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현대/2차대전

전차병 이야기 (1부) - 전차의 탄생

by uesgi2003 2023. 6. 4.

 

정말 오래간만에 역사이야기를 정리하는군요.

그동안 멀리했던 이유는 워낙 많은 주제와 소재를 정리해서 이거다! 싶은 것들이 별로 없고, 유투브 등에 온갖 카더라가 난무해서 의욕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언제 그만둘 지 모르겠지만 한동안 전차병 이야기를 정리할 계획입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제가 연구하고 분석한 자료가 아니라 해외 전문가의 자료를 정리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리뷰를 싫어해서 오타나 어색한 문장이 있으니까 미리 양해를 구합니다. 

 

이번 이야기는 넷플릭스의 서부전선이상없다를 참조하면 훨씬 재미있을겁니다. 

 

 

 

1916년 9월 중순, 솜Somme 서부전선은 위협적인 분위기였다. 낮에는 연기와 먼지가 자욱하고 밤에는 불협화음과 섬광이 뒤섞인 황폐한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영국군은 이곳에서 단 하루에 57,470명이 전사했다. 129개 대대 중 32개 대대가 각각 500명 이상을 잃었다. 솜전투는 잃어버린 2년의 교착상태의 압축판이었다. 작전개시 한달만에 사상자가 9만 명으로 늘었다가 11월에는 120만 명에 달했다. 

 


다음 전투를 위해 집결지에 모인 병사들은 본능적으로 죽음을 느끼고 있었다. 전투개시 2달 후에도 날씨는 매우 따뜻했다. 한 병사는 마차 대열에 있었는데, 누군가 다가와서 ‘전쟁이 끝났다’고 말했다. 그 사람은 정확한 내용을 말하지 않고 그저 ‘800m 정도 내려가서 저쪽 들판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라고만 했다. 


거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보거나 들어 본 적이 없는 전차가 있었다. 그들은 뭐라 설명하기 힘든 금속덩어리를 보고 있었다. 당시 스무 살이었던 보병 어니스트 포드는 '나중에 알게 된 것처럼 캐터필러가 달린 장갑차, 그러니까 전차 같은 것을 보았다'고 말했다. 참호에서 포탄을 견디던 제7 카메론 하이랜더 부대원 로비 번스는 '삐걱거리는 소리를 듣고 '도대체 저 소리는 뭐지'라고 생각했는데, 점점 더 커졌다'고 말했다. 영국군은 맞은편에 있던 독일군들처럼 참호 위로 올라가서 전차와 그 뒤에 대여섯 명의 병사들이 총검을 들고 지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철조망 제거용일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스무 살 노먼 딜런이 속한 제14 노섬벌랜드 보병대대는 플러스 마을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악취가 진동하는 밤이었다. 독가스포탄이 머리 위로 쏟아지는 가운데, 그의 눈앞에 '기괴한 물체가 진흙 위를 기어가는 것이 보였다'고 했다. 최초의 전차 작전이었다.

전차병 아치 리차드는 이 전투에 대해 공상과학 소설가보다 더 초현실적으로 묘사했다. 1990년대 인터뷰에서 "그해 9월은 더운 날씨였고, 악취를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고 회상했다. 참호에서 팔과 다리가 튀어나왔고 시체가 썩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연합군 시체가 흩어져 있는 땅을 덮어야 했고, 교착 상태에 빠진 전술의 소름 끼치는 결과였다.
오래된 참호, 시체, 그 밖의 모든 것을 밟고 지나가야 했다. 전차가 전진하면서 질식할 것 같은 뜨거운 기름 냄새와 타다 남은 코다이트(무연폭발물)의 악취까지 스며들었다. 전쟁의 참상을 직접 목격했다. 독일군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몰랐다. 
오토 슐츠중위의 베스트팔렌 보병중대는 공격 당일 마르발 마을 인근의 한 학교에 주둔하고 있었다. "우리는 연합군의 새로운 무기에 대한 소문을 들었고, 정보부가 프랑스에서 제작 중이라는 차량에 대한 정보를 보내왔다.” 슐츠는 이 정보를 일반 병사들과 공유하지 않기로 했다. 당시에는 계급의 벽이 높았고 이런 세부 사항을 쉽게 공유하지 않았다. 중대는 급히 경보를 발령하고 플러스로 향했다. 
"그렇지만 실제 전차를 처음 봤을 때, 상상하던 것과 너무 달랐다. 커다란 금속덩어리에 두 개의 캐터필러가 차체를 감싸고 있었다." 오토 슐츠중위가 초현실적인 공격자들을 처음 본 것은 공터에 무력하게 서 있는 모습이었다. 쌍안경으로 관찰한 결과 포탄에 맞아 찢겨진 흔적이 보였다. 베스트팔렌 보병 소대 2개가 전차에 접근해 수류탄을 투척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전차가 계속 기관총을 쏘아대서 접근할 수 없었다. 
한 독일 기관총사수가 응사했지만 전차에 불꽃만 튕길 뿐이었다. 지금까지 기관총이 전장을 지배했기 때문에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일부 전차는 철조망을 기괴하게 뒤집어 쓰고 있어 공포를 더했다. 
한 독일군포로는 '마치 사지의 힘을 잃은 듯이 쳐다보았다'고 기록했다. 거대한 괴물들은 비틀거리고, 구르고, 흔들리면서 천천히 다가왔다. 오토 슐츠는 자신의 보병이 이 기계들에 대해 얼마나 무력한지 잘 알고 있었는데, 플러스에서 돌파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누군가 ‘악마가 온다!’고 외쳤다. 바이에른의 한 전쟁 포로는 '그 소문이 전선을 따라 퍼졌다'고 말했다. 공황이 전류처럼 퍼졌고 '참호를 따라 사람과 사람 사이를 지나며' 일부는 싸우고 일부는 도망쳤다. 

 

https://youtu.be/D3ILZI3ZCpQ

 

서부전선이상없다의 전차신은 훨씬 뒤의 이야기입니다. 

 

휘몰아치는 궤도가 머리 위로 솟아오르자 용감한 병사들은 지상으로 기어올라 전차 지붕에 수류탄을 던지거나 구멍이 보이면 어디든 총을 쏘고 찌르며 자살 반격을 감행했다. 독일군의 자살공격은 분쇄되었고 병사들은 겁에 질린 채 항복하며 손을 들거나 통신참호를 타고 2선으로 도망쳤다. 
운전병들은 시체 위를 달리면서 통제력을 발휘했다. 빅 허팜 이등중위의 전차 돌리Dolly는 실제로 시체와 벽돌로 뒤덮인 도로를 달렸다. 전차는 가끔씩 멈췄고 허팜은 시체를 피해 밖으로 나갔다가 맹렬한 포격에 밀려 도로안으로 다시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결국 그는 시체 위로 전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가슴이 아팠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80년 후, 다른 전차를 운전하던 아처 리차드는 이렇게 회고했다. '길을 선택할 수 없었다. 병사가 앞에 쓰러지면 그 위로 지나가야 했다. 전차를 처음 본 구경꾼들은 전차가 무적이라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어떤 전투기계도 기관총과 포격으로부터 승무원을 보호하면서 적과 교전할 수 있는 충분한 기동성을 보여주지 못했다.’

1916년 9월 15일 플뢰르-쿠르셀레Flers-Courcelette전투에는 전차 50대가 참전했는데, 전차의 효율성에 대한 평가는 엇갈렸다. 출발선에 도착한 전차는 32대뿐이었고, 그 중 30대가 움직였다. 9대는 보병보다 앞서서 적에게 상당한 손실을 입혔고, 9대는 뒤처졌지만 전열을 정비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하루 동안 5대가 버려졌고 9대는 기계적 문제로 고장났다. 실제로 적과 접전하여 전투를 벌인 병력은 20~40퍼센트에 불과했다. 

 

 

 


그렇지만 사기에는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연합군 언론은 '거대공룡의 승리', '화염의 눈을 가진 용', '지상 순양함'이 적에게 엄청난 타격을 입혔다며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그럴 만도 했다. 서부전선 늪지대 전선을 취재한 특파원은 '태고의 점액질에서 눈먼 생명체가 튀어나왔다'고 표현했다. 아치 리차드는 독일군 참호 옆에 전차를 세우고 양쪽에 포를 설치했다. 그는 "독일군은 전차 같은 것을 본 적이 없었고, 곧바로 항복했다"고 회상했다. 

 


양쪽 보병들은 새로운 기계를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제7 런던 TA 대대 버트 채니는 적갈색으로 칠해진 기계 중 하나에서 네 명이 나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전투가 격렬하게 벌어지는 가운데 그들은 '몸을 펴고 머리를 긁적거리며 천천히 그리고 신중하게 차량 주위를 걸으며 모든 각도에서 차량을 점검하고 회의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열악한 참호생활에 찌든 보병과는 전혀 다른, 딴세상의 분위기를 풍겼다. 전차병들은 자신들이 완전히 다른 유형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몇 분 동안 길을 잃은 듯 서성거리던 그들은 침착하게 전차내부에서 난로를 꺼내 전차측면을 엄폐물로 삼아 바닥에 앉아 차를 끓였다.' 버트 채니는 그들이 있는 한, 전투가 끝났다고 생각했다. 

1914년 이프레Ypres전투 이후 서부전선의 교착상태 때문에 전차가 탄생했다. 독일군의 진격이 멈췄지만 연합군의 진격도 멈췄다.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바리케이드와 기관총과 포병이 장악하고 있는 몇 km의 참호가 벨기에 해안의 니우포르트Nieuport에서 스위스까지 뻗어 있었다. 끔찍한 사상자는 공격보다 방어가 효과적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왕립 공병장교 어니스트 스윈턴Ernest Swinton중령은 1915년 6월 1일 '교착 상태를 극복하기 위한 장갑 기관총 구축함'의 도입을 주장하는 보고서를 총사령부(GHQ)에 제출했다. 캐터필러를 사용하는 가솔린 트랙터를 활용하고, 독일군의 포탄에 대비해 강화강판 장갑을 씌우고 기관총 2정과 2파운더포 1문으로 무장해야 한다고 보고했다. 적 기관총을 상대로 유리한 조건에서 직접 교전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당시로서는 상당히 작은 스파크 점화엔진은 100마력 이상의 출력을 낼 수 있을 정도였다. 캐터필러 트랙은 이미 대중화되었는데, 특히 농업용 트랙터를 생산하던 미국의 홀트Holt사에서 사용했다. 이미 프랑스 왕립 포병대는 중포 견인트랙터로 사용하고 있었다. 
양측에서 장갑차를 양측에서 모두 사용했지만 서부 전선의 진흙탕 참호 조건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홀트의 캐터필러 트랙터를 군용으로 사용하면 참호 교착상태를 극복할 수 있다는 스윈튼의 주장이 힘을 얻었다. 1914년, 전쟁성에 보고서가 제출되었고 거기에는 암호같은 메모가 있었다. '이 보고서의 저자가 공상영역에서 냉정한 사실영역으로 내려온다면', '많은 귀중한 시간과 노동력을 절약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해군성 초대제독 윈스턴 처칠이 스윈튼의 아이디어를 인정했고, 필요한 자금을 지원했다. 1915년 6월, 기관총 2문과 속사포 1문으로 무장하고 10명의 승무원이 탑승할 수 있으며 험지와 철조망을 건널 수 있는 지상함의 사양이 나왔다. 평지에서 시속 6.5km 이상의 최고속도와 급격한 선회 및 후진기능이 필요했다. 
이 기계는 1.5m 높이를 오르고 2.5m 간격을 가로지를 수 있어야 했다. 공격을 받으며 참호를 통과하고 반경 30km까지 이동할 수 있어야 했다. 

7월 24일, 윌리엄 포스터스William Foster's가 개발 계약을 수주했다. 기존의 다임러 105마력 엔진은 중장갑을 구동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지만 바로 사용할 수 있었다. 해군은 경포에 필요한 6파운더포와 탄약을 충분히 제공했다. 
이제 두 가지 난제가 남아있었다. 이 모든 것을 담을 차체 그리고 새로운 무게를 지탱하고 주행 중 받게 될 스트레스를 견딜 수 있는 캐터필러 트랙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지가 문제였다. 개발 주문을 받은 지 3주 만에 프로토타입 작업이 시작되었고 리틀 윌리Little Willie라는 이름의 궤도형 차체가 제작되었다. 

 


기계천재 월터 윌슨소령이 전차원형의 불충분한 궤도너비, 상부 무게, 최소 지상고 등의 문제를 해결했다. 어니스트 스윈튼은 윌슨의 스케치를 실제로 구현한 실물 크기의 모형을 본 후 이렇게 기록했다. 
엔지니어인 나도 가까이서 크기를 측정하는 데 몇 분이 걸렸다.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기이한 마름모꼴 모양, 뒤집힌 코, 그리고 캐터필러가 차체 바로 아래가 아니라 주위로 이어진다는 사실이다. 목재원형이었지만 내 아이디어를 실제로 구현한 결과물을 보고 있었다. 캐터필러가 길어서 운전하기 힘들더라도 넓은 참호를 타고 올라갈 수 있었다. 지상고가 높아서 회전 포탑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대신에 차체 측면에 포탑을 용접해서 장착했다. 초기의 선로 약점도 새로운 경량 프레스 강판을 생산하여 극복했습니다. 이 모형전차 마더Mother는 실제 전투전차 빅 윌리가 되었고 1916년 1월 16일에 처음으로 운행되었다.

 

기획안의 리틀 윌리입니다. 

극도로 위험하고 비밀스러운 임무를 수행할 지원자가 필요했다. 지원자는 기술지식도 갖춰야 했는데 비밀유지의 이유로 그 이유를 밝힐 수 없었다. 빅터 허팸은 몇 주간의 휴가를 받고 귀국했는데 1916년 초에 '엄격하게 비밀과 기밀인' 전쟁성 명령서를 받았다고 회상했다. 
영국연방 전역의 부대 소속 장교와 지원자 300명이 런던 웰링턴 막사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했다. 스윈튼은 '우리는 매우 위험한 임무에 자원했다고 경고하며 의심이 가는 사람이 있으면 한 발짝 물러서라고' 말했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장교들은 기관총 배지를 발급받았고, '기관총 중대(HSMGC) 중위라고 되어 있었지만, 진짜 부대에 대해 정체를 알려주지 않았다.' 신병은 자동차 또는 관련 기술배경을 가진 병사들 중에서 선발되었다. 
20세기 초, 영국에서 자동차는 여전히 부유층의 전유물이었다. 에드워드 웨이크필드는 전쟁성에서 '모터 기관총부대'라는 이름의 특수부대를 창설한다는 광고를 기억한다. ‘모터사이클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모터'라는 단어가 마음에 들었다." 모터사이클 정기 간행물 편집자인 제프리 스미스는 자격을 갖춘 많은 상인들을 모집했지만 군사경험이 전혀 없었다. "하사관들이 우리를 민간인에서 군인으로 바꿔 놓아야 했고, 어려운 일이었다. 서부전선 총사령관 헤이그Haig는 곧 있을 솜 공세에 전차를 투입하고 싶어했다. 

 

1916년 6월, 테트포드 인근 엘베든 부근으로 전차를 옮겼다. 허팸과 다른 대원들은 기차역에서 행군한 후 엄격한 감시를 받았다. 내부에는 철로가 있었고, 그곳에서 처음으로 전차를 만났다. 주민들은 그 지역 밖으로 이주한 상태였다. 
첫 번째 전차병들은 3개월 만에 플러스-쿠르셀레트 전투에 투입되었다. 전례가 없었던 무기여서 전술교리는 초보적이었다. 보병을 지원해 독일군전선에 구멍을 뚫는다는 단순한 개념 이상의 것을 고려하지 않았다. 상대방 포진지까지 침투하는 것까지 노려야 하지만, 그 너머를 공략하는 것은 기병대의 임무였기 때문에 아무도 고려하지 않았다. 
승무원이 알아서 적응해야 했다. 한 전차지휘관은 '우리 전차는 도착한 날부터 문제가 생겼다. 정찰이나 지도읽기 훈련도 받지 않았고 나침반에 대해 알지도 못했고 신호나 명령을 받는 연습도 없었다’고 말했다. 
30톤짜리 기계는 동력이 턱없이 부족하고 정교하지 못했으며, 불안에 휩싸인 운전사들이 실수를 저지르면서 자주 고장이 났다. 전선으로 가는 길에 승무원들은 이상한 보안조치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았고 호기심 많은 지휘관들이 아무런 도움이 안되는 시범을 보여 달라고 요구했다. 출발선에 도착하기도 전에 탈진했다. 

 

https://uesgi2003.tistory.com/1761

 

영화 서부전선 이상없다의 전차이야기

우선 결론부터 간단하게 말하면 꼭 보세요. 감독이 마지막에 엉뚱하게 튀어서 그렇지 정말 잘 만든 전쟁+드라마 영화입니다. 영화 종반부에 프랑스의 중전차 생샤몽이 대거 투입되는 장면이 무

uesgi2003.tistor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