킵차크 칸국, 킵차크 한국, 금장 한국로 혼용하기 때문에 어떤 것을 사용해도 괜찮습니다.
1380년 9월 8일 오전, 돈Don강 위에 짙은 안개가 내려 앉았다. 러시아군의 긴 대열이 네트라브다Nepravda강이 합류하는 도강지점에 길게 늘어섰다. 2km 정도를 걸어 킵차크 칸국Golden Horde 몽골군이 기다리는 전장에 도착했다.
러시아군 지휘관 드미트리 돈스코이Dmitry Donskoy모스크바대공은 동방정교Orthodox신앙을 위해 죽음을 각오하자도 연설했다. “형제들이여. 신이 바로 우리의 피난처이고 힘이다.”
그리고 뒤에서 몰래 모스크바귀족 미하일 브레노크Mikhail Brenok와 갑옷을 바꿔 입었다. 브레노크는 성모 마리아, 성 게오르기우스St George, 성 안드레아St Andrew 깃발과 함께 러시아군 중앙의 대공 자리에 섰다.
드미트리는 몽골군이 자신만 가장 먼저 노릴텐데, 몽골군이 러시아군의 중심인 자신을 죽이면 대열이 무너지고 전장에서 달아날 것이 분명했다.
가장 앞 1번이 드미트리대공입니다.
당시 30세였던 대공은 전투 초반부터 위험을 무릅쓰기 보다는 일반 귀족으로 중앙에서 지휘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다. 부대 지휘관에 명령을 전달할 기병만 거느리고 브레노크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징기스 칸Genghis Khan의 손자인 바투Batu 칸은 2년간 키에프 루스Kievan Rus(지도 참조)를 정복했고 1240년부터 러시아 공국을 거의 250년 동안 통치했다.
징기스 칸은 네 아들에게 정복한 영토를 유산으로 남겼고 바투 칸은 몽골제국 서쪽 가장 끝에 킵차크 칸국을 세웠다. 몽골인은 실제 통치보다는 상왕으로 정기적인 공물을 받았고 러시아인의 반 자치권을 허용했다.
대신에 러시아 공국은 몽골이 요구하면 언제라도 군대를 지원해야 했다.
킵차크 칸국은 다시 청장Blue 칸국과 백장White 칸국으로 나누어 서쪽의 청장 칸국은 바투가 통치하고 동쪽 백장 칸국은 형제인 오르다Orda가 통치했다.
바투는 볼가Volga강 하류의 사라이Sarai에 수도를 세웠고 투르크전사를 대거 편입해 적을 공격했다. 러시아인은 투르크-몽골전사를 타타르Tatar라고 불렀다.
14세기 초중반, 우즈베크Uzbek 칸 시대에 최절정에 올랐다가 1341년에 그가 죽자 내부 분열이 일어나 권력투쟁이 시작되었다. 청장 칸국은 급격하게 몰락했고 리투아니아Lithuania대공국이 세력을 넓히며 이 지역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14세기 중후반, 러시아공국도 점차 세력을 되찾기 시작했고 마찬가지로 백장 칸국도 내부문제로 서서히 무너져갔다.
징기스 칸 직계만이 몽골 칸이 될 수 있었다. 1367년, 몽골군벌 마마이Mamai는 창장 칸국을 차지하면서 꼭두각시 칸을 앞에 내세웠다. 1378년, 백장 칸국 왕좌에 오른 토흐타미시Tokhtamysh는 마마이를 공격했고 사라이를 점령했다.
마마이는 수도를 잃으면서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고 토흐타미시에게 반격해 수도를 되찾으려고 러시아 봉국에게 무리한 공물을 요구했다.
역시 우측 중앙 1번이 마마이입니다.
모스크바는 12세기 중반에 블라디미르-수즈달Vladimir-Suzdal공국의 군사전초기지였었다. 계속 확장되다가 1263년에는 공국의 지위를 얻었다. 1328년, 키에프의 동방정교 대주교직을 모스크바로 옮겨온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359년, 모스크바 이반Ivan 3세공이 죽었고 9살인 드미트리 이바노비치가 블라디미르와 모스크바를 모두 통치하게 되었다. 나이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대주교Metropolitan 알렉시우스Alexius가 섭정하며 교육을 맡았다.
3년 후, 드미트리가 통치업무를 일부 시작하면서, 마마이에게 수즈달 드리트리 콘스탄티노비치Dmitri Konstantinovich가 가지고 있던 대공호칭을 자신에게 달라고 요청했다. 대공으로 오르면 훨씬 많은 권력을 차지할 수 있었다.
그는 결국 대공에 올랐고 나이가 들면서 점차 재능있는 통치자이자 지휘관이 되었다.
1378년, 드리트리대공이 마마이가 요구한 공물을 제대로 바치지 않자, 마마이는 무르자 베기치Murza Begich를 보내 모스크바를 공격했다. 드미트리는 모스크바 남쪽 160km 떨어진 보즈하Vozha강에서 몽골군을 격파했다.
마마이는 드미트리가 공물을 보내왔기 때문에 이 패전에 신경쓰지 않았지만, 점차 과도한 공무를 요구하면서 드리트리는 더 이상 공물을 마련할 재원이 없었다.
모스크바대공국이 몇 개월째 공물을 제대로 보내지 않자, 마마이는 1380년 6월에 정벌에 나섰다. 그는 드미트리가 다른 러시아공국과 연합할 것으로 보고, 리투아니아의 조가일라Jogaila대공에게 합류를 요청했다. 조갈리아는 그렇지 않아도 모스크바대공국의 확장이 불편했기 때문에 마마이의 정벌을 반겼다.
러시아군의 절반은 모스크바대공국, 나머지 절반은 러시아공국의 연합군이었다. 러시아군의 핵심은 중기병이었다. 드미트리 자체 병력 외에 러시아의 20여 영지에서 중기병이 합류했다. 농노민병, 도시경비병과 독립군벌이 보병으로 그 주변에 섰다.
드미트리 보브로크 볼린스키Dmitri Bobrok Volinsky가 참모장이자 부사령관이었고, 27살의 조카 용맹공The Bold 블라디미르 안드레예비치Vladimir Andreyevichi(그림 참조)도 지휘를 맡았다.
마마이는 병력을 집결시키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그는 쿨리코보Kulikovo평야(지도 참조)에서 리투아니아군과 합류하려고 했다. 마마이는 “러시아로 가서 러시아 금으로 부자가 되자”고 말했다. 러시아를 약탈해 막대한 전리품을 챙길 생각이었다.
9월 2일, 몽골군이 쿨리코보평야에 도착했고 전투진영으로 부대를 배치했다. 몽골군의 핵심은 경기병과 타타르 중기병이었는데 그중에는 제노바Genoese와 아르메니아Armenia군이 석궁병과 궁병으로 참여했다.
평야는 세로 8km, 가로 5km 정도의 크기로 대부분 풀밭이었고 곳곳에 숲이 있었다. 마마이는 리투아니아군의 합류를 조용히 기다렸다.
러시아군은 드미트리의 요청에 응답해 8월 중순에 모스크바 남쪽 120km 콜롬나Kolomna에 집결했다. 외지 도시의 병력이 마저 도착하기를 기다린 후에 돈강으로 이동해 9월 6일에 북쪽에 자리를 잡았다.
드미트리는 리투아니아군이 몽골군에 합류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모스크바에 있던 리투아니아출신 보야르Boyar 세묜 멜리크Semyon Melik가 리투라이나 소식을 전해주었다.
드미트리는 리투아니아군이 합류하기 전에 몽골군을 공격하기로 결정하고 작전회의를 열고 동맹군의 공격의지를 확인했다.
9월 7일, 작전회의에서 지휘관의 의견이 크게 갈렸다. 일부는 드미트리의 적극적인 공격을 지지한 반면에 일부는 돈강 북쪽에서 수비를 굳힐 것을 주장했다. 드미트리는 이 정도 지지면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공격계획을 밀고 나갔다.
그날 밤, 콜롬나주지사 미쿨라 벨랴미노프Mikula Velyaminov가 경비연대와 선봉 근위연대를 이끌고 타틴키Tatinki 여울목을 빠르게 건너 돈강 남쪽 강변의 교두보를 마련했다.
몽골군은 궁기병으로 적을 포위하는 전술을 사용하기 때문에, 드미트리는 러시아군 측면에 자리잡고 몽골군의 공격을 막기로 했다. 그는 네프라브다강으로 이어지는 울창한 숲에 우익을 배치했고 좌익은 스몰카Smolka라는 작은 강이 시작되는 숲지대에 배치했다.
마마이는 리투아니아군이 약 40km 거리에서 네프라브다강에 접근 중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고 드미트리가 9월 8일 오전에 돈강을 건너 전투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러시아 연대기 중 하나인 마마이 패주이야기The Tale of the Rout of Mamai(그림 참조)는 “해가 뜨고 2시간 만에 양측의 뿔나팔 소리가 점차 시끄러워졌고 몽골과 러시아군은 힘차게 뿔나팔을 불어댔다”고 기록했다.
쿨리코보평야에 내려 앉았던 안개가 옅어지자 양측의 병사들이 어렴풋이 보였다. 마마이는 우익 뒤에 있는 레드 힐Red Hill에 차려진 지휘소에서 러시아군의 진영을 훑어보았다. 주변에는 야크 꼬리털을 꼰 깃발이 펄럭였다.
킵차크 칸국의 유명한 전사인 첼루베이Chelubey가 말을 타고 앞으로 나와 러시아군에게 결투를 신청했다. 연대기에는 마치 엄청난 일인 것처럼 묘사되었지만 실제로는 중세유럽에서 전면전을 벌이기 전에 전사끼리 맞대결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드미트리는 자원을 받았고 러시아 수도승 알렉산드르 페레스베트Alexander Peresvet가 말을 타고 앞으로 나와 대결을 받아들였다. 두 사람은 창을 들고 충돌했고 둘 다 중상을 입고 전사했다.
러시아군은 몽골군의 전투진영을 그대로 따랐다. 양측 모두 5개 부대로 나누었는데 각 부대마다 경비연대, 선봉연대, 본대, 좌익과 우익연대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좌우익에는 소규모 예비병을 남겨두었다.
드미트리는 눈에 보이는 예비병대신에 매복부대를 숨겨두었다. 매복부대는 은신처에 대기하고 있다가 전투가 절정에 달했을 때에 적에게 결정타를 날리기로 했다.
드미트리는 러시아군의 전열에 창보병을 배치하고 후열에 중기병을 배치했다. 후열은 좌우익연대가 함께 배치되었기 때문에 전열보다 훨씬 길었다. 드미트리는 좌우익의 기병연대가 몽골경기병의 포위를 막아낼 것으로 기대했다.
드미트리는 매복연대를 블라디미르에게 맡기고 스몰카강 너머의 떡갈나무 숲에 숨어 있게 했다. 그리고 참모장인 드미트리 보브로크 볼린스키에게 매복부대가 공격에 나설 순간의 결정권을 맡겼다.
몽골군은 러시아군 반대편에 3열로 늘어섰다. 1열 중앙에 제노바보병이 서고 좌우익에 중기병이 섰다. 2열은 전부 경기병이었다. 3열인 예비병은 몽골궁기병, 체르케스Circass창병과 아르메니아궁병의 다민족 병사였다.
몽골궁기병은 속도를 내기 위해 갑옷을 입지 않은 채로 적진에 돌격해서 화살을 날리고 퇴각했다가 다시 집결해서 돌격하는 전술을 사용했다. 몽골중기병은 중장갑을 입었고 창을 들고 돌격했다가 창이 부러지면 철퇴를 사용했다.
마마이는 먼저 러시아군을 스몰카강 너머 북쪽으로 밀어낸 후에 궁기병이 동쪽으로 우회해서 러시아군 배후를 노리기로 했다.
몽골과 중앙의 제노바보병이 러시아군 보병을 밀어내기 위해 전진했다. 제노바석궁병과 아르메니아궁병이 화살을 마구 날려 러시아군 전열을 두들겼지만 훨씬 많은 숫자의 러시아보병이 포위하려고 하자 전열 좌우익에 있던 중기병에게 러시아보병을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러시아보병은 연꼴방패 뒤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창을 들어 몽골중기병을 막아냈다. 마마이는 좌우익연대에게 적의 측면을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러시아 우익은 서쪽의 몽골연대를 막아냈지만 러시아 좌익의 지휘관은 측면을 노출할까봐 동쪽의 몽골연대와의 접전을 기피했다.
기세가 오른 몽골궁기병과 중기병은 러시아 좌익보병을 압도했고 잘 버티던 좌익은 러시아기병 뒤로 퇴각할 수 밖에 없었다.
초반 전투는 겨우 30분 동안 진행되었다.
몇 번의 충돌만으로, 몽골과 제노바보병은 심각한 피해를 입었고 살아남은 병사들이 남쪽으로 퇴각했다. 이제 2열의 몽골궁기병이 앞으로 나서 새로운 전열을 갖췄다. 몽골기병이 러시아기병과 격전을 벌였다. 안장에서 떨어진 병사는 마구 짓밟혀 피를 흘리며 진흙속에 파묻혔다.
드미트리는 기병 중앙에서 맹렬한 기세로 싸우다가 몇군데 부상을 입었지만 군의 사기를 충분히 유지할 수 있었다. 러시아군 좌익이 물러나는 것이 보이자, 22살의 글레브 드리트리에비치Gleb Dmitrievich공은 주변의 수행병사를 모아 몽골 우익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화살세례를 맞고 전사했지만 반격으로 몽골군의 신경을 분산시킨 덕분에 드미트리가 위험해진 좌익에 병사를 투입해 보강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러시아군 진영은 완전히 회전한 모양이 되었다. 우익은 온전한 상태 그대로였지만 중앙과 좌익은 전선을 제대로 유지하지 못했다.
2시간 정도가 흐르자 몽골군이 확실히 우위인 것처럼 보였다. 그래도 러시아군은 사기를 잃지 않고 맹렬하게 싸우고 있었다. 마마이는 예비병만 빼고 전체병력을 투입할 수 밖에 없었다.
압도적인 몽골궁기병 때문에 러시아군 좌익은 완전히 무너졌고 이제 러시아군 배후로 돌 수 있는 통로가 열렸다.
마마이는 예비병에게 러시아군 배후로 돌아서 퇴로를 차단하라고 명령했다. 몽골궁기병은 아무런 저항없이 러시아군 배후로 침투했다. 몽골궁기병이 러시아군 배후를 공격하는 순간, 보브로크 볼린스키가 매복부대에게 공격에 나서라는 신호를 보냈다.
중기병이 떡갈나무 숲에서 나타나 몽골군에게 달려들었다. 자돈슈치나Zadonshchina연대기는 “칼을 이교도 헬맷에 내리쳤다”고 기록했다. “이교도는 손으로 칼을 막아내다가 달아나기 시작했다.”
반격은 그대로 적중했다. 몽골군은 강력한 러시아군의 공격에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내렸다. 몽골기병 패잔병이 마마이의 지휘소를 지나 그대로 달아났다. 마마이와 참모는 말을 타고 동쪽으로 달아났다.
드미트리는 30% 이상의 병력을 잃었지만 몽골연합군을 격파했다. 몽골군은 겨우 5,000명 정도만이 죽음을 모면할 수 있었다. 마마이는 크림반도 카파Kaffa항으로 달아났다가 암살당했다. 백장 칸국의 첩자에게 암살당했다는 말이 전해진다.
드미트리는 눈부신 승리로 돈스코이Donskoi(돈강의)라는 호칭을 얻었다. 모스크바방어에 이어 쿨리코보승리로 몽골군은 더 이상 무적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러시아가 킵차크 칸국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면 다시 100년을 기다려야했다. 백장 칸국의 토흐타미시가 1382년에 모스크바를 공격해 불태웠다.
1480년, 모스크바의 이반 3세대공이 우르그라Urgra강에서 모스크바를 공격하던 킵차크 칸국의 몽골군을 막아내 몽골의 통치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렇지만 드미트리의 러시아군이 쿨리코보 평야에서 승리한 영광에는 비할 바가 못된다.
1480년 우르그라강 대치는 50일동안 서로 대치하다가 양측이 모두 여러 가지 이유로 퇴각했는데, 아흐메드Akhmed의 사정이 더 절박했기 때문에 러시아군은 몽골의 통치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됩니다.
당연히 막대한 피해를 무릅쓰고 승리를 거둔 쿨리코보전투가 훨씬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중세 > 러시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튜톤기사단의 흥망(2부) - 페이푸스호수 전투 (0) | 2020.07.08 |
---|---|
튜톤기사단의 흥망(1부) - 러시아침공 (0) | 2020.07.08 |
코사크의 역사 - 예르마크의 시베리아 탐험(2부) (0) | 2016.08.20 |
코사크의 역사 - 예르마크의 시베리아 탐험(1부) (0) | 2016.08.17 |
코사크의 역사 - 흐멜니츠키 봉기 (2부) (0) | 2016.08.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