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우 길고 복잡한 이야기인데다가, 리뷰를 싫어해서 오타와 어색한 문장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시간내서 정독하면 시야가 훨씬 넓어질 것입니다.)
우크라이나전쟁으로 국제사회에 대한 관심이 무척 뜨겁습니다.
그래서 전세계에서 벌어졌거나, 현재진행형인 전쟁과 인종말살에 대해 정리하고 있습니다.
다른 시대, 대륙, 인종과 문화의 참상에도 관심을 가져주시기 바랍니다.
다르푸르 인종말살은 2002년에 시작해서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최소한 40만명이 목숨을 잃고 250만명 이상이 터전을 버리고 탈출했습니다.
난민의 거처입니다.
아이까지 무차별 학살하고, 무차별 성폭행하고, 무차별 인신매매가 벌어지는데도 국제사회의 개입이 너무나도 늦었고
주요 전쟁범죄 수배범들입니다.
오마르 알 바시르가 오늘 참상의 주범인데 2019년 수단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바시르를 국제형사재판소에 인도했습니다. 그리고 잔악한 민병대 잔자위드의 지도자도 국제형사재판소의 처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래 명단 중에 앞에 3놈이 모두 세르비아계열입니다. 세르비아가 저지른 인종말살은 2차대전 독일나치의 유대인말살 수준이고 너무 끔찍해서 정리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대학때에 매주 타임지를 읽으면서 무기력한 국제사회에 분노했던 기억을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습니다.
이번 이야기는 참상의 스냅샷이 아니라 수단출신 교수가 설명하는 배경이기 때문에 아래의 만화를 먼저 보시기 바랍니다.
제 이야기는 무척 길고 복잡한데, 시간내서 정독할 가치가 있습니다.
그리고 2009년 2월 기사이지만, 다르푸르 분쟁은 지금도 소규모로 계속되고 있습니다.
https://blog.naver.com/unhcr_korea/90172765149
2003년 이후, 수단 서부 다르푸르Darfur지역은 끔찍한 폭력, 죽음과 강제이주의 현장이 되었다. 미국이 인종말살Genocide이라고 부르는 바로 그 단어였다. 세계최대의 응급지원작전에도 불구하고 충돌을 진정시키고 500만명에 가까운 다르푸르 사람들의 고통을 막으려는 노력은 제대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혼란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수단출신이며 오하이오주립대학 역사학 교수인 아흐마드 시카잉가Ahmad Sikainga는 다르푸르 충돌의 원인과 현재 상태를 이렇게 설명한다.
본 내용은 오하이오주립대학의 인종과 민족성연구기관의 자금지원으로 진행된 연구조사 프로젝트의 일부에서 발췌했다.
아프리카에서 벌어지는 상황에 대해 더 자세한 내용은 본문 가장 끝에 있는 케냐Kenya 국내의 폭력에 대한 클레어 로버트슨Claire Robertson의 기사를 참조하기 바란다.
지난 4년 동안, 잘 알지 못하는 수단의 다르푸르에서 피비린내나는 충돌이 벌어져서 수만명이 목숨을 잃고 200만명 이상이 피난을 떠났다. UN은 세계최악의 인권위기로, 미국은 인종말살로 단정지었다. 두르푸르의 폭력과 파괴는 1994년 르완다Rwanda 인종말살과 비교될 정도다.
다르푸르 참사는 국제사회를 충격에 빠트렸고 언론의 관심을 모았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언론은 근본원인을 다루지 않고 현상에 대해 자극적인 기사를 쏟아냈다.
다르푸르 참사는 처참한 모습의 피난민 사진과 아프리카 흑인 무슬림을 죽이는 아랍인의 만평이 전부였다. 아프리카 전체가 내전과 정국불안에 시달리는 대륙이라는 선입견을 그대로 드러냈다.
마을 전체가 사라졌습니다.
다르푸르 참사 이면에는 사회불평등, 환경위기, 부족한 자연자원, 정체성 충돌, 농촌사회의 군세력화라는 뿌리깊은 역사적 배경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1956년, 수단이 영국식민지에서 독립할 때부터 계속된 무능력한 정부라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다르푸르: 프로필
다르푸르 지역은 수단 (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국가)의 서쪽 부분에 자리 잡고 있으며 리비아, 차드 및 중앙 아프리카 공화국과의 국경 근처에 있다. 다르푸르의 인구는 2002년에 약 600만 명으로 추산되며 80% 정도가 농촌지역에 살고 있다.
우선 다르푸르 충돌을 다룬 언론기사의 수많은 편견과 오해를 머리속에서 지워버려야 한다. 아랍인과 아프리카 흑인 사이의 충돌로 단정한 것부터 잘못이다. 실제로는 다르푸르 충돌집단의 인종이나 종교를 확실하게 구분할 수 없다. 충돌집단이 자신을 아랍인이나 아프리카인으로 밝히더라도 모든 사람이 원주민이고, 흑인이며, 무슬림이다.
다르푸르에는 매우 다양한 민족과 언어집단이 살고 있다. 그 중에서도 푸르Fur, 마살리트Masalit, 자그하와Zaghawa, 툰주르Tunjur, 다주Daju는 비 아랍어 부족이며, 리자이콰트Rizaiqat, 미사이리야Missairiyya, 타이샤Ta`isha, 베니헬바Beni Helba, 마하미드Mahamid는 아랍어 부족이다. 하우사Hausa, 풀라니Fulani, 보르노Borno와 같이 서부 아프리카 부족이 상당히 많지만 넓은 지역에 분산되어 있으며 비슷한 체형과 문화특징을 가지고 있다.
다르푸르에서 오랜 동안 서로 이주하고 섞여 살고 혼인하면서 너무나도 다양한 민족이 탄생했다. 민족은 억지로 구분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예를 들어, 다르푸르에서는 아랍이라는 단어가 민족정체성보다는 직업구분에 사용한다. 아랍어를 사용하는 부족 대부분은 목축업에 종사한다. 반대로 비 아랍어 부족 대부분은 농부다. 그렇지만 이런 직업경계선도 모호한 경우가 많다.
수백 년 동안, 특히 식민지 이전 시대에는 푸르족이 이 지역을 통치했다. 17세기, 푸르족은 왕국을 세웠고 사헬Sahelian벨트의 다른 무슬림국가와 많은 공통점이 있었다. 사헬 또는 수단벨트는 사하라사막 남쪽, 대서양에서 동쪽 나일강 유역까지를 말한다. 다르푸르왕국은 수도 알 파세르Al-Fashir에서 근처 무슬림국가뿐만 아니라 이집트와 북아프리카와 외교와 교역관계를 유지했다.
푸르왕국은 지역강자로 지내다가 1874년에 수단북부의 상인이자 군벌인 알 주바이르 라흐마드Al-Zubair Rahmad군에게 멸망당했다. 그는 다르푸르를 투르코 이집트식민정부Turco-Egyptian colonial administration(1820-1884)에 합병했다.
노예상이었고 영화 카르툼(카슘공방전)의 고든과 대립했습니다.
1884년, 이슬람 부흥운동이 투르코 이집트Turco-Egyptian정부를 전복시켰다. 무하마드 아흐마드 이븐 압달라Muhammad Ahmad ibn Abdalla는 선지자 마흐디를 자처하며 마흐디야Mahdiyya를 주도헸다. 많은 다르푸르 사람들이 마흐디야를 가장 열성적으로 지지했다. 실제로 마흐디의 후계자인 칼리파 압둘라히Khalifa `Abdullahi도 다르푸르 출신이었다.
마후디스트Mahdist국(녹색 부분)은 1898년까지 수단을 통치하다가, 영-이집트군에게 정복당했다. 영-이집트정권 후에, 다르푸르왕족 후계자인 알리 디나르Ali Dinar가 왕국을 재건했다.
다르푸르술탄국Sultanate of Darfur은 1차대전까지 독립을 유지했는데, 알리 디나르가 오스만제국과 동맹을 맺었다가 영국의 침공을 받았고 1916년에 영-이집트 영토로 합병당했다.
1956년, 수단이 독립한 후 내전과 정치혼란이 끊이지 않았다. 한 지역의 위기가 다른 지역의 충돌로 번졌기 때문에 다르푸르의 충돌도 수단전체 문제 중 일부로 봐야 한다. 수단내전 중 최악의 무력충돌은 남북분쟁이며 1955~1972년과 1983~2005년 동안 전쟁을 벌이다가 2005년에 평화조약으로 끝났다. 누바Nuba산맥, 청나일 상류Upper Blue Nile, 수단동부의 베자Beja지역에서도 국지전이 벌어졌다.
수단은 식민지 그리고 독립 후에 지역, 정치와 경제불평등이 만연했고 이런 충돌로 이어졌다. 그리고 아랍어권의 소수 엘리트가 권력을 잡고 전국의 비 아랍과 비 무슬림국민을 한계상황까지 몰아냈다.
무력충돌 도화선: 자연환경
현재의 다르푸르 충돌은 자연조건, 정치와 경제요인이 한꺼번에 어우러져 폭발한 결과다. 자연조건이 나빠지고 자원을 둘러싼 경쟁이 심해지면서 사헬벨트의 말리, 니제르, 차드 등에서도 부족간 충돌이 일어났다. 다르푸르도 마찬가지였다.
다르푸르는 다양한 기후대가 있다. 남부는 비교적 강수량이 많은 사바나 안에 있고, 중부는 제벨 마라Jebel Marra산이 우뚝 솟은 고원이다. 북부는 이집트와 리비아국경까지 이어진 사막지대다.
인구 대부분은 농업에 종사하는데, 강수량과 토질에 의존한 원시농업이어서 기후변화와 자연재해에 큰 영향을 받는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는, 가뭄, 사막화와 인구증가로 식량생산량이 급감했고 기아로 큰 고통을 받았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토지소유권 문제가 있다. 다르푸르의 토지보유 체계는 수 백년 동안 지역사회의 갈등을 높이는 방식으로 수정되었다. 푸르왕국 당시에는 아랍어의 소유권을 의미하는 하쿠라Hakura법이 있었다.
하쿠라법에서는 토지가 지역사회 전체의 소유권이었고 족장이 토지소유 후견인 역할을 하며 부족민에게 경작할 땅을 나누어 주었다. 다르푸르 사람에게는 단순히 경작지가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이었다. 그리고 왕국의 고위관리에게는 개인소유의 땅을 나누어 주었다.
영국식민지 통치 중, 원주민행정에 맞게 토지소유체계를 수정했다. 다르푸르의 식민지관리는 지역부족장이 부족을 통치하고 토지도 관장하는 것이 편리하다고 판단했고 각 부족에게 특정 지역을 위임했다. 지역 부족장이 토지를 부족민에게 할당했다.
독립 후, 토지보유와 원주민행정 체계는 크게 바뀌었다. 독립정부는 원주민행정 체계를 식민잔재로 간주하고 단계별로 해체시켰고, 지역 부족장의 권한축소로 이어졌다. 토지보유에 대한 분쟁이 생겨도 부족장이 개입하거나 해결할 수 없게 되었다.
목축업과 농업
자연환경과 토지소유권 변화로 촉발된 목축업과 농업의 충돌도 다르푸르 폭력의 큰 원인이 되었다.
다르푸르에서는 유목 목축이 중요한 생계수단이다. 코르도판Kordofan과 다르푸르주 사이에서 생활하는 아랍어권 바콰라Baqqara족이 가장 큰 유목부족이다. 바콰라는 단일민족이 아니라 타이샤, 리자이콰트, 베니 헬바, 미사이리야 등의 연합부족이다.
다르푸르 북부 사막지역은 압발라(낙타주인)이라고 부르는 낙타 유목민이 산다. 유목민은 하쿠라법에 해당되지 않아서 농부들이 받은 지역에 동물을 풀어놓고 기르는 관습권리만 인정된다. 유목민이 남북으로 이동할 경우, 유목민 족장과 농민 족장이 사전에 경로를 합의하고 정부의 승인을 받는다.
1980년대 가뭄이 닥치기 전까지는 문제가 없었다. 기후가 바뀌고 흉작이 예상되자 많은 농부가 목축업으로 바꾸면서 초원경쟁이 벌어졌다.
가뭄의 여파로 북부에서 가축을 기를 공간이 크게 줄어들었다. 낙타 유목민은 전통적인 해결을 강력하게 고집했고 무력충돌의 뇌관이 되었다(앞부분 자흐라의 이야기 만화에 잘 나옵니다).
1980년대 자연자원은 계속 줄어 들고 결국 목축업과 농업부족 사이에 여러 차례 분쟁이 일어났다. 식민지와 식민지 이후에도 여러 차례 충돌이 벌어졌기 때문에 이때만해도 그렇게 심각하지 않았다. 양쪽 모두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중재, 원주민행정, 부족축제, 부족간 혼인, 선물교환 등의 관습을 따랐다.
분쟁해결에는 부족회의가 가장 효과적이었는데, 폭력사태가 벌어지면 지역부족장들이 회의를 주선했다. 그렇지만 원주민행정을 없앴기 때문에 더 이상 부족회의가 열리지 않았다. 더구나 하르툼Khartoum의 수단정부는 정치적으로 부족충돌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민족긴장 고조 그리고 무너진 경계
자연환경과 자원을 둘러싼 경쟁심화도 중요한 원인이지만 수십년 동안 이어진 수단집권 엘리트들의 조작과 다른 민족의 한계상황도 근본 원인 중 하나다.
수단의 중부와 북부의 아랍어권 엘리트층이 독립 후의 정부를 독차지했다. 고향에 경제개발을 집중시켰고 국가정체성을 아랍과 이슬람으로 통일시키려고 했다. 남부, 누바산맥과 홍해지역에서 한계에 몰린 비아랍과 비이슬람 부족은 이런 정책에 강력하게 저항했다.
1950년대와 60년대에 지역과 민족별로 저항운동이 연달아 일어났고, 특히 남부에서는 수십년 동안 내전이 계속되었다. 1960년대 중반, 다르푸르 개발전선Darfur Development Front이라는 조직이 다르푸르의 경제개발과 자치권을 주장했지만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에 국한되었다. 다르푸르는 불평등에 시달렸고 하르툼정부와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했다.
다르푸르는 내부갈등뿐만 아니라 차드와 리비아에게서도 고통을 받았다. 자그하와, 마살리트, 마히리야 등의 부족은 차드에서도 살고 있었기 때문에 수단과 차드의 문제가 국경선을 넘어 영향을 미쳤다.
1980년대의 차드내전은 리비아가 깊숙이 개입하면서 다르푸르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리비아는 차드에 점차 군사개입 강도를 높이면서 다르푸르를 기지로 사용하는 차드군벌을 지원했다. 차드군벌은 지역 농부와 유목민을 약탈하고 다르푸르에 엄청난 양의 무기를 반입했다.
리비아의 무마르 가다피Mu`mar Gaddafi는 사헬 아프리카에 아랍벨트를 구축해서 리비아의 헤게모리를 확고하게 구축하겠다는 야망이 있었다.
그는 불만을 품은 사헬의 아랍어권과 투어레그Tuareg부족을 모병해 이슬람외인부대Islamic Legion(사진 참조)를 만들어서 차드에 투입했다. 그 중에는 다르푸르의 아랍어권 유목민도 있었다.
전차까지 있는 정규군이었습니다.
외인부대에 지원한 수단인 대부분은 1970년대 자파르 니레이리대통령(1969~1985년 집권)에게 저항하던 마흐디파Mahdist였다. 1976년에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실패하자, 마흐디잔당은 수단, 차드, 리비아 국경지대로 달아났다. 가다피의 야망은, 1988년 외인부대가 차드군벌에게 패배하면서 무산되었다.
외인부대가 해산되었지만 잘 훈련되고 무기와 아랍우월주의 사상으로 무장한 병사들이 남았다. 다르푸르에서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잔학한 잔자위드Janjawid (사진 참조)중 일부도 외인부대 출신이다. 설상가상으로 1985년, 니베이리정권이 무너진 후에 상당히 많은 마흐디파가 수단으로 돌아갔다.
다행히도 잔자위드의 지도자 중 한 명인 알리 쿠샤이브Ali Kushayb도 국제형사재판을 받았습니다.
1980년대 말, 귀국한 병사들은 아랍연맹Arab Alliance이라는 정치동맹을 만들고 수단 서부에 아랍우월주의 사상을 퍼트리고 비 아랍권 부족에게 노골적인 적대감을 드러냈다.
수단 서부의 아랍어권 부족들이 다수 민족인데도 불구하고 정치와 경제적으로 불평등에 시달리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동맹은 토지소유권 말고도, 중앙정부에 아랍어권 부족의 지분을 더 요구했다. 중앙정부의 정책을 등에 업고, 다르푸르의 지역사회 균형을 완전히 무너트렸다.
1980년대 초에 북수단과 남수단의 내전이 벌어지면서 상황이 더 악화되었다.
수단인민해방운동Sudanese People's Liberation Movement (SPLM)과 무장조직 수단인민해방군Sudanese People's Liberation Army (SPLA)은 남부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새로운 수단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우며 전국에서 핍박받는 부족의 보호자를 자처했다.
SPLA는 누바산맥, 다르푸르, 청나일과 홍해지역에서 병력을 계속 징집했다. 학생운동과 이슬람운동에 참여했던 다우드 볼라드Daoud Bolad는 다르푸르에 친 SPLA 분파를 만들었다가 정부군에게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1992년에 고문을 받던 중에 죽었다.
그가 죽지 않았더라도, SPLA의 종교분열로 다르푸르에서 기세가 꺽이던 중이었다. SPLA 대부분이 남부 기독교인이었던 반면에 다르푸르는 마흐디운동이나 국가이슬람전선National Islamic Front을 추종했다.
이슬람주의
SPLM은 새로운 수단이라는 슬로건을 남겼다. 종교, 민족, 언어, 성과 지역차별없는 현세에서 다양성을 존중하는의 통일 수단이라는 희망이었다. 지배층의 아랍어권 북부 엘리트에게는 받아들을 수 없는 도전이었다. 국가이슬람전선NIF는 수단의 국가정체성으로 열렬하게 아랍우월주의와 이슬람주의를 내세웠는데 수단, 더 나아가 이웃 국가에 이슬람국을 건설하려고 했다.
NIF 지도자인 하산 투라비Hasan Turabi는 이슬람근본주의를 다른 이슬람세계, 특히 사헬 아프리카에 퍼트릴 생각이었다. 투라비는 다르푸르를 통로로 결정하고 다르푸르 부족을 대대적으로 끌어들였다.
목표를 이루려면 먼저 수단정부를 장악해야 했다. NIF는 학생, 교수 그리고 가장 중요한 수단군에서 추종자를 양산하고 든든한 경제기반을 만드는데 전력을 다했다.
1980년대 말, SPLM의 군사력과 정치영향이 늘어나고, SPLA가 세력을 상당히 넓히자 NIF가 대응에 나섰다. 막강한 자금력과 군대내 지지를 이용해, 1989년에 쿠데타를 일으켜 민주적으로 선출된 사디크 알마흐디Sadiq Al-Mahdi정부를 무너트렸다.
NIF가 권력을 잡자 이슬람근본주의 작업에 착수했다. 세속주의라고 의심받은 수천명이 군대, 공공, 경찰에서 쫓겨났고 정권에 반대하는 사람을 구금, 고문, 처형했다.
NIF는 남부에서 성전Jihad를 대대적으로 시작했다. 인권학대, 이웃국가 교란, 이슬람근본주의 거처제공 등으로 국제고립을 자초했다. 서방정부, 특히 미국은 수단을 테러후원국가로 지정하며 경제제재를 가했다. 수단국민도 극심한 경제불황과 독재때문에 NIF 정부를 혐오했다.
NIF는 탈출구로 중국을 선택했고 교역과 무기공급원으로 의존했다. 중국은 수단의 유전이 필요했다.
평화협정
산적한 내외부 문제에 몰린 수단정부와 SPLA는 2003년에 평화협상을 시작했다. 교착상태의 전선, 경제타격, 국민의 심각한 불만, NIF 내분, 9월 11일 테러와 부시행정부의 테러전쟁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케냐에서 UN, 미국, 유럽국가, 동아프리카 지역국가 등의 중재로 협상이 시작되었다. 2005년, 양측은 포괄적평화협정Comprehensive Peace Agreement (CPA)에 서명했다.
수십년동안 남부를 물들인 파괴와 참상을 끝내게 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남북충돌에만 국한하고 다르푸르, 동부와 다른 불만부족의 고통을 무시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지역위기와 긴장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기 때문에 다르푸르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2003년, 수단해방군Sudan Liberation Army (SLA)과 정의와평등운동Justice and Equality Movement (JEM)이 다르푸르에 등장했다. JEM 지도자는 이슬람근본주의를 추종했던 할릴 이브라힘Khalil Ibrahim이었기 때문에 이슬람근본주의를, SLA는 반대로 좀더 세속적인 노선이었다. 두 세력 모두 다르푸르의 자치권, 경제자원과 권력배분을 요구했다.
바르푸르 폭력사태와 세계반응
2003년 4월, 반란군이 알파시르al-Fashir공항을 공격해 군사장비를 파괴하고 수단군을 밀어내면서 다르푸르 폭력사태가 시작되었다. 정부는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정부는 아예 반란군의 동태를 모르고 있었고 그냥 무장강도로만 생각했다. 수단정부군은 남부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제대로 반격하지 못했다.
정부는 남부와 누바산맥에서 그랬던 것처럼 대리전을 택했다. 부족의 분열을 이용해, 특정 부족을 무장시키고 서로를 상대하게 했다.
다르푸르에서는 악명높은 잔자위드Janjaweed를 만들었고 아랍어권 지역사회의 지지를 받았다. 잔자위드는 무법자(또는 낙타를 탄 악마)라는 뜻이다. 잔자위드는 수단군의 지원을 받아 비 아랍어권 지역사회를 대대적으로 약탈하고 학살했다. 30만명이 죽고 200만명이 피난을 떠나는 참상이 벌어졌다.
참상이 너무 심해 국제사회와 미국정부는 아예 인종말살로 단정지었다. 그렇지만 국제사회의 분노는 말뿐이었다.
미국과 유럽정부는 군사개입을 할 의사가 없었고 수단에 대해 일관성있는 정책을 제시하지도 못했다. UN은 여러 차례 위협하며 결의안을 통과시켰지만 수단정부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만이었고 무엇보다 수단의 기름수출 상대국이자 무기공급원인 중국과 아랍국가가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가장 효과적인 수단은 평화유지군 주둔이었는데, 수단정부는 어떤 유럽군도 영토에 들여 놓을 수 없다며 반대했다. 2007년, UN은 절충안으로 UN과 아프리카연합군 혼성부대 결의안을 통과시켰고 수단정부도 받아들였다. 그렇지만 자금부족, 병참시설 미비, 수단정부의 의도적인 태업으로 시간만 흘러갔다.
배치된 UN 평화유지군의 수준도 너무 한심스러워서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수용소의 난민도 보호하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UN은 국제형사재판소에게 수단정부의 인종말살과 범죄를 조사해달라고 요청했다. 수단관리 2명이 기소되었지만 수단정부는 신변을 인도하지 않았다.
2007년 7월, 재판소는 수단대통령 오마르 알바시르Omar Al-Bashir 체포명령을 고려 중이라고 밝혔고 가까운 시일 내에 판결이 나올 것으로 보인다. 체포명령이 나온다고 해도 다르푸르에는 별다른 영향이 없을 것이다. 일부 관측통은 수단정부가 현지의 모든 UN 활동을 중지시켜서 인권상황을 악화시킬 뿐이라고 생각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체포명령이 수단정부를 압박해 부담을 갖게 만들 것으로 믿고 있다.
군부쿠데타로 축출당한 후에 2020년 국제형사재판소에 수감되었습니다.
다르푸르 평화과정
UN, 아프리카연합African Union, 이웃 국가의 압력에 못이긴 수단정부와 다르푸르 반란군은 니제리아Nigeria에서 평화협상을 벌이다가 2006년, 다르푸르 평화협정Darfur Peace Agreement (DPA)에 서명했지만 반란군 파벌 대부분은 DPA가 다르푸르에 불리하다며 인정하지 않았다.
수단정부는 협정을 악용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협정에 서명하더라도 어떻게든 실행에 옮기려 하지 않았다.
반대로 다르푸르 반란군은 파벌이 너무 많았고 분명한 목표도 없었다. 수십 개의 파벌이 서로 내전을 일으켜서 다르푸르의 혼란을 더했다. 수단정부는 나누어서 정복한다는 전략으로 반란군의 분열을 조장했고 차드, 리비아와 에리트레아Eritrea 등의 외세가 계속 개입했다.
무엇보다 다르푸르 반란군은 수단과 차드정부의 대리전을 벌이고 있었다. 예를 들어 2008년 2월, 수단정부의 지원을 받은 차드반군은 이드리스 데비Idris Deby정부를 전복시키려고 했다. 3개월 후, 차드정부는 JEM의 수도공격을 지원했다.
다르푸르의 현재상황은 그렇게 밝지 않다. 수단정부의 태업, 반란군의 내부, 국제사회의 방관으로 평화협정이 무용지물이 되었다. 국제형사재판소의 바시르 체포명령결과, 2009년의 총선, 남북수단의 국경지대 상황에 따라 다르푸르의 운명이 달라질 수 있다. 그동안에는 참상이 끝없이 계속 될 것이다.
https://origins.osu.edu/article/beyond-tribes-violence-and-politics-kenya?language_content_entity=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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