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고대/로마

한니발, 알프스를 넘어 로마의 성문 앞으로 (1부)

by uesgi2003 2013. 8. 16.


원래는 스페인의 전성기를 알린 파비안 전투를 정리할 차례인데, 그냥 손에 잡히는 대로 한니발의 알프스 등산기로 정했습니다. 제 블로그에서는 이미 한글 자료가 많은 이야기는 피하고 있는데, 그러다가는 인기없는, 잊혀진 블로그가 될까봐 가끔씩 유명한 이야기도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저도 다시 배우는 계기가 됩니다. 


이번 이야기는 기원전 218년,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84,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베리아를 떠난 한니발 바르카가 주인공입니다. 

로마 중심의 세계사를 배울 때에는 한니발이 잔인한 야만족으로만 알았었는데, 전사를 제대로 공부하고 부터는 시각이 완전히 바뀌었죠. 조국 카르타고의 지원만 제대로 받았다면 로마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을, 비운의 명장 그리고 세계 최고의 명장입니다. 


이번 이야기는 모두 기원전 이야기입니다. 별도의 표시가 없더라도 기원전 년도입니다. 


(수정 중에 다음 서버에 저장이 안되어서 두 번이나 날아갔습니다. 같은 부분을 3번째 정리해야 하는군요.)


알프스를 넘어 로마의 성문 앞으로 


다양한 민족과 문화가 뒤섞인 대군이 에브로강을 건너, 스페인 북부로 들어설 참이었다. 병력이 이민족으로 잡다하게 구성되었지만, 20년 동안 계속된 전쟁을 겪은 역전의 용사들이었다. 그리고 빠른 진군속도와 강력한 전력이 특징이었고 무엇보다도 카르타고의 한니발의 명령만 따랐다. 누미디아 출신의 날렵한 경기병은 적대세력의 정찰병을 멀리 내쫓아서 본대의 움직임을 노출시키지 않았다. 

한니발의 원정군은 몇 km에 걸쳐서 강을 건너고 있었다. 이베리아 기병과 보병. 어릴 때부터 투석전(Sling)으로 유명한 발레아릭 제도 용병, 북아프리카 부족의 궁수와 투창병. 마치 이동식 감시탑이 움직이는 것처럼 육중한 코끼리. 베테랑 리비아 창병 등 80,000명이 넘는 숫자였다. 


카르타고의 한니발 바르카는 결정적인 순간에 대군을 이끌고 에브로 강변에 도착했다. 10년 전, 로마 의회는 카르타고에게 그 강을 건너오지 말 것을 명령했지만, 한니발은 로마의 경고를 무시하는 것만큼 기분좋은 일이 없었다. 젊은 장군은 더 나아가 피레네 산맥을 건너고 골족의 영토를 관통한 후에 알프스 산맥까지 넘어서 이탈리아로 들어갈 생각이었다. 

로마는 나중에, 한니발의 아버지인 하밀카르 바르카가 로마 침공계획을 아들에게 물려주었다고 믿었다. 마찬가지로 명장이었던 아버지는 1차 포에니 전쟁의 마지막 7년 동안 시실리 서쪽에서 게릴라전으로 로마군을 괴롭혔었다. 육지에서는 패배를 몰랐던 그도 해전에서 패배해 배후가 끊기자 기원전 241년에 시실리를 넘겨줄 수 밖에 없었다. 


1차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이는 카르타고군입니다. 원래 카르타고는 해상강국이었지만 해전에서도 결국에는 패전하고 지중해를 내주게 됩니다. 큰 그림으로 감상하세요. 


그러나 또 다른 전쟁이 기다리고 있었다. 용병의 반란에 직면한 하밀카르는 238년에 용병군을 격파했지만 그 기회를 노린 로마는 사르디니아와 코르시카를 합병했다. 

로마의 비겁한 행위에 격분한 하밀카르는 로마가 무사하게 있는 한은 평화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각오를 했다. 


반란군을 진압한 하밀카르는 이베리아 원정군을 꾸려 시실리와 사르디니아 상실을 복구할 생각이었다. 그는 카르타고를 떠나기 전에 9살 먹은 한니발을 사원으로 데려가 "절대로 로마의 친구가 되지 않는다"라는 맹세를 하게 만든 후에 9년 동안 이베리아 반도의 식민지를 경영하다가 기원전 229년에 목숨을 잃었다. 


1~2차 포에니 전쟁 당시의 로마와 카르타고 세력입니다. 하밀카르의 이베리아 식민지를 스페인 남부 지역이었습니다. 아들 한니발이 2차 포에니 전쟁을 벌이기 전에 거의 절반을 경영해서 포에니 전쟁의 자원창고로 활용했습니다.

큰 그림으로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이베리아 식민지는 사위 하스드루발에게 일임되었다. 그러나 그는 228년에 무장을 한 채로는 에브로강을 건너지 않겠다는 서약을 할 수 밖에 없었다. 

하스드루발은 221년에 자객에게 암살될 때까지 8년 동안 이베리아 식민지를 확장했다. 카르타고군은 겨우 25살 밖에 안 된 한니발을 새 지휘관으로 추대했다. 그리고 아버지의 원대한 계획은 한니발과 두 동생인 하스드루발(동명이인)과 마고에게 이어졌다. 


한니발은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다. 2년간의 고전 끝에 이베리아 남부 식민지를 다졌고 베테랑 병사를 양성했다. 로마와 동맹관계인 사군툼과의 분쟁은 전쟁을 일으킬 좋은 구실이 되었다. 그는 8개월 동안 공격해 함락시켰고 로마는 외교관을 카르타고로 보내 사군툼 반환과 한니발 인도를 요구했다.

전쟁을 각오하고 있던 카르타고는 로마의 선전포고를 기다렸다는 듯이 받아들이면서 2차 포에니전쟁 또는 한니발 전쟁이 벌어졌다. 


한니발은 군대를 겨울 숙영지로 보냈고 이베리아 병사(그림 참조)는 마지막으로 고향을 들를 수 있게 휴가를 보냈다. 첩자와 사절단을 미리 보내 진격로를 파악하고 원주민의 협조를 이끌어냈다. 특히 포강 계곡의 보이와 인수브레스 부족의 협조가 반드시 필요했는데, 다행스럽게도 로마와의 분쟁 끝에 복종한 두 켈트 부족은 복수를 바라고 있었다. 한니발은 두 부족에게서 이탈리아 북부의 본거지와 병력을 지원받을 수 있었다.

 

그는 복수전을 위해 3개 군을 동원했다. 먼저 로마의 침략이 예상되는 이베리아에 아프리카 징집병을 불러들였고 반대로 아프리카에는 13,850명의 보병, 1,200명의 기별과 870명의 발레아리 투석병을 파견했다.

100척의 전함이 지키는 조국 카르타고에는 4,000명의 병력을 주둔시켰고 자신이 자리를 비우는 이베리아는 동생 하스드루발에게 맡겼다. 그리고 11,850명의 리비아 창병과 450명의 중기병, 500명의 발레아리 투석병, 1,800명의 누미디아 경기병, 300명의 이베이라 기병, 300명의 리구리아(이탈리아 북서쪽) 보병, 21마리의 전투코끼리와 57척의 전함도 떼어주었다.

 

한니발이 보유한 병력은 총 90,000명의 보병과 12,000명의 기병으로 알려져 있지만 여기에는 하스드루발의 병력도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한니발의 군대는 75,000명의 보병과 9,000명의 기병으로 분석된다.

한니발은 신 카르타고(스페인, 카르타헤나)5월 말에 떠나 550km 떨어진 에브로스강에는 6월 말에 도착했다. 물론 그 중간은 미리 손을 써둔 덕분에 일체의 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막내동생 마고, 부사령관 마하르발, 병참장군 하스드루발(또 다른 동명이인), 보밀카르의 아들 한노를 동반했다. 이 지휘관팀은 역사상 가장 유능한 팀으로 남게 된다. 


두 세대 전에 세웠던 바르시드(Barcid, 카르타고 공격) 침략계획 때와 달리, 로마는 사군툼이 함락된 후에야 급하게 전쟁계획을 수립했다. 로마는 64,000명이 보병과 6,200명의 기병을 급하게 동원했다. 원로원은 카르타고에 대해 이중전선을 펼치기로 했다. 두 명의 집정관을 선출해서 각 전선을 맡기기로 했다 (로마군은 집정권을 매년 새로 선출해서 군대를 맡겼습니다.)

부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Publius Cornelius Scipio)에게는 2개 군단(각 4,000명의 보병과 300명의 기병)과 14,000명의 이탈리아 동맹보병, 16,00명의 기병과 60척의 전함이 주어 이베리아의 한니발을 상대하게 했다. 원로원은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론구스(Tiberius Sempronius Longus)에게 2개 군단, 16,000명의 동맹보병, 1,800명의 기병과 172척의 전함을 주어 카르타고에 상륙시킬 계획이었다. 반란의 기미를 보이고 있는 켈트 부족으로는 2개 군단, 10,000명의 동맹보병과 1,000명의 기병을 보냈다. 


한니발이 에브로강(그림 참조. 그림의 장면은 론강 도강. 굉장히 커집니다)을 건널 때에는, 카르타고와 로마가 이미 전쟁을 벌이고 있어서 조약위반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한니발은 이베리아 북부를 점령하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격전 끝에 4개 주요 부족이 항복을 했다. 해안도시는 공격하지 않고 그대로 통과했는데 겨울이 오기 전에 알프스를 넘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로마군을 이베리아 북부에서 만날 것으로 기대했었지만 늦여름까지도 로마군은 단 한 명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한니발은 8월에 피레네스 산맥을 통과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새로 합병한 지역에 11,000명의 병력을 남겨두었고 피레네 산맥에 도착하자 다시 조국을 떠나고 싶어하지 않는 이베리아 병사 11,000명을 다시 남겨두었다. 

한니발은 50,000명의 보병과 9,000명의 기병만으로 골(Gaul) 부족 지역에 들어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스키피오(한니발에게 복수하는 대 스키피오의 아버지)는 여름까지는 이베리아에 들어서고 싶었다. 그러나 한니발의 격려를 받은 보이와 인수브레스 부족이 반란을 일으켰고 로마 수비대를 계속 공격해왔다. 원로원은 스키피오에게 1개 군단과 5,000명의 동맹군을 따로 떼어서 고립된 수비대를 구해내라고 명령했다. 결국 그의 이베리아 침공은 지연되었다. 


그 동안 카르타고군이 서쪽 골 부족 지역에 들어서자 호전적인 켈트족 사이에서는 놀라움과 반감이 일어났다. 한니발은 켈트 족장들과 일련의 회의를 가져 공물을 주고 무사통과 약속을 받아냈다. 그 덕분에 피레네스 산맥에서 론강(Rhone)까지의 300km 여정은 별 문제가 없었다. 

9월에 론강에 이르른 한니발 병력은 보병 38,000명, 기병 8,000명 그리고 전투 코끼리 37마리로 기록된다. 

(우에스기 왈 : 지금도 그렇지만 기원전 장거리 행군은 많은 인명손실을 가져옵니다. 질병과 탈영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고, 아무리 사전에 협의된 무사통과였다고 해도 무려 60,000 명의 보급은 심각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무차별적인 약탈까지는 아니어도 무력충돌이 계속 있을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물론 알프스 산맥을 넘어서면서 겪게 되는 인명피해에 비해서는 약과입니다.

북 아프리카와 스페인 남부의 온화한 지역 출신이 영하의 기온을 장기간 겪게 되면 참담한 피해가 발생할 수 밖에 없습니다. 마치 임진왜란의 일본군이 조선의 북부지방 한겨울을 보내고 자멸하던 것과 같습니다. 한니발군은 기원전 3세기의 군대였으니 월동장비는 말할 필요도 없겠죠.)


카르타고군은 바다에서 4일 거리에 있는 론강 지점에 도착했고 그 지역에 살고 있던 켈트부족인 볼카에(Volcae)가 동쪽 길을 가로 막았다. 한니발은 서쪽 지역의 켈트 마을에서 강을 건널 수 있는 모든 것을 사들이는 동시에 배를 만들라고 명령했다. 

반대편에 적대적인 볼카에 병사들이 늘어나는 것을 본 한니발은 전면전을 벌였다가는 원정이 실패할 것을 직감했다. 3일째 되는 밤에 한노에게 병력을 주어 강을 거슬러 올라가게 했고 적당한 도강지점을 찾은 별동대는 강을 건넜다. 배를 타지 못한 이베리아 병사들은 가죽 주머니에 공기를 넣어 부풀린 다음에 헤엄쳐 건넜다. 

강을 건넌 한노는 병사들에게 하루의 휴식을 주었다. 


그동안 한니발은 일부러 무력도강 준비를 하는 시위를 벌여 볼카에 군대의 시선을 고정시켰다. 5일째되는 아침, 그는 한노에게서 미리 약속된 봉화신호를 받았고 병사들에게 도강하라고 명령했다. 가장 큰 배들은 상류에 머무르면서 강의 유속을 느리게 했다. 기병대는 배 뒤에서 말과 함께 건넜고 보병은 카누나 뗏목으로 건넜다. 

한니발이 최선을 다해 배를 모았는데도 제1진으로 건너는 병력은 얼마 되지 않았다. 볼카에 병사들은 진영에서 달려나와 강변에 집결했다. 서쪽 강변에서는 카르타고 동료들이 응원의 함성을 보냈고, 반대편 강변에서는 켈트병사들이 위협의 함성으로 화답(?)했다. 


바로 그 때에 한노의 별동대가 볼카에 진영에 불을 지르고 뒤를 기습했다. 소수의 볼카에 병사가 진영을 구하기 위해 달려갔지만 나머지는 뒤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 지도 모르고 여전히 강 위의 카르타고군에게만 집중하고 있었다. 

카르타고군은 강변에 도착하자 마자 바로 공격해들어갔고 앞과 뒤에서 협공당한 볼카에족은 전열을 무너뜨리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한니발은 바로 2진을 강건너로 보내 한노의 별동대를 구원했다. 

도강작전은 대성공이었지만 정찰병이 예상 밖의 소식을 가지고 왔다. 로마군이 론강 하구에 있다는 것이었다. 한니발은 500명의 누미디아 기병을 급파해 로마군의 전력을 탐색하게 했다. 


스키피오는 보이와 인수브레스 부족을 진압하는 데에 1개 군단을 파견한 후에, 한니발이 에브로강을 건넜을 뿐만 아니라 피레네스 산맥으로 접근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는 급하게 모병을 했다. 스키피오는 론강 하구의 마실리아(마르세이유, 그리스 소유)로 가서 한니발을 상대할 본거지로 삼을 생각이었다. 

5일간 바다항해를 한 끝에 스키피오의 24,200명과 60척의 배는 마실리아에 도착했는데, 한니발의 군대가 겨우 며칠 거리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충격을 받았다. 그는 카르타고군이 그렇게 빨리 전진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스키피오는 300명의 기병과 켈트용병 기병을 골라 적이 있다고 알려진 지역을 정찰하게 했다. 


중요한 지도입니다. 큰 그림으로 눈여겨 봐두세요. 


 

우리에게 친숙한 한니발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너무 전형적인 유럽인으로 보입니다. 


한니발은 북아프리카 출신인데 이런 모습이었을까요? 


차라리 아래의 모습이 오히려 한니발에 가까울 것입니다. 

 

 한 분이 이런 정보를 주셨습니다.

한니발이 유럽인과 닮은 것이 당연합니다.
카르타고인은 페니키아인의 후예로 인도유럽 어족에 속하는 백인이 맞습니다.
그의 병사들 중 뛰어난 기병인 누미디아인을 제외한다면 혼혈이 많이 진행된 지금도 그렇지만 북아프리카 출신의 인종들은 거의가 다 백인들입니다.
북아프리카와 중부 아프리카는 사하라 사막으로 분리된 만큼 혼혈이 더디게 진행되었고 햄족, 셈족, 페르시아계 모두 백계 아프리카인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