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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로마

로마의 마지막 위대한 황제, 트라야뉴스

by uesgi2003 2012. 9. 10.

 

지금쯤이면 표트르 대제와 예카트리나 여제에 대한 원서를 번역하고 있어야 하는데, 출판업 등록이 예상보다 지연되어서 블로그에 전사 이야기 한 두 편은 더 올릴 수 있겠습니다.

출판업 등록은 지자체에 신고만 하면 되는데, 사무실이 있는 건물의 용도가 발목을 잡을 수 있습니다. 건물의 용도가 딴 용도일 경우 지자체에서 반려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루 빨리 진행해서 여러분에게 표트르라는 역사상 최고의 지도자를 보여드리고 싶은데, 좀 더 기다려야겠습니다.

뭐... 라이센스 계약이 진행되어도 원서가 9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내용이어서 번역하는 시간도 상당히 걸리겠습니다만...

퓰리처상까지 탔던 책이고 주인공의 인생이 워낙 드라마틱해서 책의 품질은 장담합니다.

 

오늘 이야기는 고대 이야기를 더 올려달라는 요청이 있어서, 로마 이야기는 제가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한 편 더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의 마지막 위대한 황제, 트라야누스(Trajanus)

 

로마제국이 전사에서 가지는 명성을 생각하면, 정작 황제들은 전쟁을 반기지 않았다는 사실을 간과하기 쉽다. 에드워드 기본(Edward Gibbon)은 로마제국의 멸망(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에서, 황제들은 즐거움만을 추구했고 폭정을 일삼았으며 군대 근처에는 가지도 않았다고 했다. 로마가 영국을 점령한 것은 극히 예외적인 일이었다.

영국 원정을 한 플라비우스 도미티안(Flavius Domitian, 81~96년 동안 로마를 통치한 황제)도 선왕들의 업적에 비해 초라했던지 아니면 들어간 엄청난 자금에 비해 얻은 것이 거의 없었던 탓인지 모르겠지만 더 이상의 원정을 하지 않았을 정도였다.

그러나 당시 황제들로서는 특이하게도 원정으로 명성을 높이려고 한 황제가 한 명이 있었다. 최초로 외국(스페인지역)에서 태어나 황제가 된 마르쿠스 울피우스 트라야누스(Marcus Ulpius Trajanus)는 아버지가 66-73년의 유대전쟁에서 그랬던 것처럼 1개 군단 지휘관 정도만 꿈꿨을 것이다.

 

그림 설명: 13대 황제 트라야누스 시절의 방대한 로마제국의 영토입니다. IE에서 설명과 제대로 연결되고 클릭하면 상당히 커집니다.

 

왕좌에 오른다는 것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던 그가 로마 역사상 가장 위대한 원정인 다키아 원정에 나섰고 그의 치하에서 로마는 최고의 절정을 맞이했다.

 

아우구스투스(Augustus, 로마 공화정에서 제국으로 변한 뒤 기원전 27~기원후 14년 간 로마를 통치한 초대황제. 로마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황제) 황제는 로마의 국경을 라인강과 다뉴브강으로 한정했었다. 2,200km 길이의 국경은 로마 군단이 상주하며 요새화되었다. 다뉴브강 너머에는 마르코만니(Marcomanni)족, 콰디(Quadi)족 그리고 다키아(Dacia)족이 살고 있었다. 야만족들은 서로 반목하고 있었고 당시 막강한 로마군대에 눌려 국경 안으로 들어오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기원후 75년 이후 데케발루스(Decebalus)라는 왕이 다키아족 통일에 나섰다. 

98년 트라야누스가 황제에 올랐는데 전통에 따르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멀리 세비야 지방의 스페인 혈통출신으로 황제에 오를 수 있는 귀족 혈통이 아니었다. 그가 황제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양부모인 네르바(Nerva) 황제의 현명한 결정덕분이었다. 대부분 이민족으로 구성된 병사들이 원하는 트라야누스를 선택해서 내전을 피할 수 있었다. 

 

100년 경, 다키아는 파르티아(Parthia, 중동과 중앙아시아의 제국, 크라수스가 패배한 카레 전투는 로마가 당한 두 번째로 큰 참패로 기록)왕국과 함께 로마의 가장 큰 위협거리로 떠올랐다. 데케발루스의 용 깃발 아래, 다키아족은 영토를 확장해나갔고 로마군에 공공연히 대항했다. 다키아족과 맺었던 협정이 소용없게 되자, 트라야누스는 다뉴브 국경 근처에서 상황을 직접 확인했다. 원정을 나서기에는 도로와 다리가 부족하고, 다케발루스의 중기병이 국경 안으로 언제라도 급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겨울이 되면 로마의 통신체계가 완전히 마비될 수 있다는 것도 발견했다. 

군사작전 경험이 풍부한 트라야누스는 두 곳의 도강지점을 정했는데 한 곳은 티비스쿠스강이고 다른 한 곳은 다뉴브강이었다. 두 도강지점 간에는 20km 정도의 도로를 파서 통신과 보급이 원활하게 이루어지게 했다. 그리고 건축가 아폴로도루스(Apolodorus)에게 드로베타에(폰투스) 다리를 건설하게 했는데 이 다리는 당대 최고의 공학건축물로 꼽히고 있다. 트라야누스는 줄리우스 카이사르(Caesar)가 라인강에 놓았던 다리를 본 딴 것으로 군사목적으로도 대단했지만 로마의 위력을 주변 야만족에게 알리는 효과도 있었다.

 

101년 5월까지, 트라야누스는 90,000명이 넘는 병력을 모았고, 그 중에는 제국전체에서 특별히 선발한 군단을 포함해 7개 군단이 전력의 핵을 이루었다. 그리고 로마 근위대, 24개 경기병대(Cohort, 군단-Legion은 10개 Cohort로 구성, 아래 단위는 백인대-Century)와 70개 경보병대가 원정에 참가했다. 데케발루스의 야만인 부대의 기동력을 따라집기 위해 현지 야만인 용병부대도 모집한 후에 로마장교에게 지휘를 맡겼다. 지원병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거의 대부분 징집해야했다. 

 

그림 설명: 로마의 5대 현제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트라야누스입니다. 로마에 대한 이야기는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를 참조하시면 됩니다. 시오노 나나미는 역사학자가 아니어서 지극히 로마의 관점에서 단정적으로 결론을 내리는 한계는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트라야누스는 다키아 전쟁일지를 썼지만 안타깝게도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의 원정에 대한 가장 자세한 내용은 로마에 있는 트라야누스 기둥에 기록되어 있다. 건축가 아폴로도루스가 그의 업적을 기려 113년에 세운 것으로 3m 가까운 높이에 18m 길이의 기록이 새겨져있다. 에드워드 루시-스미스는 '많은 사건들이 아주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현장 스케치를 복원한 것이 분명하다. 성공적인 원정을 예상하고 개선행진에 사용하기 위해 스케치한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그림 설명: 트라냐우스 기둥의 일부로 로마 병사들이 다리를 건설하고 있습니다. 죽인 다키아 전사의 목이 효수되어 있습니다. 클릭하면 상당히 커집니다.

 

두 곳에서 도강한 후의 전진은 순조로웠다. 남아있는 기록에 따르면 로마군을 본 다케발루스는 안쪽으로 후퇴했고 로마의 기병정찰대가 바로 그 뒤를 추격했다. 다케발루스는 퇴각하는 지역을 모두 불지르는 초토화작전을 선택했고 다키아 정찰대만이 산 위에 모습을 보이는 정도였다. 로마군은 초반의 성공에 자만하지 않고 엄격한 군율에 따라 전진했고 로마인 특유의 도로, 다리, 숙영지 건설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비스트라(Bistra) 강의 티비스쿰(Tibiscum)에서 트라야누스는 북쪽 부대를 멈추고 남쪽 부대와 연결시킨 후에 사르미제게투사(Sarmizegethusa)로 향하는 길목인 아이언 게이트(Iron Gate)협로로 향했다. 타파에(Tapae)의 비스트라 계곡에서 양쪽이 처음으로 격전을 벌였는데, 다케발루스는 이미 88년에 로마 원정대에 패배를 당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이 지역을 요새로 만들어두었다. 

 

그림 설명: 로마군에 맞서는 다키아 전사들입니다. 저런 무기를 사용했었군요. 그림은 클릭하면 커집니다.

 

트라야누스는 보조부대를 언덕 위로 올려보냈고 다키아군은 낫과 같은 무기를 휘두르며 저항했다. 우거진 숲때문에 전황을 알지 못해 염려하는 트라야누스의 눈 앞에 다키아족의 잘린 머리를 들고 환호하는 보조병들이 보였다. 그러나 나머지 다키아 병사들은 필사적으로 버티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천둥번개와 함께 폭우가 쏟아지며 다키아군은 기사회생했다. 미끄러워진 언덕에서 병사들의 피해가 늘어나자 트라야누스는 병사들을 불러들였다. 황제가 자신의 망토를 잘라 병사들의 상처를 동여맸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만큼 황제가 최전선 가까이에 있었다는 뜻이며 다른 위대한 지휘관처럼 부하들을 걱정했다는 것이다. 

 

두 번째 전투에서 로마군은 다키아군을 밀어냈지만 결정타를 날리지는 못했다. 트라야누스의 기둥은 사상자를 챙기며 질서정연하게 후퇴하는 다키군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트라야누스는 이제 다키아 영토에 교두보를 마련하게 되었다. 겨울이 가까워지면서 로마군은 다뉴브강의 숙영지로 돌아가기 전에 점령한 교두보의 방어를 강화했다.

다케발루스는 로마군을 영토에서 몰아내기 위해 반격에 나섰다. 궁수와 발리스타로 중무장한 서쪽의 로마요새를 공격하지 않고 다뉴브강을 건너 모에시아(Moesia) 남부를 기병대로 습격하기로 했다.

 

트라야누스는 멀리있었기 때문에 현장에 가려면 배를 타야만 했다. 그 동안 다케발루스는 로마군 고위장교를 죽이며 기세를 높였고 트라야누스는 도착하자 마자 말을 몰아 다키아군을 몰아냈다. 그리고 트라야누스는 야영지를 건설한 후에 직접 다뉴브강을 건너 다키아족의 마을에 보복공격을 가했다.

트라야누스 기둥에서는 달의 여신 셀린느(Selene)가 천에 가려진 모습으로 기록되어 있어서 야간행군과 전투가 힘들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또 다른 장면은 두 마리의 당나귀가 발리스타를 끌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겨울에 거친 지역을 중화기를 가지고 통과하는 것은 상당한 고역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음 장면에서는 첫 번째 다키아 포로가 항복하고 있어서 중화기가 적절하게 사용된 것을 알려준다. 곳곳에서 로마군의 중화기가 사용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데케발루스가 101-102년에 펼친 겨울작전은 로마군에게 큰 피해를 주기는 했어도 결정적인 승리를 이끌어내지는 못했다. 트라야누스는 다키아에서 후퇴하지 않고 오히려 다키아군을 섬멸하기 위한 봄 작전 준비에 들어갔다.

 

그림 설명: 데케발루스는 루마니아의 위대한 역사이기 때문에 다뉴브 강변에 55m 높이로 암벽조각되어 있습니다. 그림은 클릭하면 커집니다.

 

102년, 서쪽 측면의 안전을 확보한 후에 다뉴브강을 건넜다. 다케발루스는 평화협상을 원했지만 트라야누스는 사절조차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케발루스가 계속 간청하자 참모장인 리시니우스 수라를 보내 무조건 항복을 제시했고 다케발루스는 전쟁을 선택했다.

로마군은 별다른 전투없이 트란실바니아 알프스 근처의 세도니아에(Cedoniae)까지 전진했다. 데케발루스는 17년 전에 로마군 근위대를 매복공격했던 것처럼 로마군을 계속 유인했다. 기둥의 한 장면은 군단병력이 도강하고 있는 동안에 황제가 장교들과 함께 도강지점에 따로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기 때문에 다케발루스는 기습공격할 기회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데케발루스의 수도는 매우 거친 지역을 지나 세도니아에의 서쪽 방향에 있었다. 트라야누스는 가장 방어가 취약한 북쪽에서 사르미제게투사로 전진하기로 했다. 황제는 원정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 다가오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군단 진영 안에서 의식을 지낸 후에 전투준비를 시켰다. 그의 연설은 전해지지 않고 있지만, 다키아족의 침입에 복수하고, 군단과 황제의 명예를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을 강조하는 연설이었을 것이다.

산 속에 있는 요새를 공격하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로마군은 하나씩 점령해나갔다. 그리고 스키피오가 누만티아(Numantia)에서, 케이사르가 알레시아(Alesia)에서 했던 것과 같이 주변을 방책으로 둘러 포위하는 고전적인 전술을 사용했다. 다키아 성채 주변을 벽, 탑, 도랑과 함정을 두르고 어떤 식량이나 지원군도 들어가지 못하게 봉쇄했다. 봉쇄와 로마군의 거북이 전술(방패로 둘러치고 접근하는 전술)에 다키아 요새들은 무너졌고 수도 포위망은 완성되었다.

 

그림 설명: 다키아는 현재의 루마니아 지역으로 로마가 멀리도 원정에 나섰군요. 알렉산더나 징기스칸의 원정과 비교하는 전사 초보자 분들이 있을텐데, 그들이 그렇게 멀리 신속하게 원정할 수 있었던 것은 말그대로 군사원정이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징기스칸의 경우에는 뒤에 아무 것도 남겨두지 않는 약탈원정이었고, 로마는 원정로의 모든 곳에 도로와 다리를 건설하고 새로 도시를 건설하며 대로마 연맹을 만들어가는 원정이었기 때문에 당시의 국력에 비해 원정이 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역사의 시간으로 보면 몽골은 그 자취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남은 것이 없는 반면에 로마는 가장 오래 존재하며 심지어 지금까지도 그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붉은 원이 다키아의 수도입니다.

 

데케발루스는 무릎을 꿇고 자신이 있어야 다키아에서 황금이 생산되고 부족들의 분쟁을 막을 수 있다고 간청한 끝에 속국의 왕으로 남을 수 있었다. 로마는 다키아 수도와 주요 요새에 군대를 배치하고 다른 요새들은 허물었다.

그러나 기둥의 기록을 보면, 다키아족이 서로 속삭이며 반란을 모색하는 장면이 나온다. 102년, 트라야누스는 로마로 돌아가 승리를 축하하고 '다키우스(Dacius)'라는 성을 붙였다.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105년 겨울, 다케발루스가 군대를 모으고 현지에 주둔한 로마군을 공격했다. 트라야누스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바로 행동에 옮겼다. 황제는 아드리아 해를 건너 그리스의 도시를 발판삼아 전진했다.

모든 로마 요새가 함락되었고 황제의 친구인 론기누스(Longinus)가 적의 함정에 빠져 포로로 잡혔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트라야누스에게 부담을 주기 싫었던 론기누스는 명예를 선택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데케발루스는 로마 지원군이 오기 전에 드로베타에(Drobetae)의 다리를 끊기 위해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다. 드로베타에의 로마군 요새는 거의 모두 함락되고 겨우 마지막 참호를 사이에 두고 공병부대가 버티고 있던 위기의 순간에 황제가 가병대를 이끌고 도착했다. 

 

106년 봄, 로마군은 이전과 같이 두 개의 대열로 나누어 다뉴브강을 건너 전진했다. 트라야누스가 맡은 한 대열은 올트(Olt) 계곡으로 통과해 전진했고 다른 대열은 서쪽에서 다키아 수도를 향해 전진했다. 사르미제게투아를 포위한 후에 보조부대가 위장공격하는 동안 군단병사들이 사다리를 이용해서 성벽을 넘어갔다. 기둥은 이 전투에 대해, 몇 명의 지휘관급 다키아 전사가 쓰러져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어서 다키아군의 절망적인 상황이었음을 알 수 있다.

멀리 지평선에 또다른 로마군을 본 데케발루스는 모든 것을 끝났음을 알았다. 로마군이 성벽을 뚫고 들어오자, 다키아 병사들이 항복하거나 스스로 건물에 불을 질러댔다. 다키아군은 온 힘을 다해 저항했지만 결국 106년 가을에 사르미제게투아가 함락되었다.

 

늙은 여우가 다 된 데케발루스는 카파치아 산맥 안으로 도망쳤고 일부 다키아군이 로마군이 지나간 몇몇 곳을 탈환하기도 했지만 데케발루스 편에 섰던 족장들이 하나씩 등을 돌리기 시작했고 병력은 하루가 다르게 줄어들어갔다.

데케발루스는 수도가 함락되기 전에 많은 황금과 보석을 사르게티아(Sargetia) 강 속에 숨겨두었었는데 이런 비밀은 오래 갈 수 없었다. 동료는 데케발루스를 배반하고 로마군에게 황금의 위치를 알렸고 다케발루스에게 마지막 결정타가 되었다.

 

그림 설명: 루마니아 영화 Dacii에서의 데케발루스입니다.

 

트라야누스는 데케발루스를 잡아야 다키아족을 굴복시킬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기병대에게 끝까지 추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명령을 받은 기병대 중에, 특히 클라우디우스 막시무스라는 고참 정찰병이 데케발루스를 지옥의 화신처럼 추격했다.

데케발루스의 전쟁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음식도 떨어지고 밤만 되면 병사들이 도망을 쳤고 말도 이제는 더 이상 달리지 않았다. 탈영병에게서 데케발루스의 위치를 캐낸 로마 정찰대는 2일 거리에서 하루 거리까지 좁혀들어갔다. 로마 기병대를 본 데케발루스는 단검을 꺼내 자신의 목을 찔렀다. 역사가 기록하듯이 '수도에서 몰려나 죽을 수 밖에 없었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용감했던 왕'이었다.

막시무스는 데케발루스의 목을 잘라 황제에게 바쳤다.

 

다키아 원정은 이제 거의 완성단계였다. 트라야누스는 보조부대를 북쪽으로 보내 저항을 계속 하는 부족을 정리했고 사방에서 포로가 밀려 들어왔다. 나포카(Napoca)에서 다키아의 마지막 부족이 항복했다.

트라야누스는 다키아 원정에서 자신이 꿈꾸던 명성을 얻었다. 역사가들이 그에게 찬사를 보냈지만 트라야누스로 로마의 위대한 황제는 더 이상 없다는 것은 몰랐다. 다키아 원정은 로마식으로 무장하고 훈련된 야만부족 덕분에 완수될 수 있었고 로마는 이미 이전과 같은 압도적인 전투력의 로마군단을 만들거나 새로운 군사기술을 창조할 능력을 잃고 있었다.

 

기둥의 마지막 장면은, 수염을 기른 베레랑 병사가 황제에게 정착할 땅을 받은 후에 어깨에 아이를 올리고 돌아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다키아 왕국이 함락되면서 다키아 언어와 문화도 단절되었다. 50,000명 이상의 다키아 부족민이 노예로 끌려갔고 젊은 전사들은 검투사로 로마의 환락을 위해 희생되었다.

인종대학살이나 청소와 같은 인위적인 통치는 없었지만 로마의 우월한 문화가 유입되면서 다키아 자체의 정체성은 사라졌고 로마의 영향력이 사라진 후에는 소 아시아 또는 시리아의 식민지가 되었다.

 

트라야누스는 알렉산더 대왕을 꿈꾸며 메소포타미아 사막까지 군사원정에 나섰지만 큰 의미가 없었다. 그의 후계자인 하드리안(Hadrian)은 제위에 오르자 마자 메소포타미아 영토를 포기했고, 트라야누스가 다키아에 건설한 다리만이 그 때의 명성을 전해주고 있다.

 

지난 이야기에서 소개했던 로마의 다키아 원정 영화입니다. 45년 전에 만들어진 영화치고는 괜찮은 편입니다. 소리 높여 보시기 바랍니다.


전투장면은 25분부터 보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