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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러시아

튜톤기사단의 흥망(2부) - 페이푸스호수 전투

by uesgi2003 2020. 7. 8.

(이번 이야기에서 잠시 끊고 2차대전 서부전선 이야기를 한동안 한 후에 다시 이어갈 예정입니다.)

 

 

타르투주교의 병력은 기사 300명과 에스토니아 보조병 1,000명, 나머지 에스토니아지역에서 기사 200명과 보조병, 튜톤기사단은 기사 350명과 보조병으로, 십자군은 총 800명의 기사와 1,000명의 보조병이 전부인 것으로 추측된다. 
러시아군은 규모를 아예 알 방법이 없다. 알렉산드르 네브스키와 형제인 안드레이Andrey의 친위대 그리고 노브고로드 민병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십자군의 에스토니아 보조병과 같은 이민족 보조병이 있었을 것이다. 몽골 궁기병파견대는 수백명이 고작으로 전체 병력은 아무리 많아도 7,000명을 넘지 않았다. 
양측의 정예병 규모는 거의 비슷했고 러시아군의 규모가 십자군보다 훨씬 많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노브고로드의 발트해 진출로를 막으려던 해상작전이 실패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강과 육지로 침공하기로 했다. 스웨덴군이 네바Neva강 남쪽 강변에 진지를 만들고 노브고로드의 교역로를 차단하자 상인들은 알렉산드르와의 갈등을 끝내고 도움을 간청했다. 
알렉산드르는 새벽에 적진에 돌격해 진지를 무너트렸다. 십자군이 처음으로 겪은 알렉산드르의 용병술이었다. 알렉산드르는 스웨덴 지휘관과 맞대결을 벌여 얼굴에 부상을 입혔다. 러시아군은 겨우 20명 정도만 전사했고 전투를 벌이지도 않은 적군의 시체가 강 건너편에서 다수 발견되어 대천사가 도와주었다는 말이 퍼졌다.
패전한 스웨덴은 러시아 동방정교의 진출을 막기 위해 핀란드 중앙의 개종에 주력했다. 알렉산드르는 네바강의 승전으로 네브스키라는 별칭을 얻었다. 

핀란드만의 남쪽 해안을 따라 진격하던 중앙 십자군은 규모가 컸고 그만큼 성공을 거뒀다. 일단 스웨덴군을 물리치자 노브고로드 상인들은 서유럽군과의 평화를 원하며 다시 한 번 알렉산드르와 대립했고 그는 가족을 데리고 모스크바 부근으로 물러났다. 
결국 친서방 진영이 승리를 거둔 것처럼 보였지만 1940~41년 겨울, 십자군 일부가 노브고로드에서 30km 떨어진 곳까지 진출하며 약탈했다. 튜톤기사단, 덴마크군, 에스토니아 보조병은 코포례Koporye를 점령했다. 
1241년 4월, 십자군은 석조 성을 쌓아 영구적인 지배를 노렸다. 십자군의 잔인한 약탈 때문에 모든 가축을 빼앗긴 러시아 농부는 이듬해 농사를 지을 수 없었다. 노브고로드는 알렉산드르에게 매달렸다. 

설상가상으로 세번째 십자군 대열이 페이푸스호수 남쪽에 나타났다. 프스코프에서 추방당한 야로슬라프도 여기에 동참했고 사기가 높았다. 프스코프주민은 전략요충지인 이즈보르스크Izborsk요새를 내줄 생각이 없었다. 
9월 16일, 전투가 벌어졌고 십자군은 800명의 러시아인을 죽이는 대승을 거뒀다. 러시아쪽 자체 기록은 겨우 600명만 참전했다고 한다. 러시아군은 심각한 피해를 입었고 지휘관까지 전사했다. 
십자군은 프스코프 부근에 진영을 차리고 일주일 동안 동방정교 교회를 불태우고 마을을 약탈했다. 프스코프의 친서방진영이 힘을 얻으면서 아이들을 인질로 내주고 성문을 열었다. 반대진영은 가톨릭의 입성을 반대하며 노브고로드로 달아났다. 십자군은 기사 2명과 일부 보조병만 성문에 세우고 프스코프는 친서방진영에게 맡기는 결정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십자군은 알렉산드르 네브스키가 노브고로드를 떠났다고 들었기 때문에 원정성공을 자신했다. 이미 노브고로드 북쪽과 핀란드만 남쪽지역을 차지했고 하인리히Heinrich주교의 강력한 함대가 해상교역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하인리히는 로마로 달려가 교황에게 러시아 점령지의 주교직을 달라고 요청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대반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몽골군이 러시아의 저항을 무너트린 후에 중앙유럽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십자군은 폴란드, 동부독일, 헝가리에서 몽골군을 상대할 지 아니면 계속 러시아를 밀어붙일 지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덴마크왕이 죽고 아들 카뉴트Canute가 귀국하면서 수습을 혼란하기 위해 덴마크군이 이탈했다. 형제기사단 세력은 오히려 이것을 기회로 삼고 에스토니아 북부를 노렸다. 

몽골군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노브고로드를 공격하지 않고 러시아군이 십자군을 상대하게 내버려두었다. 노브고로드는 알렉산드르의 복귀를 요청했고 알렉산드르는 친위대와 함께 볼가강을 거슬러 노브고로드로 향했다. 
알렉산드르는 도시에 들어서자 마자 자신에게 반대했던 사람들을 목매달았다. 그리고 바로 친위대를 이끌고 핀란드만 남쪽 해안의 십자군 수비대를 공격했다. 십자군이 코포례에 새로 건설한 석조성채를 손쉽게 점령했다. 기록에 따르면 예상 밖으로 대부분의 포로를 풀어주었다. 그는 노브고로드 지역만 지키고 싶었기 때문에 더 이상 십자군을 몰아붙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몽골이 훨씬 큰 위협이었다. 
이상하게도 프스코프 십자군은 이런 상황에 대응하지 않았다. 프스코프의 극소수 병력을 보강하지 않았다. 십자군 내부의 분열로 노브고로드 진출계획이 지연된 탓이었다. 
알렉산드르는 수즈달에서 동생 안드레이와 그의 친위대를 합류시키고 노브고로드 민병대와 함께 1242년 초, 서쪽으로 진군했다. 아직 추위가 매서웠지만 오히려 습지를 건너기 가장 좋은 시기였다. 러시아군이 프스코프 앞에 도착하자 성문에는 튜톤 기사 2명과 보조병 몇 명이 고작이었다. 이즈보르스크에 있던 1,000명 이상의 십자군이 움직이기도 전에 프스코프가 함락되었다(그림 참조). 

 

 

이번에는 알렉산드르가 리보니아 깊숙이 진출했고 십자군도 본격적인 대응에 나섰다. 십자군에게는 다행히도 몽골군이 중앙유럽에 큰 피해를 입혔지만 점령하지 않았다. 몽골 칸에 대항하던 코텐Koten칸과 킵차크Kipchaq군에게 피난처를 마련해준 헝가리 토벌이 목적이었다. 어이없게도 코텐칸은 일년 전에 이미 헝가리동맹에게 살해당했는데도 말이다. 지도자를 잃은 킵차크군은 헝가리에 남아 킵차크칸국에 합류했다. 
알렉산드르는 이즈보로스크의 십자군수비대를 피해 타르투 남쪽의 헤르만주교 영지로 들어섰다. 십자군이 바로 대응하지 않을 것으로 예상하고 병력을 넓게 펼쳐서 최대한 피해를 주려고 했다. 타르투 남동쪽 모오스테Mooste에서 벌어진 서전은 십자군의 승리였다.
모오스테 다리는 매복당하기 딱 좋은 병목지점이었고 하필이면 상대가 튜톤기사였다. 노보고로드민병대를 이끌던 도마슈 트베르디슬라비치Domash Tverslavichi가 전사했고 패잔병은 알렉산드르의 본대로 돌아갔다. 
헤르만주교가 군대를 이끌고 타르투를 나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알렉산드르는 덴마크군과 튜톤기사단도 거기에 합류했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전체 병력은 러시아군에게 크게 못 미쳤지만 덴마크군이 합류해 상당한 전력이었다. 그리고 튜톤기사단 덕분에 십자군의 무장, 훈련과 규율은 오히려 러시아군을 능가했다.

아이젠슈타인Eisenstein의 명작 알렉산드르 네브스키 영화 덕분에 페이푸스 전투가 얼음 위에서 벌어졌다는 오해가 깊다. 페이푸스호수는 마치 모래시계처럼 생겼고 수심은 겨우 2m에 불과했다. 그리고 중간에 피이리사르Piirissaar섬이 있어서 겨울에는 호수를 쉽게 건널 수 있었다. 양측의 구체적인 이동로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역사기록에서도 추측하고 있을 뿐이다. 

 

 

붉은 화살표가 알렉산드르의 그의 친위대 이동로입니다. 

 


러시아군의 정찰대는 십자군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알렉산드르에게 제대로 전달했다. 알렉산드르는 노브고로드로 곧바로 가지 않고 호수가의 까마귀 바위로 이동했다. 이 지점도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기 때문에 피이리사르섬 방향으로 돌출된 지역으로 추측된다. 호수 표면이 거칠게 얼어 천혜의 장애물이 되었기 때문에 알렉산드르는 야전을 선택했다. 
노브고로드 연대기Novgorod Chronicle에 따르면 러시아군은 십자군에 맞서 호수위에 정렬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호수 바로 옆의 땅에 정렬했을 것이다. 이후 벌어진 전투는 알렉산드르 네브스키의 삶Life of Alexandre Nevskii에 기록되었는데 너무 허술해서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양측이 호수 위에서 대치하고 알렉산드르가 기도를 올린 후에 격돌했다고 한다. 
‘두 군대는 토요일 해가 뜨자 격돌했다. 끔찍한 학살이 벌어졌고 창이 부딪쳐 부러지고 얼어붙은 호수를 이동하며 칼이 충돌했다. 피로 뒤덮여 얼음이 보이지 않았다.’

 


이 기록에 따르면 십자군은 알렉산드르를 처음부터 노렸다는데 중세전투에서는 일반적인 전술이었다. 알렉산드르의 친위대 드루지나Druzhina(아래 사진 참조)는 ‘오 우리의 주군이시어. 이제 당신을 위해 목숨을 바칠 시간입니다’라고 외쳤다. 
다른 기록도 아주 약간의 정보만 추가할 뿐이다. 십자군은 전통적인 전술대형인 쐐기진형으로 돌격했고 얼음위에서 전투가 벌어졌다고 한다. 리보니아 연대기를 보면
‘그럼에도 그들은 러시아군을 공격하기로 했다. 적은 궁수가 많았고 왕의 병사(에스토니아 북부 덴마크군)에게 과감한 공격을 했다. 곧바로 형제(튜톤 기사단)의 깃발이 궁수들 사이에 휘날리고 칼에 투구가 떨어져 나갔다. 양측의 많은 병사가 풀 위에 쓰러졌다’라고 기록했다. 

 

페이푸스전투 100년 후의 러시아 기병 그림입니다. 비잔틴제국, 몽골과 스텝부족의 영향으로 서유럽과는 많이 다른 모습입니다. 

 

당시 두 군대의 전통적인 전술을 생각하면 이 정도 정보로도 전황전개를 재현하기 충분하다. 러시아궁수는 중앙진영에 있었고 소수의 몽골 또는 투르크 스텝 궁기병은 한쪽이나 양쪽 측면에 배치되었다. 아마 더 공격적인 우익 끝에 배치되었을 것이다. 
러시아군은 수백 년 동안 비잔틴과 이란의 영향을 받았다. 궁수는 수비보다는 공격에 치중했고 북쪽(우익)에 접근하는 덴마크군을 공격했다. 덴마크군이 북쪽에 배치되었다고 추측하는 이유는 명예로운 전장인 중앙전투는 튜톤기사단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헤르만주교는 지휘를 위해 중앙에 있었고 그의 민병대도 중앙에 있었다. 경무장의 에스토니아 보조병은 후방에 배치되었다. 

 

모처럼 편집했으니깐 클릭확대해서 참조하세요. 

전투는 격전이었지만 오래 걸리지 않았다. 십자군이 러시아군 대열 깊숙이 파고 들었기 때문에 대부분 땅위에서 벌어졌다. 전투의 향방은 북쪽에서 이미 결정 난 상태였다. 궁기병대가 덴마크군을 간단하게 물리쳤다. 대천사의 개입을 주장하던 알렉산드르 네브스키의 삶에서도 궁기병의 활약에 대해 언급했을 정도였다. 십자군은 궁기병전술을 처음으로 마주쳤고 화살세례를 맞은 덴마크군은 대처할 방법이 없었다. 
십자군은 러시아군 대열 안으로 파고들자 곧바로 포위당했고 백병전이 벌어졌다. 알렉산드르의 친위대는 헤르만주교의 민병대를 압도했다. 민병대는 그대로 달아났다. 전투의지가 없던 에스토니아 보조병이 더 이상 접근하지 않아 십자군 기사는 절대적인 열세에 몰렸다. 
리보니아 연대기는 십자군의 완패를 인정했다. ‘그 후 형제기사단이 완전히 포위당했다. 러시아군이 너무 많아서 독일기사 한 명당 60명이 달라붙었다.’

 

튜톤기사단 포로와 함께 노브고로드로 돌아온 알렉산드르입니다. 

노브고로드 연대기는 독일군과 덴마크군 400명이 죽었다고 주장하지만 다소 과장된 숫자로 보인다. 리보니아 연대기도 튜톤기사 20명이 죽었다고 기록했다. 일부 지휘관은 이후 어떤 기록에도 이름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이 전투에서 전사했을 것이다.
알렉산드르는 프스코프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귀환했다. 십자군에 협조한 죄를 모면하기 위해 신부와 승려가 십자가를 들고 나왔다. 알렉산드르는 포로로 잡은 기사를 앞세워 노브고로드로 들어갔다. 
알렉산드르는 십자군의 침공을 막은 것으로 충분했다. 그는 몽골과의 관계가 더 중요했다. 양측은 평화협상을 원했고 십자군은 이즈보르스크요새를 포함해 점령지를 모두 반환했다. 십자군 영지에서는 발트해 원주민이 쿠를란트Kourland와 프로이센에서 저항을 시작하더니 에스토니아까지 번졌다. 남쪽에서는 프로이센 장로들이 폴란드와 접촉해 7년 동안 저항했다. 

새 교황 이노첸시오Innocent 4세는 동방정교에 대해 군사수단을 버리고 외교를 선택했다. 전사자 중에 형제기사단이 많았기 때문에 더 이상 튜톤기사단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타르투의 헤르만주교도 튜톤기사단의 요구에 따라 러시아대신에 발트해와 리투아니아의 이교도로 시선을 돌렸다. 덴마크왕은 에스토니아에 부담을 느끼고 튜톤기사단에 많은 것을 양보하다가 결국에는 1346년에 매각했다. 

 

알렉산드르는 20년 후인 1263년에 사망했고 동방정교는 그를 성인으로 추대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