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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독립전쟁

미시시피 촌놈들의 최고의 순간 - 2부

by uesgi2003 2011. 11. 7.


25, 영국군 캠프에서 한 발의 포성이 울려퍼졌다. 이제 드디어 공격이 시작되는 것일까? 용기병은 잭슨에게 영국군에 새 장군이 합류했다는 것을 알려왔다. 소문으로는 웰링턴 공작의 분신이라고 하는데, 웰링턴의 사촌인 37세의 에드워드 파켄햄(Pakenham) 중장이었다. 파켄햄은 그 동안 별 성과를 보이지 못한 킨을 대체하기 위해 온 것으로, 전투에서 승리하는 것을 너무 당연하게 생각한 나머지 루이지애나 총독의 업무 서류함을 가져왔으며 대가로 이 지역을 보장받았다고 했다. 그는 병사들에게서 인기가 높아서 웰링턴이 다시 부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림 설명: 미군의 방벽을 공격하고 있는 영국군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출발할 당시에 들었던 것과 달리 파켄햄은 크리스마스 기분을 낼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코치레인 제독이 선택한 부르쥬 호수를 통한 공격로에 대해 심각하게 염려하고 있었다. 영국군은 미시시피 강과 도저히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늪 사이에서 갇혀버렸던 것이다. 19km의 좁은 늪 통로만이 함대로 가는 유일한 길이었다. 더구나 미군이 단단히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습을 노릴 여지가 없었고 결국 130km의 거리를 왕복하며 군수품을 실어나르는 부담까지 안고 있었다.

파켄햄이 불만과 염려를 나타내자, 코치레인은 그가 결단을 내리지 않는다면 자신이 직접 해군과 해병을 동원해 오합지졸 미군을 공격할 것이고 육군은 그냥 군수품이나 나르라고 말했다. 자존심이 상한 파켄햄은 참모와 함께 공격 계획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장군의 첫 번째 결정은 미군의 캐롤리나를 먼저 없애는 것이었다. 그의 포병 지휘관 알렉산더 딕슨(Dickson) 대령은 가열로를 만들어서 포탄을 달군다면 경포만으로도 충분히 미군의 전투함을 처리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우에스기 왈: 적함이나 성벽을 공격할 때에 포탄을 뜨겁게 달군 다음에 바로 사격을 하는데, 적함에 구멍을 내는 동시에 화재를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전장포에 대해서는 http://glob.egloos.com/v/2653071에 아주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이 블로그에는 다른 전장지식들도 많으니까 참조하시면 좋을 것입니다.)

 

12 27일 새벽, 영국군의 달궈진 포탄이 캐롤리나로 쏟아졌다. 잭슨은 강을 거슬러 후퇴하라는 명령을 내렸었지만 바람이 거의 없고 물결이 거세서 제 때에 후퇴할 수가 없었다. 몇 발의 포탄을 맞은 캐롤리나에는 화재가 발생하면서 폭발을 했고 이 장면을 지켜보던 영국군 캠프에서는 환호성이 올랐다.

영국군 포병은 이제 1.7km 정도 상류에 있는 24 파운드 포 무장상선 루이지애나를 노렸다. 루이지애나의 선원들은 빨갛게 달궈진 포탄을 계속 떨어지는데도 보트와 밧줄을 이용해 배를 강변으로 올려 위험에서 벗어났다.

 

짜증스럽던 미군 전투함을 모두 쫓아낸 파켄햄은 찰메트(Chalmette) 농장을 가로질러 공격을 시도했다. 존 램버트(Lambert) 중장의 병력 2,400명이 조만간 합류하겠지만, 함대가 가지고 있는 군수품만으로는 오랜 시간을 버틸 수 없으며 근처의 농장을 약탈한다고 해도 턱없이 부족할 것이기 때문에 서둘러야만 했다. 그리고 한 편으로는 포병이 미군의 진흙 방벽을 무너뜨려 오합지졸들을 총검으로 전멸시킬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12 28일 추운 아침에, 영국군은 2개 대열로 전진을 시작했다. 킨 장군은 3개 연대와 일부 민병대를 지휘했고 사무엘 깁스(Gibbs) 중장은 늪지대에 있던 잭슨의 측면으로 병력을 이끌었다. 대포가 미군의 방벽으로 포문을 열었고 미군을 놀라게 만들 목적으로 로켓탄(Congreve 로켓)도 발사했다. 잭슨은 로켓탄은 "애들이나 놀랄 장난감"이라고 소리치면서 병사들의 동요를 막았다.

 

그림 설명: 다연장로켓의 중간형태입니다. 극초기형은 이미 중국이 수 백년 전에 사용했었죠. 로켓탄은 정확도나 폭발력이 크게 떨어져서 적을 공포에 몰아넣거나 신호용으로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미군을 너무 얕잡아 본 탓에 구포와 같은 대구경 포를 가져오지 않은 것도 패전의 주요 원인이 됩니다.

 

강에서는 루이지아나가 조용히 대기 중이었다. 영국군이 달궈진 포탄을 다시 발사했지만 제대로 맞추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 킨의 병력이 방벽에서 600m 지점까지 전진하자, 패터슨이 "발사!"라고 소리쳤다. 루이지아나와 방벽에서 강력한 포탄이 쏟아지면서 영국군의 대열을 찢어놓았다. 포화가 얼마나 치열했던지 영국군이 "지금까지 싸운 전장에서 가장 끔찍한 포화"라고 회상할 정도였다. 특히 도미니크 유가 지휘하던 포대가 가장 치명적인 손실을 입히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찰메트 농장 건물들에는 부비트랩이 설치되어 있어서 포화를 피해 몸을 숨긴 영국군이 그 안에서 모두 죽었다.

미군 포병은 이제 영국군 포대에 포화를 집중시켰다. 그들은 2문의 6파운드 포를 부수

2문의 9파운드 포가 전장을 떠나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미군의 좌측에 있던 깁스의 병력은 루이지아나의 사정거리 밖에서 계속 전진하고 있었다. 그는 늪으로 1개 연대를 보내 200명의 테네시 민병대를 밀어내고 지휘관을 죽였다. 잭슨이 모집한 60명의 인디언이 영국군의 발목을 잡았지만 깁슨은 인디언의 교란공격을 신경쓰지 않고 미군의 측면공격에 집중하기로 했다.

잭슨에게는 안좋은 소식이 계속 들어왔다. 그렇지 않아도 영국군이 좌측을 위협하고 있는데, 클레이본에게서 뉴 올리온즈 의회가 영국군에게 도시를 내줄 생각이라는 전령이 왔다. 의회와 시민들은 잭슨이 전쟁에서 패하면 영국군이 도시를 고스란히 가지지 못하도록 불을 지를 것이고 노예들이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걱정했던 것이다. 잭슨은 단호하게 "주지사에게 당장 상황을 알아보라고 하시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의회를 날려버리겠다고!"라고 말했다.

그 동안 전장터 중앙에서는 영국군의 대열이 무너지고 대포들이 내버려져 있는 것이 보였다. 우측에서 전진하던 깁슨의 상황을 알지 못한 파켄햄은 상황을 잘못 읽고 그만 후퇴명령을 내렸다. 어처구니없는 명령을 받은 깁슨과 연대장들은 화를 참지 못했다.

파켄햄은 코치레인 제독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육군의 경포만으로는 루이지아나와 방벽에 설치된 24파운드와 32파운드 포를 상대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해군이 가진 18파운드와 24파운드 포를 사용하려고 했다. 코치레인과 해군은 함대에서 부르쥬 호수를 가로지르는 130km 거리를 무거운 포를 운반하기 시작했다. 약간만 땅을 파도 물이 나오는 습지대로 3일 밤낮으로 고생한 끝에, 1815 1 1일에 드디어 대구경포를 설치할 수 있게 되었다.

 

아침이 밝고 안개가 걷히자 영국군의 대포가 불을 뿜었다. 초반의 승리와 새해 첫날의 기분에 들떠있던 미군진영에 포탄이 떨어지고 머리 위로 로켓탄이 날아다녔다. 처음에는 영국군 포병이 미군의 포 3문을 부수면서 승기를 잡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30분이 지나자 미군의 포화가 영국군 포대를 두들기고 무거운 해군포를 더 이상 지탱하지 못하게 되면서 곳곳에서 무너져내렸다. 화약까지 떨어졌기 때문에 3시간에 걸친 대결에서 결국 영국군의 대포는 완전히 침묵하게 된다.

 

그림 설명: 영국군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는 미군 진지의 모습입니다. 실제 전투는 미군의 일방적인 공격을 영국군이 일방적으로 두들겨맞다가 물러났습니다.

이런 그림의 특징은 앞 옆에서는 병사들이 죽어넘어가는데, 지휘관은 한가로운 영웅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돈 트로이아니의 그림을 제가 좋아하는 이유가 그의 그림에서는 병사 한 명 한 명마다 역동적이고 마치 전장터에 있는 느낌을 주기 때문입니다.

 

 

파켄햄은 다시 한 번 후퇴명령을 내렸지만 미군 포병은 그대로 돌려 보낼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어둠이 내릴 때까지 영국군은 차가운 비를 맞아가며 땅에 엎드려 있어야 했다. 두 번에 걸친 패배로 사기가 크게 떨어진 영국군은 심지어 10문의 대포를 안전한 곳으로 옮기라는 명령을 못 들은 체했다. 파켄햄이 직접 나서 명령을 하지 않으면 움직이지도 않았다.

이 때에 반가운 소식이 전해져왔다. 램버트와 2,700명의 새 병력이 부르쥬 호수 근처에 도착했다는 소식이었다. 파켄햄은 즉시 해군에 요청해서 그들을 실어 나르게 했다. 잭슨도 마찬가지로 반가운 추가병력이 도착했다. 1 4, 소식이 끊겼던 2,368명의 켄터키 민병대가 도착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보급을 받지 못해 3명이 겨우 한 자루의 소총만을 가졌고 복장이나 건강상태가 아주 안 좋았다. 잭슨은 뉴 올리온즈에서 두꺼운 옷을 구해왔고 시장을 설득해 스페인 화승총이라도 무장시켰지만 무기를 갖지 못한 나머지 절반은 수비선의 가장 뒤에서 비무장의 예비군으로 배치되었다.

 

그 동안 파켄햄은 가장 공격적인 윌리엄 쏜톤(Thornton) 대령에게 1,400명을 주어 서쪽 강둑의 미군을 공격하게 했다. 이들은 패터슨의 대포를 점령한 다음에 미군의 방벽으로 침투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킨이 강을 따라 움직여 미군의 집중포화를 이끌어내는 동안 깁스는 2,100명의 병력으로 미군의 좌측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흑인 연대 중 하나는 코피의 병력을 늪으로 꾀어내는 역할이 주어졌다. 새로 합류한 램버트의 병력은 중앙에 머무르다가 좌우측 어느 한쪽의 공격이 성공하면 그곳에 힘을 보태기로 했다. 이 정교한 작전은 미군의 대포가 별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5시 이전에 시작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계획자체는 훌륭한 계획이었지만 1 8일 공격이 시작되자 마자 모든 일이 기대와 다르게 전개되기 시작했다. 쏜톤의 보트는 진흙밭에서 좌초되더니 코치레인의 해군공병이 쌓은 댐이 무너지면서 완전히 반대방향으로 보트를 몰고 갔다. 1,400명의 병력 중 450명만이 강을 건널 수 있었다. 깁스의 경우, 44 연대가 갈대를 가지고 와서 로드리게즈 수로를 메우고 사다리를 놓아서 미군의 방벽을 넘기로 되어 있었다. 병력이 전진을 시작하자 문제는 갈대와 사다리가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44연대를 다시 되돌려 짐을 가져오게 했는데 대열에서는 제대로 준비하지 않은 연대장을 저주하는 욕설이 끊이지 않았다.

 

그림 설명: 뉴 올리온즈 전투가 절정에 달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대포가 너무 과장되어 그려져있죠? 아마도 대포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을 표현하고자 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미군의 우측에 있는 진지가 영국군에게 점령당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중앙에서는 파켄햄이 강 건너에서의 총성을 노심초사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쏜톤의 공격이 시작되면 우익이 전진하기로 되어 있었다. 어둠이 서서히 걷히고 안개낀 새벽이 다가오고 있었는데, 날이 밝으면 미군의 대포에 바로 노출되는 끔찍한 상황이 된다. 참모는 공격을 연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뭔가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로켓탄 두 발을 발사해 전 병력을 전진시킨다. 여전히 필요한 장비를 갖추지 못한 깁스는 어쩔 수 없이 명령에 따라 전진했고 반대편 강변에서는 쏜톤의 병력이 이제 겨우 보트에서 내리고 있는 지경이었다. 미시시피 강의 유속을 얕잡아봤다가 그만 미군 포대가 있는 곳에서 1km나 하류에 내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동쪽 제방의 영국군의 운이 좋은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짙은 안개를 틈타 계속 전진했고, 영국군의 드럼 소리가 안개속에서 퍼지자 잭슨은 4,400명의 병력에게 장전할 것을 명령했다. 계속 보강된 방벽은 두께가 훨씬 두꺼워져 3m이상 되었고 영국군의 대포도 이제는 무용지물이어서 염려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병사들에게 명령이 있기 전까지 머리를 내밀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마치 누군가가 커튼을 확 열여제친 것처럼 갑자기 안개가 완전히 걷히더니 환한 햇빛이 영국군의 레드코트 위를 비쳤다. 잭슨의 대포가 불을 뿜었고 포탄이 꽂히는 곳에는 영국군의 대열이 무너져내렸다. 깁스의 병력이 300m 이내로 들어오자 켄터키 민병대 지휘관 존 어데어(Adair) 소장은 저격수를 불렀다. 그는 앞 열의 회색 말을 탄 장교를 지목하더니 "저 놈을 꺼지게 해"라는 명령을 내렸다. 몇 초 후에 한 발의 총성이 울리면서 제21 연대장 존 휘태커(Whittaker)의 왼쪽 귀를 관통하자 미군의 사격이 뒤를 이었다. 근처의 민가 발코니에서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던 영국군 병참장교는 "말그대로 영국군이 모두 땅에 코를 박았다"라고 할 정도로 치명상을 입혔고 "생존자들은 사다리를 버리고 달아나버렸다."

 

그림 설명: 미국 정규군의 모습입니다. 당시 미군은 정규군이 부족해서 전시에 민병대에 절대적으로 의존했지만, 인디언과의 전투와 사냥으로 사격술이 뛰어난 사람들이 합류했기 때문에 1:1 사격에 있어서는 세계 최고의 수준이었습니다.

만약 중대급 이상의 집단 사격이었다면 군사훈련을 받은 영국군이 훨씬 유리했을 것입니다.

 

강 근처에서는 패터슨의 대포가 포탄을 계속 발사하고 있었지만 영국군이 의외의 승리를 거두고 있었다. 영국군 대대가 로드리게즈 수로 수비선을 뚫고 미군의 진지하나를 점령한 후에 킨 장군의 본대가 합류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던 미군의 방벽에 구멍이 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킨의 병력이 우측으로 선회하더니 완전히 붕괴한 깁스의 제44 연대쪽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미군의 방벽에서는, 앞 열이 사격을 퍼붓고 내려오면 뒷 열이 바로 그 자리를 채워 사격이 끊기지 않게 하고 있었다. 몇 분만에 깁스의 제21 연대도 44연대와 마찬가지로 붕괴했고 연대장이 전사하자 모두 달아나기 시작했다.

깁스는 앞으로 뛰어나가 달아나는 병사들을 불러모으려고 했고 거의 같은 시각에 킨 장군이 허벅지에 총을 맞고 쓰러졌다. 킨의 제93 하이랜더 연대가 깁스의 무너진 대열을 메우려고 할 때마다 많은 병사들이 쓰러졌고 간신히 방벽까지 도달한 제21 연대 병사들은 방벽 앞에서 어쩔 줄을 몰라하고 있었다. 이 모습을 본 깁스는 "내가 내일까지만 살아남는다면, (장비를 준비하지 않은)연대장 물린스 놈을 목매달아버릴 거다"라고 외쳤지만 그도 머리와 몸에 4발을 맞고 전사했다.

깁스의 병력이 달아나고 하이랜더 연대가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본 파켄햄은 전선에서 직접 지휘하기 위해 말을 달렸다. 그가 하이랜더에게 뒤를 따르라고 명령을 내리고 있을 때에, 포도탄 파편이 그의 무릎을 박살냈고 말도 총에 맞아 쓰러졌다. 그는 겨우 일어나 참모의 말로 갈아타고는 "이쪽이다. 용감한 93연대여!"라고 외쳤지만 총탄이 허리에 박혔다. 그는 참모의 품에 쓰러져 후방으로 옮겨질 때에도 마지막 명령을 내렸다. "램버트에게 예비군을 보내라고 해." 앞서 진지를 점령했던 영국군 대대는 지원병력이 오지 않는 것을 보고는 자신들만으로 미군의 방벽으로 달려들었다. 대대장은 즉시 집중사격을 받았고 나머지 대대원도 거의 쓰러졌다.

 

그림 설명: 무너지는 영국군의 대열을 바로 잡기 위해 최전열에 나섰다가 총에 맞은 파켄햄 장군입니다. 뭔가가 계속 안맞아들어가서 패전의 굴욕을 당했지만 몸을 사라지 않고 최고 지휘관이 최전열을 뛰어 다녔다는 것을 보면 지휘관으로서의 기본은 충분히 갖추고 있었습니다.

 

강 건너편에서는 주 전장터와 완전히 다른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450명 밖에 안되는 영국군이 총검돌격으로 1,000명이 넘는 민병대를 궤멸시켰고 패터슨은 9문의 포대를 강둑에 쓰러뜨리고서는 함께 달아났다. 이 중에 대부분이 다시 사용할 수 있는 수준이어서 영국군은 재빨리 수리한 후에 잭슨의 수비선을 향해 발사했다. 만약 쏜톤의 전체 병력 1,400명이 강을 제대로 건넜다면 전투를 반전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쏜톤의 병력이 패터슨의 포대에 도착할 때에는 이미 파켄햄과 깁스가 쓰러졌을 때였고 공격군 중 절반 정도가 죽거나 달아난 상태였다. 나머지 병력도 지휘관을 잃고 더 이상 전투를 벌일 수 없는 지경이었다.

전장터 중심에 대기 중이던 램버트와 2개 연대는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42세의 나이로 스페인과 프랑스에 참전했던 램버트는 잭슨의 소총병처럼 정확하게 집중사격하는 군대를 본 적이 없었다. 램버트는 남아있는 최고 지휘관으로 코치레인에게 조언을 구했다. 코치레인은 즉시 공격에 나설 것을 요구했다. 램버트는 쏜톤에게 동쪽 제방으로 돌아오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전투를 끝내기로 마음먹었다.

잭슨은 램버트가 전사자를 묻고 부상자를 돌보기 위해 휴전하자는 요청을 받고는 승리를 확신했다. 잭슨은 제안에 동의했지만 휴전은 동쪽 제방에만 국한시켰다. 서쪽 제방에서는 계속 공격하고 싶어했지만 찰메트 평원에 덮인 시체들을 보고는 영국군이 더 이상 전투를 할 여력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파켄햄의 공격은 3,326명의 손실만 입혔다. 이 중에서 828명이 죽고 2,468명이 부상을 당했는데 부상병 중 절반 이상이 팔 다리를 절단해야 하는 더 이상 군대에 복무할 수 없는 심각한 부상이었다. 그리고 나머지는 포로가 되었다. 연대별로 보면 그 피해는 더욱 심각했다. 하이랜더는 1,000명 중에 868, 깁스의 경보병 연대는 862명 중 650명의 손실을 입었고, 가장 운이 나빴던 제44 연대는 816명 중 134명만이 살아남았다. 진흙 방벽 뒤에 있었던 잭슨의 미군은 8명만이 죽고 14명이 부상당했을 뿐이었다. 잭슨은 "신의 손길이 우리를 보호해주었다"라는 말로 믿을 수 없는 승리를 표현했다.

1 9, 미군은 영국군의 매장작업에 합류해 1,500정 이상의 소총을 걷어 이것을 아직도 무장하지 못한 켄터키 민병대에게 나눠주었다. 영국군은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갔지만 그래도 철수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미시시피 강 85km 하류에서 영국 함대가 세인트 필립 요새를 공격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코치레인은 1 9 6척의 전투함을 동원해 이 요새를 두들기기 시작했다. 이 요새에는 346명과 월터 오버톤(Overton) 소령이 수비를 맡고 있었다. 요새의 사정거리 밖에서 영국함대는 1주일 동안 1,000발 이상의 포탄을 퍼부었다. 요새에서는 도화선이 부족해서 박격포(구포)를 발사할 수 없었는데, 1 15일에 잭슨의 지원군과 함께 도화선, 화약, 포탄이 공급되었다. 미군의 박격포가 두 척의 전투함을 격침시키자 18일에 영국함대가 물러갔다. 요새는 거의 무너졌지만 겨우 2명만이 죽었고 수비군의 사기는 여전했다.

그날 밤, 영국군이 조용히 철수하기 시작했다. 공병은 7일 동안 길을 낼 때까지 고생을 했는데, 부르쥬 호수에서도 배에 오를 때까지 한 주 이상을 더 끔찍한 노숙을 해야만 했다.

 

워싱턴에서는 다른 드라마가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메디슨 대통령은 뉴 올리온즈와 하트포드(Hartford)의 소식을 애태우며 기다리고 있었다. 하트포드에서는 뉴 잉글랜드가 연방에서 탈퇴할 것인지를 협의 중이었다. 12 24일에 들어온 소식은 영국군이 6,000명의 병력으로 기습상륙했고 도시로 진격 중이라는 절망적인 소식이었었다. 2 3, 하트포드에서 온 세 명의 의원이 연방정부가 전쟁에 대한 모든 권한을 포기하고 개별 주의 결정에 맡겨야 한다는 최후통첩을 하기 위해 워싱턴으로 떠났다. 최악의 연방탈퇴는 아니었지만 그 이전 단계였다.

워싱턴에서 하루거리인 볼티모어에 지내던 의원단은 거리가 소란스러워지는 것을 들었다.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며 총을 쏘고 다니는 것이었다. 잭슨이 1 8일에 승리를 거뒀다는 소식이 이제 막 도착한 것이었다. 위원단이 워싱턴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곳곳이 축제분위기였다. 위원단은 흥분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전투에서는 이겼지만 전쟁에서 이긴 것은 아직 아니었다.

영국의 육군과 해군 모두에게 전쟁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들은 걸프 해안을 따라 항해해 모바일 만의 바위어(Bowyer) 요새를 향했다. 부상에서 아직 회복하지 못한 킨 장군도 5,600명을 동원해 모바일을 점령하고 북쪽에서 뉴 올리온즈를 다시 공격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마지막 전투에서 이긴 쪽이 승리를 가지는 것이며 바위어 요새를 점령한 영국군의 분위기는 상당히 좋은 편이었다. 모바일 일대도 실제로 영국군의 지배하에 있었다.

그러나 코치레인의 기함에 영국군 프리깃 함에 도착하면서 믿을 수 없는 소식이 전해졌다. 12 24, 영국과 미국은 겐트에서 평화조약을 맺었다는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조약에 따르면 모든 영토와 경계는 전쟁이 터지기 전의 상태로 되돌아가고 그것을 유지하게 되어 있었다. 1814 9 11일 미군이 영국군을 상대로 챔플레인(Champlain) 호수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영국내각의 강경파들의 목소리라 잦아든 덕분이었다.

 

이 뉴스는 2 14일에 워싱턴에 전해졌고 또 한 번 축제가 벌어졌다. 하트포드 위원단은 메디슨 대통령을 또 다시 기다리는 수 밖에 없었다. 결국 10일 후에 아무런 소득도 없이 고향으로 돌아온 하트포드 의회는 역사의 조롱거리로 남게 된다.

앤드류 잭슨은 평화조약의 소식을 마지막까지 믿지 않았다. 그는 양쪽 정부가 조약을 승인할 때까지 군대를 해산하지 않으려 했고 이것 때문에 뉴 올리온즈에서 불필요한 소문이 돌았고 클레이본과도 불화가 생겼다. 그러나 장군은 "불신의 알비온(영국, Perfidious Albion 신교로 전향한 영국을 비난하며 교황쪽에서 붙인 별명)"과의 관계에서는 반드시 군대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잭슨은 이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국가영웅이 되었고 결국 1828년에 대통령이 되었다. 1837년 두 번째 임기를 마치고 백악관을 떠날 때에, 한 의원이 뉴 올리온즈 전투가 왜 필요했는지를 물었던 적이 있다. 평화조약이 맺어진 후에 벌어진 전투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항상 그렇듯이 의원을 찌를듯이 노려보며 "파켄햄과 10,000명의 영국군이 우리가 가진 작은 군대를 전멸시켰다면, 그는 뉴 올리온즈를 점령하고 인근 지역까지도 영향력을 펼쳤을 것이오. 기술적으로는 전쟁이 끝났지만 대영제국은 겐트 조약을 즉시 무효화하고 다시 전쟁상태로 돌렸을 것이오."라고 대답했다.

과연 그가 옳았던 것일까? 분명한 것은 그가 뉴 올리온즈 전투에서 압승을 거둬 이런 쓸데없는 질문을 더 이상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제 관련 영화의 한 장면을 즐길 차례입니다. 소리키우고 시간여유를 가지고 즐기시기 바랍니다.

뉴 올리온즈 전투에 대한 영화를 찾지 못해서 미국 독립전쟁 당시의 레드코트가 주요 장면과 1812년 전투의 리액션 동영상을 준비했습니다. 우리나라도 반만년 역사에 대해 말과 글로만 자랑하지 말고, 주요 전사에 대해 리액션을 시도해주었으면 합니다.

한산도 대첩도 매년 리액션을 하고 있지만 실제로 보면 어선 수십척 띄우고 이리 저리 움직이면서 "전선이라고 생각해주세요"라는 코미디를 연출합니다.

군대도 안 가본 외국인들이 실전을 모방한 전사 리액션으로 관광상품을 만들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왜 활성화되지 않는지 이상합니다.

갑옷입고 행진하는 것 말고 실제 전투 리액션말이죠.

 

그리고 두 번째 영화, 알파치노가 나오는 미국독립전쟁 영화에서 제대로 표현이 되었는데, 지휘관이 부대와 나란히 또는 아예 돌아서서 이끄는 장면이 있습니다. 실제로도 그랬다고 하는데, 그들의 용기가 대단합니다. 당시 소총의 성능이 크게 떨어졌지만 그래도 저격수들이 배치되어 지휘관만 노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