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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독립전쟁

미시시피 촌놈들의 최고의 순간 - 1부

by uesgi2003 2011. 1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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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개봉했던 고지전이라는 영화를 보신 분이 계신가요? 휴전조약이 체결되었지만 발효될 때까지 한 뼘의 땅이라도 더 갖기 위해 남과북이 피를 흘리던 비극적인 영화입니다. 영화가 다 끝났다고 생각할 때에 정말로 감독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이어지죠.


이번 이야기는 그것보다도 더 비극적인, 시간이 많이 지났기 때문에 희극적으로도 보일 수 있는 뉴 올리온즈 전투입니다. 

이 전투가 미국과 영국의 역사에 미친 영향은 대단했지만, 그곳에서 죽어간 4,000명 이상의 병사들은 죽을 필요가 전혀 없었던 목숨이었습니다. 휴전조약이 유럽에서 2개월 전에 맺어졌지만 소식을 전할 방법은 배를 타고, 말을 타고 직접 전하는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 기간 동안 양쪽이 치열한 전투를 벌이게 됩니다. 

 

 

미시시피 촌놈들의 최고의 순간

 

뉴 올리온즈(New Orleans) 전투,1815 1 8

 

미시시피 강둑을 따라 늘어선 오합지졸의 미국 수비군과 앤드류 잭슨(Andrew Jackson) 장군은 대영제국의 최강군대를 막아내고 미국의 운명을 결정짓는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Thomas Flemming, Military History 특별판

 

 

1814 9월 중순, 루이지아나 총독 윌리암 클레이본(Claiborne)앞으로 의문의 편지가 배달되었다. 그가 혐오하는 미시시피 강 근처의 토호세력인 쟝 라피트(Jean Lafitte)에게서 온 편지였다. 라피트는 부자 집에서 태어나 나폴레옹 전쟁 기간 동안 미국, 영국과 스페인 상선을 노략질한 해적이었다. 1813, 클레이본은 이 해적을 잡는 사람에게 500달러의 상금을 주겠다는 포고문을 걸기도 했었다. 라피트는 거꾸로 클레이본을 잡아오는 사람에게 5,000달러를 주겠다는 포고문을 뉴 올리온즈 전역에 뿌렸다.

 

그림 설명: 유명한 미국전사 화가 Don Troiani가 그린 뉴 올리온즈 전투입니다. 나중에 이 사람의 화집 그림을 추가하겠습니다만, 실제로 큰 그림으로 보시면 대단한 역작들입니다.

 

해적이 감히 자신에게 직접 편지를 보냈으니 황당했겠지만 편지를 뜯은 그의 얼굴은 공포로 얼어붙었다. 편지에 따르면 라피트는 영국군 대위에게서 뉴 올리온즈 공격에 합류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고 한다. 영국군 원정대는 캐나다에 이미 만들어 놓은 대영제국의 영토와 똑 같은 것을 멕시코 만을 따라 만들 계획이었던 것이다. 이 지역을 점령하면 영국이 프랑스의 나폴레옹과 전쟁을 벌이던 1812년에 반란을 일으킨 미국인들을 궁지에 몰아넣을 수 있게 된다.

 

(우에스기 왈: 약간의 배경 설명을 하면, 미국이 독립한 후에 계속된 영국과의 긴장으로 미국함대가 영국 선박을 공격하고 캐나다의 영국식민지를 공격해 들어가는 적극적인 공세를 폅니다. 캐나다 원정은 참담한 실패로 끝나고 영국함대가 반격으로 미국해상에 머무르면서 유럽과의 무역의 봉쇄하자 유럽에 모든 것을 의존하고 있던 미국의 경제는 큰 타격을 입습니다. 결국 영국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하게 되고 영국이 정규군을 파견하게 됩니다.

자유무역을 표방하던 미국은 무역봉쇄를 계기로 내수시장을 크게 늘려 자립도를 높이게 됩니다.

 

이 전투의 배경이 되는 뉴 올리온즈는 영국계 미국인보다 프랑스와 스페인 이민자와 혼혈인이 대부분이었던 지역으로 연방정부에 대한 충성도가 상당히 낮았습니다. 라피트는 프랑스쪽 혈통이어서 영국은 그를 이용해 뉴 올리온즈 시민의 반란을 노린 것으로 보입니다.)

 

나폴레옹을 엘바섬에 몰아넣어 전쟁을 끝낸 영국의 강력한 병력이 자메이카에 집결해 미국으로의 진격을 기다리고 있었다. 로키어(Lockyer) 대위는 라피트에게 루이지아나에 사는 프랑스 시민들을 함께 구출하자고 설득하던 참이었다. 미시시피 강 입구의 뉴 올리온즈를 장악하면 강을 통해 면화와 밀을 수출하는 미국의 취약한 경제를 말라버리게 할 수 있다. 라피트는 영국군 대위에게 2주의 여유를 달라고 요청해 시간을 벌고는 즉시 클레이본에게 죄를 사면받는 조건으로 미국 편에 서겠다는 편지를 보냈다.

클레이본 총독이 가진 해군전력은 겨우 6척의 작은 무장함과 대포 14문의 범선이 고작이라 영국군 구축함 한 척이 5분만에 전멸시킬 수 있는 하찮은 정도여서 해상에서 영국군을 저지할 방법이 없었고, 육군도 47세의 앤드류 잭슨 중장이 지휘하는 정규군 700명이 고작이었다.

 

 

그림 설명: 1800년대 초반의 미국 정규군의 모습입니다. 대륙이 떨어져 있었지만 프랑스와 영국의 영향이 그대로 느껴지는 모습입니다. 여기의 모든 그림은 클릭하면 커집니다.

 

미국이 나폴레옹에게서 구입한 뉴 올리온즈의 주지사로 11년 동안이나 있으면서도 클레이본은 프랑스와 스페인 시민을 미국시민으로 만드는데 실패했다. 그는 워싱턴 정부에 끊임없이 불평만 늘어놓으며 애원하는 편지만 보냈었다. "여기 시민들은 의지도 없고 단결하지도 않습니다. 곳곳에 스파이와 반역자들 뿐입니다"라고 울어댔다.

뉴 올리온즈에서 시민군을 조직하려던 시도도 저항과 조롱만 샀을 뿐이다. 프랑스 영사가 다른 동료에게 협조해주라고 부탁하자, 시민들은 클레이본의 창문을 박살내는 것으로 대답했다. 북쪽에서 간신히 모은 시민군도 남부지역에서는 별 호응이 없는 것을 보고 대거 탈영을 했다. 그보다도 더 큰 문제는 소총과 탄약도 너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클레이본이 손톱만 물어뜯고 있는 동안, 북쪽의 뉴 잉글랜드는 전쟁을 계속할 것인지 아니면 미국연방에서 탈퇴할 것인지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제퍼슨 다음으로 대통령이 된 제임스 메디슨은 한 나라의 지도자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모자랐다. 그는 영국과 전쟁을 벌이기 바로 직전인 1811년에 알렉산더 해밀턴 은행 파산에 대한 의회투표를 승인했고 결국 연방정부는 파산상태가 되었다. 연방정부의 신용이 얼마나 형편없었던지 전쟁상(장관) 제임스 먼로가 은행마다 돌아다니며 자신의 신용으로 돈을 빌려야 할 정도가 되었다.

뉴 잉글랜드는 전쟁선포를 반대했었다. 제퍼슨 대통령이 1807년 멍청하게도 영국이나 프랑스의 공격이 두려워 미국 상선이 다른 어느 국가와도 거래를 하지 않는 수출금지 조치를 취하면서부터 뉴 잉글랜드는 연방정부와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메디슨 대통령은 이 조치를 약간만 수정한 채 계속 유지하고 있었는데, 코피가 난다고 목을 베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멍청한 조치였다. 전쟁이 시작된 다음 캐나다를 점령하려는 일련의 시도가 실패로 돌아갔고 연방정부의 무능함때문에 남부지역의 독립열기는 식어갔다.

소수의 영국군이 1814 8월 메릴랜드에 상륙해 오합지졸의 미국군을 쫒아낸 다음 워싱턴의 집들을 불지르고 다니는 일이 벌어지자 남부의 반 연방정부 감정이 극에 달했다. 며칠 뒤 영국군은 알렉산드리아 근처에 있던 전쟁물자를 무방비상태로 노획하는 일까지 생겼다. 천만다행으로 챔플레인(Champlain) 호수에서 영국군을 이기면서 뉴 잉글랜드 분리주의자들이 영국군을 직접 만나는 최악의 상황을 피할 수 있었다.

한 편으로는 2대 대통령의 아들인 존 퀸시 아담스가 이끄는 협상단이 벨기에 겐트(Ghent)에서 영국 정부관료와 치열한 평화협상을 시도하고 있었다. 영국정부는 승자독식의 원칙으로 미시시피를 자유롭게 항해하고 북서 지역에 위상국가를 세우겠다는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미국의 국가주권은 완전히 무너지게 되기 때문에협상단은 이 조건을 계속 거부하면서 전장에서 승전보가 전해오기만을 기다렸다.

 

 

이제 뉴 올리온즈, 아니 미국 전체의 운명은 앤드류 잭슨 중장이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걸려 있었다. 추종자들이 미시시피 촌놈이라는 애칭으로 부르던 잭슨은 1814년 초에 크릭족 연합을 공격해 미국 연방에게 23백만 에이커의 땅을 안겨주면서 국가영웅으로 떠올랐다.

 

(우에스기 왈: 크릭족은 남동부에 살던 인디언 원주민들로 스페인 탐험대에 대항해 일종의 국가연합을 설립했습니다. 23백만 에이커는 약 93천 평방km의 엄청난 땅을 의미합니다. 아마도 크릭족은 약간의 거주지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땅을 빼앗겼을 것입니다.)

 

그림 설명: 미국 독립전쟁 이전의 영/프 전쟁때부터 미국땅의 주인이었던 인디언들은 전투에 이용당했습니다. 이 그림은 돈 트로이아니의 그림으로 너무 커서 절반만 스캔했습니다. 양쪽 모두에 인디언이 참전한 그림입니다.

뉴 올리온즈 전투에서도 영국과 미국 모두에 인디언이 정찰과 특수부대 형식으로 동원됩니다.

 

뉴 올리온즈의 정서는 절대로 호의적이지 않았다. 프랑스 장군들의 거들먹거리는 모습을 직접 봤던 한 혼혈(프랑스와 흑인, Creole) 여성은 잭슨을 "추악하고 늙은 뱃놈"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잭슨은 유럽의 다른 장군과 달리 과감하다는 장점이 있었다. 클레이본이 라피트의 경고를 받았던 9월에, 잭슨은 스페인에게서 최근에 점령한 모바일(Mobile) 항구에 있었고, 이미 영국군이 침공할 지도 모른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는 영국군이 모바일을 점령한 후에 배톤 루지(Baton Rouge)로 이동한 다음에 북쪽에서 뉴 올리온즈로 공격해 내려올 것이라고 생각했고 크릭족과의 전투에 참가했던 테네시 민병대에게 즉시 달려와달라는 요청을 해둔 상태였다.

영국군은 실제로 모바일 점령 후에 육로로 이동하려고 했었지만 너무 자신감에 넘쳐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루이지아나가 무방비 상태라는 정보를 받은 원정군 지휘관 알렉산더 코치레인(Alexander Cochrane) 부제독은 4척의 프리킷함(구축함보다 작은 전투함)과 해병대 1개 중대를 중립지대였던 스페인령 서 플로리다의 펜사콜라(Pensacola)로 보냈다. 이곳에서 영국군은 크릭족을 무장시키고 훈련시키기 시작했다. 해병대 니콜스 중령은 라피트와 해적무리를 포섭하는 동시에 현지 시민들에게 무능한 정부를 함께 무너뜨리자고 선동했다.

9 12, 니콜스는 모바일 만의 바위어(Bowyer) 요새를 공격했다. 잭슨은 여기에 겨우 12문의 소구경 포와 130명의 정규군만 배치시켜 두었기 때문에 영국군은 단 20분이면 점령한다고 큰소리쳤지만 놀랍게도 소수의 미군은 영국해병의 공격을 막아냈을 뿐만 아니라 한 척을 침몰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니콜스는 펜사콜라로 후퇴했고 잭슨은 곧바로 적의 교두보에 선공을 퍼부었다. 존 코피(Coffee) 소장이 지휘하는 2,000명의 테네시 기병, 700명의 정규군 그리고 약간의 미시시피 용기병이 11 7일에 펜사콜라를 공격해 영국군을 다시 배로 돌려보냈다.

영국에 동조했던 스페인군과 크릭족은 미군의 맹렬한 기세에 완전히 사기를 잃었다. 잭슨에게 조롱하는 편지를 보냈던 스페인 총독은 "당신을 따르며 감사하는 종복이 손에 입맞춤하며"라는 서명을 한 편지를 보낼 정도였다. 배톤 루지에서 내쉬빌까지 레드코트(영국군)가 도망쳤다는 소식이 퍼지면서 시민군 사이에서도 사기가 올랐다.

 

잭슨이 펜사콜라에 2개 연대를 남겨두고 모바일로 돌아가자, 뉴 올리온즈로 와서 수비군을 지휘해달라는 클레이본의 편지가 도착했다. 주지사는 그 동안 해군을 동원해 장 라피트를 공격하는 믿을 수 없는 짓을 저질렀다. 2,000명의 병력을 보유한 라피트는 클레이본이 보낸 소함대와 70명의 정규군을 단숨에 수장시킬 수도 있었지만, 미국과의 관계가 더 이상 악화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형 피에르와 함께 근처의 섬으로 후퇴를 했고, 미군은 큰 형 프레데릭과 80명을 포로로 잡고 50만 달러 상당의 물품을 노획했다.

잭슨은 원래 클레이본의 공격에 대해 동의를 했었고 대부분의 시민이 라피트를 지지하고 있으며 이번 공격을 실수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여전히 해적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오랜 친구인 에드워드 리빙스톤(Livingston)에게 자문을 구했다.

 

그림 설명: 역사에 자신의 이름을, 초상화까지 남긴다는 것을 가문의 영광이지만 그래도 교훈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되겠죠? 왼쪽이 위기의 상황에서 아무 것도 해내지 못한 무능력한 주지사 클레이본이고 오른쪽이 최악의 상황에서 모든 것을 다 해내 대통령까지 오른 잭슨 장군입니다.

 

잭슨과 함께 의회에서 활동했던 변호사 리빙스톤은 1790년대 말 혼란스러웠던 정치판에서 신뢰를 쌓았다. 리빙스톤은 잭슨에게 라피트와 화해를 하고 시민들을 최대한 끌어안으라는 진심어린 조언을 했다. 잭슨은 시민들의 반감을 실제로 느끼게 되자 중앙 광장에서 환영식을 열어 시민에게 다가섰다. 잭슨이 "적은 바다로 몰아내거나 완전히 분쇄하겠다"라고 웅장한 연설을 마치자, 한 시민은 전율을 느꼈다고 기록했다. 나이를 가리지 않고 거의 모든 남성이 시민군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미군이 모바일과 펜사콜라를 장악하고 있었지만, 영국군은 수륙양면에 능숙해서 1,000km나 되는 걸프 해안에 언제라도 상륙할 수 있었다. 실제로 그들은 도시로 향하는 6개 경로를 선택해뒀었다. 잭슨은 이 모든 경로를 방어하기에는 병력이 턱없이 부족했고 이 일대를 모두 아는 사람도 없었다.

잭슨이 자신의 선택을 두고 고심하는 동안, 코치레인의 50척의 함선, 1,500명의 해병, 5,498명의 정규군은 자메이카 네그릴 만을 떠났다. 당시 56세인 코치레인은 형 챨스 코치레인이 1781년 요크타운 전투에서 전사했었기 때문에 미국인에 대한 증오심을 가지고 있었다. 육군 지휘관은 33세이 존 킨(Keane) 중장으로 웰링턴 공작 아래에서 지휘관 수업을 쌓았고 무모한 성격으로 악명이 높았다.

원정대의 비공식적인 모토(motto)"미인과 약탈", 미인은 뉴 올리온즈의 유명한 혼혈 미인들을 말하고 약탈은 도시에 쌓여있는 15백만 달러 상당의 목화와 다른 물품을 말하는 것이었다. 영국군은 모바일과 펜사콜라에서 패전을 겪어놓고도 의외로 손쉬운 승리를 기대하고 있었다. 많은 장교들이 수송선에 아내를 데리고 와서 마치 해외여행하는 분위기까지 느껴졌다. 코치레인 제독은 크리스마스를 뉴 올리온즈에서 거대하게 즐길 수 있다는 약속을 했다.

 

잭슨은 이질에 걸린데다가 1813년부터 어깨에 박혀있는 탄알(내쉬빌에서 정치적인 문제로 대결하다가 입은 부상)때문에 납중독으로 몸 상태가 엉망이었지만 뉴 올리온즈 곳곳을 돌아다니며 방어막을 확인하면서 한 주를 보냈다. 그는 도시에서 90km 남부에 있는 세인트 필립 요새에 특히 주의를 기울였다. 28문의 24 파운드 포로 영국군이 미시시피 강을 거슬러 올라오지 못하게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요새였기 때문이다. 나머지 포대는 20km 남부의 잉글리시 턴(English Turn, 미시시피 강의 굴곡점)에 배치되었다.

코치레인은 전함 HMS 톤넌트(Tonnant)에서 지도와 수집된 정보를 분석하고 있었다. 뉴 올리온즈의 스페인계 스파이들이 많은 정보를 제공해주었는데 이들은 영국군이 승리하면 루이지아나가 다시 스페인령으로 바뀔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킨 장군의 염려에도 불구하고 코치레인은 부르쥬(Bourgne) 호수를 통하는 길을 진격로로 선택했다. 이 호수는 미시시피 강 10km, 잉글리시 턴바로 앞까지 전진할 수 있다. 그곳에서 여러 경로를 선택할 수 있는데 그 중의 하나는 우회전해서 폰챠트레인(Pontchatrain) 호수를 거치면 북쪽에서 뉴 올리온즈를 공격할 수 있었다. 아니면 알려지지 않은 육로를 운좋게 발견해서 남쪽에서 바로 도시를 공격할 수도 있을 것이다.

 

부르쥬 호수의 취약점을 알고 있던 잭슨과 패터슨은 여기에 총 전력 6척의 소형전투함 중 5척을 배치시켜두었다. 코치레인은 미군의 전투함을 그냥 때려잡을 하루살이정도로 판단하고 한 문의 대포가 장착된 45척의 상륙정을 내려 12 14일에 미군 전투함을 공격했다.

전투함 지휘관 토마스 캐스비 존스(Jones) 중위는 영국군의 습격을 급하게 잭슨에게 알렸고, 바람이 불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노에 의존해 영국군과 전투를 벌였다. 2시간의 전투가 끝나자 미군은 10명이 죽고 존슨을 포함한 35명이 부상을 당했고 나머지가 포로로 잡혔고, 영국군은 17명이 죽고 77명이 부상을 당했다.

 

그림 설명: 부르쥬 호수에서 상륙함만으로 미국 전투함을 공격하고 있는 영국군입니다. 생각보다 치열한 전투는 아니었던지 불과 150여명만 죽거나 다친 전투였습니다. 이 전투로 영국군이 뉴 올리온즈로 향하는 길이 열립니다.

 

존슨은 패배를 당했지만 잭슨에게 귀중한 시간을 벌어주는 동시에 영국군이 이 호수를 통해 진격한다는 확실한 정보를 제공했다. 배톤 루지 요새에 있던 코피 장군에게 "잠도 자지 말고 바로 내게 합류하시오"라는 잭슨의 명령이 전달되었다. 다른 전령은 미시시피 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만나는 테네시와 켄터키 민병대에게 멈추지 말고 바로 합류해달라는 요청을 전달했다. 다른 어떤 원군보다 더 급한 것은, 연방 정부가 몇 달 전에 보냈다는 총과 화약이 빨리 도착하는 것이었다. 잭슨은 다른 한 편으로는 부르쥬 호수에서 미군 전투함이 전멸당했다는 소식에 동요하고 있는 뉴 올리온즈를 안정시켰다. 그는 루이지아나 주 의회 앞에 나타나 계엄령을 선포했고, 의원들은 주권침해라고 비난하며 계엄령을 거부했다. 클레이본 주지사에게서 완전히 버림받은 의원들은 당연히 잭슨에게 협조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도시가 불타는 것보다는 항복해서 온전히 살아남기를 바랬다.

리빙스톤은 잭슨이 라피트를 만나라고 계속 조언하면서, 의회가 해적을 사면시켜야 한다고 재촉했다. 먼저 사면이 되어야 잭슨이 자신의 말을 뒤집지 않고도 해적과 협조를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잭슨이 정말로 라피트와 만났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그와 형 피에르가 잭슨의 참모가 되었고 다른 형제 도미니크 유는 해적선에서 가져온 포대의 지휘를 맡았다. 그리고 이들은 무려 7,500 정의 화승총과 500 정의 소총을 제공했다.

12 20, 코피 장군의 선봉대인 2,000명의 여단이 뉴 올리온즈에 도착했다. 나머지 병력도 이틀 후에 합류했다. 그리고 몇 시간 뒤에는 잭슨의 친구 윌리엄 캐롤 중장이 지휘하는 3,000명의 테네시 민병대가 도착했다. 캐롤은 5주 동안 미시시피 강을 내려오면서 훈련도 함께 했다. 민병대는 도중에 연방정부의 느려터진 수송대를 만나 1,100정의 소총을 먼저 가져왔다. 12 22, 토마스하인즈 소령이 미시시피 용기병 연대를 이끌고 도착했다. 이제 강 어딘가에서 다가오고 있을 2,300명의 켄터키 민병대만 도착하면 해볼만한 전투가 되는 것이었다. 12 23, 잭슨은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에 "모든 것이 제대로 되고 있소(All's well)"라는 말로 만족스러움을 나타냈다.

편지를 봉투에 넣자마자, 3명의 흙먼지를 뒤집어 쓴 병사가 사령부로 뛰어 들어와 영국군이 도시 남부 14km까지 전진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영국군과 뉴 올리온즈 사이에는 요새도, 대포도, 다른 어떤 병사도 없이 영국군과 미군만이 있을 뿐이었다.

 

잭슨이 아무리 생각해봐도 영국군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을 해냈다. 현지 주민으로 위장한 두 명의 영국군 장교가 부르쥬 호수에서 미시시피 강까지 이어진 육로를 발견해냈고 잭슨의 거듭된 요청에도 불구하고 지역주민 중 어느 누구도 2,080명의 영국군이 다가서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지 않았던 것이다, 기습을 받은 지역 수비대 중 한 명이 탈출해 잭슨에게 영국군의 진격을 알렸던 것이다.

그 소식을 들은 잭슨의 첫 번째 대답은 "그 놈들을 무찌르자. 신이 도울 것이다"였다. 잭슨은 공포에 사로 잡힌 병사들을 참호로 몰아넣지 않고 거꾸로 공격에 나섰다. 그는 캐롤과 테네시 민병대에게 예비군으로 뉴 올리온즈에 남으라는 명령을 내리고 2,131명의 병사로 영국군에게 공격을 퍼부었다. 공격에는 제7 44 보병 연대, 그리고 지역주민의 반대를 꺾고 모집한 하이티 자유흑인 대대가 참여했다. 그리고 포병지원을 위해 14문의 대포를 장착한 USS 캐롤리나에게 강 하류로 내려와서 영국군 캠프 반대편에 정박해 있게 했다.

기습은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자만한 영국군이 저녁식사 준비를 하는 동안 캘로리나에서 퍼부은 포도탄이 캠프를 뒤흔들었다. 그리고 정규군, 자유흑인, 일부 뉴 올리온즈 민병대가 도로를 따라 공격에 나섰지만 곧 날이 저문데다가 강의 안개가 자욱했고 기습의 충격에서 벗어난 영국군이 대열을 갖추면서 전투는 소대단위 그리고 점차 일대일 육박전으로 변했다. 영국군 지휘관 킨은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가 없어서 참모에게 "무슨 전투가 도대체 이따위야?"라고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자정이 되자 미군은 영국군 캠프를 관통해 강까지 도달했지만 다른 영국군 여단의 측면공격을 받았다. 그리고 미군의 앞에 있던 영국군 제85 연대도 이제는 도랑을 따라 강력한 수비선을 펼쳐둔 상태였다. 커피는 잭슨의 명령에 따라 후퇴했다. 두 명의 도망병은 잭슨에게 6,000명의 영국군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렸고 이 병력이 주력병력이라면 기습군 전체가 위험에 빠지기 때문에 후퇴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날이 밝자, 양쪽의 손실이 드러났다. 미군은 24명 사망, 115명 부상, 74명 포로의 손실을 입었고 영국군은 46명 사망, 167명 부상, 64명 포로의 손실을 입었는데 영국군 포로 중에는 지난 8월에 수도에 불을 질렀던 제95 연대의 사무엘 미첼 소령이 포함되어 있었다.

12 24, 미군의 대담한 기습에 충격을 받은 킨은 4,700명이나 되는 병력이 준비하고 있는데도 뉴 올리온즈 공격을 연기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잭슨이 뉴 올리온즈에 충분한 병력이 있기 때문에 이런 대담한 기습을 펼쳤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얼마 안되는 전사자 중에 유명인들이 끼어있었기 때문에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지고 있는데다가 날씨가 추워져 여름용 군복을 입고 있던 자메이카 흑인 연대가 움직이려 하지 않았고 미군의 캐롤리나는 무방비상태의 영국군 캠프에 계속 포도탄을 쏘아대고 있어서 도저히 전투를 벌일 분위기가 아니었다.

잭슨은 미시시피 용기병의 정찰을 통해 영국군이 전진하지 않고 캠프에 틀어박혀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잭슨은 영국군을 따라 로드리게즈(Rodriguez) 수로를 따라 방벽을 쌓아올리게 했다. 하루가 지나자 통나무와 진흙더미로 800m 정도의 방벽이 만들어졌지만 잭슨은 말에서 한 번도 내리지 않고 곳곳을 돌아다니며 밤새 참호를 파게 했다.

 

(우에스기 왈: 전쟁에서는 전략과 병력 못지 않게 시간이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적시적소라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킨이 귀중한 시간을 허비하는 동안 잭슨은 허접한 방벽을 쌓았고 이 방벽이 전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2부는 다음에 바로 이어집니다.)

 

1800년대 초반 레드코트로 유명했던 영국보병의 복장과 무장입니다. 용맹했던만큼 피해가 컸던 하이랜더 연대를 주목해서 보시기 바랍니다. 모든 그림은 클릭하면 커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