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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2차대전

팬저 에이스 - 스탈린그라드전투

by uesgi2003 2023. 2. 22.

러시아군, 소련군을 혼용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부상을 당해 본국으로 후송된 김에 전차학교와 장교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을 기록했고 중위로 진급했습니다. 

저자의 중대가 타이거를 가장 먼저 장비하고 다시 러시아로 돌아갑니다. 

 

A가 저자 리하르트 프라이허 폰 로젠입니다. 

 

전차학교 전경이고 아래는 전선으로 이동하는 극초기 타이거입니다. 

 

타이거전차는 2종의 궤도를 사용했습니다. 소련의 진흙밭을 헤치고 무거운 하중을 분산시키기 위해 넓은 궤도를 사용했는데 이게 수송열차보다 넓어서 위험해졌습니다. 그래서 사진처럼 수송할 때에는 좁은 궤도를 쓰고 전장에 도착하면 다시 넓은 궤도로 바꾸는 성가신 작업을 했습니다. 

 

타이거전차의 첫 실전은 참사 그 자체였습니다. 기술적으로 많은 문제가 있는 극초기형을, 그것도 습지 투성이의 레닌그라드에 투입했다가 3대 중 1대가 고장났고 나머지 2대는 소련군의 대전차포 화망에 모두 파괴되었습니다. 

그 중에 1대가 고스란히 소련군 손에 넘어가 소련군이 대비할 귀중한 시간을 벌어주었습니다. 

 

소련군은 이렇게 노리라는 교범을 만들었는데 

 

이렇게 광활한 소련의 대초원에서는 타이거를 보기 전에 이미 88mm 철갑탄이 아주 정확하게 날아들죠. 

 

공수주에서 공격과 수비에 몰빵한 타이거는 동부, 아프리카, 서부전선 모두에서 공포의 대상 그 자체였습니다. 

아래는 중전차대대의 교환비율입니다. 저자가 있었던 대대는 13:1의 교환비율입니다. 

 

그런데 타이거와 같은 중전차의 등장은 독일군의 수세와 맞물려있습니다. 

이전의 전격전은 완전히 사라졌고 소모적인 방어전과 참호돌파 전략전술로 전환하면서 독일군과 소련군의 격차는 크게 줄어들었습니다. 

 

 

야크트타이거 전면장갑에 난 상처입니다. 이 전차는 전면에 3발을 맞았는데 모두 관통하지 못했죠.

자세한 배경은 설명할 수 없지만 야크트타이거와 판터 실내에도 들어가서 포수석에 앉아봤습니다. 

저 발자국은 전부 제 발자국입니다. 

 

 

 

동부전선에서 스탈린그라드에서 독일전사에서 최악의 패전을 겪었는데 다른 전선에서도 참사가 벌어졌다. 1942년 11월, 미군이 모로코와 알제리에 상륙했고, 롬멜은 엘 알라메인 이후 군단을 이끌고 서쪽으로 후퇴했다. 
1943년 봄, U보트 전쟁의 붕괴와 함께 2차대전은 완전히 흐름이 바뀌었다. 더 이상 희망이 없어졌다. 우리는 독립중대로서 전선구원에 나서야했다. 중전차대대 502가 북쪽 레닌그라드 전선에 묶여 있는 동안 우리는 돈집단군Don Army Group돈에 소속되어 있었다. 
우리는 단 이틀만에 제국의 모든 지역에서 보급, 수송, 작업장, 전차 복구소대를 지원받아서 150명에서 500명으로 늘어났다. 동시에 헨쉘공장에서 12월 21일부터 26일까지 총 9대의 새로운 타이거가 도착했다. 
중대장 타이거 1대, 타이거 4대로 구성된 2개 소대, 3호전차 8대로 구성된 1개 경소대로 중대를 편성했고 각 소대마다 장교 2명이 배치되었다. 나는 셰르프소령의 제1소대 부소대장이었는데 전황악화고 장교 수가 줄었다. 
부모님께 요금이 10배나 비싼 긴급전화로 작별인사를 했는데 걱정만 끼쳐드렸다. 독일인 모두가 두려워하던 스탈린그라드였으니까.

 

초기 중전차대대는 타이거전차의 부족으로 3호전차가 많이 배치되었습니다. 그래서 초기사진을 보면 타이거전차 부근에 3호전차가 많이 보이는 이유입니다. 이후에는 타이거만으로 완편되었습니다. 

 

1942년 말, 모스크바방면은 완전히 막혔지만 스탈린그라드방면은 독일군의 기세가 아주 좋아습니다. 

아니 아주 좋아보였습니다. 소련군은 이미 대대적인 병력을 집결시키고 독일군을 포위섬멸한다는 계획이었는데 히틀러의 광적인 편집증으로 독일 6군, 루마니아, 이탈리아, 헝가리와 기타 의용군 등 최대 100만 명이 완전히 전멸했습니다. 

스탈린그라드에 갇혔을 때만 해도 밖에서 구원하고 안에서 일시에 탈출했다면 몇십만명의 병력을 구할 수 있었는데 히틀러는 절대불가의 명령으로 이들의 목숨을 모조리 빼앗았습니다. 

 

저자처럼 외부에서 구원작전을 벌였지만 처음부터 불가능했던 것이, 소련군은 단순히 6군뿐만 아니라 남부전선 자체를 무너트릴 계획이었고 독일군을 압도하는 전력을 집결시켜 놓았습니다. 

 

스탈린그라드 섬멸전을 벌이는 동시에 남부전선 전체에서 대대적인 반격을 시작해 독일군은 대공황상태에 빠져들었습니다. 전사가들이 스탈린그다르전투를 독일군의 (패배가 아니라) 승리가 멈춘 전투라고 말하는 것이, 2차대전 최고의 전략가 만슈타인이 대공황을 수습하고 기가 막히게 반격해서 소련군을 완전히 궤멸시키고 전선을 원상복귀시켰습니다. 

독일군의 패배가 시작된 전투는 저자의 이야기가 계속 이어질 쿠르스크전투입니다. 

 

2013년 러시아영화 스탈린그라드입니다. 이전에 설명했듯이 소련군 포로를 워낙 잔인하게 학대해서 소련군이 집 한채마다 틀어박혀 결사항전하며 독일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습니다. 

그래서 각종 자료를 보면 마구 투항하던 소련군을 비웃던 저자들이 소련군을 무서워하고 경탄하게 됩니다. 

 

https://youtu.be/T8AxuiNVS4Q

 

우리는 '전격수송'으로 분류되어 동쪽으로 향하는 다른 모든 차량보다 우선권을 가졌고 새해 전야에 벨라루스의 고멜에 도착했다. 여기서 좁은 러시아용 철도로 바꿔야 했다. 혹독한 추위와 얼어붙은 경사로때문에 승무원들이 힘든 작업을 했다. 
3일 후 우리는 로스토프나돈Rostov-on-Don에 도착했다. 철도건물과 플랫폼은 긴장한 루마니아 군으로 가득 차 있었는데 거의 무기가 없었다. 마치 도망치는 군대처럼 보였다. 독일 철도원들은 러시아군이 루마니아군 전선을 다시 뚫고 들어왔으며 이제 겉잡을 수 없는 상황이라고 조언했다. 철도원들은 러시아군이 갑자기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전차 안에 머무르라고 했다. 

 

스탈린그라드전투에서 포로가 된 루마니아군입니다. 


전차 안은 몹시 추웠다. 그렇게 기다렸던 수퍼전차인데도 그리 희망적이지 않았다. 1943년 1월 6일, 칼묵 대초원 가장자리에 있는 프롤레타르스카야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날 저녁 중대 전체가 소집되어 우리가 이제 17사단에 소속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우리도 적도 고정된 전선없이 서로를 발견해서 파괴하는 대초원 전쟁이었다. 첫날 저녁, 전차와 함께 몰려오는 러시아군과 전투를 벌였다. 우리는 상당히 높은 지대에 있었고 몇 km 앞의 지형을 볼 수 있었다. 
저 멀리서 거대한 개미 떼의 검은 점들이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 사이에는 더 큰 검은 점들이 있었는데 바로 전차였다. 전차지원을 받은 약 4,000명의 러시아 보병 2개 연대가 공격해왔다. 접근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전차부터 파괴하고 보병을 공격했다. 

그들은 용감했다. 그건 인정해야 했다. 우리는 어둠을 틈타 후퇴했다. 약 1,000명의 러시아군을 죽였다고 보고했는데 우리도 전차 1대와 승무원 5명을 잃었다. 다시는 기온이 영하 30도까지 떨어졌다. 
이제부터는 하룻밤을 지낼 마을을 점령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러시아군이 먼저 점령했으면 쫓아내야 했고 반대로 러시아군도 마찬가지였다. 대초원에는 마을이 많지 않기 때문에 마을을 파괴하지 않고 보존해야 했다. 
주민은 난로 위나 주변에서, 우리는 바닥이나 테이블 아래에서 잠을 잤다. 칼묵족은 친절한 사람들이었지만 전쟁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이튿날 전차밖에서 타우버중위가 소화기를 맞고 쓰러졌다. 

타이거는 제대로 테스트하지 못했기 때문에 많은 문제가 있었다. 아니면 생산단계에서 사보타주가 있었을 수 있다. 적과 기술적 어려움이라는 두 가지 전선에서 싸우고 있었다. 셰르프소령이 타이거 3대와 3호전차 7대로 편성된 우리 중대를 지휘했다. 
1월 14일, 타이거 3대는 서쪽 카마로프로 이동해 제16사단을 지원한 후 프롤레타르스카야에 있는 중대로 복귀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3호전차는 후방에 남았다. 러시아군이 산등성이에 대전차포를 배치해서 생각보다 어려웠다. 
대전차포와 전투를 벌이고서야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은 포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여러 발을 맞았고 갑자기 무전기를 통해 소령이 내게 '지휘전차가 포탄에 맞았다. 네가 맡아!'라고 외쳤다. 한 번도 지휘해 본 적이 없어서 당황했다. 
'알겠습니다. 아웃'이라고 무전했고, 더 생각할 필요도 없이 '224호 전방 산등성이에 대전차포 있음. 가!' 224호가 바로 출발했고 우리 전차도 재빨리 뒤따라갔다. 러시아군은 모든 대전차포와 미제 지프차를 남겨두고 도망쳤다. 미군 지프차는 이제 동부전선에서 흔하게 볼 수 있었다.
공격은 성공적이었고, 지휘임무도 처음으로 성공했다. 이제 나도 경험 많은 소대장이 되었고 서로 의지할 수 있는 신뢰관계가 형성되었다. 

중대까지 30km 정도 남았을 때에 224호 엔진에 문제가 생겼다는 보고를 받았다. 시동이 안걸려서 견인해야 하는데, 그렇게 먼 거리는 무리였다. 224를 최대한 멀리 견인하되 비상시에는 폭파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사단의 병력이 철수한 광활한 대지에 홀로 남았다, 
견인 케이블을 연결했고 엄청나게 느린 속도로 출발했다. 곧 어둠이 내렸고 열린 포탑 해치에 서 있자니 너무 추웠다. 장갑을 안끼고 장갑을 만지면 달라붙었다. 
'중위님, 엔진이 끓어오르고 있어 멈춰야 합니다." 잠시 후 운전병이 말했다. 냉각수 온도계는 80도가 정상인데 100도가 넘었다. 온도가 떨어질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한 시간 반이 지난 후, 엔진에 무리를 주지 않기 위해 이전보다 느리게 갔지만, 다시 엔진이 너무 뜨거워졌다. 시동을 끄고 식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시동을 거는 리듬이 주변을 뒤흔들었다. 엔진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장전수는 엔진을 예열하기 위해 가지고 다니는 블로우램프에 불을 붙였다. 그을음과 끈적끈적한 그을음을 뒤집어썼어도 얼어 죽는 것보다는 나았다.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가장 가까운 독일군 진지를 향해 얼마나 멀리 가야 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수평선 왼쪽에 갑자기 검은 점 몇 개가 나타나 우리 쪽으로 다가오는데, 러시아군인가? 기병 20~30명이 멈춰 우리를 지켜보았다, 독일군은 기병이 없었다. '포수! 포탑 3시 방향, 사거리 2,500m, 고폭탄, 마음대로 쏴'라고 명령했다. 
3발을 쏘자 적들이 돌아서서 시골로 사라졌다. 우리는 계속 이동하여 도랑 위의 작은 나무 다리에 도착했다. 견인 중인 전차가 너무 왼쪽으로 갔고 아차!하는 순간에 도랑으로 미끄러졌다. 그대로 둘 수도 폭파할 수도 없었다. 
셰르프가 회수소대를 보낸다고 했는데 13시간이 지났다. 자폭이 너무 빨라도 너무 늦어도 군법회부감이었다. 나는 전차병 5명을 전차에 태우고 이동했다. 운좋게도 멀리서 차량이 보였고 흰색 조명탄이 솟아오르는데, 아군이라는 뜻이었다. 나도 똑같이 응답했다. 
그들은 17사단 소속 병력이었고, 무전으로 사단에 연락해 회수차량이 우리에게 오는 중이라고 알려주었다. 3대의 트랙터가 나타났고 곧바로 전차를 회수했다. 우리는 살아났지만 스탈린그라드의 아군은 구원할 길이 없었다. 
이미 포위된 아군은 더 이상 돌파할 힘이 없었고 스탈린그라드 포위망을 돌파할 병력도 없었다.우리 중대는 로스토프로 완전히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코카서스에서 후퇴하는 아군이 모두 통과할 때까지 이 도시를 지켜야 했다. 

오스트리아에서 편성되어 타이거 2개 중대를 보유하고 있던 중전차 503대대가 새로 도착했다. 우리는 독립중대 자격을 잃고 150명의 평범한 중대가 되었다. 하지만 공식 명칭인 3중대/중전차 503대대 뒤에 항상 괄호(./502)를 붙였고, 맘모스 상징을 그대로 유지했으며 전차에 503 표식을 달지 않았다.

 

 

중전차대대의 상징입니다. 저자의 대대는 맘모스입니다. 


통신전차에서 중파 라디오를 얻었고 독일 방송국을 수신할 수 있었다. 러시아의 전파방해로 못듣다가 갑자기 '스탈린그라드 - 대량학살, 스탈린그라드 - 대량학살'이라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독일군 최고사령부는 매일 이 방송을 송출했다. 자세한 내용이 없어도 동부 전선 남쪽, 특히 스탈린그라드 주변의 상황이 재앙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트랜지스터가 등장하기 전에는 무전기 세트에 상당히 큰 진공관이 장착되어 있었고 일선부대는 진공관이 없었다. 우리 이외의 주변부대는 정말 '무지의 계곡'에 살고 있었다. 그래서 소문이 더 쉽게 퍼졌다. 집에서 받는 편지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지만, 오랜 시간이 걸렸고 검열을 거쳤다. 
우리는 로스토프 비행장에서 공군과 교류했는데 이전에는 수송기가 스탈린그라드로 자주 이륙했었지만 이제는 크게 줄어들었다. 공군조종사들은 더 이상 스탈린그라드에 착륙할 수 없고 군수품을 낙하해야 한다고 말했다. 

1943년 2월 2일, 독일군의 마지막 저항이 사라졌다. 공군에게서 수십만 명의 군인이 포로가 되었다고 들었다. 군지도부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흔들렸다. 우리가 단절되거나 포위되거나 다른 절망적인 상황에 처하더라도 구출할 방법을 찾아낼 것이라고 확신하였었는데, 이제 산산조각이 났다.
6군은 고의로 버려졌다. 스탈린그라드에서 탈출하여 수많은 병사를 구할 기회가 여전히 남아있었는데도 외면한 군지휘관들을 비난했다. 스탈린그라드는 심리적인 측면에서도 전환점이었고 모든 것이 이전과 같을 수 없었다. 
2월 8일, 전차부대 전체가 로스토프에서 철수했다. 도시 일부는 이미 러시아군에게 넘어갔고 사흘 내내 강력한 공격을 막으며 미국 전차 일부를 포함해 많은 전차를 파괴했다. 타간로그Taganrog에서 나는 기적처럼 나타난 특별기차에 전투 병력을 실었다. 
우리는 목적지를 알 수 없는 마지막 기차를 타고 떠났다. 수송지휘관도 대혼란속에서 우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러시아군은 아주 멀리 전진하여 대공업지대인 도네츠분지까지 침입했다. 전차수리창이 마리우폴Mariupol로 옮겨졌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으로 향했다. 

 

기름을 들이마시는 타이거입니다. 이 사진을 보면 제 인피니티 M37이 생각나서... 타이거 먹는 만큼 먹습니다. 

아래는 중전차 대대의 퇴각로입니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마구 밀려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