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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독립전쟁

19세기의 전투 (4)- 죽음의 계곡을 향해

by uesgi2003 2011. 10. 25.

이번 이야기는 전사 중 가장 많이 인용되는 전투인 발라클라바(Balaclava) 전투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읽어보시면 아실테니까 글머리에서는 염두에 두실 몇 가지만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1. 영/프/러/터 4개국의 수십 만 명이 참전한 크림 전쟁의 규모에 비해 발라클라바 전투, 특히 경기병 여단의 사상자는 최대 400여명(러시아 손실 미포함)에 불과합니다.

2. 이 전투가 유명한 것은, 전투의 격렬함, 작전운용 기타 등등은 아니고, 귀중한 교훈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지휘관의 능력과 커뮤니케이션 방법입니다. 명령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으면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에 대해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3. 러시아군의 포병과 보병이 엄청난 포화를 퍼부었는데도 경기병 여단은 정면의 포대를 유린하고 심지어 절반 가량이 되돌아옵니다. 요즘의 시각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겠지만, 소총과 포의 발사속도나 정확도가 크게 떨어지던 시절이고, 러시아군의 사기와 훈련은 워낙 심각한 수준이었기 때문에 그런 전설(?)이 만들어질 수 있었습니다. 

4. 이 전투의 교훈은 실제 사회생활에서도 큰 의미를 가집니다. 지시를 내릴 때에는 간결하지만 누구나 바로 이해할 수 있는 지시를, 지시가 불분명하거나 이해가 되지 않을 때에는 반드시 다시 문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이야기 업데이트가 좀 지연되었었는데 중요한 전투 한 장면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죽음의 계곡을 향해, 발라클라바(Balaclava, 1854년 10월 25일)

지휘관의 멍청한 오판 때문에, 용감한 영국 경기병 여단은 러시아 포화 속으로 돌격해 들어간다.

Thomas J. Deakin (Military History 특별판)


경기병, 창기병, 용기병 혼성의 영국 기병대가 계곡 아래에서 대열을 정비하고 있는 동안, 레글란(Raglan) 경과 긴장한 참모들이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 전투를 위해 조직된 경기병 여단(Light Brigade)는 전사에서 계속 회자되는 전설을 남기게 된다. 그들은 러시아의 포화를 향해 정면돌격을 했고 완전히 와해된다.


발라클라바(Balaclava) 전투는 1854 10 25일 크림 반도에서 벌어졌다. 러시아는 압도적인 기병, 포병, 보병을 절벽 반대편까지 이어지는 양쪽 언덕의 경사면에 배치시키고 있었다. 이날 이른 아침에, 러시아군은 이 지역의 진지를 급습해 장악했고, 영국군은 그 정도의 피해는 긁힌 정도의 상처에 불과했다.

그러나 영국군이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영국의 초등학교 학생도 알고 있듯이, 600명의 영국 기병여단은 러시아 포대가 펼쳐진 죽음의 계곡으로 너무나도 용감하게 그리고 바보같이 정면돌격해 들어갔다. 기병대원들의 잘못은 하나도 없이!


그림 설명: 이 역동적인 장면은 당연히 실제 전투장면이 아니고 영화의 한 장면입니다. 놀란(본문참조)이 선두에 나섰다가 파편에 맞고 죽는 장면입니다. 영화는 이야기 마지막에 첨부되어 있으니 시간을 가지고 즐기시기 바랍니다. 여기의 모든 그림은 클릭하면 커집니다.


테니손(Tennyson) 경은 "왼쪽에도 대포... 오른쪽에도 대포... 정면에도 대포..."라는 시를 썼다.

누군가 실수했다.

그들은 저항하지 않았다.

그들은 의심하지 않았다.

그들은 돌격했고 죽었다.


"그들은 의심하지 않았다"라는 시구는 군대와 민간을 가리지 않고 지도자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사람들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테니손은 다른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명령을 이행한 그들이 잘못된 것이 아니고, 명령을 잘못 내린 경기병 여단장인 제임스 브루드넬(James Brudenell, 카디건 경) 준장을 비롯한 지휘관을 비난해야 한다는 것이다.


크림전쟁을 잘 모르는 사람은 왜 영국군이 이렇게나 멀리 떨어진 곳에서 전투를 벌였는지 궁금할 것이다. 그 당시는 제국주의가 절대선이었던 시대였고 러시아의 니콜라스(Nicolas) 1세가 "유럽의 환자" 터키의 다뉴브 지역을 침공하면서 크림 전쟁이 시작되었다. 러시아 짜르는 지중해로의 진출을 노리고 세바스토폴(Sevastopol)에 해군기지를 건립한 후에 터키의 수도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를 위협했다.

영국정부는 지중해에 러시아 함대가 출몰하고 터키가 러시아 영토가 될 수도 있다는 상황에 경악했고, 오랜 숙적이었던 프랑스까지 끌어들였다. 러시아는 1853년에 있었던 터키의 그리스 정교도 탄압을 빌미로 전쟁을 시작했고 그 해 11월에는 러시아 함대가 콘스탄티노플을 향해 출항해 터키 함대를 시노페(Sinope)에서 격침시켰다.

제해권에 목숨을 걸고 있는 영국으로서는 날로 위세를 더해가는 러시아 함대를 더 이상 두고 볼 수 만은 없었다. 러시아군의 행위를 학살로 규정하면서 런던은 참전을 요구하는 시위대로 가득 찼다. 영국 정부는 러시아에 대해 전쟁부터 선포한 후에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 지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전쟁의 초점은 세바스토폴에 있는 러시아 함대기지였기 때문에 영국해군이 투입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고 영국함대가 크림반도를 봉쇄해 러시아 본토와 단절시키는 전략이 검토되었지만 흑해의 수심이 너무 낮아서 전함을 배치시킬 수 없다는 것이 알려졌다.

결국 프랑스와 연합한 육군이 핵심역할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영국육군은 워털루 전투 이후에 대규모 작전을 펼쳐본 적이 없었고 가장 믿을 수 있는 웰링턴 공작은 2년 전에 죽은 상태였다. 다행스럽게도 그가 죽기 전에 후계자로 피츠로이 제임스 헨리 소머셋(Somerset, 레글란 경)을 지정해두었다. 레글란 경은 야전에서 대대규모 이상을 독자적으로 지휘해 본 경험이 없었는데도 그에게 영국이 총동원할 수 있는 30,000명의 병력이 주어졌다.

작다면 작다고 할 수 있는 이 병력은 보병 10개 여단으로 구성된 5개 사단이 주축이 되었고 여기에 2개 기병여단과 약간의 포병과 공병이 보강되었다. 5명의 사단장 중에서 2명만이 실전경험이 있었고 조지 프레데릭(35, 캠브리지 공작, 1사단)을 제외하고는 모두 60세가 넘는 고령이었다


(우에스기 왈: 나중에 본문에서도 설명이 나오듯이, 이 당시 영국의 지휘관은 금권정치와 같이 후원금으로 결정되었다고 합니다. 모 사단의 지휘관 자리를 능력이나 경험보다는 배경과 후원금으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지휘관 매각금?으로 다른 병력을 모집하고 무장시키는데 사용했던 것이죠. 그래서 이 전투에서는 특히나 지휘관의 역량이 문제가 됩니다.)


기병사단은 조지 빙햄(George Bingham, 루칸 경)이 지휘를 맡았고 경기병 여단은 사촌인 카디건 경이 맡았는데, 역사학자 크리스토퍼 히버트에 따르면 루칸은 "전쟁광"이었다고 평가할 정도로 잘못된 선택이었다. 히버트는 루칸을 "편견이 있고, 악의적이고, 용감하며 편협하고 인기가 정말 없는" 사람으로도 표현했다. 카디건 경에 대해서는 "루칸이 가진 장점은 모두 뺀 단점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루칸만큼 인기가 없었으며 훨씬 더 오만했다. 거기에 서로를 증오했다"라고 기록했다.

루칸은 병력을 조금씩 차출해 250명씩으로 구성된 2개 기병대대를 만들고 카디건에게 넘겼다. 카디건은 제8 경기병(Hussar), 18 창기병(원래는 루칸의 병력), 11 용기병(원래 카디건의 병력), 13 경용기병(Light Dragoon)과 제4 경용기병을 맡게 되었다.


그림 설명: 위가 기병사단 지휘관 루칸. 아래가 부하였던 경기병 여단장 카디건입니다. 이들의 불화와 무능력은 전체영화에서 답답해 미칠 지경으로 묘사됩니다. 그래도 무능력의 극치였던 러시아군의 지휘관보다는 나은 편이었습니다.


3개월에 걸쳐 영국을 떠난 병력은 콘스탄티노플을 거쳐 베르나(Verna)에 도착하지만, 이미 터키군이 다뉴브 지역에서 러시아군을 몰아낸 상태라 별 일없이 전쟁이 끝나는 것처럼 보였다. 카디건은 지루한 정찰임무를 맡았다. 1개 대대를 이끌고 15일 동안 500km가 넘는 지역을 정찰했는데도 60% 넘는 말만 잃고 러시아군은 찾지 못했다. 영국군에게 전염병이 번져 말과 사람 모두 고통을 받았지만 영국정부는 전쟁을 계속하기로 결정했고 9월에 약 60,000명 이상의 영프 연합군이 세바스토폴에서 50km 북쪽에 있는 칼라미타(Kalamita) 만에 상륙했다.


루칸 경은 베르나에 도착한 다음부터 열심히 돌아다니는 카디건을 좇아다녔고, 카디건은 루칸과 상관없이 레글란의 명령을 받아 거의 독자적인 지휘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루칸은 당연히 사단장으로서의 지휘관을 제대로 발휘하고 싶어했다. 영프 연합군이 세바스토폴로 진격하자, 카디건 휘하의 제11 경기병과 제13 경용기병이 선두에 섰다. 루칸은 제17 창기병과 제8 경기병과 함께 좌익에 섰으며 프랑스 군은 우익에 섰다. 조지 페이것(George Paget) 경이 제4 경용기병과 함께 후위를 맡았다.

해가 머리 위에 떠오르자 2,000명이 넘는 회색 군복의 러시아 기병이 불가네크(Bulganek) 강의 도강지점을 막아서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다음에 벌어진 일은 경기병 여단의 운명을 미리 알려주는 전조였다. 카디건과 쿠간은 선봉대를 재빨리 배치시켰지만 근처 고지대에 있던 레글란 경은 러시아 기병을 지원하기 위해 많은 보병이 집결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참모를 쿠란에게 보내 후퇴하라는 지시를 내렸는데, 참모장군이 도착했을 때에는 두 지휘관이 말다툼을 벌이고 있는 황당한 장면이 연출되고 있었다. 어쨌든 전투를 벌이지 말고 즉시 후퇴하라는 분명한 지시가 전달되어 이번에는 지휘계통이 무너지지 않고 제 모습을 지킬 수 있었다.

문제는 레글란의 명령이 너무 정치적이라 분명하지 않고 이러면 좋겠다는 제안수준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레글란은 지휘관이 아닌 고참지휘관으로 조언을 하려는 경향이 있었던 것이다. 이 날은 다행히 어느 누구도 다치지 않았고 루칸만이 "방관자"라는 오명을 뒤집어 썼다.

러시아군은 알마(Alma) 강으로 후퇴를 했고, 알렉산더 멘쉬코프(Alexander Menshikov) 왕자는 세바스토폴이 수비를 강화하는데 필요한 3주 동안 연합군을 막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짜르에게도 그렇게 장담했지만 영국 보병이 2,000명의 사상자를 내면서도 맹렬히 공격해 하루 만에 이곳을 점령했다. 레글란이 기병을 결정적인 순간에 투입하려고 아껴둔 것이었는데, 이번에도 인기가 없었던 방관자 루칸이 모든 욕을 먹어야했다.

알마를 점령한 연합군은 남동쪽으로 우회해 세바스토폴이 약점을 가지고 있는 지역에서 해군기지를 포위했다. 여기에서도 영국기병은 후퇴하고 있던 러시아 기병을 만났지만 숫자가 너무 많은 것에 놀란 레글란이 후퇴를 시켰다.


영국군은 세바스토폴에서 남쪽으로 15km 떨어진 발라클라바(Balaclava)에 캠프를 차렸다. 프랑스군은 항구 2개를 점령하고 포위전을 대비했지만 영국군은 몇 주면 이 전쟁이 끝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10 24, 러시아군 25,000명이 발라클라바 동쪽 10km 지점에 집결하기 시작했다.

터키 스파이는 발라클라바 수비군의 지휘관 콜린 캠벨(Colin Campbell) 중장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그는 레글란에게 다시 보고를 했다. 그러나 너무 급하게 보고가 된 탓인지 아니면 레글란이 스파이를 믿지 않았던 탓인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그 동안 영국군 캠프는 발라클라바 북쪽 5km 지점에 영국군 해군포를 장비한 터키군이 6개의 진지를 만들고 보호를 하고 있었는데, 터키군의 남쪽에는 제93 하이랜더 550명만이 배치되어 있었다. 터키군의 진지는 코스웨이(Courseway) 고지대를 따라 이어진 너무나도 중요한 보급선도 지키고 있었다.


10 25일 카디건이 여전히 요트에서 잠을 자고 있는 시간에, 동쪽 끝의 진지에 2개의 신호깃발이 올라오자 루칸이 영국기병에게 대열을 갖추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신호는 보통 적이 접근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데 터키군이 12파운드 포를 발사하면서 장교들은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11개 대대 병력의 러시아군이 30문의 대포의 지원을 받아 첫 번째 진지를 공격한 것이다. 90분 정도가 지나자 절반의 병력을 잃은 터키군이 진지를 내주고 도망을 쳤다. 2, 3, 4 진지의 지휘관은 영국군에게 지원요청도 하지 않고 진지를 비웠다.


그림 

설명: 발라클라바 전투의 전개도입니다. 심오한 전술이 있었던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이야기를 이해하는 보충자료로만 잘 보시기 바랍니다. 


레글란은 제1과 제4 보병에게 전진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자신과 참모는 750미터 고지에 올라 앞으로 있을 전투를 대비했다. 그 동안 루칸은 러시아군의 전진을 지연시키려고 움직였지만 실패했고 러시아군은 계곡 양쪽으로 기병대를 속보로 전진시키고 있었다.

루칸이 기병대를 전선에서 빼내자, 콜린 캠벨의 제93 하이랜더가 전투에 휘말린 첫 번째 영국군이 되었다. 포화를 피해 누워있던 550명은 러시아 기병대의 공격을 맞아 150명의 환자까지 동원했다.

고지대에서는 런던 타임즈의 통신원 윌리암 러셀(William Russell)이 하이랜더의 분전을 글로 옮겼다. "좌측에 러시아군이... 한 줄로 하이랜더를 덮쳤다. 수 많은 러시아군이 땅에 쓰러졌고... 그들은 소수의 영국군에게 계속 달려들었다." 러시아군은 왼쪽으로 선회했지만 하이랜더는 좌측을 내주지 않았고 결국 러시아 기병대가 물러나는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계곡 반대편의 상황은 좋지 않게 돌아갔다. 러시아 기병대가 계속 전진을 하고 있었다. 그곳에서는 영국군 기병 6개 대대가 레글란의 명령에 따라 터키군과 12파운드 포를 지원하려고 언덕의 진지로 올라가고 있었다.

터키군은 이미 진지를 비웠고 6개 대대를 이끌던 스칼렛(Scarlett)은 영국군의 포화를 피해 언덕 아래로 내려오던 러시아 기병대와 갑작스럽게 마주치게 되었다. 루칸은 대열을 갖추려고 하는 스칼렛에게 당장 돌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3,000명의 러시아군은 겨우 600명의 기병이 엉뚱하게도 언덕을 거슬러 올라와 공격하려는 모습에 당황해 멈춰서면서 스칼렛이 기동력을 잃은 러시아군을 공격하는 유리한 입장이 되었다. 레글란이 고지대에서 지켜보고 있는 동안, 영국기병은 러시아군을 꿰뚫고 지나간 다음 반전공격을 하려던 참이었다.


그림 설명: 러시아군을 향해 돌격하는 영국 창기병입니다. 유달리 영국군을 묘사한 그림은 이렇게 역동적인 기병의 그림이 많습니다. 클릭하면 커집니다. 


중기병이 뒤를 들이치고 작전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공교롭게도 우측에서도 기병이 달려들자 러시아군은 등을 돌려 언덕을 내려가 후퇴하기 시작했다. 레글란은 스칼렛을 칭찬하는 전령을 보냈다.

그러나 500m 정도 북쪽 언덕에서 이 장면을 지켜만 보고 있던 카디건은 애가 탔다. "빌어먹을 중기병놈들. 저 놈들이 우리를 비웃을 거야." 카디건은 나중에 그 장소에 머무르라는 명령을 받았고 제17 창기병 지휘관이 도망가는 러시아군을 추격해달라고 요청하는 것도 거절해야 했다고 말했다. 카디건은 루칸에게 책임을 돌렸고 루칸은 레글란을 비난했다.

그러는 동안, 보영 제4 사단에게 진지를 다시 점령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지만 너무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루칸에게 "기병을 전진시켜서 고지를 점령할 수 있으면 점령하라. 보병에게도 전진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라는 명령이 전달된다.

그러나 루칸은 보병이라고는 한 명도 보지 못했고, 뭐가 잘못된 것인지 몰라 30분 동안 제자리에서 보병만 기다렸다. 너무나도 귀중한 시간이 흐르는 동안, 러시아군은 코스웨이 고지에 있는 4개 진지를 11개 보병대대와 30문의 포로 완전히 점령해버렸다. 그리고 반대편 페디오우킨(Fedioukine) 언덕에도 8개 보병대대, 4개 기병대대와 14문의 포를 배치시켜두었다. 계곡의 동쪽 끝에는 영국 중기병에게 밀려난 러시아군이 창기병 대대와 12문의 대포와 함께 재집결하고 있었다.

귀중한 기회가 흘러가는 것을 본 레글란은 루칸이 움직이지 않는 것에 조바심이 났고, 즉흥적으로 다시 기병대를 투입하면 확실한 승리를 거둘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레글란이 대단한 지휘관감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부하들의 사기가 올라있고 적이 우왕좌왕하는 것을 느낄 수는 있었다.


루칸이 움직이기를 기다리는 동안, 러시아 포병대의 말이 로프를 가지고 진지에 접근 중이라는 정보가 들어왔다. 그렇다면 터키군에게 빌려준 12파운드 포들을 견인해가려는 것이 틀림없었다. 레글란은 전장에서 포를 잃게 되면 전투도 잃는다는 것을 웰링턴 공작에게서 배웠었다. 러시아군이 포를 견인해간다면 그 피해는 두 배가 되는 것이 당연했고 레글란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참모인 에어리(Airey) 장군에게 다음 명령을 내렸고, 에어리는 "레글란 경은 기병대가 전선으로 즉시 전진하기를 바라고 있소. 적을 추격해서 대포를 견인해가지 못하게 하시오. 기병 포대가 지원될 것이고 프랑스 기병도 좌익을 맡을 것이오. 즉시 움직이시오. 에어리"라는 역사적인 명령문을 가죽 주머니에 대고 급하게 받아 적었다.

레글란은 참모 중 가장 확실한 기병인 루이스 에드워드 놀란 대위를 시켜 70미터 정도의 가파른 절벽을 바로 뛰어내려가게 했다. 놀란 대위는 기병전술에 대해 두 권을 책을 썼고 경기병이면 어떤 임무도 수행할 수 있다고 믿은 사람으로 루칸과 카디건의 기병전술에 혐오를 하고 있었다.

레글란의 최종 명령은 루칸을 다시 혼란에 빠뜨렸다. 자신이 있던 아래에서는 어떤 러시아군도 대포를 견인하려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레글란은 자신이 고지대에 있어서 모든 전장의 모습을 파악할 수 있다는 말을 빠뜨렸고 루칸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에 대해 다시 묻지도 않았다. 루칸은 심지어 레글란의 두 가지 명령을 종합해서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루칸은 놀란에게 "뭔 공격하라고? 대포가 어디에 있는데?"라고 따져물었다.

놀란은 그만 진지에 있는 대포를 정확하게 가리키지 않고 동쪽 반대편에 있던 12문의 러시아군 대포 방향으로 애매하게 손동작을 했다. "저쪽입니다. ! 저기에 적이 있습니다. 대포가 있고요."

그러고는 놀란은 제17 창기병에 있는 친구 윌리암 모리스 대위에게 전투에 참가해도 좋은지 물으러 자리를 떴고, 루칸은 여전히 뭐가 뭔지 모르는 상태였다.

루칸은 놀란을 붙잡아 확실한 결정을 내려야 했었지만 카디건에게 레글란의 명령을 들고 갔다. 그리고 루칸만큼이나 판단력이 부족했던 카디건조차도 명령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끼고 "그런데 경. 러시아군이 우리 전면에 대포를 배치했을 뿐만 아니라 계곡 양쪽에도 보병과 포병을 배치시켜뒀습니다."라고 물었다.

루칸은 "나도 아는데... 레글란 경이 돌격하라고 하는 구만. 명령을 따르는 수 밖에 없지 않나."

사촌형에게 경계를 한 카디건은 경기병 여단으로 돌아가 대열을 정비시키고 지옥의 불길 속으로 뛰어들어갈 준비를 한다. 그는 최전열 오른쪽에 제13 경용기병을, 중앙에는 제17 창기병을, 왼쪽에는 제11 경기병을 배치시켰다. 4 경용기병과 제8 경기병으로 두 번째 열을 만들고 페이것에게 지휘를 맡겼다. 카디건은 페이것에게 죄선을 다해 따라와달라는 요청을 한 후에 최전열에 서면서 "이제 고향은 다시 못가보려나"라고 중얼거렸다.

루칸은 카디건과 상의도 하지 않고 제11 경기병의 위치를 옮긴 후에 중기병 여단에 다가가 칼을 뽑아들고 "기병 여단은 전진한다. 속보로 전진"이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제 전사에서 가장 유명한 전투의 한 장면 "죽음의 계곡을 향한" 2km의 돌격이 벌어진다. 레글란과 참모는 카디건의 여단이 대열을 지키며 움직이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고, 러시아군은 영국군이 진지를 공격할 것으로 예상하고 뒤로 물러나 고지에서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레글란은 보병이 기병을 좇아 진지를 재점령할 것으로 기대했다.


그림 설명: 영국 경기병 여단이 맹돌격하는 사이에 양쪽의 러시아군의 포대가 불을 뿜고 있습니다. 이 당시 러시아군 지휘관도 워낙 무능력했기 때문에, 이들을의 움직임에 따라 뒤를 봉쇄해 전멸시켰어야 할 러시아 기병이 그냥 지켜만봅니다. 


그런데 너무나 놀랍게도 기병대의 대열이 무너지면서 놀란 대위가 앞으로 튀어나왔다. 놀란은 우측으로 전속력을 내면서 카디건을 지나 앞에 서며 칼을 휘두르고 고함을 질러댔다. 당연히 러시아군의 대포가 포문을 열었고 첫 탄의 파편이 놀란의 가슴을 관통하고 나가 더 이상 전진하지 못했다. 죽을 때에도 칼은 떨어뜨렸지만 팔은 여전히 든 상태였고 경기병들은 놀란의 말이 뒤로 도망칠 때에도 시체가 소리를 내는 것을 들었다고 한다.

놀란이 갑자기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튀어나간 것은 카디건에게 방향을 수정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대부분의 전사에서 그에게 책임을 돌리고 있으며 놀란의 의도에 대해서는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다.

러시아군의 포화가 격렬해지면서 기병대의 속도도 전속력으로 치달았다. 고지의 참모들은 이 황당한 전황을 지켜보며 눈물을 흘렸고 프랑스 장군 피에르 보스켓(Pierre Bosquet) "감동적인 장면이지만 학살이다."라고 안타까워했다.

포탄이 작렬하며 기병들이 쓰러져갈 때마다 대대 지휘관들은 끊임없이 "중앙으로 밀착"을 외쳤고. 경기병 여단이 자신의 앞에서 마구 쓰러지자 루칸은 중기병에게 정지할 것을 명령했다. "이건 명령이 잘못된 거야. 중기병까지 희생시킬 수 없어."

대포에 100미터 정도 접근했을 때에 마지막 포화가 쏟아졌고, 산산조각났을 것으로 생각되었던 카디건은 놀랍게도 대포들 사이를 꿰뚫고 지나갔다. 그리고 50명의 기병이 그의 뒤를 따랐지만 포대를 그냥 지나쳤기 때문에 반전해 다시 공격해야만 했다.

좌측의 프랑스 기병대도 페디오우킨 언덕에 있던 러시아 보병과 포대를 공격해 궤멸시켰지만 한쪽의 포화만 줄인 효과만 있었을 뿐이었고 살아남은 경기병은 어떻게든 알아서 사지에서 벗어나야만 했다.


놀란의 친구 모리스 대위 휘하의 제17 창기병 중 20명은 포대를 비껴가는데 성공했지만 러시아 기병대와 마주쳤다. 한 줌도 안되는 기병은 돌격해 러시아군을 몰아냈지만 코사크 기병대의 추격을 받아 달아날 수 밖에 없었다. 모리스는 머리가 부서진 채로 말에서 떨어졌다.


그림 설명: 여기에서는 카디건이 포대를 유린하고 코사크 기병과 대결하는 역동적인 장면을 그렸지만 60세가 넘는 그가 그랬을 리도 없고 코사크 기병은 이렇게 기민하게 대처하지도 않았습니다.  


두 번째 줄에 있던 약간의 창기병과 제13 경용기병이 포대에 난입해 그 때까지도 포탄을 장전하던 포병들을 베어넘겼다. 마침 후퇴하던 제4 11 경기병은 다시 돌아와 공격에 합류했고, 러시아 기병은 도저히 이해가 안될 정도로 무기력하게 제자리만을 지키고 있다가 거꾸로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덕분에 살아남은 기병들은 포대를 무너뜨린 후에 공격을 피해 물러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모든 기병이 그렇게 운이 좋았던 것은 아니었다. 8 경기병의 프레데릭 조지 쉬웰 중령은 러시아 포대가 무너진 후에 다른 기병대를 찾아 말을 몰다가 러시아군 기병대가 뒤를 차단한 것을 보고 70명 정도의 병력을 이끌고 돌진해 들어갔지만 다른 기병대는 후퇴를 하고 있어서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


페이것은 나중에 아내에게 "우리가 어떻게 돌아올 수 있었는지 기억이 안나오"라고 편지를 썼다. 그는 전진하는 도중에 쏟아진 엄청난 포화와 총탄에 대한 기억을 되살렸고, 참모였던 로버트 포탈 대위는 어머니에게 후퇴가 전진보다 훨씬 더 어려웠다고 편지를 썼다. 고지대에 있던 레글란은 계곡 끝에서 소수의 병력이 모여있는 것을 보고 처음에는 이상하게 생각했다. "저기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네? 맙소사! 경기병 여단이 싸우고 있어!"


그림 설명: 전투 후의 경기병 생존자들 모습입니다. 사진만 보면 아주 극소소가 살아남았을 것 같지만 절반에 가까운 인원이 살아남았고 러시아 기병과의 본격적인 전투가 없었기 때문에 생존자의 상태가 극히 양호했습니다.


카디건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는 포대를 지나 러시아 기병대 20m 앞에서야 말을 멈췄다. 러시아 라드지빌(Radzivill) 왕자는 런던에서 만났던 그를 알아보고 사로잡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카디건은 추격하는 코사크를 뿌리치고 약간의 상처만 입은 채로 다시 포대를 넘어왔다. 그러나 자신을 따르는 병력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자신의 임무는 완전히 실패했고 그렇다고 일개 병사로 싸우는 것은 장군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도망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려고 아주 느린 속도로 계곡을 빠져 나왔다.

그는 멈춰서 전투에 참가하지 않은 중기병대의 스칼렛 장군을 만나자 "놀란이 죽을 때에 계집애처럼 비명을 지르더군요"라는 말을 건넸고, 스칼렛은 "그만두시오. 경은 방금 전에 놀란의 시체를 건너오지 않았소."라고 싸늘하게 대답했다.


발라클라바 전투는 영국 본토를 들끓게 했고 출신배경에 따라 지휘권을 주는 기존의 시스템을 고치는 계기가 되었다. 청탁금에 따라 지휘권을 부여하던 시스템은 영국 정부의 큰 수입이 되었었는데, 입찰식으로 과도한 경쟁이 붙으면 카디건의 시절 연대장은 현재의 10억원이라는 큰 금액으로 뛰었다.

무모한 돌격의 대가에 대해서는 기록에 따라 다른데, 타임즈의 러셀은 607명 중 195명만이 돌아왔다고 했고 역사가 세실 우드햄-스미스도 생존자에 대해서는 의견을 같이 했지만, 109명 전사, 120명 부상

58명 부상으로 441명이 생존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림 설명: 경기병 여단의 분전은 문학뿐만 아니라 뮤지컬로도 만들어져 공연되었을 정도로 영국을 분노로 몰아넣었습니다. 무능력한 리더때문에 희생된 병사들이 안타까웠기 때문이죠. 160년 전의 런던시민의 의식이 분노할 줄도 모르는 요즘의 젊은 세대보다도 더 나을 수도 있겠습니다.


포로를 심문한 러시아군 장교는 기병대가 술을 마시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랐다고 한다. 술을 마시지 않고서도 그렇게 무모한 돌격을 할 수 있었는지 이해가 안되었고 그 다음부터는 영국 기병대와 직접 대결하는 일은 피했다고 한다.

경기대 여단이 죽음의 계곡으로 돌격한 것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이런 일이 벌어진 원인으로 5가지를 꼽는데 (1) 루칸과 카디건의 심각한 불화 (2) 레글란의 명확하지 않은 명령 (3) 레글란과 루칸 사이의 명령전달 체계 오류 (4) 지리적 상황 (5) 놀란의 행동이 바로 그것이다.

루칸과 카디건은 서로를 혐오했던 것이 사실이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서로를 도왔고 명령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레글란의 명령은 발라클라바 전투 내내 불분명했었다. 한 두 마디만 더 보충했다면 루칸이 분명하게 알아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루칸의 위치가 자신만큼 모든 것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감안해서 좀 더 자세한 명령을 내려야 했다. 루칸도 명령을 받고 이해가 안되었으면 정찰기병을 보내 상황을 파악했어야 했다.

이 전투에 대해 책을 쓴 바틀렛(Bartlett)은 놀란을 비난하고 있다. 놀란은 적의 배치상황, 명령의 목적과 기병대의 임무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었다. 전투 초기에 그를 만났던 한 근위병 장교는 "너무 벅찬 흥분으로 자제력을 잃어버렸다"라고 말했다.  


다음은 Osprey 출판사의 18~19세기 영국기병 변천사입니다. 설명없이 그림만 연속해 올리겠습니다. 클릭하면 커집니다. 그 다음에는 발라클라바 전투의 마지막 경기병 여단의 돌격장면을 두 개 올립니다. 1938년도 영화와 비교해서 보시기 바랍니다. 









 

 

 

 

 

 

 

 

 

 

 

 

 

 

 

 

 

 

 

이 영화는 전투장면보다 지휘관때문에 답답해서 스트레스받은 기억이 납니다.

이 클립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지휘관끼리 책임을 미루면서 싸웁니다.

그리고 놀란에 대해 쫑알거리니까 너 지금 그의 시체를 넘어왔으니까 입닥쳐라는 장면이 제대로 그려졌군요.

그러니까, 놀란은 싸우다 죽었는데 너는 도망쳐왔잖아.

 

1938년 작품은 그 시대답게 고증은 완전히 무시한 경기병 여단의 전설만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심지어 러시아 사령관이었던 왕자가 죽기까지 하는군요 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