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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독립전쟁

미국독립전쟁 당시의 레드코트(영국군)

by uesgi2003 2012. 8. 27.

 

미국 출판사와의 라이센스 문제가 잘 풀려야 여러분에게 가장 좋은 리더십 인물을 소개할 수 있을텐데 걱정이 많습니다. 원서 자체가 퓰리처 상을 탔던 책이고 미국 최대 출판사인 랜덤하우스이다 보니 라이센스를 높게 부르면 방법이 없습니다.

 

'미래를 바꾼 리더십 시리즈' 1권이 잘 나와주어야 세계역사를 바꾼 101번의 전투 등 다음 시리즈들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 외에도 제가 직접 편집하기 위해 Militray Histroy에 문의 메일을 보내놓았는데 이것도 궁금합니다. 제대로 성사되면 멋진 내용들이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질 겁니다.

 

이번 이야기는 근대 유럽뿐만 아니라 아시아에서 미국까지 영국 제국주의의 선봉에 섰던 레드코트(Redcoat)이야기입니다. 영국 정규군을 말하지만 영국군이라고 하면 그들만의 특색이 사라지기 때문에 레드코트라고 부르겠습니다.

 

그림 설명: 멋진 그림이니까 클릭해서 큰 그림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거듭 안내하지만 IE에서 보셔야 그림과 설명이 제대로 연결됩니다. 그림 안에 설명이 있습니다.

 

 

 

 

미국독립전쟁 당시의 레드코트(영국군)

 

 

19세기 프랑스 저자 Ernest Renan은, 나라들이 역사를 기억할 때에는 어느 정도의 왜곡이 있고 전사에 있어서는 그 정도가 더 심해진다고 주장했다. 미국독립전쟁은 숭고한 자유시민 지원병들이 '영광스러운 목표'에 목숨을 바쳤다는 신화를 만들어냈지만, 전쟁에서 패한 영국에게는 독일 용병, 왕당파와 레드코트의 실수투성이 합작품이라는 오명을 남겼다.

신화는 읽기좋은 소설에 넘기도록 하고, 전사에서 양쪽의 장단점을 평가할 때에는 군 전력의 엄격한 진실만을 인정해야 한다. 선량한 병사라도 나쁜 전투에 참전할 수 있으며, 사기가 항상 넘치는 것도 아니고 오늘의 영웅이 내일은 겁쟁이가 될 수 있다. 레드코트를 입었던 블루코트(미군)를 입었던 상관없이 잘 조직된 군대는 맹종, 가학, 패배주의의 복잡한 가능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 단순한 구조로 명령이 정확하게 일반 사병에게까지 전달되는 군대는 지금까지 존재한 적이 없었다.

레드코트를 '미국독립전쟁 당시 대부분의 전투를 이긴 대단한 군대'라고 칭찬한 사람이 있다. 그러나 레드코트가 벙커 힐, 부룩클린, 브랜디와인, 저먼타운, 사바나, 캠던, 길포드 코트하우스와 같은 전투에서 이겼지만 전쟁에서는 결국 졌다.

 

(우에스기 왈: 사실 레드코트가 세계 최강의 군대는 아니고 유럽에서도 절대강자의 지위는 아니었습니다. 영국군의 중심은 해군으로, 육군은 프랑스, 프러시아, 러시아에 비해 열세였습니다. 그래도 해군에 대한 투자를 그렇게 많이 하고도 강력한 육군을 유지하며 전세계 전장에 투입할 수 있었다는 점은 대단했습니다.)

 

레드코트는 거의 모든 전장에 모습을 나타내고 그렇게 효과적으로 싸웠던 것일까? 

미국독립전쟁 당시의 레드코트는 대부분 지원병이었다. 마을에 몇 명의 드러머와 함께 연대단위 모집관이 연설을 하면 계약을 하는 형태였다. 사기성 모집도 적지 않았다. 술에 취해 여인숙에서 잠이 들었는데 깨어서 보니 자원입대한 것으로 되어 있고 주머니에는 누군가가 넣어준 돈이 들어 있었다. 심지어 범죄를 저지르고 처벌을 면하기 위해 자원입대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너무 긴급한 상황일 때에는 '신체가 건강한 남성은 적법한 상업활동이나 근로활동을 입증하지 않으면...' 강제징집하기도 했다.

1778년 버크셔의 한 관리는 장관에게 '강도와 도둑질로 구속된 범죄자들이 있는데 육군이나 해군에 상당히 쓸만하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림 설명: William Redmore Bigg이 그린 Trepanning a Recruit (신병 꼬시기). 영국 모집관이 호구를 잡아서 입대지원서에 서명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군 복무는, 특별힌 어떤 전쟁을 위해 계약한 것이 아니라면, 평생 계속되지만 실제로는 그 병사가 부상을 입었거나 나이먹었을 경우 또는 해당 부대의 병력숫자가 너무 적어졌을 경우에는 군복무에서 풀어줬다. 의사검진을 받은 후에 입대할 수 있었지만 그 당시 의료수준이나 채워야 할 숫자때문에 형식적인 절차였다. 군입대 나이는 17~50세였고 드러머는 소년병을 모집했다.

독립전쟁 당시 사병의 절반 정도가 영국과 웨일즈 출신이고 나머지 절반은 스코트랜드와 아일랜드 출신이었다. 대부분의 사병은 보병이었고 60개 연대 정도가 전세계의 이런 저런 전투에 참전했었다. 정규 기병연대 중 16과 17 경용기병(Light Dragoons)만이 해외참전했고 왕당파 기병대가 보조를 해준 정도였다.

 

 

영국군은 프랑스나 프러시아와 같은 유럽 강대국과 비교해서 적은 수로 참전하고 평화를 유지했다. 독립전쟁 당시, 영국군은 118개 보병대대(당시 연대와 대대의 구분이 분명하지 않았다)와 30개 기병연대로 규모가 크게 늘어났다. 한 대대에는 10개 중대가 있었는데, 8개 보병중대(모자때문에 hatmen이라고 불렀음), 2개 경보병(Flank) 중대, 그리고 1개의 독특한 모자를 쓴 척탄병(Grenadier)로 구성되었다.

완전 충원된 경우, 1개 대대는 600명 정도였는데 독립전쟁에서는 대대의 병력이 이보다는 적었으며 사상으로 인한 결원은 보충되지 않았다. 캠던(Camden) 전투 직전, 33 연대의 8개 대대는 238명이 전부였고 길포드 코트하우스의 2개 근위대대는 전부 합쳐서 400명을 넘지 못했었다.

 

대위가 지휘하는 중대는 1768년 당시에는 3명의 장교, 3명의 하사, 3명의 상사와 2 명의 드러머와 47명의 사병이 있었으며 경보병과 척탄병 중대는 서류상으로는 더 많은 병사가 있어야 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했다. 1779년 제42 로얄 하이랜더의 존 피블스 대위는 80명 중에 무려 50명이 아픈 상태여서 30명 만이 전투에 나설 수 있었다고 기록했다. 

기병연대는 대위가 지휘하는 8개의 중대로 구성되었었는데 말이 부족해서 한 곳에 모이는 경우가 드물었다. 1781년 카우펜스(Cowpens) 전투에 참전했던 제17 경용기병 중대는 60명의 장교와 사병을 동원할 수 있었다. 

대대 지휘관은 보통 대령이나 중령이었지만 실제로는 소령이나 선임대위에게 맡겨진 경우도 많았고 영관급 장교가 연대 자체를 소유했다고 해도 될 정도였다. 연대 지휘관은 정부가 연대병력의 무장을 위해 지급한 돈과 실제로 들어간 돈의 차액을 가졌고 대대 중 하나를 자신이 지휘하는 것으로 장교 한 사람 몫의 급여를 챙겼지만 실제로 그 대대는 중위가 지휘를 맡았다. 

연대 지휘관의 권한은 절대적이어서 대대 지휘관 임명이나 진급에 전권을 가졌다. 


1750년대까지 지휘관의 이름으로 연대를 불렀고 그 이후에는 창립순서대로 번호로 불렀지만 번호보다는 이름을 더 외우기 쉽다는 이유로 혼용했다. 평화 시에 군감축을 하게 되면 뒷 번호 연대부터 해산시키기 때문에 번호는 상당히 중요했고 장교들은 선임 연대에 들어가기 위해 애를 썼다. 

군 사령관은 기병과 보병 연대만 지휘했고 포병, 공병, 요새와 창고는 동급인 군수장군(General of Ordnance)가 맡았다. 

보병/기병장교와 포병/공병장교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는데, 포병과 공병장교는 왕립군사학교를 졸업한 후에 임관되었고 상관이 진급을 시켰다. 전투부대에서 복무하고 싶은 젊은 장교들은 신청서를 낸 후에 장교 자리를 살 수 있었다. 빈자리가 생길 때마다 진급을 할 수 있었지만 진급자리를 돈으로 살 수 있었던 것은 중령까지였다.

 

실제로는 다양한 경로를 통해 임관할 수 있었다. 1660년~1871년 기간 동안에는, 첫 번째 임관은 돈으로 살 수 있었지만 전시에는 많은 부대가 급하게 구성되면서 필요한 장교 숫자가 급증했고 견습장교(Gentleman Volunteer, 사병신분으로 합류해서 일정기간 후에 장교로 임관하는)로 군대에 합류할 수 있었다. 사병들도 장교로 임관할 수 있었다. 1770년에 입대한 제이콥 브런트는 1811년에 중령까지 진급했었다. 

장교가 은퇴하거나 전사한 경우, 선임 순으로 진급했지만 조작이 가능했다. 재력이 있는 장교는 원하는 연대를 골라 더 빨리 진급할 수 있었다. 웰링턴 공은 아더 웨슬리라는 이름으로 1787년 3월, 제73 보병연대에 임관했었다. 1791년에는 제58 경용기병대에서 대위로 진급했고 1793년에는 제33 보병연대의 소령으로 자리를 옮겼고 그 해 10월에는 겨우 24살의 나이로 중령 계급을 달았다. 33연대를 지휘하는 동안 대령으로 진급했고 1802년에는 준장이 되었다. 


어느 군대나 마찬가지로 영국군도 채찍과 당근을 사용해 부대의 단결력을 유지했다. 규율은 엄격해서 사소한 위반은 채찍질을 당했고 심각한 범죄는 처형을 당했는데 비도적적인 일에 대해서는 벌금형을 내렸다. 탈영하는 경우 사형이 선고되었지만 마지막 순간에 사면되는 일이 많았다. 1779년 7월, 존 서덜랜드 일병은 탈영죄로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사면되는 순간에 기쁨으로 거의 실신지경'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장교가 사병에게 손을 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피블 대위가 술취한 병사를 때린 후에 후뢰하는 글을 남겼는데, 영국 장교가 독일병사를 때린 것에 많은 병사들이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사기를 높이는데에는 정확한 급여지급, 승진, 좋은 음식과 약간의 술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술은 병사들이 전투의 두려움을 잊게 하려는 것보다 원정지에서의 스트레스를 줄이려는 목적이었다.

적의 재산을 노획해 나누어주는 상금도 사기 진작에 많은 도움이 되었지만 계급 순서로 나누어가졌기 때문에 오히려 문제가 된 경우가 많았다.

 

연대단위 구성에 대해 좋게 평가한 역사가는 오랜동안 함께 복무하면서 연대 고유의 문화가 만들어지고 충성도가 더 높아진다고 했지만 평화 시의 연대는 중대 단위로 나뉘어져서 개별 행동을 하기 때문에 생각보다 동료애가 없었다고 한다.

병사들은 입대하면서 기본적인 훈련을 받지만 각 부대는 영국전역에 흩어져 있었기 때문에 연합훈련을 하기 힘들었다. 1754~63년 기간 동안 프랑스와 인도전쟁에 참전했던 윌리암 하우(William Howe)는 전초전(Skirmishing) 훈련을 위해 7개 경보병 연대를 불러모았지만 절대다수의 장교와 사병들은 단 한 번의 전투경험도 없이 미국 땅으로 향했다.

영화와 달리, 독립전쟁에서는 연대 단위의 독특한 군복이나 척탄병의 모자는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연대가 구성된 지 얼마 안되었고 신병이 계속 합류하던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연대의 정체성은 병사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는 기록이 많다.

 

영국 제23 로얄 웰치 퓨질리어(Royal Welch Fusilier) 연대가 1781년 3월, 길포드 코트하우스의 미국 시민군에게 다가섰을 때의 일이다. 시민군은 철책 뒤에서 소총을 겨누고 있었고 일제사격 직전의 침묵이 있었을 때에 제임스 웹스터 중령이 앞에 나가 힘찬 목소리로 '가자. 용감한 퓨질리어 병사여'라고 외쳤다. 시민군의 첫 번째 일제사격은 상당한 피해를 줬지만 영국군은 그대로 전진했고 시민군은 다음 사격을 제대로 이어가지 못하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림 설명: 1775년 벙커힐 전투 모습입니다. 밀집대형으로 전진하는 모습을 비웃는 전사 초보자들이 많은데, 밀집대형은 고대 로마와 그리스 팔랑스부터 이어져온 기본적인 보병대형입니다. 창과 방패를 들고 화살을 맞아가며 적에게 다가가 방패로 밀어대던 전형적인 백병전 전술입니다. 전장식 소총 시대에는 속사가 불가능했고 일제사격 후에는 엄청난 탄연(화약연기)으로 연사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근거리까지 서로 접근해서 한 두 번의 일제사격만 했습니다. 밀집대형에는 고참병을 뒷열에 배치해서 일제사격 후에 대열을 무너뜨리고 도망치는 것을 막았습니다.  

부대 단위로 보면 밀집대형 전진-> 사격 -> 돌격 후 백병전이 엄청난 전사자가 나오는 전술이었지만 전장에 투입된 전체를 본다면 부대가 전멸해서 입는 피해보다 대열을 무너뜨리고 도망쳐서 입는 피해가 훨씬 컸습니다. 

어느 한쪽의 대열이 무너지기 시작한다면 기병을 투입해 그 지역을 넓히고 단절되어 고립된 부대를 협공하기 때문에 아무리 큰 피해를 입어도 제 자리를 지켜야 했습니다.  

 

제2 대대 경보병이 1777년 10월에 저먼타운에서 기습을 당해 곤란을 겪고 있을 때에, 하우가 소리쳤다. "부끄러운줄 알아라 경보병대! 우리가 언제 도망간 적이 있었나. 대열을 맞춰라! 대열! 도망갈 생각이냐." 그러나 경보병이 실제로는 적이 주력공격을 받고 있던 것이라 창피한 일이 아니었고 하우도 그 점을 인정했다. 


 

레드코트의 전투력에는 '자신감과 외국인혐오증'도 한 몫을 했다. 독일용병 헤센 대위는 레드코트의 전투력에 대해 '무한한 자긍심과 오만함' 덕분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1781년 요크타운에서의 항복을 지켜본 프랑스인은 영국군이 거의 헐벗은 농부 모습인데도 불구하고 정복자같은 오만함을 보여 놀랐다고 한다. 

원래 외국인, 특히 시민군을 싫어했던 레드코트는 항복한 시민군에게 죽어간 아군의 복수를 했다. 영국군이 정도를 넘어선 경우가 몇 건이 있었다. 1778년 9월 28일, 찰스 그레이가 이끄는 경보병 12개 중대가 조지 베일러의 독립군 경용기병대를 패배시킨 후에 뉴저지 해링톤에 거주하던 미국인들을 밤에 습격해 학살한 적이 있었다. 

 

그림 설명: 병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미국 현지에서 왕당파 병사들을 모집하는 공고문입니다.


미국독립전쟁은 다른 전투와 달랐다. 영국군은 시가전이나 산악전 연습을 자주 했고 경보병대가 험지에서 시민군을 상대할 수 밖에 없었다. 일부 장교들은 보병이 밀집대형으로 일제사격을 퍼붓는 프러시아 전투방식을 선호했지만 미국에서는 그럴 수 없었다. 1780년 캠던과 같이 밀집대형 전투가 있기도 했지만 아주 드문 경우였다. 

레드코드가 공격을 할 때에는 약 30m 거리에서 일제사격을 한 후에 소리를 지르며 총검을 앞세워 돌격하고 시민군은 도망가는 것이 보통이었다. 사격-함성-돌격 순서는 독립전쟁 내내 계속되었고 웰링턴의 1812년 살라망카 전투에서 큰 성공을 거뒀다. 살라망카에서는 프랑스 패잔병이 기병대에게 학살당했던 반면에 미국에서는 시민 패잔병이 숲으로 도망가 목숨을 건졌고 다시 저항에 나설 수 있었다. 

 

다른 곳에서는 큰 위력을 발휘했던 보병전술이었지만 형태가 없는 시민군에게는 그 위력이 크게 줄어들었다. 

미군 중장 나타넬 그린(Nathanael Greene)은 계속 전투에 지더라도 병력을 보존하면 전투를 계속 벌일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반면에 영국군 기병장교 버내스터 탈렌톤(Banastre Tarleton)은 길포드 코트하우스의 승리가 큰 의미가 없으며 '얼 콘웰리스(Earl Cornwallis)의 보병이 항복한 것으로 영국군이 패배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지만, 미국인들에게 결정적인 승리는 이끌어내지 못한다'라고 상황을 정확하게 판단하고 있었다. 

 

그림 설명: 1777년 버고인 장군이 사라토가에서 항복하고 있습니다. 이 전투를 계기로 프랑스가 참전했고 전쟁의 승패는 급격하게 미국으로 기웁니다. 제 블로그의 모든 그림은 클릭하면 커진다는 것은 기본입니다.


사라토가에서 영국군 존 버고인(John Burgoyne)장군이 패배한 것은, 전사에서 그렇게 큰 일은 아니었지만 프랑스가 참전하는 계기가 되었고 영국은 미국보다 영국해협을 지키는 것이 급선무가 되었다. 요크타운에서 콘웰리스가 패배한 것은 훨씬 큰 영향을 미쳐서 영국군이 미국에서 발을 빼는 계기가 되었다.

레드코트는 '미국 반란군의 재생력'에 대해 해결방법이 없었다. 경험많은 독일 장교는 영국이 초기에 반란을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시민군은 병사가 될 수 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영국군은 시민군을 잡지 못했고 결국 미대륙 거주민의 마음도 잡지 못했다.   


 

우리나라에서는 크게 주목받지 못한 미국독립전쟁 이야기가 많이 나왔습니다. 전투 각각에 대해 설명하려니 너무 길어져서 다음에 한 편의 이야기로 따로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영화 'Patriot'에서 Camden 전투 장면입니다. 좋은 화질이니까 소리 높여 즐겨보시기 바랍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IFpFHj4XfF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