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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2차대전

독일군의 동부전선의 몰락(25) - 크리미아(크림) 반도의 비극 (2)

by uesgi2003 2012. 6. 19.

 

제 블로그 방문자가 10만 명이 넘었군요. 처음에는 하루에 1~20명만 집계되어서 얼마나 가려나 했었는데 요즘에는 3~400명이 방문합니다. 다음 블로그는 유니크 집계여서 한 분이 하루에 여러 번 방문해도 한 번으로 집계되니까 하루에 3~400 분이 들르신다는 말이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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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군의 동부전선의 몰락(25) - 크리미아 반도의 비극 (2)

 

 

4월 7일 오후에 드디어 러시아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러시아군 7~8개 대대가 시바시를 수비하던 루마니아 10 보병사단의 주요 거점을 공격해왔다.  크리미아 북부전선에 대한 전면공격은 다음 날 오전 9시에 시작되었다. 톨부킨의 4 우크라이나 전선군의 2개 군이 움직였다. 무시무시한 포격 후에, 500대 정도의 전차군단과 18개 보병사단이 독일군 3개 사단의 전선을 공격했다. 

 

그림 설명: 러시아군이 공격한 지 2주도 안되어서 크리미아 반도 전체를 내주고 세바스토폴 요새 부근만 간신히 버티게 됩니다. 원래 철수작전이 예정되어 있어서 전선이 순식간에 밀린 것도 있지만 이미 수비전을 펼칠 전력도 아니었습니다. 그림은 클릭하면 커집니다.

 

독일 50 보병사단은 밀려나지 않고, 111 보병사단의 지원을 받아 전선을 침투한 러시아군을 다시 밀어냈다. 시바시 전선의 서쪽에 있던 336 보병사단도 제자리를 지켜냈지만 러시아 기갑군의 전면공격을 받은 루마니아 10 사단이 무너지기 시작하더니 전선 곳곳이 뚫렸다. 

 

4월 9일, 헨셀 대위는 일기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적었다.

"북부전선의 보고에 따르면 타타르 디치(TarTar Ditch)에 엄청난 대포와 박격포 포탄이 쏟아졌고 5 보병사단은 새 수비선으로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시바시 전선의 루마니아 10 보병사단의 상황은 훨씬 심각했다. 집단군 사령부는 일선의 요청을 받아들여 세바스토폴로 후퇴하는 '독수리' 작전을 지난 밤에 결정했다."

 

4월 10일 일기에는 다음과 같이 적혔다. 

"북부전선은 더 이상 버틸 수 없다. 5 보병사단은 큰 피해를 입고 겨우 A-1 수비선으로 후퇴했다. 강력한 러시아 기갑군이 루마니아 전선의 틈을 통해 밀고 들어와 배후를 위협하고 있다. 나는 케르치 전선의 5 군단으로 날아가 세바스토폴 작전을 수행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나는 군단 포병사령관에게 곧바로 세바스토폴로 후퇴하라는 명령서를 전달했다."

 

5 군단의 73과 98 보병사단 그리고 2개 루마니아 사단은 부활절 저녁 7시에 후퇴를 시작했다. 세바스토폴까지는 210km의 거리였다. 

 

치열한 경주가 시작되었다. 독일군이 전선을 비우면 바로 러시아군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따라붙었다. 예레멘코의 독립 해안군(12개 보병사단, 1개 전차여단, 1개 공군)이 5 군단의 뒤를 좇았는데, 예레멘코는 정보를 수집하거나 정찰을 하지 않아도 독일군 전선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너무 잘 알 수 있었다. 루마니아 부대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독일 공군과 해군은 보안수칙을 전혀 지키지 않았다. 오히려 무분별한 전화가 사방으로 폭주했고 루마니아와 독일 해군은 가져갈 수 없는 포탄을 모두 사용해서 없애겠다고 막사와 참호, 비행장에 포격을 퍼부어서 러시아군에게 자신들이 지금 후퇴하고 있으니 따라오라는 친절한 신호를 보냈던 것이다. 당황한 사령부가 이들의 행위를 막으려고 나섰지만 이미 규율은 무너진 상태였다. 

 

 

마지막 독일군 부대가 전선을 떠나기도 전에 러시아군이 나타났고, 5 군단은 말이 끄는 마차에 의존하고 있어서 러시아 기갑군에게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4월 12일에 간신히 파르파치(Parpach) 수비선에 도착했다. 수비선에 도착해 있던 포병연대의 엄호사격 덕분에 러시아 기갑군의 추격을 잠시 피할 수 있었다. 

심페로폴(Simferopol)을 이미 장악한 북부의 러시아군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5 군단을 포위할 수 있었기 때문에, 5 군단은 약간 남쪽으로 선회한 다음에 수다크(Sudak)와 얄타(Yalta)를 통해 해안도로를 따라 서쪽으로 철수하기로 했다. 

4월 13일, 야일라(Yayla) 산맥 협곡에 도착한 군단은 98 보병사단에서 2개 전투단을 빼내 추격하는 러시아군을 막게하고 협곡으로 들어섰다. 

 

오전 9시, 첫 번째 러시아 전차가 스타리이 크림(Staryy Krym) 방향에서 나타났다. 아직 5 군단의 마지막 부대가 협곡에 들어서지도 못했을 때였다. 전차엽병 대대 198의 대전차포가 첫 번째 전차를 맞춘 후부터 마치 연습사격하듯이 차례 차례 그 자리에 주저 앉혔고 도로 위에서 불타고 있는 전차가 9대가 되면서 러시아군은 더 이상 전진하지 못했다. 

98 보병사단장 라인하르트는 대전차포 지휘관에게 철십자훈장을 수여하고 싶었지만 카이텔(Keitel) 원수는 후퇴하는 부대에게는 훈장을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대포 한 문에 6마리의 말이 붙었지만 협곡 위로 끌어올리지 못했고 대포와 차량은 모두 파괴시키고 말은 사살했다. 13일 저녁, 5 군단은 수다크에 도착했고 14일 오전에는 파르티잔의 기습을 막아내며 알루시타(Alushta)까지 후퇴했다. 15일 얄타에 도착한 라인하르트 장군은 휴식을 취한 후에 출발하라는 군단 참모장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보급품만 챙긴 후에 다시 세바스토폴을 향해 출발했다. 파르티잔의 야습이 걱정되었지만 무엇보다도 한 번 잠든 병사들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더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16일 오전, 5 군단의 마지막 부대가 세바스토폴 요새에 들어갔다. 그들이 도착했을 때에 이미 수송선을 타고 있던 10,000명이 바다로 나갔다. 10배가 넘는 러시아군의 맹추격을 뿌리치고 탈출에 성공한 5 군단도 바로 수송선에 오르고 싶었지만 기대와 다르게 요새 수비에 투입되었다. 그들의 기대와 정반대의 일이 벌어지게 된다.  

 

그 동안 북부전선의 49 산악군단은 어떻게 되었을까? 돌격포여단 191과 279의 지원덕분에 그나이제나우(Gneisenau) 수비선까지 간신히 후퇴한 후에 러시아 기갑군을 막아보려고 했지만 간단하게 뚫리고 말았다. 독일공군의 지상폭격기와 대공포 전투단이 50대의 러시아 전차를 파괴하면서 전멸위기에서 벗어났지만 4월 13일에는 러시아군이 이미 심페로톨에 들어왔다. 그곳은 불과 12시간 전에 군단 사령부가 있던 곳이었다. 러시아군이 얼마나 신속하게 추격하고 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4월 14일에 49 군단이 중화기와 함께 세바스토폴 요새의 북부 수비선 안으로 들어왔고 바로 그 뒤를 따라서 러시아군 전차가 달려들었지만 열차포, 보병 2개 대대, 6문의 대공포, 6대의 돌격포로 막아냈다.  49 군단은 그 사이에 요새의 수비선에 전개되었다. 16일까지 17 군의 대부분은 만신창이가 되기는 했어도 예정대로 세바스토폴 요새의 수비선 안으로 모두 들어왔다. 

러시아군은 지상군만으로도 충분히 독일군을 포위할 수 있다고 믿었던지 아니면 아직도 정교한 작전을 펼칠 수준이 안되었던지, 수비가 거의 없는 남쪽 해안에 지상군을 상륙시켰다면 5 군단의 후퇴로를 막을 수 있었을텐데 그러지 못했다. 그리고 당연히 했어야 할, 독일군과 루마니아군으로 가득찬 2개의 도로를 공습하지도 않았다. 사실 러시아군이 정교한 작전을 펼치지 않아도 충분했을 것이다. 

루마니아 사단은 거의 전멸 상태였고 독일 사단도 연대 전력 정도 밖에 안되었다. 16일까지 독일군은 13,131명을, 루마니아군은 17,652명을 잃었다. 

 

4월 12일부터 시작된 해군의 소개작전은 무난하게 진행되었고 우선은 후방요원, 수송단, 동부지원병, 전쟁포로와 비전투인력을 소개시키고 있었다. 20일까지 67,000명을 소개시켜 하루 7,000명 꼴로 소개시켰다. 18일 정도면 전체 병력을 소개시킬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오는데, 이 계산때문에 크리미아 반도의 비극이 일어나게 된다. 

16일까지만 해도 러시아군의 공군과 해군은 독일 공군을 무서워했다. 러시아 공군은 아주 조심스럽게 독일 수비선을 공습하는 정도에 그쳤고 러시아 흑해함대도 병력을 소개시키는 함정을 공격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잠수함까지도 어찌나 신중했던지 한 번에 5~8척의 잠수함만 작전에 나섰기 때문에 독일군이 충분히 막아낼 수 있었다. 러시아의 어뢰정은 야간에만 공격에 나서 어떤 결과를 기대하기 힘들었다. 

세바스토폴 요새가 2~3주 정도는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외곽 수비선이 버티는 동안에는 요새 내부에 있는 비행장까지 러시아군의 포격이 미치지 못했고, 독일공군이 버티는 동안에는 요새 외곽을 제대로 공격할 수 없었다. 마지막까지 남아 전선을 지켜줄 부대의 피해를 계산할 정도로 상황은 낙관적이었다. 

그러나 독일군도 계산하지 못했고 러시아군도 기대하지 않았던, 그리고 우리가 잠시 잊고 있었던 히틀러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을 내리면서 상황은 완전히 반전된다. 

 

"세바스토폴은 반드시 지켜내야 한다. 전투병력은 절대로 본토로 소개되어서는 안된다."

수송선에 올라 본토로 향하던 병력도 다시 전선으로 복귀했고 그렇게 세바스토폴에 독일군 6개 사단이 남게 되었다. 

 

 

야넥커는 물론이고, 3월 31일에 경질된 클라이스트를 대신한 쇠르너(Schorner) 그리고 자이츨러까지 히틀러의 미친 결정을 되돌리려고 애썼지만 소용이 없었다. 집단군 'A'가 오데사 서쪽으로 무사히 후퇴할 수 있을 때까지 크리미아를 방어해서 터키, 불가리아, 루마니아가 변심하지 않게 해야 한다는 것이 히틀러의 주장이었다. 

남부 우크라이나 집단군을 지휘하던 쇠르너는 자이츨러를 통해 다음과 같은 요구를 계속 반복했다.

 

그림 설명: 오른쪽이 쇠르너 장군, 왼쪽이 루마니아 안토네스쿠 원수입니다. 쇠르너는 전형적인 잔인한(?) 독일군 장교 이미지 그대로이며 러시아군에 대해 냉혹한 대접으로 유명했다고 합니다.

많은 지휘관이 전사 또는 자살을 했지만 쇠르너는 포로가 되었고 석방 후에 연금을 몰수당해서, 자신이 지휘관으로 있었던 6 산악사단의 참전병사들이 보내주는 돈으로 노후를 보냈다고 합니다.

이 그림은 원본자체가 좋지 않아서 축소하지 않았습니다.

 

"크리미아에 대해 지금 당장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공군과 해군 모두 입지가 줄어들고 있으며 손실을 복구할 수 없습니다. 지금 당장 소개시켜도 2주 이상 걸립니다. 그리고 총통이 명령한 세바스토폴 수비병력은 5개 사단이 아니라 5개 연대에 불과합니다. 루마니아군은 이미 와해되었습니다."

 

"크리미아를 잃으면 루마니아의 기름과 터키의 크롬광산도 잃게 됩니다. 크리미아를 계속 지키라는 것이 아니라 8~10주만 버티라는 것이요. 서쪽 본토의 상황이 나아지면 세바스토폴 병력을 소개시킬 것이오." 히틀러는 조금도 자신의 결정을 바꾸려들지 않았다. 

 

그만 쇠르너는 큰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어떤 예비병력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그는,

 

"총통각하. 지원병력이 있어야 방어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당연히 지원병력을 보낼 것이오."

 

히틀러는 1,300명의 보병, 15문의 대전차포, 10문의 박격포, 4문의 야포를 지원병력이라고 보내고 쇠르너가 더 이상 반박하지 못하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