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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2차대전

독일군의 동부전선의 몰락(25) - 크리미아 반도의 비극 (3)

by uesgi2003 2012. 6. 24.

요즘 전사 이야기 올리는 속도를 내다보니 문체가 상당히 딱딱하고 오타도 많습니다. 여러분에게 조금이라도 빨리 이야기를 공유하고 싶어서 서두르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며칠 후에 천천히 살펴보고 문체를 부드럽게 다듬도록 하겠습니다. 

흔히 말하는 버전 1.0이고 패치판이 조만간 나온다고 농담하겠습니다.

 

독일군의 동부전선의 몰락(25) - 크리미아 반도의 비극 (3)


1942년 7월, 만슈타인 원수가 함락시킬 당시의 세바스토폴에는 러시아 보병사단 5개, 해군여단 4개, 기병사단 1개가 수비하고 있었다. 러시아군은 튼튼한 콘크리트 벙커 속에서 버텼고 대구경 요새포가 안전한 지하에 있었는데도 한 달을 채 버티지 못하고 함락되었었다.

1944년 4월, 이 요새를 지키는 독일군 병력은 5개 여단 수준에 불과했고 대포도 1개 군단이 간신히 도망쳐오면서 끌고온 소구경 포가 전부였다. 1차 수비선은 부족하나마 참호와 저지장벽 모습을 갖추고 있었지만 그 다음의 수비선은 아예 없었다. 함락시킬 당시 파괴되었던 벙커와 참호는 전혀 수리되지 않은 채로 버려졌었고 보병용 중화기조차 부족했다. 98 보병사단은 야전삽도 없어서 라인하르트 장군은 근처 마을에 곡괭이와 삽 징발령을 내릴 정도였다. 러시아군의 공격을 받으면서 참호작업이 시작되었다. 이렇게 부실한 요새 안에서 러시아군의 29개 보병사단, 1개 전차군단, 3개 포병사단, 수십 개의 독립여단, 총 470,000명을 막아내라는 것이 히틀러의 명령이었다. 세바스토폴에는 6,000문의 대포가 쏟아내는 포탄 수 십 만발이 떨어지고 있었고 600대의 전차가 밀어닥치고 있었다. 

 

4월 27일, 야넥커 장군은 히틀러에게 전신을 보냈다. 히틀러가 약속했었던 2개 사단 중 한 개 사단이라도 지금 당장 보내줄 것과 작전명령권을 현장에서 가지겠다는 것이었다. 작전명령권 일임은 히틀러가 가장 싫어하는 말이었고 히틀러의 당연한 반응은 경질이었다. 그와 함께 49 산악군단의 콘라드(Konrad)도 해임되었다. 

 

 

러시아군의 전면공격은 5월 5일 오전 9시30분에 시작되었다. 먼저 400대의 대구경 포와 400대의 다연장로켓이 포문을 열었다. 그 뒤를 따라서 5개 보병사단이 독일 336 보병사단의 수비선을 공격했지만 12시간 동안 전선에는 구멍이 뚫리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24시간 동안 전선을 지켜냈고 5월 7일이 되어도 북쪽 수비선은 뚫리지 않았다. 

 

그림 설명: 보기힘든 러시아군의 다연장로켓 장전모습입니다. 이것말고 2열짜리도 있는데 워낙 장전이나 발사가 쉬워서 러시아군이 애용했었습니다. 독일군도 다연장로켓을 많이 사용했지만 구경이 훨씬 큰 포탄을 사용해서 발사속도는 상당히 느렸습니다.

 

이제 예레멘코는 남쪽과 동쪽전선을 공격했다. 러시아 해안군이 수비선 1.7km마다 320문의 포로 두들겨댄 후에 수십 개 독립 여단이 독일 73, 111, 98 보병사단의 만신창이가 된 수비선을 공격했다. 73 보병사단의 전선은 완전히 열렸고 111 보병사단도 버티지 못했다. 오후 6시까지 독일군 사상자 수는 5,000명을 넘어섰다. 

 

1942년에 파괴된 막심 고르키 2세 방어시설이 야전병원으로 사용되었다. 가파른 해안선을 가로질러 전사자 시체를 떠내려 보내는 도랑이 만들어졌고 해안에는 시체가 파도에 따라 오르내리는 기괴한 광경이 펼쳐졌다. 말이 필요없어진 루마니아군은 수 천 마리의 말을 일일이 사살할 수 없어서 절벽에 몰아넣고 기관총으로 난사해 처분했다. 

5월 8일 결정적인 위기가 다가왔다. 러시아군이 사푼(Sapun) 고지까지 밀고 들어왔고 282 척탄병연대의 2 대대가 반격에 나서 잠시나마 고지를 탈환했지만 곧바로 내주고 말았다. 사푼 고지를 잃게 되면 세바스토폴을 내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17 군은 남은 예비병력을 모두 모아 반격에 나섰지만 러시아군이 너무 많다는 무선이 들어온 것이 마지막이었다. 


5월 8일 저녁 9시 15분에 쇠르너는 총통사령부에 전신을 보냈다. "세바스토폴 수비 불가능. 소개허가바람."

이제 히틀러도 현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90분 만에 허가를 한 그는 참모장군들에게 "크리미아에서 소개하면, 거기에서 풀려난 러시아군이 남부 우크라이나 전선을 공격하게 될거야."라고 한탄했다. 이제 히틀러도 터키의 태도따위는 생각할 여유가 없을 정도의 상황이 된 것이다. 9일 새벽 2시 15분, 남은 수비군이 해안 가장 끝의 케르손(Kherson) 진지로 후퇴했다. 오후 4시가 되자 50 보병사단의 마지막 병력이 세바스토폴을 빠져나와 해안 수비선에 합류했다. 


케르손 진지는 다행히도 보병참호와 콘크리트 벙커가 미리 잘 준비되어 있었고 식량이나 탄약도 부족하지 않게 비축되어 있었다. 케르손 지역은 물이 없기 때문에 탄산수가 보급되었다. 

러시아군이 바로 추격해 17 군의 마지막 수비선을 돌파하려고 시도했지만 첫 번째 공격은 성공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도 독일군의 운명은 이미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방어의 핵심이었던 공군 비행장이 러시아군의 직격탄을 맞고 있었다. 활주로는 구멍투성이었고 30대의 전투기와 지상폭격기는 본토로 철수하는 수 밖에 없었다. 이제 공군이 펼쳐주던 우산이 없어진 것이다. 구식 Ju-52와 같은 대형기종만이 본토에서 날아와 부상병을 소개시키는 정도의 도움밖에 못 주었다. 그래도 5월 10일 하루 만에 1,000명의 부상병이 소개되었다. 


5월 10일 크리미아의 비극은 최종 목적지를 향해 달리기 시작한다.  

 

히틀러의 허가가 떨어지자 마자 해군은 미리 준비하고 있던 대규모 소개작전을 개시했다. 해군의 역할에 따라 17 군의 운명이 결정되는데, 1940년 영국의 덩케르크 소개작전과는 성격이 완전히 다른 작전이었다. 덩케르크는 영국본토까지 겨우 몇 시간 밖에 안걸렸기 때문에 독일공군을 잠시만 버텨내면 되었지만 크리미아에서 콘스탄타(Constanta)까지는 날씨에 따라 2일이나 걸리는 거리였다. 

새벽 2시 정도에 해안 멀리 수송선 토틸라(Totila)와 테하(Teja)가 모습을 드러냈다. 테하에는 5,000명이, 토틸라에는 4,000명이 올라탔지만 곧바로 재앙이 밀려들었다. 독일공군이 떠난 크리미아 반도의 상공은 러시아 공군이 가득차 있었고 날이 밝으면서 전투기의 호위를 받은 지상공격기와 폭격기가 몰려들었다. 새벽 5시 45분, 토틸라가 3발의 직격탄을 맞고 움직임을 멈췄고 2시간 30분 후에 침몰했다. 테하도 어뢰공격을 받고 오후 3시 정도에 침몰했다. 단 한 번의 공습에 8,000명이 익사하고 겨우 몇 백 명만이 구조되었다. 

 

그림 설명: 1942년에 건조되어 2년 만에 4,000명과 함께 가라앉은 토틸라 상선입니다. 원래 테하와 함께 헝가리 상선이었다가 독일에 징발된 것으로 이 정도의 배에 4,000명이 탔다는 것은 갑판까지 빼곡하게 들어찼다는 것입니다. 태평양전선의 일본군에게서는 흔한 장면이었지만 함선활동이 거의 없었던 독일군에게는 보기 드문 해상피해였습니다.

수 천 명이 불타는 함선에서 뛰어내리고 익사한 시체가 떠다니는 모습이 어느 정도의 비극인지 상상이 갈 것입니다. 그림은 클릭하면 커지고 IE에서 그림과 설명이 제대로 연결됩니다.

 

17 군은 10일과 11일 저녁 동안 철수하기로 했고 해군도 동의했다. 케르손 진지에는 30,000명 정도가 남아 있었는데, 190척이 넘는 독일/루마니아 전함과 상선을 동원하면 87,000명까지 수용할 수 있었다. 이미 지난 8일부터 비전투 인력은 소개되었기 때문에 남아 있는 비전투 인력까지 합쳐도 50,000명이 안넘기 때문에 충분히 소개시킬 수 있는 능력이 되었다. 

처음에는 작전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모사는 재인이고 성사는 재천(모든 일은 계획대로 돌아가지 않는다)이라고 했다. 갑자기 폭풍우가 몰려오더니 모든 작전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악천후를 견딜 수 없는 작은 배들은 모두 회항되었고 출발이 연기되었다. 5월 11일까지도 케르손 지역에 배가 나타나지 않았고 소개작전은 11~12 밤에 진행하는 것으로 수정했다. 케르손 진지가 엄청난 러시아군의 공격을 12시간 더 버텨야 한다는 뜻이었다. 

5월 10일에만 러시아군이 7번을 공격해왔지만 독일군은 참호를 떠나지 않고 버텼다. 전선을 뚫고 들어온 전차는 육탄공격으로 불태웠고 수비군에게 좋은 벙커가 되어주었다. 


저녁에 사단 사령부로 돌아온 라인하르트 장군을 49 산악군단의 새로운 지휘관 하르트만이 호출했다.


"라인하르트 장군. 귀관의 전선이 전투의 중심이네. 모두 배에 오르기 전까지는 절대로 전선을 내주어서는 안되네."

"장군님. 염려하실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러시아군이 7번이나 공격해왔는데도 모두 두들겨서 내쫓았습니다. 전선은 한 번도 뚫리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12시간 정도는 충분히 지켜낼 수 있습니다. 배가 올 때까지 지키겠습니다."


해안에 첫 번째 어뢰정이 도착했을 때에 러시아군은 다시 공격하기 시작했고 고지를 잠시 점령했지만 독일군의 반격으로 곧바로 제자리로 돌아갔다. 

5월 11일, 모든 병사들이 저녁 11시까지 해안에 모여 개인참호를 파고 승선준비를 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만약 예정된 지점에 배가 도착하지 않으면 눈에 보이는 아무 배나 올라타라는 명령도 떨어졌다. 러시아군은 마지막 소개작전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전선은 어떤가?"

"모두 조용합니다."

"그래? 그럼 차 한잔 마실 여유는 있겠군."

 

이것이 승선예정 지점으로 철수하라는 암호였다. 

그러나 배가 보이지 않았다. 초조한 라인하르트 장군은 그 지점에 도착한 병사들에게 계속 배가 보이냐고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어떤 배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배가 없다니?

사실 충분한 전함과 상선이 제 시간 안에 먼바다에 도착했지만 해안까지 가지 못하고 대혼란을 일으키고 있던 중이었다. 저녁 9시 30분, 슐츠 제독이 탄1 어뢰정 함대(Flotilla) 지휘함의 무전기가 고장이 났고 유일하게 사용할 수 있었던 주파수 채널은 이미 온갖 무선송수신으로 가득차 각 함선에 정박지를 제대로 알려주지 못하고 있었다. 재독은 모든 어뢰정에게 일단 카미쉐바야 만 입구까지 가서 개별 명령을 기다리라고 송신했지만 그것마저도 전달되지 않았다.

달빛도 없는 어두운 밤이라 러시아군의 야포가 정확한 공격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천만다행이었지만 독일군이 스스로 일으킨 혼란때문에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어뢰정이 이리 저리 오가며 정박지를 찾아내려고 했지만 반도에서 시작된 짙은 안개가 바다로 밀려들고 있었다. 정박시설은 이제 근처로 가야만 보일 정도였다. 안개가 갑자기 나타나다니?

 

 

지난 몇 달 동안 해군은 항구시설에 수 백 개의 연막드럼을 설치해두었었다. 러시아 공군의 공습이 있을 때마다 연막을 터뜨려 폭격에서 항구시설을 감췄었던 것인데 그만 러시아군의 마구잡이식 포격에 그것들이 터지고 만 것이다. 포격을 받은 일부 독일 함선이 멀쩡한 연막 드럼까지 터뜨리면서 해안에는 짙은 연막이 만들어졌고 이제 혼란은 극에 달했다.

 

그림 설명: 클릭하면 커집니다. 1944년 10월 독일본토의 폭격당시 사진이지만, 비슷해서 가져와봅니다. 이런 식으로 폭격기의 정밀한 폭격을 막기 위해 항구시설에 대량의 연막탄을 떠뜨렸습니다.

 

슐츠 제독이 수송선을 타고 해안으로 다가가 배회하는 몇 척의 배를 찾았지만 제독을 만나지 못한 60여척의 배는 그자리에서 대기하다가 단 한 명의 병사도 태우지 않고 그대로 본토로 회항하게 된다. 1 어뢰정 함대의 모든 배를 풀어 방황하는 배들을 찾아냈다면 상황은 훨씬 나아졌겠지만, 혹시라도 있을 러시아군의 공격과 공습에 대응할 수 있는 유일한 전력인 어뢰정을 모두 해안으로 보내는 것도 무모한 판단이었다.

결국 크리미아 반도에는 10,000명이 배를 타지 못한 채 남겨져 모두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고 만다.

 

병사들이 목숨을 건지기 위해 필사적으로 뛰어다는 덕분에 라인하르트는 5척의 평저선을 해안에서 찾아낼 수 있었다. 그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간 그는 10척의 작은 호위함을 찾아냈고 불안에 떨고 있던 사단이 모두 승선할 수 있었다.

라인하르트 장군은 일단 배에 오르면 함장에게 모든 지휘권이 넘어가는 것을 알기에 배에 오르지 않고 절대로 배가 떠나지 못하게 명령한 후에 마지막 순간까지 기다려 길을 잃은 다른 사단의 병력도 싣고 배에 올랐다. 새벽 3시, 98 보병사단은 이렇게 살아남았다.

 

50 보병사단의 승선도 한 편의 드라마와 같았다. 잔존병력은 마지막까지 침착하게 승선했고 러시아군도 그들의 철수를 눈치차리지 못했다. 121 연대가 승선하고 나자 123 척탄병연대에게는 단 한 척의 수송선만이 남았다. 뒤늦게 도착한 다른 수송선까지 합쳐도 겨우 몇 백명만 탈 수 있었다. 결국 지원자와 모든 장교에게 하선 명령이 떨어졌다. 죽음이 기다리는 땅에 내린 그들은 개인참호를 팠고 6시간 동안 버텼지만 모두 전사했다, 50 보병사단의 나머지 2,800명은 이렇게 살아남았다. 

 

그림 설명: 소개 작전 중에 러시아공군의 공습을 받고 있는 수송함입니다.

 

336 보병사단도 소개되었고 73 보병사단의 지휘관은 사령부에서 포로로 잡혔다. 

마지막 3일 동안 39,808명이 케르손 진지에서 소개되었고 31,708명이 러시아공군의 공습을 견디고 본토까지 살아돌아갔다.

 

3월에 크리미아로 전출된 111 보병사단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의 운명은 너무나도 비참했다. 어둠 속에서 방황하던 60척의 배가 그들을 소개시키기로 되어 있었고 결국 단 몇 명을 빼고는 모두 크리미아를 빠져나가지 못했다. 

5월 12일. 해안 참호에 있던 그들에게 T-34가 밀어닥쳤다. 그들이 가진 중화기라고는 기관총이 전부였다. 몇 몇 병사들이 판자조각을 타고 바다로 헤엄쳐나갔고 터키방향으로 달아나던 어뢰정을 만나 목숨을 건졌다.

T-34가 다가오자 그룬너(Gruner) 장군이 천천히 걸어나갔지만 그의 항복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T-34의 전차포에 그의 몸이 산산조각났다. 장교들을 끌어내 처형하기 시작하자 병사들이 프란츠 중령의 군복을 벗기고 에워싸서 그를 살려냈다. 러시아 인부들도 모두 처형되었다.

 

6개월 후에 프란츠는 모스크바 감옥에서 심문을 받았고 빈정거리는 말을 들었다.

"우리는 크리미아를 급하게 탈환할 필요가 없었지. 엄청나게 큰 포로수용소였거든. 1943년 11월부터 독일놈들은 사실 포로였는데 더더욱 좋은 것은 먹일 필요도 없었고 지킬 필요도 없이 제 놈들이 알아서 했다는거지. 심지어 휴가를 떠난 놈들까지 돌아왔으니깐."

 

독일군은 스탈린그라드 이후 최대의 손실을 겪게 되었고 중앙집단군의 현대판 칸나에 전투가 벌어지면서 더 이상 러시아군의 공격에 저항할 전력이 존재하지 않게 된다.

 

크리미아 전투의 마지막 부분을 잘 보여주는 동영상을 올리려고 했더니 에러가 계속 나서 유투브 URL로 대체합니다. 영화장면도 많이 들어 있지만 제 이야기를 다 읽으신다음에 보면 이해가 더 잘 될 것입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4UtwvkycoN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