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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2차대전

팬저 에이스 - 쿠르스크전투 2부

by uesgi2003 2023. 3. 8.

러시아와 소련을 혼용하고 있습니다. 

 

 

터키군사고문단에게 타이거전차를 시연하고 있습니다. 히틀러는 터키의 참전을 바라며 온갖 노력을 기울였지만 터키는 1차대전의 교훈을 잊지 않고 현명하게 중립을 유지했습니다. 

사진 가장 오른쪽이 2차대전 최고의 지휘관 만슈타인원수입니다. 저 시연회에서 타이거의 성능에 못마땅해 했다고 합니다. 만슈타인은 판터 등이 없어도 시간이 우선이라며 성채작전 조기개시를 주장했지만 히틀러가 극구 반대했습니다. 만슈타인의 계획대로 조기에 작전을 시작했다면 소련군은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을겁니다. 

 

저자는 수호천사의 축복을 받았다고 기록했는데 실제로 그랬습니다. 저자의 타이거는 지도 가장 남쪽 루트를 타고 전진했고, 다른 연대는 전무후무한 세계최대 전차전이 벌어진 프로호로프카로 전진했습니다. 

 

프로호로프카전투에서 양쪽 1,000대 정도의 전차가 맞붙었고 소련군이 훨씬 큰 피해를 입었지만 방어에 성공하고 독일군을 밀어내서 전략적 승리를 거뒀습니다. 독일군은 이 전투에서 입은 피해를 복구하지 못한데다가 서부전선으로 정예사단을 대거 이동시키면서 동부전선에 거대한 구멍이 뚫리게 됩니다. 

 

나는 진격하라는 무전 메시지를 받았다. 우리 소대 뒤에는 약 30~40대의 3호와 4호전차가 있었다. 그 뒤에 무엇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제7곡사포병연대였을 것이다. 그 이전의 모든 것은 그저 서막에 불과했다. 우리가 곧 마주하게 될 적군은 이제껏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었다. 
오른쪽 숲을 통과하는 것 외에는 숲을 통과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숲을 향해 전차를 몰았고, 갑자기 오른쪽에서 처음보는 포구 섬광을 봤다. 152mm 평탄 곡사포로 무장한 SU-152 자주포의 섬광이라는 것을 나중에 확인했다. 이 자주포는 높이가 낮아서 위장하기는 쉬웠지만 재장전 속도가 느렸다. 
오른쪽 조의 타이거 2대는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며 적과 교전했고 러시아군보다 사격실력이 좋았다. 피격된 차량에서 검은 연기가 솟아올랐지만 동시에 숲가장자리에서 진주 목걸이처럼 4, 5, 6 개의 섬광이 번쩍였다. T-34인 것 같았다. 
우리는 몇 대를 침묵시킨 후에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아갔다. 내 타이거는 포에 맞았지만 전면장갑이 두꺼워서 손상을 피할 수 있었다. 얼마나 많은 적을 쓰러뜨렸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들은 대전차포를 숨겨 놓고 우리를 지나가게 한 후에 3호와 4호전차를 공격했다. 

 

독일군의 벙커에 대응해 설계생산했기 때문에 고폭탄 152mm 그리고 장약을 사용해 발사속도와 장탄수에 치명적인 한계가 있었지만 타이거와 판터를 한방에 잡을 수 있어서 맹수사냥꾼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순식간에 뚝딱 설계하고 생산해서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쿠르스크전투에서 데뷔전을 치렀고, ISU-152로 개량했습니다.

노획한 SU-152를 검사하고 있는 독일군인데 이미 패전을 실감하고 있었을겁니다. 

 

소련군이 주로 사용한 대전차 자주포입니다. 아래에서 3번째는 미군에게서 지원받은 M3 전차인데 소련군이 무척 싫어했던 전차입니다. 그래도 M4와 함께 결정적인 순간에 물량투입을 할 수 있었던 귀중한 전차였습니다. 


처음에 빠르게 진격하던 우리의 진격은 이제 러시아의 깊숙한 방어망을 통과하는 힘든 투쟁으로 발전했다. 좌우에서 계속 포격을 받았다. 25구축전차대 전차들이 바로 뒤에 있다는 것이 위안이 되었다.
우리는 계속 나아갔고 숲이 넓어지면서 약 2km 앞의 능선이 보였다. 방어망을 통과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능선의 앞쪽 경사면에 숨어 있던 수많은 대전차포에서 20발 이상의 포탄이 터졌다. 
우리는 엄폐하기 위해 전차를 돌렸는데, 이렇게 화력이 집중된 적은 처음이었다. 무전으로 이 사실을 보고하자 연대본부는 '위치를 사수하라, 공군을 불렀다'고 재빨리 대답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30분 후 공군이 공격한다'는 답이 돌아왔다. 
땀이 흐르고 목이 마르고 손과 얼굴은 화약 연기로 새까맣게 타 들어갔지만, 그래도 해치를 조금 열어 바람을 좀 쐴 수 있었다. 공격 중에는 해치가 닫혀 있어야 했다. 초기 타이거 모델의 전차장 해치는 유리블록으로 된 관찰창이 있는 약 20cm 높이의 큐폴라였다. 

 

타이거에 저 정도 상처를 냈다면 아마 76mm 대전차포였을겁니다. 


전차장의 머리부상이 흔했다. 그래서 해치 뚜껑을 닫은 채로 작전을 진행했지만 시야가 심각하게 방해되었다. 이후 모델에서는 지휘관 큐폴라가 오목하게 들어가 있고 잠망경으로 시야를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에 머리를 훨씬 더 잘 보호할 수 있었다. 
이제 환상적인 쇼가 시작되었다. 사이렌을 울리는 스투카의 물결이 소련군진지로 내려와 지옥을 선사했다. 짧지만 모든 것이 완전히 뒤집혔을 것이다. 무전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이 떨어졌고, 우리는 숲과 산등성이 사이의 좁은 길을 지나 완전히 전멸한 진지를 지나갔다. 최악의 상황은 피한 것 같았지만,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었다.

 

 

독일의 대형 급강하폭격기 JU87인데 워낙 유명해서 그냥 슈투카(급강하폭격기 독일)로 불렀습니다. 원래는 이렇게 폭탄을 투하하다가 아예 3.7cm 기관포로 소련군 전차를 사냥하고 다녔습니다. 

쿠르스크전투까지는 독일군이 하늘을 지배했기 때문에 맹활약을 할 수 있었지만 그 이후에는 제공권을 내주면서 더 이상 하늘을 날기 힘들어서 사라졌습니다. 

 


내 전차가 가장 왼쪽으로, 나머지 3대가 내 오른쪽으로 충분한 거리를 두고 이동했는데, 전차가 갑자기 작은 점프를 한 것처럼 강력한 충격이 가해졌다. 운전병인 지글러하사가 급정거했고 나는 큐폴라를 열고 오른쪽 궤도를 보았다. 지뢰를 밟았다. 
피해는 그리 심하지 않았다. 찢어진 궤도가 쭉 펼쳐져 있었다. 수리하는 동안 다른 지뢰를 건드리지 않도록 주변의 지뢰를 찾아야 했다. 나무 가장자리 근처에 흩어져 있었다. 8~10개의 지뢰를 발견했는데, 땅을 파지 않고 풀로 덮어 방치한 상태였다. 
연대 전차들이 앞서 나갔다. 슐츠소령이 잠시 멈춰서 몇 마디를 주고받았고, 그에게 '일단 출발하면 따라잡을 수 있도록 노력해보겠다'고 말했다. 놀랍고 기쁘게도 연대 본대에 이어 보급차량과 3중대 수리반의 1톤 반궤도 차량이 뒤따랐다. 숙련된 정비사들이 작업을 시작했고,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다시 움직일 수 있었다. 
밤새 연료와 탄약을 보충하고 오일과 라디에이터 물을 교체했다. '먼저 말, 그 다음 기수'라는 기병대의 모토가 그대로 적용되었다. 우리는 전차 뒤에서 잤다. 힘들고 짧았습니다. 

 

본문의 1톤 반궤도 차량입니다. 아래는 파괴된 것이 아니라 대대적인 수리를 하는 장면입니다. 


공격 사흘째인 7월 7일, 타이거 4대가 '깡통따개' 역할을 맡았다. 전날보다 더 어려울 것 같지 않다고 예상했는데, 이른 아침에 출발하자마자 훨씬 약한 소련 방어진지를 빠르게 돌파했다. 전진하면서 때때로 소련군 낙오병 무리를 만났지만 조직적인 저항은 없었다. 
우리는 제25보병사단에서 멀리 떨어진 역경사면에 자리를 잡았다. 전차 2대를 구덩이 뒤에 배치해서 위치를 노출시키지 않고도 관찰하고 포격할 수 있게 했다. 가장 높은 지점에서 왼쪽을 바라보니 지형이 잘 보였다. 
마침내 우리는 씻을 수 있었다. 물이 거의 없었지만 5명의 대원들은 각자 한 그릇씩을 받았다. 보통 우리는 휘발유로 손을 씻었다. 연대장이 나를 불렀고, 계곡 바닥의 숲을 정찰하라는 임무를 주었다. 밤새 그곳에서 전차소음이 들렸기 때문이다. 
2대가 산등성이에서 엄호하는 동안 나는 바이겔의 타이거와 함께 선두에 섰다. 해치폐쇄, 전투준비, 전차전진! 우리는 긴 경사면을 따라 숲을 향해 천천히 굴러 내려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계속 앞으로 나아갔고 갑자기 섬광이 번쩍였다. 순식간에 포탄이 나를 향해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초탄이 전차의 전면에 맞았고 곧바로 두번째 탄이 날아들었다. 아무것도 식별할 수 없었고 적이 숨어 있을 것 같은 곳을 향해 고포탄을 발사했다. 이번에는 오른쪽에서 또 한 발을 맞았다. 나는 출발지점으로 후진했다. 타이거 2대가 모두 약간의 피해를 입었지만 관통된 것은 없었다. 
포탄이 들어올 염려보다는 측면기어에 맞아서 구동바퀴가 작동하지 않을 염려가 더 컸다. 소련군도 그 약점을 알고 있었다. 뒤에 남겨둔 2대가 모든 것을 보고 발포했다. 숲 가장자리에 자주포 2대가 나타나는 것을 보고 포를 쏜 후에 엄폐물 뒤로 물러났다. 

저녁에 3중대 그로만상사가 우편물과 쇼카콜라 한 상자를 들고 찾아왔다. 그는 미아소에도보에서 중대와 함께 작전을 수행하고 있다고 말했는데, 공격 첫날 1중대의 잠머라트중위가 전사했다고 했다. 그는 뷘스도르프에 있는 전차훈련학교에서 장교과정을 거쳤던 동기였다. 그때까지 내게 얼마나 많은 수호천사가 있었는지 상기시켜주는 충격이었다. 
다음날 아침, 내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소련군이 숲에서 빠져나오고 있었다. 전차 3대가 엄폐물 뒤에서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사수가 조준했을 때 2대가 잠시 더 나타났다가 역시 엄폐물로 사라졌다. 명중하지 못했고, 편향을 보정하자 이번에는 명중했고, 하얀 연기가 주변을 감쌌다. 
적어도 10대의 전차가 우리를 피해 도망쳤지만, 한 대는 확실히 명중시켰고 다른 한 대는 나중에 길가에 버려졌다. 1943년 7월 11일 아침, 3중대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나는 소대원들과 함께 연대장에게 보고했다. 연대장은 '잘했다'며 '좋은 협조였다'고 말했다. 

3중대로 가는 길은 미아소에도보를 지나 아직 아군이 확실히 장악하지 않은 지역을 통과하는 길이었다. 이 불확실한 지역을 피하려면 길게 우회해야 했기 때문에 더 짧은 경로를 선택했다. 해치를 닫고 전투준비를 명령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통과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갑자기 덤불이 많은 길의 굽은 지점에서 섬광이 번쩍였다. 
전차 안이 어두워졌고 내부 조명도 꺼졌다. 나는 포신 편향판과 포탑 지붕 사이에 팔을 끼고 매달려 있었다. 바로 뒤에 있던 타이거가 고포탄을 발사해 불과 30m 전방 도로의 은폐된 구간에 설치되어 있던 대전차포를 파괴했다. 
포방패에 고포탄이 날아들었다. 상당한 충격이 있었지만 관통하지 못했다. 포탄의 힘으로 8.8cm 주포가 승강기 톱니바퀴에서 떨어졌고, 포를 쏠 때마다 30cm 정도 반동했다. 내 팔이 디플렉터와 포탑지붕 사이에 끼어 버렸다. 출혈이 심했다. 포수가 응급처치를 해주었고 다시 한 번 나의 수호천사가 구해주었다. 해치가 열려 있었다면 그대로 죽었을 것이다. 
마침내 우리 앞 하늘에서 하얀 조명탄이 솟아올랐다. 우리도 하얀 불빛으로 응답하고 제7정찰대 차량에 접근했다. 나는 셰르프소령에게 복귀보고했다.

대대군의관이 상처를 치료했다. 오른쪽 팔꿈치 아래에 손바닥만한 상처가 생겼고 뼈가 부러졌다. 하르코프 군병원에 입원했고 그렇게 성채작전이 끝났다. 소대원은 아무도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