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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영국

바이킹 (4부) - 바이킹의 러시아, 북미와 중동 진출

by uesgi2003 2021. 7. 13.

넷플릭스 사극 라스트 킹덤과 바이킹스를 보다가 궁금한 것이 너무 많아서 BBC 자료를 중심으로 간단한 자료를 정리 중입니다. 
그리고 바이킹에 대한 제 지식이 부족하기때문에 용어와 설명에 오류가 있을 수 있으니 재미로만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요즘 다시 라스트 킹덤을 보고 있는데 바이킹스보다는 훨씬 낫더군요. 

 

 

 

러시아, 북미와 중동: 바이킹이 방문하고 약탈한 곳은? 
바이킹은 8세기에 스칸디나비아를 떠나 북유럽을 지배했는데 실제 영향력은 러시아, 아시아, 북아프리카와 중동까지 미쳤다. 

바이킹은 이교도 야만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유럽의 암흑시대에서 가장 야심차고 진보적인 민족이었다. 바다의 정복자, 두려움이 없는 탐험가, 무자비한 침략자로 고대세계를 지우고 새로운 세계를 만들었고 현대 지도에도 그 영향이 많이 남아 있다. 
바이킹은 북대서양의 큰 섬을 발견하고 콜럼버스보다 500년이나 빨리 북미에 정착지를 세웠다. 

앵글로-색슨 연대기는 787년, 강도의 땅에서 온 북쪽사람이 처음보는 롱십 3척을 타고 웨섹스 해안에 조용히 상륙했다고 한다. 지방치안판사가 그들을 맞이하다가 살해당했다. 외국인들은 평화롭게 정착하지 않았다. 6년 후에 돌아와서 노섬브리아 린디스판Lindisfarne(홀리섬) 수도원을 무자비하게 약탈해서 기독교 영국을 공포에 떨게 했다. 바이킹시대의 시작이었다.

 


이후 수 십년 동안, 롱십이 갑자기 나타나서 영국해안의 수도원과 정착지를 약탈하고 사라졌다. 이런 소문이 퍼지자 수도승은 성물을 모아 은신처로 숨었다. 바이킹의 약탈로 많은 기록이 함께 파괴되었다. 데인족은 9세기 중반에는 아예 영국에서 겨울을 보냈고 866년, 이교도대군Great Heathen Army은 요크를 점령했다. 뼈없는 이바르(아이바)Ívarr the Boneless와 할프단 라그나르손Hálfdan Ragnarsson이 이끄는 바이킹대군이 메르시아Mercia, 노섬브리아Northumbria, 이스트앵글리아East Anglia와 엑세스Wessex 4개 왕국을 공격했다. 할프단은 요르비크Jórvík(스칸디나비아 요크)의 첫 번째 왕위에 올랐고 더블린왕위도 주장했다.  

 


애설레드Æthelred왕과 동생 알프레드대왕Alfred the Great의 웨섹스만 완전 정복을 피했다. 878년 에딩턴Edington전투에서 알프레드가 승리를 거뒀고 바이킹왕 구스럼Guthrum은 기독교로 개종한 후에 웨섹스에서 퇴각했지만 데인로Danelaw의 영토는 요크셔Yorkshire에서 이스트 앵글리아까지 확장되었다. 그렇지만 927년, 알프레드의 손자 애설스탄Æthelstan이 요크를 탈환하고 앵글로-색슨 영국의 첫 번째 통일국왕이 되면서 데인족의 위세는 크게 기울었다. 

 


미숙왕 애설레드Æthelred the Unready(애설레드 2세)가 1002년 성 브릭시오 축일St Brice’s Day에 영국의 데인족을 집단학살(사진 참조)했고 1013년, 스베인 포크비어드Sweyn Forkbeard가 영국을 침공해 덴마크와 영국의 왕위에 올랐다. 아들 크누트대왕Cnut the Great은 1028년에 노르웨이도 합병했다, 

 

크누트가 파도에게 멈추라고 명령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실제로는 상당히 현명한 왕이었다고 합니다. 

영국의 왕위는 크누트의 아들 하르다크누트Harthacnut, 이복형제 참회왕 에드워드Edward the Confessor,  해럴드 고드윈Harold Godwinson에게 왕위가 넘어갔다. 1066년, 해럴드는 노르웨이왕 하랄드 하르드라디Harald Hardrada의 공격을 막아냈지만 노르만족침공을 받고 죽었다. 

9세기, 노르웨이 바이킹은 맨섬Isle of Man와 오크니Orkney, 셰틀랜드Shetland와 같은 스코틀랜드 섬을 정복하고 정착했다. 그들은 Eóganan mac Óengusas와 같은 픽트인Picts 왕을 죽였고, 픽트인과 게일인Gaels가 연합해 900년에 알바Alba왕국을 건국했고 Cináed mac Ailpín (케네스 맥알핀Kenneth MacAlpine)이 첫 번째 왕위에 올랐다. 나중의 스코틀랜드가 된다. I

 


웨일즈Welsh왕은 강력했고 대부분 바이킹의 침공에 버텼다. 웨일즈는 878년에 바이킹과 연합해 메르시아 앵글로-색슨왕국에 대항했다. 그렇지만 893년, 웨일즈는 진영을 바꾸어서 웨섹스 앵글로-색슨과 연합하고 세번Severn강을 따라 바이킹을 추격했고 버팅턴Buttington전투에서 격파했다. 

바이킹은 다른 지역과 달리 웨일즈를 지배하지 못했지만 스완지Swansea와 같은 도시명을 남겼다. 스베인 포크비어드의 이름을 붙였고 스베인의 섬이라는 뜻이었다. 

795년, 바이킹은 아일랜드를 발견하고 앤트림Antrim해안의 래쓰린Rathlin섬에 상륙해 이니스머리Inismurray와 이니스보핀InishbofinIn의 수도원을 약탈했다. 

바이킹은 한동안 이런 저런 시도를 하다가 9세기 중반과 10세기 초에 대대적으로 아일랜드를 침공했고 지역 켈트족 왕과 격전을 벌이다가 연합하곤 했다. 영국의 경우처럼, 바이킹의 침공은 아일랜드를 하나로 통일하는 계기가 되었고 브리안 보루마Brian Boru가 첫 번째 왕위에 올랐다. 바이킹은 아일랜드를 완전히 정복하지 못했다. 

 


바이킹도 지역민과 융합해서 노르드게일인Hiberno-Norse이 되었다. 노드르인은 841~42년에 뒤플린Dyflin(더블린, 그림 참조)에서 처음으로 겨울을 보냈고 뒤플린은 가장 크고 중요한 바이킹정착지로 노예시장이 열렸다. 노르드와 아일랜드인은 지역갈등에서 자주 연합했지만 왕들은 서로 연합해 바이킹에게 강력하게 도전했고 902년에 더블린에서 바이킹을 몰아냈다. 그렇지만 914년에 바이킹이 다시 침공했다.

 


아일랜드상왕High King of Ireland인 브리안 보루마와 노르드게일연합간에 벌어진 1014년 클론타프Clontarf전투로 바이킹시대가 완전히 끝났다. 보루마가 승리했지만 목숨을 잃었다. 

 


노르망디Normandy(노르드인의 땅)는 이름이 의미하듯이 바이킹의 땅이었다. 바이킹 군벌 롤로Rollo가 파리를 공격해서 성을 포위하자 샤를Charles 3세는 생클레르쉬르엡트Saint-Clair-sur-Epte조약을 맺고 노르망디지역을 내주었다. 996년, 이 지역은 노르망디공국Duchy of Normandy(지도 참조)이 되었다. 바이킹간의 문화, 언어와 인종융합이 일어났고 프랑크Frank와 골족Gaul이 노르만족으로 교체되었다. 롤로의 후손인 윌리암노르망디공은 1066년에 벌어진 헤이스팅스Hastings전투에서 앵글로-색슨왕 해롤드군을 격파해, 영국에서 새로운 바이킹시대를 열었다. 

 



바이킹의 지중해진출
바이킹이 남쪽으로 진출하면서 전쟁이 벌어졌고 부를 챙겼다. 

9세기 초만해도 무슬림 칼리파국caliphate이 지중해입구를 잘 지켰기 때문에 바이킹이 바다로 진입하기 어려웠다. 바이킹은 육상으로 노예교역을 벌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지만 더 큰 이익을 위한 해상진출은 시간문제였다.  

844년, 바이킹은 처음으로 지중해에 발을 들여 놓았다. 100척의 대함대가 프랑스 아키텐Aquitaine을 출발해 스페인남부 히혼Gijon과 코루냐Coruña를 공격했다. 기독교 아스투리아인Asturian의 거친 저항을 받고 이베리아Iberia반도를 돌아 리스본Lisbon을 약탈했고 카디스Cadiz를 공격한 후에 세비야Seville를 점령하고 코르도바Córdoba를 위협했다.  


아브드 알라흐만Abd al-Rahman 2세는 맹렬하게 반격했다. 무슬림군은 바이킹을 매복공격해서 죽이고 목을 매달았다. 바이킹은 대가를 지불하고 퇴로를 연 다음 아키텐으로 서둘러 달아났다. 

15년 후의 원정은 대성공이었다. 이번에는 전설적인 바이킹 라그나르Ragnar의 아들(또는 하스타인Hastein이 입양했다는) 비욘 아이언사이드Björn Ironside가 원정을 주도했다. 859년, 62척의 함대로 프랑스 루아르Loire강을 출발해 이베리아반도를 돌았다. 다시 한 번 아스투리아인과 충돌했고 스페인에서는 우마이야Umayyad 칼리파국의 무슬림군에게 패했다. 

 



바이킹은 그대로 북으로 달아나지 않고 해협을 통과해 헤라클레스의 기둥Pillars of Hercules을 지나 지중해로 들어갔다. 스페인남부 알헤시라스를 기습해 약탈하고 모스크를 불태웠다. 북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계속 약탈했고 네코르Nekor(모로코)를 약탈하고 스페인남동부의 오리후엘라Orihuela과 발레아루스Balearic제도를 공격했다.   

론Rhone강 하구의 카마흐그Camargue에서 겨울을 보내고 론계곡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나르본Narbonne, 님Nîmes, 아를Arles을 공격하고 강을 따라 발랑스Valence까지 올라갔다가 이탈리아로 눈을 돌렸다. 

일부 병력은 토스카나Tuscan해안을 따라가다가 아르노Arno강을 거슬러 올라가 피사Pisa와 피에솔레Fiesole를 공격했다. 
루나Luna가 가장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하스타인은 로마에 도착한 것으로 착각하고, 중상을 입은 것처럼 위장하고 죽기 전에 기독교로 개종해서 성사를 받을 수 있게 해달라고 애원했다. 주교가 허락했고 하스타인은 죽은 척했다. 바이킹의 애도를 허락하자 하스타인이 갑자기 일어나 루나를 약탈했다. 로마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서야 물러났다. 

 

이 에피소드는 바이킹스에서도 나옵니다. 인물과 장소는 완전히 다릅니다만.

 


일부 기록에 따르면 바이킹은 동지중해의 비잔틴제국 도시까지 약탈했다고 한다.
귀국을 결정하고 지중해 입구에서 노예를 잡으려고 잠시 정박했다가 무슬림군과 다시 전투를 했다. 스페인 북부 팜플로나Pamplona에서 벌인 마지막 공격은 패배로 끝났고 두 사람은 862년에 남은 20척을 이끌고 루아르강으로 돌아갔다. 

 

 


러시아 그 너머로
바이킹은 동쪽으로도 향했고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슬라브Slavic족은 바이킹을 바랑기아인Varangian 또는 루스인Rus이라고 불렀다. 바이킹은 9~11세기 이 지역의 중요한 역사를 만들었고 러시아와 벨라루스Belarus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많은 유산을 남겼다. 


바이킹은 볼가Volga와 드네프르Dnieper강을 따라 대륙 깊숙이 진출했고 고대 교역로를 장악하고 키예프Kiev라는 대도시를 세웠다. 심지어 동로마제국에게 용병을 제공했고 비잔틴 바랑기아근위대로 황제를 보호했다. 그 당시의 기록이 거의 남지 않아서 주요인물의 출생에 대해 논란이 많지만 루스인은 9세기 중반에 처음으로 러시아에 도착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루스인은 노브고로드 Novgorod 주변의 슬라브족에게서 세금을 받기 시작했고 홀름가르드Holmgård(그림 참조)라고 불렀다. 

 

러시아 일부 사학자는 동슬라브족이 건국시조라고 주장합니다.


비잔틴황제 테로필루스Theophilus의 바랑기아근위대
862년, 슬라브족은 바이킹을 다시 바다로 밀어냈지만 내분이 계속 일어나서 루스인을 다시 불러들였고 류리크Rurik라는 지도자가 혼란을 종식시켰다고 한다. 류리크왕조는 7세기를 유지했고 바로 러시아의 차르왕국으로 이어졌다. 

류리크왕조는 비잔틴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Constantinople(터키 이스탄불)을 공격했다. 류리크의 후계자 올레그Oleg는 키예프로 천도하고 키예프 루스공국을 세웠다. 절정기에는 드비나Dvina, 드네프르, 볼가강 일대의 교역로를 장악했고 발트해, 흑해와 카스피아해 진출을 통제해 중세 중앙유럽과 비잔틴제국뿐만 아니라 바그다드Baghdad 등의 아랍 칼리파국과도 교역했다. 루스인은 교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영토를 마구 확장했다. 

 

바이킹스의 올레그는 폭군으로 노르웨이를 침공하고 내분으로 죽는 것으로 나오는데 실제로는 자연사 또는 사고사라고 합니다. 바이킹스에서는 비잔틴제국 원정이 나왔어야 했는데 그러기에는 라그나르 가문의 이야기에서 너무 번져서 마구 잘라냈을 겁니다. 

그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성문에 자신의 방패를 거는 등, 지금의 러시아 기초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후 오스만제국과 터키와 장군멍군식으로 영토를 주고 받습니다. 

 


루스인은 비잔틴제국에게서 유리한 교역조건을 받아내려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여러 차례 공격했고, 10,000척에 이르는 함대를 동원했는데 바다 너머에서 바랑기인을 불러들였다고 한다. 바로 스칸디나비아의 바이킹이었다. 

 

비잔틴제국 내분으로 황제가 궁지에 몰리자 블라드미르가 6,000명 정도의 병력을 빌려주었고 그 일부가 정착해 제국말기까지 근위대가 됩니다. 

바랑기아인 근위대 모습이 아주 멋진 것들만 있는데 그건 훨씬 이후이고 저 당시에는 위의 모습이 더 정확하겠죠. 

약 300년 후에는 이런 모습입니다. 


980년, 블라디미르Vladimir대왕(올레그의 후손)은 현재의 우크라이나Ukraine에서 흑해에 이르는 영토를 정복하고 친척인 노르웨이왕 호콘 시구르손Jarl Håkon Sigurdsson의 지원을 받아 형제에게서 노브고로드와 키예프를 빼앗았다. 블라디미르는 왕국을 기독교로 개종했고 루스왕국은 1015년까지 유지되었다. 

루스인은 그동안 전계층의 슬라브족과 가문을 섞었고 12세기 말에는 지금의 러시아민족이 되었다.

 



북쪽의 바이킹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는 바이킹의 평화적인 면을 보여준다. 

분쟁, 노르웨이 하랄드 1세의 실정, 살기 좋은 땅의 필요성, 탐험욕구 등의 이유 때문에, 9세기부터 바이킹은 북해를 건너가기 시작했다. 
바이킹은 800년에 페로제도Faroe Islands에 정착하기 시작했고 800년대 중반에는 북극으로 진출했다. 항로착오나 악천후로 밀려난 바이킹은 아이슬란드를 처음으로 발견했다. 

 



나도드Naddodd는 노르웨이에서 페로제도로 향하던 중에 항로를 이탈했고 아이슬란드 동쪽 해변에 도착했다. 나도드는 스넬란트Snæland(눈의 땅)이라고 불렀는데, 스웨덴 바이킹 가르다르 스바바르손Garðar Svavarsson이 착오로 아이슬란드에 도착해 땅을 개척하고 자신의 이름을 따서 가르다르스홀미Garðarshólmi라고 불렀다. 플로키 빌게르다르손Flóki Vilgerðarson은 아이슬란드를 일부러 찾아와 겨울을 보냈고 그 이후부터 아이슬란드Ísland라는 이름이 붙었다. 

 

예. 맞습니다. 바이킹스의 그 플로키입니다.

아이슬란드의 겨울은 어둡고 혹독했지만 최소한 적대적인 원주민이 없었다. 가르다르가 일부러 남겨둔 노예 1명과 동굴에서 지내던 아일랜드 수도승을 제외하면 아이슬란드는 무인지대였다. 874년, 노르웨이의 분쟁을 피해 달아난 바이킹군벌 잉골프 아르나르손Ingólfur Arnarson에게는 아이슬란드가 더없이 좋은 피난처였다. 

잉골프형제는 아이슬란드 남서쪽 반도에 상륙했다. 형제인 효를레이프Hjörleifur는 노예를 학대하다가 살해되었다. 874년~930년, 약 2만명이 아이슬란드에 정착했다. 의회가 만들어지고 법도 제정되었다.

에이리크 힌 라우디Erik the Red라는 바이킹은 여러 명을 죽인 죄로 982년에 3년 추방형을 받았다. 에이리크는 25척 함대와 함께 출발해 그린란드를 발견하고 남쪽 해안을 탐험하며 형기를 마친 후에 아이슬란드에서 개척민을 이끌고 986년에 그린란드로 돌아왔다. 

 


그들은 따뜻한 계절에 도착했지만 험난한 생활이 이어졌다. 땅은 거칠고 나무도 없었고 악천후가계속되었다. 
이누이트Inuit의 선조인 툴레인Thule은 바이킹 정착민을 위협했다. 나중에는 정착지 한 곳이 공격을 받았다.  

바이킹의 그린란드 정착지는 약 5,000명까지 불어나며 거의 500년간 유지되었고 그 이후에는 아이슬란드나 스칸디나비아와 완전히 단절되었다. 

그린란드 정착민은 신화속으로 사라졌고 모든 기록도 15세기 후에 사라졌다. 덴마크-노르웨이연합 탐험팀은 1721년에 그린란드에 상륙했지만 유럽인은 발견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바이킹 그린란드는 가장 유명한 탐험가를 배출했다. 에이리크 힌 라우디의 아들 레이프에이릭손Leif Eriksson으로 콜럼부스Columbus보다 500년이나 앞서 북미를 발견하고 정착지를 만들었다. 



북미로 간 바이킹
바이킹은 북미에 상륙한 최초의 유럽인이었다. 

레이프 에이릭손은 캐나다에 식민지를 건설했다고 전해지지만 북미대륙 발견의 명예는 노르웨이 바이킹 뱌르니 헤룔프손Bjarni Herjólfsson의 차지였다. 그뢰늘렌딩가Groenlendinga(그린란드 사람들의 사가)에 따르면, 그는 에이리크 힌 라우디의 정착팀에 참여했던 아버지를 찾으려다가 항로를 잃고 986년에 그린란드 서쪽 해안 앞에 도착했다. 

 



헤룔프손은 상륙하지 못하고 다른 해안을 찾아 나섰다. 1000년, 레이프 에이릭손은 그의 배를 구입하고 35명의 동료와 함께 2,900km를 항해해 미지의 신세계에 도착했다. 에이리크가 탐험팀을 지휘할 예정이었지만 출발직전에 말에서 떨어져 부상을 당했다. 에이리크 사가Eiríks saga rauða, 하우크스복Hauksbók과 플래티북Flatey Book은 레이프의 북미탐험 중에 발견한 3곳을 기록했다. 헬룰란드Helluland(평평한 돌의 땅, 배핀섬Baffin Island), 마르클란드(숲의 땅, 래브라도Labrador와 뉴펀들랜드Newfoundland), 빈란드Vinland(포도주의 땅, 뉴펀들랜드섬Newfoundland Island)이었다. 1001년, 레이프는 지금의 랑스 오 메도즈L’Anse aux Meadows 부근에 정착지를 마련했다. 이곳에서 두 번의 겨울을 보내고 야생딸기를 발견했다. 그는 그린란드로 복귀했다.

 

미드 바이킹스와는 완전히 다르죠? 바이킹스는 나그나르 가문이 모두 다 해먹는 것으로 왜곡을 했습니다.

신세계는 그린란드에 없는 것들이 가득했다. 배와 집을 지을 수 있는 나무, 양질의 토양, 살기 좋은 기후와 동식물 등. 그렇지만 이누이트와 선주민First Nation tribes이 이미 살고 있었고 이상한 외모의 바이킹을 반기지 않았다. 

 

1004년, 레이프의 형제 토르발드 에이릭손이Thorvald Eriksson이 30명을 이끌고 다시 겨울을 보냈다. 그는 카누 밑에서 자고 있던 원주민을 공격해 충돌을 일으켰고 대대적인 반격을 받아 죽었다. 

 



토르핀 칼세프니Thorfinn Karlsefni라는 바이킹이 1009년에 3척의 배에 가축과 160~250명을 태우고 신세계에 본격적으로 정착하려고 했다. 이 중에는 레이프의 여동생 프레위디스 에이릭스도티르Freydís Eiríksdóttir도 있었다. 스트라움피오르드Straumfford와 스트라움소이Straumsöy에 정착지를 마련하고 원주민과도 가까스로 왕래를 시작했다. 

 

예. 맞습니다. 빈란드사가 만화의 주인공 토르핀입니다.

그렇지만 바이킹 정착민과 선주민 사이에 투석기까지 동원한 전투가 벌어졌다. 에이리크 사가에 따르면 남자들은 모두 달아났고 임신한 프레위디스가 버티고 서서 가슴을 드러내고 칼로 두들겨 원주민을 쫓아냈다고 한다. 

 


결국 너무 먼 곳이었고 원주민과의 충돌이 일어나 정착은 실패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린란드와 단절되었고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지만 마르클란드와의 교역과 벌목은 350년 정도 계속되었던 것 같다. 아이슬란드 연대기에 따르면 목재를 가득 실은 18명이 1347년에 아이슬란드에 도착했고 그린란드로 돌아가려고 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