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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로마

로마 시대를 종식시킨 아드리아노플 전투,

by uesgi2003 2011. 1. 14.

 

고트족과의 전투를 서둔 발렌스(Valens) 황제는 자신의 목숨과 함께 시대를 풍미했던 로마시대의 막을 내린다.

 

 

후기 로마제국의 역사는 서기378 8 9일 오후, 아드리아노플(Adrianpole)의 트라시안(Thracian) 도시 근처에서 있었던 사건으로 오점을 남긴다. 그날 저녁이 되자, 동로마제국 황제 발렌스가 수 만 명의 로마병사와 함께 전사하면서 로마는 더 이상 외부의 침입을 막을 수 없게 된다. 동시대의 역사가 암미아누스 마르셀리누스(Ammianus Marcellinus)에 따르면, “칸나에를 제외하고 이렇게 대학살이 일어난 전투는 없었다.”

 

그림 설명: 고트족에 몰려 전멸직전인 동로마군. 이 패배로 찬란했던 로마시대가 막을 내린다. 클릭하면 커집니다.

 

 

서기 337, 콘스탄틴(Constantine) 황제가 서거하자, 로마제국에는 친족간의 권력투쟁 피바람이 불어 닥쳤다. 콘스탄틴은 세 명의 아들이 제국을 공평하게 나누어서(서유럽, 남동 유럽과 동유럽 그림 참조) 협력하기를 바랬지만 그 바램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세 명 모두 살해당한 후, 친족이 아니라 군대의 사령관이 황제의 자리를 차지했다.

364 2 26, 제국의 황제자리를 마지막으로 차지한 사람은 플라비우스 발렌티니아누스(Flavius Valentinianus), 미천한 집안 출신이었지만 지휘능력은 뛰어났다. 발렌티니안 1세로 황제에 오른 그는 다뉴브(Danube) 강을 따라 국경을 보강하는데 힘을 쏟았다. 제국의 동부 지역도 자신과 함께 할 수 있도록 3 28일 동생인 플라비우스 율리어스 발렌스(Flavius Julius Valens)를 공동황제로 임명하고 콘스탄티노플로 보낸다. 375년 발렌티니안이 죽고 그의 16살 아들 플라비우스 그라티아누스(Gratianus)가 황제에 오른다.

 

동시대는 그라티아누스를 웅변을 잘하고 자제할 줄 알고 호전적이지만 연민을 가진 상당한 재능을 가진 젊은이로 기록하고 있다. 그의 짧은 생애 동안, 로마를 위협하는 적과 끊임없이 싸웠고 이교도를 없애기 위해 노력

했다. 그렇지만 서부지역의 황제가 되었을 당시에는 작은 아버지인 발렌스(그림참조)를 제어하기에는 너무 어리고 경험이 없었던 것이 문제였다.

발렌스는 형과 다르게 360년이 되어서야 로마군에 입대를 했고 아드리아노플(Adrianpole)의 패배때문에 매우 무능한 지휘관으로 역사에 남았지만, 사령관으로서의 자질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367~369년 사이에 있었던 초기의 고트족 정벌은 나름 좋은 결과가 있었다. 자신의 안방에서 치고 빠지는 적을 상대로 작전을 펼치는 것이 매우 힘든데도, 그는 고트족을 전장터로 불러내 패주시켰다.

 

고티스칸드자(Gothiscandza)라는 땅에서 유래된 고트족은 전통에 따라 남부 스칸디나비아 종족으로 구분되었다. 그래서 그들이 현재의 폴란드 지역인 오데르(Oder)와 비스툴라(Vistula) 강 사이의 모국으로 이동할 수 밖에 없었다는 주장이 있지만 실제로는 고고학적 증거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지금 알 수 있는 것은 오데르-비스툴라 지역에서 스키타이(Scythia, 현재의 우크라이나) 지역으로 천천히 그러나 계속해서 이동했다는 것이다. 그 지역은 이미 다른 잡다한 인종이 모여 살던 곳이었는데, 3세기 중반이 되자 고트족은 막강한 세력을 자랑하게 된다.

 

테르빈지안스(Tervingians)라는 서고트(Visigoth)족의 족장 프리티게른(Fritigern, 바라던 평화라는 고트어)은 매우 뛰어난 전사왕으로 고트족뿐만 아니라 다른 로마 복종국까지도 추종할 정도였다. 로마에 복무했던 고트족 병사, 금광 광부, 탈출한 노예들까지 추종한 것으로 보아 프리티게른은 상당한 카리스마와 함께 남다른 의지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길 수 있다는 신념 하나로 다양한 부족과 씨족을 하나로 뭉치게 만들었다. 고트족뿐만 아니라 훈족, 로마에서 추방된 사람들, 독일인은 다른 누군가가 더 뛰어난 지도력을 보였다면 바로 그를 버리고 떠났을 텐데 그렇지 않았던 것으로 보아 고트족 최고의 지도자였음이 틀림없다.

 

4세기의 로마군에 대해서는 매우 방대한 자료가 남아 있는 반면에, 고트족의 전투조직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그렇지만 고트족이 로마가 기록한 것과 달리 그저 야만족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많은 고트인이 로마군에서 복무했으며 백병전 기술을 배웠다. 당시 로마는 군비에 많은 돈을 쓸 수 없었기 때문에 로마병사는 이제 더 이상 온몸을 금속갑옷으로 무장할 수 없었고, 방패도 작고 둥근 것으로 바뀌었으며 글라디우스라는 짧은 창과 칼대신에 더 긴 칼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래서 칼, 창과 도끼를 사용하는 백병전 기술이 로마군에게 매우 중요해졌다. 로마 보병대열은 여전히 막강한 위력을 발휘했지만 예전과 같은 백전불패의 신화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고트족은 짐마차를 둥글게 배치한 후에 그 안에서 재빨리 공격했다가 되돌아오는 전술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렇게 짐마차로 야영지를 꾸리게 되면 언제 어디에서라도 바로 방어를 할 수 있는 이동형 요새가 된다.

 

그림 설명: 아드리아노플 패배 100년 후의 서로마 병사. 아드리아노플 전투 이전에도 이민족의 편입이 있었지만 패배이후 로마군은 급속도로 이민족화된다. 다음 편의 참조 자료를 확인하시길. 클릭하면 커집니다.

 

376년 가을, 로마는 프리티게른이 사람들을 이끌고 다뉴브 강을 건너 모에시아(Moesia) 지역에 정착하는 것을 허락한다. 377년 기근이 서고트족이 정착한 지역을 휩쓸고 도움을 요청했는데도 로마 총독은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는다. 그 지역의 총독(Magister Militum)인 루피시누스(Lupicinus)는 오히려 고트족을 학대하면서 거꾸로 식량을 높은 가격에 팔고 고트족 여자들을 첩으로 희롱했다.

 

그림 설명: 서고트족의 다뉴브 강 정착을 허용하는 발렌스. 로마제국은 귀중한 인적자원이 될 수도 있었던 고트족을 외곽의 야만인으로 한정하는 실수를 저지른다.

 

고트족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자 루피시누스는 프리티게른, 알라비브(Alaviv)와 다른 서고트족 족장을 사령부의 만찬에 초대해서 인질로 잡아두고 고트족을 억압하려고 했지만, 음모가 실패하면서 고트족 호위병사들이 전투를 벌이는 동안 프리티게른은 탈출한다.

이제 프리티게른 휘하의 테르빈지안족은 저항에 나서 마르시아노플(Marcianople) 근처 지역을 약탈한다. 루피시누스는 소수의 병사를 이끌고 이들을 진압하려고 도시를 나서지만 거꾸로 학살을 당한다.

 

위기는 378년에도 계속 이어져서 서고트족은 트라키아(Thrace, 발칸 반도의 남동부)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다뉴브 북쪽과 지금의 불가리아, 그리스와 터키지역까지 진출한다.

트라키아에 주둔하고 있던 발렌스 황제와 그의 군대는 아드리아노플에서 마르티사(Martisa) 강 계곡을 따라 서쪽으로 진군하던 중에 고트족이 툰드자(Tundzha) 강을 따라 남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처음에는 소규모 도둑떼라고 착각했지만 훨씬 큰 규모의 부족이동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바로 군대를 아드리아노플로 되돌리고 도시 외곽에 야영지를 설치한다.

 

그림 설명: 이민족의 침입에 붕괴되고 있는 로마제국. 그림에서와 같이 속주뿐만 아니라 로마자체가 함락된다. 문제의 발단이었던 동로마제국은 이민족의 침략에서 벗어난다. 클릭하면 커집니다.

 

콘스탄티노플에서 북서쪽으로 200km 정도 떨어진, 그리스 국경선 근처의 트라키아 평원의 서쪽 끝에 있던 아드리아노플(지금의 터키 에디르네)는 원래 도시를 건설한 로마황제 하드리안(Hadrian)을 기려 하드리아노플(Hadrianople)이라고 불렸었다. 마르티사, 툰드자와 아르다(Arda)강이 만나는 이곳은 원래 지리적으로도 군사학적으로 중요한 곳이었다.

 

그림 참조: 로마제국 외곽을 유린하고 있는 고트족

 

378 8 8, 부관들과 회의를 마친 발렌스는 바로 고트족과 전투를 벌일 것인지 아니면 어린 조카가 군대를 이끌고 합류할 때까지 기다릴 것인지를 결정해야 했다. 상급 지휘관중 신중파는 조카의 군대가 올 때까지 기다릴 것을 권유했다. 지원군이 합류하면 동서연합군의 훨씬 더 강력한 전투력으로 고트족의 위협을 한 번에 끝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라티아누스의 서쪽 군대가 며칠 안 있어서 도착할 것이고 두 군대 간에 연락도 이미 되고 있었다.

 

다른 호전파는 즉시 대응에 나설 것을 주장했다. 두 달 전에 세바스티아누스(Sebastianus)라는 귀족이 이 지역의 군대를 지휘하도록 임명된 후에, 게릴라 스타일의 공격적인 원정을 다녔었다. 그가 적극적으로 공격을 하자, 소규모로 약탈하던 고트족이 어쩔 수 없이 훨씬 큰 부대로 뭉쳐 다니게 되었고 로마군의 장기인 야전을 펼치면서 가장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 세바스티아누스는 발렌스에게 합류하기 직전에도 트라키아 남쪽의 로도프(Rhodope)로 돌아가던 대규모의 고트족을 패배시켰었다.

 

여러 가지 일들이 벌어지면서 발렌스는 최종결정을 내리게 된다. 먼저, 정찰대는 고트족의 병력이 10,000명도 안 된다는 보고를 한다. 발렌스는 자신의 직속부대로도 15,000명의 병사가 있었기 때문에 고트족과 전투를 벌일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당시 발렌스는 콘스탄티노플에서 평판이 아주 안 좋았다. 그가 고트족을 아드리아노플과 콘스탄티노플 사이에서 잡는다면, 보급로를 끊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수도의 시민들은 황제가 자신들을 보호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역사가 암미아누스와 후대의 역사가들은 발렌스가 젊은 조카보다 좋은 평판을 얻기 위해 즉시 전투를 감행했다고 믿고 있다. 그것이 사실일지라도 질투와 평판만을 위해 성급한 전투를 벌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그는 9년 전에 다뉴브 강에서 고트족을 이긴 경험이 있어서 상대를 얕잡아봤을 수도 있다. 어떤 이유에서든, 8 9일 오전에 발렌스는 손쉬운 승리를 확신하면서 아드리아노플에서 18km 떨어진 고트족을 치러 도시를 나선다.

 

로마군은 최대한 속도를 내 오후 2시에 고트족 야영지에 도착한다. 고트족은 방어하기 쉬운 지역을 골라 이미 방어선을 폈고, 이 모습을 본 로마군은 성급하게 진영을 펼친다.

지형에 미숙했던지 아니면 실수였는지, 기병대의 좌익이 고트족 야영지로 채 올라오기도 전에 우익이 고트족에게 먼저 모습을 드러낸다. 일부 역사가들은 고트족이 마차를 방어진지 삼아 싸웠다고 주장하지만 아드라이노플 전투에서는 그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이 마차 뒤에서 싸웠다면 초기 주도권은 로마군에게 넘어갔을 것이고 고트족이 선호하는 백병전을 펼치기 힘들기 때문이다. 암미아누스의 전투기록을 보면, 로마군 중 한 부대만이 마차까지 전진할 수 있었다고 하니까 전투는 마차에서 떨어진 개방된 공간에서 시작된 것이 분명하다.

 

고트족은 대담하게 로마 기병대의 우익을 공격해서 이들을 쫓아 보낸 후에 바로 좌익에게 공격을 퍼붓는다.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도 되기 전에 이미 로마의 기병대는 전장터에서 쫓겨나 보병들의 양 옆이 그대로 노출된다.

 

그림 설명: 기병의 배후공격에 맞춰 정면으로 돌격하는 고트족 보병. 유럽은 이런 미니어춰로 워게임을 즐긴다. 클릭하면 커집니다.

 

이 순간을 노려 프리티게른은 보병을 이끌고 돌진했고, 암미아누스는 로마군의 참담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여러 부대가 칼을 뽑지도, 뽑은 칼을 휘두르지도 못할 정도로 좁은 공간에 서로 뒤엉켜버렸다. 흙먼지가 하늘을 가려 방패로 고트족의 화살을 막아낼 수도 없었기에 그들의 화살은 로마군 병사에게 그대로 명중했다.”

 

사방에서 압박을 받은 로마군은 너무 좁은 곳에 몰려 어떤 전투대형도 만들 수 없었다. 프리티게른의 보병이 대형을 이뤄 접근하고 기병이 탈출하려는 병사들을 베어넘기면서 대학살이 시작된다. 조속한 전투를 주장했던 세바스티아누스를 비롯한 거의 모든 로마군이 시체로 변한다.

발렌스의 운명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진다. 병사들 틈에 섞여있던 그는 화살을 맞아 쓰러지고 시체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설과 화살을 맞아 부상당한 그를 호위병이 근처의 농부 오두막으로 옮겼지만 곧바로 공격을 당해 불타 죽는 것을 창문으로 탈출했다 포로로 잡혔던 봤다는 설이 있다.

암미아누스는 로마군의 3분의 2 이상이 아드리아노플 전투에서 전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앞 부분에서 그가 칸나에 전투와 비교했던 이유는, 전투시작과 함께 기병대가 전장터에서 밀려났고 보병들은 좁은 지역에 봉쇄되어 전멸한 전투진행이 너무나도 흡사했기 때문이다.

 

그림 설명: 안드리아노플 전투의 진행. 동로마군의 무모한 접근으로 생긴 기병과 보병의 틈을 숨어있던 고트족 기병이 파고든다. 로마군 기병이 밀려난 후, 고트족 기병이 돌어와 보병과 함께 로마군을 포위섬멸한다. 칸나에 전투의 복사판이 재현된다.

 

아드리아노플의 패전은 서방세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로마는 전에도 많은 전투에서 패했었지만 이렇게 참패를 한 적은 거의 없었다. 더구나 무시했던 야만인이 로마의 지휘관을 작전에서 압도한 적은 더더욱 없었다. 시작해서 끝날 때까지, 고트족의 프리티게른은 발렌스와 그의 장군보다 계획과 실행 모든 면에서 뛰어났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잘 무장되고 훈련된 군대를 비정규 혼성군이 전멸시킨 믿을 수 없는 사건에 대해 여러 가지 주장이 제기되어 왔다. 몇몇 역사가는 발렌스의 추측과 달리 고트족의 병력이 200,000명이 달하는 대군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그렇게 많은 수의 부족을 먹여 살리는 보급문제가 엄청나기 때문에 아마도 프리티게른은 10%도 안 되는 병력만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다른 역사가들은 이 전투에서 다시 한 번 보병을 상대로 한 기병의 우월함을 보여주었다고 주장한다. 적시에 기병을 투입해서 전투를 유리하게 만든 것은 사실이지만 운명을 결정지은 것은 보병들의 백병전이었다.

 

아드리아노플에서 로마가 패배한 것은 전략과 전술 모두에 원인이 있을 수 있다. 먼저 전략 면에서 로마는 고트족의 위협을 신속하고 확실하게 처리할 수 있는 높은 수준의 군대를 충분히 보유하지 못했다. 그 당시 로마가 약 500,000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영국에서 시리아까지 넓은 국경을 방어하는데 모두 투입된 상태였다. 만약 어느 한 요충지에서 병력을 빼서 이동시킨다면 적이나 야만인이 그 기회를 노릴 수 있었다. 더욱이 로마의 야전군은 기동성이 좋고 신속하게 전개할 수 있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먼 지역에 배치를 시키게 되면 대규모 탈영이나 반란이 일어났기 때문에 예전과 같이 쉽게 옮길 수도 없었다.

 

우수한 병력을 손에 쥔 아드리아노플의 지휘관 역시 실패할 수 없는 임무를 실패하는 지휘관들의오만함을 그대로 드러냈다. 아무리 사소한 전투라고 반드시 먼저 실시하는 정찰도 하지 않고 적이 어느 정도의 병력으로 어떤 작전을 펼칠 것인지 분석과 긴급작전 수립도 하지 않고 그대로 전투에 뛰어들었다.

원정을 시작하기 전에 이미 동로마 병사들의 사기와 훈련도가 낮았을 수도 있다. 8월 한 낮의 뜨거운 태양 아래 고트족 야영지까지 급하게 행군했기 때문에 전투가 시작되지도 전에 이미 로마군은 탈진한 상태였을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원인이 로마에게만 있었던 것은 아니며 잡다한 부족을 이끌고 승리를 거둔 프리티게른의 뛰어난 전술과 지도력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라티아누스는 아드리아노플에 거의 다 와서야 무능한 공동황제가 죽임을 당했고 군대도 거의 사라져 버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서로마제국의 내부문제도 있는데 이런 당황스러운 소식을 들은 그는 동로마제국에 전념할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유명한 장군의 아들인 플라비우스 테오도시우스(Theodosius)에게 행정을 맡긴다. 379 1 19, 테오도시우스는 공동황제의 자리에 올라 동로마제국을 책임진다.

프리티게른의 승리로 이제 고트족은 발칸 반도 대부분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들은 그리스까지 침범해서 아테네와 같은 극히 일부 도시만 피해를 입지 않는 지경이 된다.

고트족이 로마에 충성하고 군대에 편입된다면 트라키아 지역을 가져도 좋다는 테오도시우스의 고트족 유화정책은, 발렌스가 다뉴브 강 이남으로 그들을 들어오게 만들었던 것만큼이나 안 좋은 결과를 자초한다. 다시 평화가 찾아오지만, 막대한 비용을 치른 후였다. 아드리아노플에서 잃은 병역을 보충할 수 없던 로마제국은 고트족에게 국방을 맡기게 된다. 이렇게 4세기 무렵이 되자 고트족은 막강한 힘을 발휘하게 되고, 역사상 처음으로 로마의 군대는 로마인이 아닌 종족으로 채워진다.

 

로마의 몰락시기에 대해 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하며, 오토만 투르크에게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된 1453년을 지정하는 사람도 있는데, 비잔틴 제국은 로마제국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동떨어진 그리스어를 모국어로 한 제국이었다. 서로마 시대의 종식은 마지막 황제인 로물루스 아우수스툴루스(Romulus Augustus)가 동고트(Ostrogoth)족에게 항복했던 476년으로 알려져 있다. 서로마제국의 몰락은 378년에 시작되어 거의 1백 년이나 걸렸다. 410년 알라리크(Alaric. 그림참조)의 고트족이 로마를 점령했고, 429년에는 반달족이 아프리카를 정복했으며 발렌티니안 3세가 455년에 죽임을 당하는 혼란을 겪었지만 불세출의 영웅이 있었다면 재건될 여지도 있었다. 바로 아드리아노플 전투에서의 패배가 로마를 재기불능 상태로 빠뜨린 것이다. 고트족에게 국방을 맡기게 되면서 황제의 권위는 추락했고 이민족으로 가득 찬 군대는 다른 이민족이 국경을 넘어오는 것을 방관한다.

 

아드리아노플에서 기병이 보병을 압도한 전투였고, 이 전투에서 패배한 로마군은 전통적인 색채를 완전히 잃어버리고 동방에서 들여온 기병과 궁기병이 주력을 차지하게 된다. 장궁과 석궁에게 기병이 밀려나는 15세기까지 기병은 군대의 중심이 된다.

로마군의 정체성이 사라지면서, 황제, 장군과 일반시민까지도 게르만족과 같은 사병을 거느리게 된다. 5세기 중반이 되자 로마의 야전군은 대규모 기병대가 국가와 황제가 아닌 강력한 군벌에게 충성하는 형태가 되는데, 이것은 고대 로마의 공화정 또는 황제정치 시대보다는 봉건주의에 더 가까운 형태다.

 

아드리아노플 전투는 동로마제국의 영토에서 일어났지만 오히려 서로마제국이 직격탄을 맞았다. 5세기부터 게르만족이 대거 국경을 넘어 서로마제국에 유입되기 시작한다. 흥미롭게도 동로마제국은 로마제국이 붕괴하는 것을 지켜보며 이민족에게 둘러 쌓인 채 또 다른 1,000년을 버틴다.

 

Military HistoryJoe Zentner 기사를 번역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