과 대립했다. 
1238년, 교황은 에스토니아를 덴마크에게 주고 라트비아를 튜톤기사단에게 주었다. 교황은 아마도 튜톤기사단을 동원해 동방정교 러시아에 대항할 계획이었을 것이다. 이제 기사단은 폴란드에서 페이푸스호수에 이르는 긴 국경선을 지키게 되었고 영향력도 그만큼 커졌다.

가톨릭과 동방정교Orthodox는 11세기부터 반목하기 시작했다. 로마교황은 동쪽의 동방정교를 흡수하고 싶었고 1204년에는 4차십자군이 비잔틴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을 점령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에스토니아 타루를 점령하자 러시아의 노브고로드Novgorod에게 가톨릭으로 전향하라고 집요하게 강요하다가 실패했다. 이미 십자군원정의 열기가 식은 상태였고 특히 독일은 더 이상 관심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로마교황의 야망은 이뤄지지 않았다. 

 


러시아의 상황
중세 러시아에는 이런 말이 있었다. “감히 누가 신과 위대한 노브고로드에 맞설 수 있는가?” 러시아북부를 통치하던 노브고로드는 대단한 도시였다. 러시아 영토는 광활하지만 인구가 적었고 도시의 이름을 딴 10개의 지역구로 구분되었다. 그 중에서 키에프Kiev가 여전히 중심이었고 대공Grand Prince이 거주했다. 보야르Boyar(중세 기사와 비슷한 동유럽귀족직위)와 도시상인계급의 권한이 커지고 있었다. 
노브고로드는 울창한 숲 가장자리에 있었고 주변이 늪이어서 경작지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교역에 주력했다. 볼호프Volkhov강을 통해 라도가Ladoga호수와 핀란드만까지, 그리고 육로로 발트해, 키에프, 비잔틴제국과 중앙아시아로 연결되었다. 
원래는 원주민도시였다가 9세기 말에 키에프가 군대를 보내 복종시켰다고 한다. 노브고로드는 교역목적에 맞게 도시가 개발되었다. 강 동쪽에는 외국상인의 대규모 거주지가 있고 서쪽에는 도시를 방어하는 산타 소피아 요새가 있었다. 이 요새에는 도시를 건설한 슬라브, 핀란드와 발트해 사람들이 거주했다. 모두 동방정교로 개종했기 때문에 러시아인이 되었다. 

 

노브고로드의 위치입니다. 당시에는 키에프, 노브고로드, 프스코프(지도 왼쪽 아래) 등이 모스크바보다 영향력이 훨씬 컸습니다. 

노브고로드는 러시아 동부개척의 기지역할도 했다. 1100년, 상인이 우랄Ural산맥을 넘어 오브Ob분지로 들어갔다. 노브고로드는 북극까지 통치영역을 넓혔고 핀란드원주민에게 공물을 받았다. 북부지역은 막대한 털가죽과 생선을 생산했다. 상인은 강에서 해적질을 벌였고 농민은 일확천금을 노리며 북부로 이주했다. 
동쪽으로는 더 이상 진출하지 못했다. 1079년, 군대를 보냈지만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1193년, 다시 보낸 개척부대도 전멸했다. 우랄산맥 너머에는 악마가 산다는 소문이 퍼졌다. 
노브고로드 부근에는 위성도시인 프스코프Pskov가 있었는데 비교도 안되게 기름진 경작지를 가지고 있었다. 키에프는 블라드미르 수즈달Vladmir Suzdal에게 큰 피해를 입은 후에 급격하게 위력을 잃어갔고 중앙러시아가 대공의 지지기반이 되었다. 러시아 도시국가는 동방정교로 연결되었고 더 이상 로마가톨릭과 무관하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노브고로드, 폴로츠크Plotsk, 볼히니아Volhynia는 발트해 민족에 별 관심이 없었다. 교역로가 열려 있는 한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일부러 선교를 하지 않았는데도 동방정교가 핀란드만 부근에 퍼지기 시작했고 스웨덴십자군과 충돌하는 계기가 되었다. 
노브고로드는 북쪽의 이민족지역을 완충지대로 삼으면서 한발 물러섰다. 1211년과 1218년, 프스코프와 노브고로드는 십자군의 공격을 받는 에스토니아를 도왔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러시아 주요 도시국가는 내부문제가 더 시급했고 노브고로드는 독일과 발트해 북부에서 많은 사람이 이주해와 서쪽영토 상실을 복구하고도 남았다. 
1223년, 몽골이 러시아 남부를 침략했고 일년 후에는 발트해에 전염병이 퍼졌다. 1238년, 리투아니아가 부족을 통일하면서 급부상했고 형제기사단과 튜톤기사단의 합병은 오히려 반길 일이 되었다. 
몽골이 대대적으로 침략하자 노브고로드와 프스코프는 십자군에 대해 입장이 달라졌다. 일부는 몽골군과 협상할 것을, 일부는 대공의 지휘아래 저항할 것을 주장했다. 프스코프는 알베르트와 헤르만주교의 형제를 축출해 십자군과 대립각을 세운 반면에 다른 도시는 십자군과 유대를 강화했다. 

노브고로드를 포함한 주요 도시의 권력층이 여러 사건으로 밀리고 밀려나는 동안, 몽골은 두번째 침공을 준비하고 있었다. 스텝민족과는 그동안 균형이 깨질 때마다 대대적인 전쟁이 벌어졌지만 몽골은 차원이 달랐다. 
1237~38년 겨울, 몽골은 러시아북부까지 진출했고 노브고로드는 큰 충격을 받았다. 알렉산드르 네브스키Alexandre Nevskii는 미처 대비를 못했기 때문에 복종하기로 했다. 몽골은 그 제안을 받아들이고 도시 앞에서 되돌아갔다. 
몽골군은 러시아 특유의 봄 진흙탕에 놀라 물러난 것이지만 알렉산드르는 복종의 약속을 지켰고 다른 도시도 그 뒤를 따랐다. 노브고로드의 경제와 문화는 계속 발전한 반면에 이제 동방정교가 서유럽 가톨릭에 연결될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졌다. 

 

러시아 건국영웅이자 성인으로 추앙받는 알렉산드르 네브스키입니다. 오늘의 또 다른 주인공입니다. 십자군에게는 전면전을, 몽골에게는 복종을 선택해 러시아와 동방정교를 구해냈습니다. 

가톨릭진영은 노브고로드의 분열과 쇠약을 기회로 삼으면서 동방정교가 이교도를 제대로 교화시키지 않는다는 명목을 내세웠다. 교황이 부진한 북부십자군을 보고 화를 내며 동방정교 원정으로 십자군단합을 노렸다는 주장도 있다. 십자군도 이교도 리투아니아와 휴전을 맺어 노브고로드를 노릴 여유가 생겼다. 
1237년, 교황 그레고리오Gregory는 모데나의 윌리암William of Modena에게 십자군조직을 명령했고 공교롭게도 1239년에 몽골이 러시아를 대대적으로 침공해 러시아는 십자군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다. 
윌리암은 북유럽을 누비며 튜톤기사단의 헤르만 발케Bermann Balke와 덴마크의 발데마르Beldemar왕을 만나 둘 사이를 화해시켰다. 튜톤기사단은 에스토니아 대부분을 덴마크에 반환했지만 형제기사단의 불만이 터지지 않을 정도의 땅은 유지했다. 에스토니아의 귀족도 분쟁을 끝내고 협조를 약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