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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2차대전

팬저 에이스 - 스탈린방어선 돌파

by uesgi2003 2023. 2. 19.

저자가 부상을 입어 본국으로 후송되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부상이유가 좀... 그렇습니다. 큰 기대하지 마세요. 

 



7월 11일 새벽, 드네프르를 건너 동쪽으로 계속 진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강으로 내려가는 길에 1시간 동안 공중전에서 7번 승리하는 것을 보았다. 공병이 설치한 드네프르강 다리를 건넜는데 중간에 러시아군 경포사격을 받았다. 정확도는 떨어졌지만 물속에서 사방으로 터지는 것은 보기 좋은 광경이 아니었다. 
곧 우리는 포와 로켓으로 황폐해진 숲에 도착했다. 대전차 장애물이 도로를 막고 있었고 도로를 벗어나면 지뢰밭이었다. 전차엔진에 문제가 생겨 너무 뜨거워졌다. 라디에이터 캡을 열면 물이 솟구쳐서 계속 물을 보충해야 했다. 오른쪽 팬이 멈춰버렸다. 
1500 시간경, 개활지에 도착했는데 대전차포 포탄이 근처에 떨아졌다. 포구가 번쩍이는 것을 볼 수 있었고 반격했지만 결과를 알 수 없었다. 전차에서 내린 비저하사는 포탄 파편에 발 부상을 입었다. 

 

1차대전 경험으로 많은 나라들이 시대착오적인 대형 방어선을 구축했는데 소련도 스탈린방어선을 10년에 걸쳐 구축했습니다. 그 이후에 스탈린방어선을 비우고, 독일과의 협정에 따라 확장된 국경으로 몰로토프Molotov방어선을 구축하다가 완성하지 못한 상태에서 독일군이 침공했습니다. 


로셔트소령이 3호전차 2대로 길을 열어주었다. 드레허가 포탄에 맞아 사망했고, 마르그라프는 가벼운 부상을 입었습니다. 정면 공격은 위험했기 때문에 3중대 대원들과 함께 우거진 덤불과 밀밭이 있는 숲으로 우회했다. 곧 러시아 대전차포를 발견하고 유탄으로 대전차포 2문을 파괴했다. 
위치를 알 수 없는 곳에서 대전차포탄이 쏟아졌고 전차 2대가 파괴되었다. 손실이 너무 커지자 무전으로 '사격 중지, 안전 확보, 후퇴'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전차들이 돌아섰고 러시아군은 우리 후방으로 포격을 계속 퍼부었다. 
도중에 드레허의 파손된 전차를 견인하려고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후방에 도착하자마자 연료를 채우고 재장전했다. 우리 전차는 너무 뜨거워서 기화기에 불이 났지만 바로 껐다. 정비를 받을 때까지 움직일 수 없었다.

 

개전초기에 마치 누워서 떡먹듯이 아주 가볍게 소련군을 격파한 것처럼 오해하기 쉬운데 독일군의 피해도 무척 컸습니다. 

다음날 아침 1000시간이 지날 무렵, 러시아군이 우리 진지로 진격하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움직일 수 있는 모든 전차가 초원으로 출동했고, 전력을 다해 포탄을 퍼부었다. 러시아포병은 우리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고 있어서, 전차 아래로 피신해야 했다. 
파도처럼 밀려드는 러시아군때문에 상황은 매우 위험해 보였다. 탄약이 부족해지기 시작했고, 포탄이 근처에 떨어지기 시작하면 진흙탕에 누워있거나 주저앉은 전차에서 탄약을 옮겨야 했다. 오후가 되어서야 수리에 들어갔다. 
저녁 무렵 2중대 라크폴소령이 전사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의 전차가 지뢰를 밟아 주저 앉았고 러시아군의 손에 떨어졌다고 한다. 3중대의 왈로프스키는 전차에 접근한 러시아군에게 부상을 당했다. 동이 트자 우리는 조금 후퇴했다. 8.8cm 2문이 도착했고 명중률이 매우 높았다. 정오가 되자 한숨을 돌렸고 전차부대는 전열을 정비한 후 프로포이스크로 향했다. 이전과 같이 먼지와 힘겨운 사투를 벌였다. 

 

독일이 더 일찍 앞당겨 침공했더라면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의 진흙장군에게 붙잡혀 속도를 내지 못하고 오히려 소련군에게 귀중한 시간을 벌어주었을겁니다.  봄에 눈과 얼음이 녹으면서, 가을에는 장마로 전지역이 진흙밭으로 변했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꺼내야 하는데, 노획한 T-26도 동원했군요. 

 


1600시간이 다 되어갈 무렵 전투준비 명령이 내려졌다. 야전취사장에서 따뜻한 음식을 가져왔다. 소련 전투기들은 공격하지 않고 우리 상공을 선회했다. 완전히 어두워지자 공격은 중단되었다. 우리는 울창한 숲 속으로 들어갔는데 러시아군이 전차에 접근해 화염병을 던질 수 있기 때문에 주의했다. 
우리는 0130시에 출발했다. 숲을 빠져나오자마자 오른쪽에서 불타는 독일군 장갑정찰차가 보였다. 러시아군은 근처 어딘가에서 105밀리포 1문으로 포격하고 있었다. 근처에 있던 집이 불타고 있었고, 그 불빛이 모든 것을 유령 같이 비추고 있었다. 해치를 단단히 닫고 가속페달을 밟아 위험지역을 가로질렀다. 
포탄이 근처에 터질 때마다 파편이 장갑에 부딪히는 것이 보였다. 그래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

야포 위치를 찾을 수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적군이 점령하고 있는 마을에 도착했다. 집집마다 사격을 받았지만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다. 포탑 주변에서 소총탄이 휘파람을 불었다. 정찰소대의 오토바이병은 아무런 보호 장치도 없이 고개를 숙이고 전차 옆에 최대한 가까이 붙어 있었다. 
그들은 나중에 끔찍한 손실을 입었다. 우리가 마을로 들어서자 동쪽에서 동이 트기 시작했다. 먼저 전선 절단기로 전화선을 끊었다. 그런 다음 우리 중대는 가장 중요한 지점을 확보하기 위해 마을 전체로 흩어졌다. 러시아군은 후퇴하는 동안 모든 것에 불을 질렀다. 
다른 전차는 한 집에서 20명의 러시아군을 포로로 잡았다. 0800시가 되자 우리는 다시 마을에 집결했다. 멘델레츠하사관의 전차가 철거된 다리를 지나던 중 지뢰를 밟았는데 아무도 다치지는 않았지만 뒤쪽 구동바퀴가 망가졌다. 
건물이 모두 목조였기 때문에 사방이 불타기 시작했다. 중대는 이제 공격에 대비해 마을을 확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우리 앞에 감자밭이 있었고 러시아군은 전방 200m 지점에 대전차호를 파놓았다. 
갑자기 감자밭 너머로 머리 하나가 보였다. 나는 고폭탄을 발사했고 보병부대가 와서 수류탄과 권총으로 모든 참호를 차례로 청소했다. 그런데 갑자기 이전에 발견되지 않은 큰 참호에서 15 명의 병사가 튀어나왔다. 기관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져 정치위원을 죽였더니 모두 손들고 투항했다. 

 

개전 초기 소련군 대부분은 싸울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쉽게 투항했는데, 독일의 광적인 인종차별로 동물 이하의 취급을 받았고 그런 소식이 퍼지면서 소련군은 항복대신에 철저한 저항을 선택했습니다. 

 

 

소련군 포로들을 먹이기 위한 식량입니다. 이런데도 무슨 동물이하 취급? 

저것이 밀가루가 아니라 나무를 잘게 갈은 목분Wood Flour입니다. 나뭇가루를 먹인 것입니다. 

그것도 하루에 겨우 140g만 주었습니다. 

 

유대인이 아니라 소련군 포로입니다. 330만명의 포로 중에 220만명이 죽었다고 하니... 나머지도 강제노동수용소에서 학대를 받았습니다. 독일이 처음부터 대규모 포로수용계획을 세우고 사람대접을 해주었다면 동부전선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겁니다. 

소련국민은 수백년동안 온갖 고난을 버티고 버텨왔기 때문에 독일을 상대로도 초인적인 저항을 하기 시작합니다. 

주변을 밝히기 위해 포탄을 쏘아 집에 불을 지르던 중에, 중대장 전차의 포신에서 포탄이 터졌다. 중대장이 우리전차로 옮겨 탔다. 지난 몇 주 동안 전투를 치르면서 계속 고장이 났고 이제 3호전차 5대만 남았다. 저질 러시아휘발류와 장거리 운행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우리는 불타버린 프로포이스크의 잔해 사이를 지나 다른 중대와 함께 높은 옥수수 밭에서 러시아군의 공격에 대비했다. 전차 밖에서나 안에서나 무기를 청소하는 등 할 일이 많았고, 오랜 시간이 걸렸다. 오른쪽 팬이 안돌아가서 며칠 전과 같은 수리를 했다. 
다음날 1500시가 되자 '준비하라'는 명령이 떨어졌고 조금 후 아브테일룽은 출발해 프로포이스크 너머에 있는 세 개의 큰 다리를 건넜다. 우리 사단병력이 쉬지 않고 지나갔다. 특히 중포가 많았는데 모스크바 포격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후에 개전 후 처음으로 근처 물에서 목욕을 했다. 먼지, 오물, 기름, 화약 연기로 검게 그을려 있었다. 온몸은 회색빛이었고 모공은 검게 그을렸다. 머리카락과 수염에는 먼지가 들러붙었다.
다음 날 내내 보고할 것이 없었다. 이발사가 이발을 하러 왔고 재단사와 구두수선공도 우리를 방문했다. 둘 다 기진맥진했다. 

그날 세 번의 공격에 투입되었던 우리 중대는 뒤늦게 기갑돌격배지를 받았다. 저녁 무렵 며칠 동안의 휴가가 취소되고 전투준비 명령이 떨어졌다. 러시아군이 후방의 롤반을 탈환하고 그 위에 진을 치고 있던 기갑척탄병부대를 포위했다. 1900시에 3중대를 선두로 이동했다. 
체르니코프 너머로 러시아군이 감시하고 있는 다리를 건넜고, 그 다리에 도착할 때마다 포탄이 근처에서 폭발했다. 다리는 여러 번 포격을 받았지만 곧바로 수리되었다. 그날 저녁 10시 무렵 선두전차가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접근해 구원했다. 
기갑척탄병부대는 도로에 지뢰를 매설했다가 곧바로 파냈다. 

 

25회 이상의 전차돌격작전에 투입되었던 병사는 이런 전차돌격배지를 받았습니다. 보병과 공군도 마찬가지로 배지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후퇴하는 러시아군을 바짝 추격하며 속도를 높였다. 너무 더워서 측면해치를 열어 두고 운전했다. 로슬라블 외곽에 있던 목조다리가 빠르게 달리는 전차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고 우리는 다리 아래로 떨어졌다. 사소한 사고였지만 떨어지는 대들보에 왼손 손가락 세 개가 부러졌다. 
응급처치를 받고 중상자들과 함께 흔들리는 야전구급차를 타고 100km가 넘는 거리를 떨어진 기차역으로 이송되었다. 탄약과 연료를 내려 놓은 기차는 부상자를 싣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3호전차가 아무리 가볍다고 해도 23톤이었고 소련의 나무다리를 건너면서 사고가 많았습니다.

두번째 사진은 독일군에게 더 없이 귀중한 전력이 되어준, 소련의 KV1 중전차인데 45톤이니 제대로 만든 교량도 무너지기 쉬웠죠. 당시 독일군전차로는 상대할 수 없어서 공군이나 88mm를 불러야했습니다. 

 

비교적 가벼운 부상으로 후송되는 저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