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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2차대전

독일군의 동부전선의 몰락(25) - 크리미아 반도의 비극 (1)

by uesgi2003 2012. 6. 17.


이번 이야기로 Paul Carell 덕분에 날로 먹었던 동부전선 이야기가 일단락됩니다. 

제 자신도 그렇고, 자료자체가 오류를 많이 가지고 있던 탓도 있어서 자신있게 누군가에게 내놓을 내용은 아니지만 그래도 국내에서 동부전선 전체에 대해 이 정도로 정리한 한글 자료는 처음이지 않을까 합니다. 

물론 오래 전의 모 잡지사가 출간했던 2차 대전 시리즈가 있었지만 그건 누구에게도 권하고 싶지 않은 오류와 왜곡 투성이었으니까 논외로 치고, 2차대전에 상당한 지식을 가진 몇 분이 자신의 블로그에 좋은 내용을 정리하신 것은 주요 전투 단위라 좀 아쉬웠었죠. 


중앙집단군이 궤멸하는 전투부터 독일 본토 전투는 책 한 두 권을 정리해야 하기 때문에 좀 시간이 많이 걸리게 될 겁니다. 문재인씨 이야기를 많이 올릴 예정이라 부지런히 전사도 정리해야겠죠?

 

그동안의 전투는 그래도 독일군이 맹렬한 반격과 기동전술로 러시아군에게 큰 피해를 주면서 전선을 축소해가던 이야기였지만 이번 이야기부터는 흠씬 두들겨맞고 간신히 살아 도망치는 일방적인 이야기로 진행됩니다. 


독일군의 동부전선의 몰락(25) - 크리미아 반도의 비극 (1)

 

 

이번 이야기는 1944년 4월 20일에서 5월 12일까지 흑해의 크리미아 반도에 남아있던 독일 17 군에게 닥친 대재앙의 이야기다. 

그 동안 크리미아 반도는 동부전선에서 가장 안전하고 평화로운 곳이었다. 1943년 9월에 17 군이 동부전선 축소의 여파로 이곳에 밀려들어 온 다음부터 분위기가 심상치않게 돌아갔다. 케르치(Kerch) 해협을 건너는 후퇴작전은 피해가 거의 발생하지 않은 완벽한 작전이었다. 34일 동안 해군과 공병은 227,484명의 독일군과 루마니아군, 72,899마리의 말, 28,486명의 비정규군과 인부, 21,230량의 차량, 27,471대의 마차와 1,815문의 대포를 이동시켰다. 그것도 러시아의 흑해함대가 바로 건너편에서 지켜보고 있는데도 말이다. 흑해함대는 독일 공군의 스투카가 두려운 나머지 단 한 번의 출항도 하지 않고 항구에만 있었다. 


17 군 전체를 위협받고 있던  남부전선, 예를 들어 6 군의 미우스 전선이나 남부집단군의 드니에페르 전선에 투입하지 않고 크리미아 반도에 남겨두었는지에 대한 의견은 갈리고 있다. 그들의 16개 사단이 만슈타인에게 주어졌다면 멜리토폴에서 키에프에 이르는 방대한 전선의 위기를 충분히 넘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럴 것이 아니라면 아예 17 군 전체를 고스란히 크리미아에 남겨두었다면 앞으로 닥칠 재앙의 피해를 크게 줄일 수도 있었을텐데,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중간을 선택하는 바람에 양쪽 모두를 잃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결과론일 뿐이고 '크리미아 요새'를 지키고 싶었던 히틀러의 바램도 틀린 것만은 아니었다. 히틀러도 처음에는 16개 사단을 만슈타인의 드니에페르 강에 투입할 생각도 있었지만 루마니아 원수인 안토네스쿠(Antonescu)가 크리미아 반도를 넘겨주면 루마니아 해안이 바로 노출된다고 맹렬히 반대를 했다. 불가리아 왕도 쿠반 교두보에서 후퇴하는 것 자체를 반대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터키를 자극시킬까봐 두려웠다. 히틀러의 적극적인 구애에도 불구하고 중립태도를 버리지 않던 터키가 연합국에 가담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쿠반 교두보를 내주는 것만으로도 동구권 국가들과 터키를 불안하게 만들기 충분한데 크리미아 반도까지 쉽게 포기하면 그들의 이탈은 보지 않아도 뻔했다. 


상대적으로 안정적이었던 크리미아는 톨부킨(Tolbukin)의 집단군이 1943년 10월 24일 멜리토폴 전선을 뚫고 드니에페르 강 하류로 진격하면서 상황이 완전히 반전되기 시작했다. 러시아군이 페레코프(Perekop)를 점령하면 17 군은 본토와 단절되어 고립되는 스탈린그라드 상황이 될 판이었다. 

17 군 지휘관 에르빈 예넥커(Erwin Jaenecke)은 1943년 1월 중순까지 스탈린그라드에서 있었기 때문에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 걱정이 되었다. 예넥커는 페레코프 지역의 러시아군을 뚫고 드니에페르 하류의 아군 전선으로 선회하는 비상작전을 준비하고 10월 29일 행동에 옮기려고 했었지만 28일 21시에 히틀러가 탈출작전을 중지시켰다. 히틀러가 중지시키지 않았다면 톨부킨의 2 근위군의 전차대와 마주쳤을 것이고 2개 돌격포 여단과 얼마 안되는 88mm 대공포만으로 러시아 전차의 추격을 돌려세웠을런지는 의문이지만 어쨌든 작전개시 직전에 앞에서 설명한 정치적인 이유 외에 또다른 이유로 크리미아에 17군을 그대로 두기로 한 것이다. 

히틀러는 마지막 순간에 해군제독 되니츠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되니츠는 크리미아 반도를 잃게 되면 독일해군이 흑해에서 더 이상 활동하지 못하게 되는데, 17 군을 그대로 주둔시킨다면 매달 50,000톤의 보급을 해군이 책임지게 해내겠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최악의 순간에 전군을 소개해야 한다면 4일 만에 20,000명과 모든 장비를 소개시킬 수 있다고 자신했다. 200,000명, 말과 모든 장비를 날씨에 상관없이 40일 만에 소개시킬 수 있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무난한 전투상황도 그런 결정을 내리는데 일조를 했다. 독일군과 루마니아 연합군은 페레코프와 케르치를 통해 반도로 들어오려는 러시아군의 모든 시도를 잘 막아내고 있었다. 러시아군은 케르치와 시바시(Sivash)에 몇 군데의 작은 교두보만을 확보했을 뿐 더 이상 전선을 확대하지 못했다. 오데사 항과 콘스탄타(Constanta) 항으로 부터 군수품도 문제없이 들어오고 있었다. 부상병 등의 긴급수송은 엔진이 6개 달린 Me323이 담당했고, 흑해에는 마치 러시아군 함대가 전혀 없는 것처럼 루마니아 구축함과 독일 잠수함이 활대를 치고 다녔다. 


그림 설명: 길이가 20m, 날개너비가 50m, 높이 10m, 무게 27톤이 넘어  Gigant(거인)이라는 별명이 붙었던 엄청난 크기의 Me 323 수송기입니다. 그런데 정작 수송량은 병력 130명 또는 장비 12톤이 고작이어서 그리 효율적이지는 못했습니다.

플라모델로 가지고 있는데 이번 기회에 만들어보려고 책상 위에 꺼냈더니만 BV222이군요. ㅡ.ㅡ 

좀 더 크고 성능이 향상된 BV222도 1:72라는 비행기 플라모델 비율에서는 작은 비율인데도 길이와 너비가 60cm가 넘는 대형입니다. 접착제 바르는 것도 일입니다.

 

독일 공군을 두려워 한 스탈린은 흑해 함대의 오크탸브르스키이이(Oktybrskiy)에게 자신의 허가없이는 어떤 해상작전도 펼치지 말라고 명령해둘 정도였다. 추축군 전함이 흑해를 장악한 것은 전적으로 크리미아에 비행장을 둔 독일 1 비행단의 지상공격기 덕분이었다. 160대 정도의 스투카와 바부어 대령이 이끄는 전투기들은 크리미아 수비의 모든 것이라고 해도 과장이 아니었다. 

예넥커 장군은 독일군 보병사단 6개, 루마니아 산악사단 3개, 루마니아 기병사단과 보병사단 4개, 총 13개 사단으로 크리미아 반도를 수비하고 있었다. 13 기갑사단이 6 군으로 전출되어 전차는 단 한대도 없었고 2개의 돌격포연대, 산악엽병연대 크림와 대공포대대 275와 279를 보유하고 있었다. 러시아군은 독일군이 밖으로 빠져나와 본토의 독일군 전선과 연결되는 것을 막기 위해 30개 보병사단, 1개의 전차군단과 여러 개의 독립전차여단을 크리미아 주변에 배치시켜두었으니까 13개 사단만으로 러시아군 3개 군의 발목을 잡아두고 있었던 것이다. 


군 장교가 일기에 '크리미아는 파도 속에 솟아있는 섬과 같은 신세였다"라고 할 정도로 본토의 전선과 완전히 단절되어 있었고, 지휘관부터 일선 병사들까지 모두 본토로의 철수는 기정사실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수비선을 강화하기 보다는 러시아 가옥을 독일식으로 꾸미는데 더 큰 공을 들였고 크리미아 반도를 점령할 때에 부숴진 러시아 참호는 그 상태 그대로 두었다. 중간 중간 철수할 때를 대비해 러시아군의 전차를 막을 대전차호만 넓게 그러나 얇게 준비해두었다. 

사실 700km에 가까운 반도 해안을 13개 사단만으로 수비하라는 것은 말이 안되었고 17 군은 히틀러의 마음을 바꿔 제 시간 안에 본토로 철수하는데 모든 힘을 기울였다. 

4월 초만 해도 '독수리' 작전이 준비되어 있었다. 일주일 이내에 크리미아 반도의 모든 병력을 세바스토폴(Sevastopol)의 요새로 철수시킨 다음에 바다를 통해 본토로 철수하는 작전이었다. 세바스토폴은 병력이 소개되는 시간인, 최소한 3주 정도는 버틸 수 있도록 외곽 수비선이 강화되었다. 

17 군은 기다리고 기다렸다. 러시아군이 공격해 오기를. 그래서 철수명령이 떨어지기를. 

독일 73과 98 보병사단 그리고 루마니아 6 기병사단과 3 산악사단은 동쪽의 케르치 해협을 수비했고, 독일 49 산악군단(독일 50과 336 보병사단, 루마니아 10과 19 보병사단, 루마니아 9 기병사단)은 페레코프와 시바시 댐 일대를 지켰고, 루마니아 1 산악군단은 해안지대와 반도 내부의 파르티잔에 대한 수비를 맡았다. 3월 초에 크리미아로 들어온 111 보병사단은 군 예비병력이었고 북쪽과 동쪽 전선에 돌격포 여단이 한 개씩 분산배치되었다. 


1944년 3월 중순부터는 러시아군의 대규모 공격이 임박했다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니코폴 교두보가 함락되었고 본토의 A 집단군 전선은 드네스트르, 오데사까지 밀렸고 17 군의 보급기지도 4월 10일에 내주게 되었다. 드니에페르 강과 페레코프 지역에 갇혀있던 러시아 남부전선은 더 이상 독일군을 걱정할 필요없이 마음대로 작전을 펼칠 수 있게 되었다. 시기만 남아있던 크리미아 반도로의 공격이 4월 7일 드디어 시작되었다. 


(우에스기 왈: 독일군과 루마니아군은 크리미아 철수작전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아 65,000명의 병력을 잃게 됩니다. 그 중에 대부분은 포로로 잡히는데 부상으로 전력외 손실이 되는 병력까지 합치면 무려 100,000(독일군 65,100명, 루마니아군 31,600명)명을 일게 되는 것입니다. 

동부전선 최대의 비극인 중앙집단군 손실 250,000명 만큼은 아니지만 이 전투부터는 독일군과 러시아군의 손실비율이 1:1을 넘어서게 됩니다. 러시아군은 크리미아 전투에서 부상병을 포함해 84,808명의 손실을 입지만 이전에 설명했듯이 수복한 지역에서의 강제징집으로 그 이상의 병력을 회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