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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2차대전

팬저 에이스 - 쿠르스크전투 1부

by uesgi2003 2023. 3. 6.

소련과 러시아를 혼용하고 있습니다. 쿠르스크전투에 대해서는 이미 전문서적 2권 분량을 정리해두었습니다. 

 

성채작전은 지도처럼 양동작전으로 몇백만명의 소련군을 궤멸시키고 단숨에 전황을 역전시킨다는 엄청난 계획이었고 독일군의 거의 모든 전력을 쏟아부었습니다. 그렇지만 신형전차 판터 등의 투입을 위해 작전이 계속 지연되었고 소련군은 이미 그 계획을 모조리 입수해서 작전개시 직전에 거꾸로 대대적인 포격을 퍼부을 정도였습니다. 

독일군은 이 작전에서 가용전력 대부분을 소모시켰고 독일군의 패배가 시작된 전투가 되었습니다. 

 

마리우폴에서는 피해정도에 따라 순서대로 수리를 받았고 열흘 후에야 전차를 돌려받았다. 1943년 3월 초에 이 전차를 가지고 미우스 전선 뒤편에 있는 집단농장으로 갔고 방어선을 돌파한 러시아 전차부대를 전멸시켰다. 
며칠 후 중대는 타간로크에서 동쪽으로 약 20km 떨어진 미우스의 포크로브스코예로 이동했다. 이곳에서 우리는 러시아의 공격을 예상하며 6주 동안 머물렀다. 그 사이 진흙의 시기가 도래했고 미우스가 얼음에서 풀려났다. 랑게소령은 심장과 간 질환으로 독일로 이송되었고, 셰르프소령이 중대장으로 임명되었다. 바이너르트중위는 제1소대, 나는 제2소대, 오버펠트베벨 안 데어 하이덴 대위가 제3소대를 맡았다. 
포크로프스코예에서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우리와 함께 충성스럽게 지낸 러시아 자원병Hiwi를 받았다. 육군최고사령부의 칙령에 따라 히비는 보급업무에서 많은 독일군을 대체했다. 히비는 휘장이 없는 독일 군복을 입고 계급에 맞는 급여를 받았으며 무기가 필요없는 임무를 수행했다. 

셰르프는 가능한 한 많은 히비를 모집하라고 명령했다. 지역 시장에게 전달했지만,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았고 한 시간 만에 한 청년이 내게 보고했다. 그는 독일어를 잘했고 우리와 동행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우리와 같은 유니폼, 일주일치 월급, 담배와 함께 저녁 배급에 만족했다. 

 

나폴레옹과 히틀러의 러시아침공을 프랑스와 독일군으로만 오해하는 사람이 많은데, 실제로는 상당한 전력이 주변 동맹국, 전세계와 러시아 현지의 의용군이었습니다. 독일은 히비라고 불렀는데 당연히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독일로 탈출했거나 처형당했습니다. 


나중에 그는 비무장 상태가 싫어서 러시아제 기관단총을 직접 구입했다. 다음 날 10명의 젊은이들이 군복과 월급, 담배를 달라고 나왔다. 1943년 4월, 우리가 미우스에서 철수했을 때에 히비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부활절 일요일에 철수명령을 받았다. 대대 전체가 하르코프에서 북쪽으로 약 60km 떨어진 벨고로드 지역으로 이동했다. 1943년 봄 독일의 새로운 공세가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임박한 작전에 대비해 준비해야 할 것이 많았다. 
도네츠강을 따라 약 30km에 이르는 전방지역과 도로를 정찰하고 모든 지휘관에게 가장 정확한 그림을 만들어주었다. 나는 벨고로드 교두보에서 도네츠강을 건널 수 있는 지점을 직접 정찰했다. 밤낮으로 거대한 호송대가 인근 하르코프-벨고로드 롤반을 따라 지나갔다. 거의 모든 나치 친위대 사단이 투입되었다. 공군을 위해 사방에 잔디활주로가 깔렸고, 대규모 진격을 막기 위해 곳곳에 중화기가 배치되었다. 러시아군은 낮과 밤에 몇 차례 폭격을 가했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그 사이 독일에서 새로운 타이거가 도착했고, 이제 각 중대는 14대의 타이거를 보유하게 되었고, 대대 전체에 타이거 45대가 배치되었다. 이제 3호 전차를 제외시켰다. 

5월 초, 예정된 작전이 몇 주 연기되었고 하르코프로 돌아갔다. 도심은 완전히 유럽풍이었고 일부 지역은 미국풍이 강하게 느껴졌다. 거리는 넓고 깨끗했으며 트램과 트롤리 버스 노선이 사방으로 이어졌다. 대형 백화점과 함께 진짜 커피부터 휘핑크림까지 무엇이든 주문할 수 있는 카페가 있었지만 가격은 정말 비쌌다! 어디에서나 러시아 포스터와 함께 독일광고를 볼 수 있었다. 
그 사이 우리는 치타델레Zitadelle작전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날짜는 알지 못했다. 또한 다음 작전에서는 독립대대가 아니라 제1중대는 제6사단, 제2중대는 제19사단, 제3중대는 제7사단에 배치된다는 명령을 받았다.

우리는 전차전투 교육과 전술훈련, 연습을 받았는데, 일주일에 두 번 오후에는 지도연습이나 지형에 대한 회의와 함께 장교훈련을 받았다. 소대원들은 매일 도시 주변으로 이동하여 자체훈련을 마쳤다. 
당시 타이거와 그 성능은 전선의 병사들에게 상당히 생소했다. 이 무기와 다른 신무기를 설명하기 위해 3중대가 소속된 제7보병사단은 설명회를 열었다. 군단의 모든 사단과 연대 지휘관들이 참석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나는 소대원들과 함께 척탄병연대 공병이 만든 통나무 길로 늪지대를 통과해야 했다. 58톤 전차를 견딜 수 있을까? 나는 통나무 길을 무사히 지났지만, 4번째 타이거에 문제가 생겼다. 양쪽에 많은 관중들이 서 있는 것을 보고 뭔가 있다고 예상했는데 적중했다. 
갑자기 양쪽에서 최루탄이 든 연막탄을 전차를 향해 던졌다. 해치를 닫고 '방독면 착용!'을 외쳤다. 연기는 불쌍한 척탄병들을 괴롭혔다. 나머지 훈련은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우리는 매우 좋은 인상을 남겼다. 
우리는 도네츠의 추기예프에서 실전 사격훈련을 받았다. 그리고 실전에서 우리 소대는 60여 개의 벙커와 대전차포, 박격포 진지를 파괴했다. 한 명이 경미한 부상을 입었다. 

6월 초, 다음 작전에 대한 명령을 받았다. 우리가 배치된 제7포병연대는 풍선보트를 이용해 도네츠강을 건너 적의 제방에 교두보를 구축하는 임무를 맡았다. 다리가 없었기 때문에 내 타이거소대는 강을 건너 연대의 공격을 지원해야 했다.
타이거가 건널 수 있는 적절한 장소를 함께 정찰해야 했다. 화창한 여름날이었다. 러시아군이 최전방에 진을 치고 땅을 파고 있는, 먼 쪽 강둑의 완만하게 솟아오른 땅을 바라볼 수 있었다. 강변에는 독일군 전초 기지가 몇 개 밖에 없었기 때문에 러시아 측도 마찬가지일 것으로 예상했다
며칠 후 우리는 7월 5일에 공격을 시작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하르코프에 있던 러시아인들은 이미 3주 전에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독일 최신형 판터의 도착이 기다리고 있었다. 소련군은 3월 초부터 독일군의 진격 상황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이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쿠르스크 양쪽의 전선을 연결시키면 독일 전선을 150km 단축할 뿐만 아니라 중앙과 남부전선의 경계에서 협공으로 적을 고립시킬 수 있었다. 소련군은 작전이 지연되는 동안 방어진지를 더욱 두텁게 했다. 또한 예비병력까지 끌어 모았기 때문에 작전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련군은 장교와 병사들의 훈련에서 큰 성과를 이뤘고, 우리가 맞닥뜨릴 적은 더 이상 1941-2년의 병사가 아니라 전투 효율성과 사기 면에서 우리와 동등한 병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원들은 전차 안에서 잠을 잤고, 후속 기갑부대의 '깡통 따개'가 되어야 한다는 책임감에 어깨가 무거웠다. 다음날인 7월 5일 새벽 04시 15분, 포병과 공군의 40분간의 공격이 우리 구역에 대한 공격을 예고했다. 
장갑척탄병이 재빨리 도네츠강으로 내려갔다. 첫 번째 풍선보트가 건너는 동안 강둑의 높이를 낮추기 위해 폭약을 준비했다. 우리 전차는 척탄병이 만들어 놓은 경사면을 느린 속도로 내려가 물속으로 들어가 반대편 강둑을 가로질러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폭발로 인해 지반이 상당히 약해졌고 전차가 밀어낸 진흙이 제방을 덮었다.
강을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을 때 트랙이 단단히 붙잡을 만한 지반이 없어 미끄러졌다. 두 번째 시도도 마찬가지로 실패했고, 이제 소련군의 박격포 사격을 불편할 정도로 가까이서 받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무전으로 도하실패를 보고하고 대원들과 함께 그 자리에 남아 있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공병대대가 나타나 내가 지나온 지점 근처에 60톤 용량의 다리를 세우는 동안 우리가 엄호했다. 곧 첫 번째 부상자들이 풍선보트를 타고 돌아왔다. 소련군의 저항은 강하고 잘 조직되어 있었고, 2개 전차연대는 많은 사상자를 냈으며 느리게 진전하고 있었다. 

우리는 오후 내내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소련군은 땅굴과 대전차포를 이용한 방어망을 두텁게 구축해 놓았는데, 위장이 잘 되어서 발견하기 어려웠다. 수없이 많은 여우굴과 기관총 진지에서 적 보병과 백병전을 벌여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척탄병은 우리가 적을 제거해준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작전내용을 입수한 소련군은 엄청난 방어망을 구축해두었고 독일군의 전차전력은 여기에 걸려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소련군은 우리 전차가 구멍을 밟고 지나가게 한 후에 우리 뒤에서 다가오는 보병 앞에 나타났다. 우리는 고폭탄만 쏘았다. 첫날에는 적 전차를 본 기억이 없었다. 
7월 6일, 나는 제2소대와 함께 제25보병사단에 배치되었고, 매일 바뀌는 무선암호를 받았다. 척탄병이 개척한 길을 따라 이른 아침 고원에 도착해 그곳에서 북쪽과 동쪽으로 교두보를 확장하여 뒤따라오는 제25전차연대가 공격 출발점으로 삼을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그런 다음, 그곳에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 방어진지를 돌파하고 바트라츠칼라 다차를 지나 내륙으로 공격을 하기로 했다. 
우리는 전투대형을 갖추고 처음에는 적을 만나지 않고 명령받은 방향으로 향했다. 약 3km 떨어진 지평선 너머로 전진선 너머로 넓은 삼림지대가 보였습니다. 나는 불안한 마음에 천천히 접근한 다음 소대를 멈추고 뒤에서 25전차연대가 따라잡을 때까지 기다렸다. 포탑해치를 열었더니 적군병사가 여우구멍에서 공포에 질려 나를 올려 보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나와서 후방으로 가라고 손짓했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권총을 뽑아 들고 손동작을 반복하며 그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분명히 알려주었다. 아무 반응이 없었다. 
나는 명령을 재확인하기 위해 여우구멍 근처에 한 발을 쏘았지만 반응이 없었다. 수류탄을 꺼내 핀을 뽑아 아래로 던졌다. 러시아병사가 그것을 집어 들고 다시 던졌다. 전차를 50m 전진시켰다. 뒤따라오던 척탄병에게 포로가 되었을 것이다. 

 

어느 정도로 치열한 전투였는 지만 확인하세요. 지도를 약간 회전시킨 것으로 왼쪽이 중앙집단군, 오른쪽이 남부집단군입니다. 저 좁은 전선에 양쪽 사단이 바글바글 몰려 있습니다. 

 

아래는 참조자료입니다. 

 

사상최대의 전차전 - 쿠르스크와 프로호로프카 

 

독일군 전차의 재무장

 

1939년 9월 전쟁을 일으킨 독일군은 전격적(Blitzkrieg)을 완벽하게 구현했다. 적의 강력한 저항선을 피해 공격속도를 줄이지 않고 적의 뒤로 돌아 통신과 보급선을 끊어 놓았고 포위망에 갇힌 보병은 상황파악도 하지 못한 채로 전멸하거나 포로가 되었다.

먼저 폴란드를 필두로 덴마크와 노르웨이 그리고 프랑스에 이어 저지대 국가(네덜란드 등)가 정복당했다.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 작전도 비슷한 형태로 시작되었지만 워낙 거친 지형때문에 전차전을 벌일 여지가 없었고 독일군은 많은 피해를 입었다.

기습, 절대적인 항공전력, 천재적인 지휘관 그리고  잘 갖추어진 교통망 덕분에 1941년에는 자신들도 믿지 못하는 대전과를 올렸다. 유럽의 정교한 도로와 철도를 통해 독일 공장에서 나온 무기가 바로 최전방으로 달려 갈 수 있었다.

 

그렇지만 소련의 경우에는 그런 교통망이 없었다. 그리고 소련의 철도 폭은 서유럽보다 넓어서 화물을 옮겨 실어야 했고 도로는 마차를 위해 만들어진데다가 비가 오면 진흙수렁으로 변했다.

바르바로사(Barbarossa) 작전 개시에 독일은 17개 기갑사단, 총 3,000대의 전차를 동원했다. 그렇지만 전차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약한 1호와 2호 전차가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고 전차전에서 주력이 되어야 할 3호와 4호 전차의 수량은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에 체코에서 노획한 38(t) 전차가 귀중한 전력이 되어 주었다.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와 함께 3호 전차는 거의 모두 37mm에서 50mm로 공격력을 높였지만 4호 전차는 75mm 단포신을 그대로 유지했고 1941년 7월에 소련의 T-34와 KV-1 전차는 독일군을 공포에 몰아 넣었다.

소련은 6월까지 900대 이상의 T-34와 500대 이상의 KV-1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제대로 운용하지 못해 거의 모두를 잃고 말았다. 이 전차가 제대로 사용된 곳에서는 독일군은 큰 피해를 입었고 전설적인 88mm 대공포를 전용하거나 75mm 대전차포를 동원해서야 막을 수 있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당시의 T-34로 초기형과 다른 포탑모양입니다.)

 

 

소련 전차의 위력에 충격을 받은 독일은 주력 전차의 공격력과 방어력 모두를 획기적으로 높여야 했고 4호 전차에는 장포신 75mm를 장착했지만 3호 전차의 포탑은 너무 작아서 50mm를 그대로 사용했다.

그리고 소련은 막대한 피해에도 불구하고 신속하게 회복하고 있었다. 전차 공장은 철도로 우랄 산맥 너머로 옮겨져 그곳에서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생산을 시작했다.

독일의 전차 생산속도는 의외로 늘어나지 않았는데 히틀러의 배려가 큰 원인이었다. 그는 독일시민의 생활에 큰 지장을 주고 싶어하지 않았고 독일 여성을 공장에 동원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1942년 후반 동부전선 곳곳에서 급한 요청이 빗발치자 점령국 시민까지 동원해 1교대 원칙을 무너뜨리고 생산을 늘렸다.

그래도 1942년 11월 4호 전차의 생산량은 겨우 100대에 머물렀던 반면, 소련은 같은 시기에 무려 1,000대의 T-34를 전방으로 보내고 있었다.

 

독일의 산업생산력은 군수장관에 알버트 스피어(Albert Speer)를 임명하면서 급증했고 모스크바 공격실패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 구데리안이 기갑군총감(Insptector of Armoured Forces)을 맡으면서 독일군 전차부대의 전성기가 시작되었다. 구데리안은 1943년 초에 타이거와 판터를 제외한 다른 전차의 생산을 중지시키려는 총사령부를 설득해서 4호 전차를 계속 주력으로 사용할 수 있게 했다. 3호 전차는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1942년 12월부터 돌격포(일명 구축전차)로 전환해서 생산되었다.

 

 

1943년에는 타이거와 판터가 전장의 전면에 서게 되었다. 타이거는 1942년 레닌그라드 전선에 투입되었는데 히틀러의 생일이었던 4월 20일에 포르쉐 형과 헨셀 형 두 가지를 모두 선보인 후에 헨셀 형이 선택되었다. 타이거는 동부전선에서 얻은 모든 교훈이 투입된 궁극의 전차였다. 

88mm KwK 36 주포는 소련 전차 사거리 밖인 1500m에서 당시의 모든 소련 전차를 격파할 수 있었고 장갑은 최고 100mm 두께였으며 심지어 차체 밑의 장갑도 26mm로 지뢰나 자폭견(폭탄을 달고 전차 밑으로 들어가도록 훈련된 개)의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 그리고 독일전차로는 처음으로 넓은 트랙을 사용해서 56톤의 체중으로 소련의 열악한 지형을 19km/h의 속도(도로에서는 36km/h)fh 달릴 수 있었다. 

타이거의 결정적인 약점은 너무 비싼 제조가(300,000 노동시간)와 회수하기 너무 어렵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타이거는 설계목적인 전선 돌파 역할을 훌륭하게 해냈다. 

 

우리 눈에 익숙한 왼쪽의 T-34 85mm는 1943년에 개발되어서 쿠르스크전투에는 투입되지 못했습니다. 

 

판터는 T-34의 교훈을 그대로 독일판으로 옮겨온 것이었다. 그동안 직각이었던 독일군 특유의 전면장갑은 경사장갑으로 바뀌었고 도로에서 54km/h의 속도로 T-34가 가진 무장, 장갑과 기동력 모두를 그대로 빼닮았다. 판터도 만(MAN)과 다이믈러 벤츠 형이 경합을 벌여 만이 채택되었고 매달 250대 이상을 생산한다는 계획었다. 

그러나 요구가 계속 추가되어 실전에 투입되었을 때에는 지나치게 무거워졌고 기어와 트랜스미션이 쉽게 닳아버리는 한계를 드러냈다. 그래도 타이거에 비해 두 배나 빨리 생산할 수 있었고 크게 개선된 75mm 주포로 타이거와 거의 비슷한 관통력을 자랑했다.  

 

 

타이거 경합에서 탈락한 포르쉐형은 장포신 88mm를 무장한 69톤의 괴물 자주포 전차인 페르디난드(Ferdinand)로 재탄생했지만 기관총과 같은 부무장이 일체없었고 지나치게 느린 속도때문에 소련의 대전차병의 손쉬운 사냥감이 되었다. 그렇다고 해도 소련 전차병이 가장 두려워했던 상대가 바로 페르디난드였다. 

 

 

3호와 4호 전차의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 쉬르첸(Schurzen)이라는 사이드 스커트가 추가되었고 쿠르스크에서는 841대의 4호 G형이 주력전차로 투입되었다. 무장이 강화된 4호 전차는 T-34와 충분히 맞대결을 벌일 수 있었다. 

 

 

3호 전차는 장포신 50mm로 업그레이드되어 432대가 투입되었는데 근거리에서 T-34를 격파할 수 있었다. 약 60대의 3호 전차가 화염방사 전차로 전용되었고 건조기였던 쿠르스크 전에서 큰 활약을 했다.

돌격포는 구데리안이 아닌 포병 계통의 결정을 따라 보병을 근접지원하는 이동식 포대로 개발되었다. 처음에는 단포신 75mm를 무장했다가 대전차 능력이 입증되자 장포신 75mm로 무장을 바꾸기 시작했다. 

 

 

이밖에도 다양한 전차와 자주포가 개발되었는데 사진과 함께 설명하도록 하자.  

 

 

그리즐리 곰(Brummbar). 4호 전차 차체에 단포신 150mm 곡사포를 장착. 주로 적의 방어거점을 공격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 총 306대 제조.

 

 

코뿔소(Nashorn). 4호 전차 차체에 88mm 대전차포 장착. 473대 제조.

 

 

왕벌(Hummel). 4호 전차 차체에 장포신 150mm  곡사포를 장착. 714대 제조.

 


말벌(Wespe). 38(t) 전차 차체에 105mm 곡사포를 장착. 682대 제조.

 

 

담비(Marder) II. 2호 전차 차체에 장포신 75mm 장착. 651대 제조.

 

생산량이 증가하고 유지보수 작업을 거쳐 대부분의 기갑사단은 1943년 6월 당시에 100~130대의 전차를 보유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모든 사단이 같은 수준의 장비를 보급받은 것이 아니라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SS 친위사단이 가장 우선적으로 최신식 장비를 받았다. 기갑척탄병(Panzergrenadier) 사단인 라이브스탄다트 아돌프 히틀러(Leibstandarte Adolf Hitler), 다스 라이히(Das Reich), 토텐코프(Totenkopf)가 기갑사단 수준의 전차전력을 갖출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