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독립전쟁

미국독립전쟁을 결정지은 전투

uesgi2003 2022. 7. 15. 19:46

 

BBC 자료를 정리한 것입니다. 

인명, 지명과 용어가 다를 수 있습니다. 

 

미국독립전쟁American Revolutionary War의 결정판 전투 
렉싱턴Lexington과 콩코드Concord의 첫탄부터 요크타운Yorktown의 항복까지, 가장 중요한 전투 9곳을 설명한다.

렉싱턴과 콩코드: 1775년 4월 19일
미국승리. 독립군 3,960명 대 영국군 1,500명
독립군 94명 대 영국군 272명 손실

미국독립전쟁의 첫 번째 총격전은 서로 충돌하지 않으려다가 벌어졌다. 
1775년 4월, 양측의 갈등이 고조되었고 미국 식민지주민이 민병대를 조직하면서, 콩코드에 무기가 숨겨져 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매사추세츠Massachusetts총독 소장 토마스 게이지Thomas Gage는 프란시스 스미스Francis중령에게 800명을 이끌고 무기와 탄약을 압수하라고 명령했다. 

그렇지만 식민지주민이 영국군의 접근소식을 들었다. 몇 명이 한밤중에 말을 타고 지역민병대에게 경고했고 영국군을 가로막았다. 

4월 19일 오전, 상인과 농민이 대부분인 민병대는 콩코드에서 몇 km 떨어진 렉싱턴 그린Lexington Green에서 영국군에 맞섰다. 민병대를 보고 존 피트케른John Pitcairn소령과 경보병이 앞장서고 스미스 본대는 후방에 남았다. 피트케른은 민병대해산을 요구했고 양측은 발자금지 명령을 받았는데도 곧바로 총격이 시작되었다. 

 


누가 먼저 발사했는지는 불분명한데, 영국군이 민병대에게 돌격해 8명을 죽이고 10명 이상에게 부상을 입혔다. 영국군은 1명만 부상당했다. 

민병대는 퇴각했고 스미스는 콩코드로 진격해서 무기를 찾으려고 했다. 그렇지만 민병대가 계속 보강되었고 콩코드강 북쪽다리를 두고 전투가 벌어졌다. 병력과 위치가 불리한 영국군은 사방에서 쏟아지는 총탄을 피해 보스톤Boston까지 달아났다.

 


영국군은 73명이 죽고 173명이 부상당하고 26명이 행방불명이었다. 2일도 안되어 민병대 15,000명이 보스턴을 포위했고 거의 11개월 동안 이어졌다. 

렉싱턴과 콩코드 산병전skirmishes에서 인명피해는 비교적 적었지만, 영국에게는 엄청난 정치적 타격이었다. 무기를 몰수하려던 사소한 작전에서 허둥지둥 퇴각했고 수많은 식민지주민이 민병대에 가담해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보스턴공방전 : 1775년 4월 19일~1776년 3월 17일
미국승리. 독립군 16,000명 대 영국군 11,000명
독립군 19명 대 영국군 79명 손실


독립군은 1775년 4월의 렉싱턴과 콩코드 산병전에서 승리한 후에 기세를 올려, 보스턴을 탈환하기로 했다. 영국군이 1768년부터 점령하고 있었다. 보스턴에서는 전쟁발발전부터 영국군과 식민지주민의 충돌이 잦았다, 보스턴은 항구로 병력과 보급을 받을 수 있어서 쉽지 않은 목표였다. 

오랜 기간동안 도시를 포위했고 1775년 6월 벙커 힐Bunker Hill전투에서는 영국군이 엄청난 피해를 입고도 승리를 거뒀다. 

11개월간 포위했지만 실제 전투는 별로 벌어지지 않았다. 1775년 7월,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이 도착해 대륙군Continental Army의 규율을 잡고 민병대를 합쳐 전력을 보강했다. 뉴욕 포트 타이콘데로가Fort Ticonderoga에서 노획한 영국군 대포를, 보스턴을 내려다보는 도체스터 헤이츠Dorchester Heights에 배치했다. 

1776년 3월, 보스턴을 맹포격했고 영국군장군 윌리엄 하우William Howe는 바다를 통해  노바 스코샤Nova Scotia로 퇴각했다. 보스턴에 있던 왕당파도 함께 탈출했다. 

조지 워싱턴이 대륙군 지휘를 맡았을 때에 영국군과 천연두에 맞서야했다. 병력 전체에 백신을 맞춰 병력손실을 크게 줄였다. (천연두 백신은 1776년 영국의사가 처음 시도한 것인데 이 부분은 BBC의 착오가 아닌가 싶습니다.)

 



벙커 힐: 1775년 6월 17일
영국 승리. 독립군 2,400명 대 영국군 3,000명
독립군 450명 대 영국군 1,054명 손실

영국군은 벙커 힐에서 승리를 거뒀지만 막대한 피해를 입어 그 의미가 퇴색했다. 영국군은 보스컨 부근의 고지를 점령하고 있는 독립군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주려고 했다. 그렇지만 그런 움직임을 미리 파악한 독립군은 매사츄세츠와 코네티컷Connecticut에서 1,000명이 부근의 찰스타운Charlestown에 집결했다. 

윌리엄 하우소장은 고지로 진격했다가 독립군의 맹렬한 사격을 뒤집어 썼다. 독립군은 탄약이 떨어지자 바로 백병전을 벌였지만 영국군에게 고지를 내주었다. 

 



영국군은 독립군보다 2배나 많은 손실을 입었고 렉싱턴과 콩코드전투 원인인 존 피트케른소령도 전사했다. 독립군의 의지를 재확인한 전투였다. 

 




브룩클린Brooklyn(또는 롱 아일랜드Long Island전투 : 1776년 8월 27~29일
영국승리. 독립군 10,000명 대 영국군 20,000명
독립군 2,000명 대 영국군 388명 손실

미국독립전쟁 최대의 전투로 30,000명이 참전했고 영국군은 종전까지 뉴욕의 전략요충지 항구를 장악할 수 있었다. 

영국군은 보스턴패배 후에 뉴욕에 집중했다. 대륙군이 뉴욕 방어선을 보강했지만 대부분이 전투경험이 없었고 훈련이나 규율이 엉망이었다. 

8월 22일, 영국군 10,000명이 롱 아일랜드로 진격했고 워싱턴은 기만공격으로 주공은 맨해튼Manhattan이라고 오판했다. 독립군은 브룩클린과 맨해튼으로 나뉘어 힘을 모으지 못했다. 대륙군은 양쪽에서 협공당했고 9,000명이 브룩클린 헤이츠Brooklyn Heights에 몰렸다. 

영국군이 포위를 준비하는 동안, 워싱턴은 밤을 틈타 강을 건너 탈출했다. 

 




트렌턴Trenton과 프린스턴Princeton전투: 1776년 12월 26일과 1777년 1월 3일 
미국승리. 독립군 2,400명 대 영국군 1,500명. 독립군 4,500명 대 영국군 1,200명
독립군 80명 대 영국군 1,175명 손실

1776년 말과 1777년 초, 대륙군은 두 차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둬 롱 아일랜드, 맨해튼과 뉴 저지New Jersey패전을 극복하고 사기를 올렸다. 1776년 12월 25일, 워싱턴과 오합지졸 군대는 악천후 속에서 얼어붙은 델라웨어Delaware강을 건너 뉴 저지로 진격했고 1,500명의 헤센Hessians군(당시 영국의 동맹)을 기습했다. 

헤센군 지휘관 요한 롤Johann Rall대령이 중상을 입고 죽기 전에 항복했다. 일부 병력은 탈출했지만 800명 정도가 포로로 잡혔다. 

워싱턴은 강을 건너 퇴각하고 병력을 더 모아 12월 30일에 다시 강을 건넜다. 이번에는 프린스턴의 영국군기지를 공격했고 병력이 크게 부족한 영국군은 퇴각했다. 

워싱턴은 2차례 승전으로 지휘능력을 인정받았고 대륙군은 전쟁을 이어갈 여력을 갖게 되었다. 

 



사라토가Saratoga: 1777년 9월 19일~10월 17일
미국 승리. 독립군 15,000명 대 영국군 6,000명
독립군 330명 대 영국군 1,135명 손실

1777년, 존 버고인John Burgoyne장군은 캐나다기지를 출발해 알바니Albany에서 뉴욕의 영국군과 합류할 생각이었다. 영국군은 허드슨Hudson강 하류를 장악하고 뉴 잉글랜드New England를 고립시킨다는 계획이었다. 

그렇지만 9월 19일, 버고인 부대는 뉴욕 사라토가 부근의 버려진 농장에서 호레이쇼 게이츠Horatio Gates의 대륙군과 충돌했다. 양측은 몇시간 동안 전투를 벌이다가 헤센군이 대륙군을 밀어냈다. 버고인이 뉴욕의 지원군을 기다리는 동안 독립군이 대륙군에 몰려들었다. 

10월 7일, 버고인은 독립군이 있는 베미스 헤이츠Bemis Heights에 병력을 보냈지만 실패했다. 영국군은 추운 날씨와 폭우에 시달리다가 대륙군에게 포위당했고 항복할 수 밖에 없었다.

대륙군은 이 승리로 외국의 지원을 계속 받을 수 있게 되었다. 프랑스는 1778년 2월, 동맹조약Treaty of Alliance과 통상조약Treaty of Amity and Commerce을 맺고 미국을 지원했다. 

 

(프랑스는 본국의 소총이 모자랄 정도로 미국을 지원했다고 합니다.)

 




몬머스Monmouth: 1778년 6월 28일
무승부. 독립군 11,000명 대 영국군 15,000명
독립군 600명 대 영국군 700명

1778년 말, 덥고 습한 날에 헨리 클린턴Henry Clinton의 영국군은 1년 전 겨울에 점령했던 필라델피아Philadelphia에서 퇴각하고 있었고, 워싱턴과 찰스 리Charles Lee가 후위를 공격했다. 영국군보다 2배나 많았고 최근에 군사훈련을 제대로 받았기 때문에 독립군이 상당히 우세한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리가 확신을 가지고 맹공에 나서지 않았고 전세는 크게 불리해졌다. 워싱턴이 전장에 도착하자 영국군에 밀려 달아나는 병사들로 가득했다. 분노한 워싱턴은 리를 해임하고 드 라파예트후작Marquis de Lafayette에게 병력을 맡기고 몇시간 동안 계속 전투를 벌였다. 오후 6시가 되자 양측이 물러났다. 

영국군은 이튿날 오전에 계속 전투를 벌이지 않고 어둠을 틈타 뉴욕으로 퇴각했다. 리는 군사재판을 받고 다시는 복무하지 못했다. 

 

 




캐우펜스Cowpens: 1781년 1월 17일
미국 승리
독립군 1.065명 대 영국군 1,150명
독립군 149명 대 영국군 868명 손실

전쟁이 계속되면서, 영국군이 식민지 남부에서 왕당파의 지원을 받았고 전쟁의 양상이 변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다니엘 모건Daniel Morgan의 대륙군이 남부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영국군작전을 교란하면서 영국군의 남부전역이 난처해졌다. 

영국군 배네스터 탈턴Banastre Tarleton중령이 대응에 나섰고 양측은 1781년 1월, 사우스 캐롤라이나South Carolina초원에서 전투를 벌였다. 모건은 병사들을 3열대열로 세우고 가장 먼저 영국군장교를 저격해서 혼란을 일으키고, 두번째 열은 일제사격 후에 등을 돌리고 뒤로 돌아서 마치 달아나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고, 경험많은 세번째 열이 영국군을 상대하게 했다. 

작전이 들어맞아 영국군은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독립군기병대가 달아나는 영국군을 궤멸시켰고 워싱턴의 조카인 윌리엄 워싱턴대령은 탈턴과 결투를 벌였다. 

탈턴은 달아나기 전에 워싱턴의 말을 쏘았지만 수모를 당했다. 승리를 거둔 독립군은 몇 개월 후에 요크타운Yorktown에서 대승을 거뒀다.  

 



요크타운: 1781년 9월 28일~10월 19일
영국군 항복. 독립군 19,900명 대 영국군 9,000명
독립군 389명 대 영국군 9,000명 손실

전쟁이 6년째 이어지면서, 양측은 결정적인 승리를 노렸다. 그리고 요크타운이 결전의 장이 되었다. 

대륙군은 프랑스의 해상지원을 믿고, 뉴욕기지에서 버지니아Virginia, 요크타운으로 엄청난 거리를 행군했다. 프랑스함대가 체서피크만Chesapeake Bay으로 들어와 요크타운을 봉쇄했고, 워싱턴과 프랑스 총사령관 드 로샹보Comte de Rochambeau백작은 요크타운으로 남진해 찰스 콘월리스Charles Cornwallis의 영국군을 포위했다. 그는 보급과 증원을 기다리고 있었다. 

집중포격이 이어지고 보급로와 탈출로가 모두 끊긴 콘월리스는 10월 17일에 항복했다. 

약 8,000명의 영국군과 왕당파가 포로가 되었고, 2일 후에 공식적으로 항복했는데 콘월리스 대신에 부사령관이 나섰다. 별다른 전투없이 2년을 보내다가 평화조약이 체결되었다. 

11월 25일, 프레드릭 노스Frederick North수상은 항복소식을 듣고 ‘신이시여. 다 끝났습니다. 다 끝났다고요’라고 울부짖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