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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로마

카이사르의 첫 번째 원정길

by uesgi2003 2013. 2. 9.


정말 오래간만에 화약냄새가 안나는 시대로 돌아왔습니다. 아직 남북전쟁의 이야기가 몇 편 더 남아있지만 고대 이야기를 요청하신 분이 있어서 우선 케이사르의 비교적 젊은 시절 원정 이야기를 정리해보겠습니다. 


제가 그리스 로마 시대 이야기는 피하고 싶은 것이, 워낙 국내에 자료가 많은데다가 특히 로마 시대는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가 대단한 내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중복된 이야기를 정리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고대 이야기에서 그리스와 로마를 빼고 나면 자료를 구하기 힘들어서 어쩔 수 없이 한 발 디밀게 되는군요.


카이사르의 첫 번째 원정길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는 골(Gaul, 현재의 프랑스 지방) 부족을 도와 헬베티(Helvetii, 현재의 스위스와 독일 지방) 침입을 막아달라는 로마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자신의 야망을 위해.


기원전 58년,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42세의 나이였다. 재능과 카리스마를 동시에 갖춘 그는 로마 정치인 중에 가장 두드러졌고 이미 권력을 향한 그의 욕망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었다.  바로 전 해에, 그는 부유란 마르쿠스 리시니우스 크라수스(Marcus Licinius Crassus)와 명망높은 지휘관 그나에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Gnaeus Pompeius Magnus)와 함께 첫 번째 삼두정치(Triumvirate)에 진출했고 공화국 의회를 좌지우지했다. 그러나 삼두정치 연합은 당연히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거나 확대하려고 불안한 시도를 계속 했다. 

자신보다 앞선 폼페이와 크라수스를 상대하려면, 카이사르는 충성스러운 군배와 화려한 전적이 필요했다. 이전에도 지중해 해적이나 스페인 산악부족을 상대로 승리를 쌓았지만 폼페이가 소 아시아(Asia Minor)와 지중해 동부에서 기록한 업적 앞에서는 초라한 것이었다. 헬베티(Halvetii)부족이 갈리아 나르보넨시스(Gallia Narbonensis, 지도 참조) 문턱에 나타나면서 케이사르에게도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이 지역은 갈리아 시살피나와 일리리쿰과 함께 로마의 3대 동맹 주 중의 하나였다. 


골(Gaul) 부족과 같은 혈통의 켈트 민족인 헬베티 부족은 원래 독일 남부에서 살다가 북쪽에서 밀려온 게르만 족에게 밀려나 스위스 서부에 정착한 부족이었다. 그러나 게르만 족은 서쪽으로 계속 진출했고 기원전 61년부터는 헬베티 마을마다 이주 준비를 하는 부족민으로 가득했다. 족장 중 한 사람인 오르게토릭스(Orgetorix)는 골 부족 모두를 할베티 부족의 노예로 만들겠다고 장담하고 나섰다. 

그의 장담은 허풍이 아니었다. 로마 나르보넨시스와 시살피네에 살던 골 부족은 반 로마시민화되었고 로마의 와인을 가져온 상인이 원자재와 노예를 바꿔갔다. 요새화된 마을에서는, 도기, 유리와 금속가공이 거의 산업수준으로 크게 번창했다. 그러나 로마의 선진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야만성은 사라졌고, 반대로 헬베티 부족은 게르만과의 끊임없는 전투로 상당히 거친 성향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헬베티는 고향을 영원히 떠나는 여정을 위해 2년 동안 밀, 가축과 수레를 모았고 기원전 58년 드디어 원정에 나설 때가 되었을 때에는 정작 오르게토릭스는 그 자리에 없었다. 원래 헬베티 부족은 군주제를 싫어해서 수령은 선출해서 행정을 맡겼었는데, 왕이 되려는 욕심이 과했던 오르게토릭스는 체포되어 화형을 당하는 대신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것이다. 

그가 죽었다고 해도 보다 안전한 곳으로 이동하려는 부족의 결심은 바뀌지 않았고 엄청난 수의 마차, 가축과 말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서쪽으로 나아갔다. 자신들의 결심을 다지기 위해 12곳의 요새 마을과 400개 마을을 불태웠다. 그들은 대서양 해안과 산토네스(Santones)의 비옥한 땅에 정착할 생각이었다. 

여러 부족이 합류하면서 헬베티의 대열은 점차 불어났고 기원전 283년부터 로마와 적대적이었던 보이(Boii) 부족도 있었다. 시살피네를 로마에게 빼앗기고 보헤미아와 다뉴브를 떠돈 보이 족은 1세기만에 고향을 향해 할베티의 대열에 동참했다. 

케이사르가 받은 보고로는 약 386,000명이 이동 중이었고 그 중에 92,000명이 전투에 동원될 수 있는 남성이었다. 150km 이상 늘어설 정도의 대행진이었으니까 약탈만으로는 먹고 살 수 없었을 것이다. 현대 학자들 중에는 케이사르의 기록은 과장이고 실제로는 12,000명의 전투원이 고작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이 숫자는 너무 적은 것으로 최대 90,000명, 아마도 25,000명 정도의 전투원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헬베티는 두 경로를 택할 수 있었는데, 세콰니(Sequani)와 게르만 족이 쉽게 막을 수 있는 세콰니 지역보다는 차라리 로마를 상대하기로 결정하고 제네바 론(Rhone) 강을 건너기로 했다. 그 지역의 알로브로게스(Alliobroges) 부족이 지배자인 로마에 대항해 봉기해주기는 바랬는데 그렇지 않더라고 알로브로게스 정도는 쉽게 쫓아내고 지나갈 수 있었다. 3월 28일, 헬베티는 제네바 건너편에 모여 강을 건너려고 했지만 놀랍게도 로마군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로마에 있던 카이사르는 헬베티의 침입이 임박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마차에서 잠을 자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1주일만에 달려간 후에 갈리아 나르보넨시스의 10군단(Regio X)과 급히 모은 보조군을 동원해 론 강의 다리를 부수기로 했다. 

카이사르는 정치가로 보기에는 지휘능력이 너무 뛰어났다. 번잡한 로마의 거리를 떠나 시골의 병영 생활은 그의 외모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줬고 로마에서는 그렇게 괴롭히던 두통과 간질발작도 골 지역에서는 말끔히 사라졌다. 

건널 다리도 부숴지고 로마군의 단호한 태세를 본 힐베티는 전령을 보내 평화롭게 이주할 수 있게 허락해달라는 요청을 했다. 카이사르는 그들의 요청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그들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더라도 엄청난 인구와 가축은 통과하는 모든 지역을 황폐화시킬 것이 분명했다. 4월 13일까지 교묘하게 답변을 피한 그는 30km에 이르는 요새를 만들어 론 계곡을 완전히 봉쇄했다. 


13일이 되자, 카이사르는 헬베티의 요청을 간단하게 거절했다. 당연히 헬베티는 론 강을 건널 수 있는 모든 지역을 찾아다녔고 가능한 곳에 뗏목을 묶어 강을 건너려고 했지만 로마군이 허용하지 않았다. 공격이 예상되는 지점에 카이사르는 6,000명을 모두 동원해서 막아냈다. 결국 모든 방법이 좌절된 헬베티는 놀랍게도 세콰니 부족에게 청원해서 그 지역을 통과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냈다. 

새로 택한 경로는 켈트 부족을 멀리 통과하는 길이라 로마와 상관이 없었는데도 로마에 자랑할 전과가 필요했던 카이사르는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북쪽을 통과할 수 없다고 선포했다. 그리고 제네바에 10군단을 그대로 두고 갈리아 시살피나에서 2개 군단을 새로 모아 기존의 3개 군단과 함께 40,000명 이상의 전력을 갖췄다. 

헬베티는 알로브르게 마을을 약탈해서 보급을 채우면서 세콰니 지역을 통과해 론 북쪽으로 이동 중이었고 약탈당하는 부족의 구원군으로 카이사르가 군단을 이끌고 나타났다. 리옹(Lyons) 부근에서 10군단을 이끌고 온 라비에누스가 합류했고 알로브로게스와 아에두이(Aedui) 부족이 찾아와서 헬베티가 아라르(Arar) 강을 건너고 있다고 알려줬다. 

카이사르를 즉시 아라르를 향해 출발했고 60% 정도의 대열이 이미 강을 건넜고 힐베티의 한 주였던 티구리니(Tigurini) 주민이 건널 준비를 하고 있었다. 카이사르는 적이 나뉘어진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3개의 정예 군단을 보내 급습했다. 완전히 무방비 상태에서 공격을 당한 티구리니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죽거나 근처 숲으로 도망쳤다. 

전투에 참가하지 않은 3개 군단을 동원해 즉시 다리를 놓은 케이사르는 강을 따라 북쪽으로 향하고 있는 헬베티 주력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가축과 아이들을 데리고 강을 건너느라 20일을 보낸 헬베티와 달리 로마군단은 단 하루만에 강을 건넜고 대열을 바로 따라잡을 수 있었다. 49년 전에 톨로사(Tolosa) 부근에서 로마군을 전멸시켰던 디비코(Divico)가 사절로 와서 케이사르가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갈테니까 평화롭게 보내달라고 간청했다. 로마가 전쟁을 원한다면 티구리니처럼 무기력하게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경고도 잊지 않았다. 

그는 카이사르에게 "톨로사 부근에서 로마인이 당했던 재앙과 헬베티 부족이 보여준 용맹을 잊지 말라"는 조언을 했다. 

카이사르는 야만족이 제시한 조건을 수용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자신은 물론이고 로마도 이전의 치욕을 잊지 않고 있으며 보복하겠다고 대답했다. 그것만으로 전쟁을 할 이유가 충분하지 않다면, 로마의 우방인 아에두이와 알로브로게스에게 한 만행으로 충분했다. 카이사르가 댄 이유는 충분했지만 헬베티가 인질을 보내고 두 부족에게 충분한 보상을 한다면 휴전을 할 생각이 있다고 맹세했다. 


그림 설명: 디비코가 승리했던 톨로사 전투를 19세기에 고증따위는 전혀 상관없이 낭만풍으로 그린 그림입니다. 클릭하면 상당히 커집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카이사르는 헬베티에게 로마에게 복종할 것으로 요구한 것이었다. 두 부족에게서 약탈한 물품은 대부분 식료품이어서 이미 먹어버렸고 반환할 수 없는 것이었다. 자존심강한 디비코는 헬베티는 인질을 받지도 주지도 않으며 로마는 이미 이것을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헬베티가 북쪽으로 계속 이동하자, 케이사르는 동맹 부족의 4,000명 기병을 모두 보내 대열을 바짝 따라다니자 헬베티의 500명의 기병은 용감하게 공격에 나서 로마 기병대 모두를 내쫓았다. 흥분한 헬베티 기병은 로마 본대를 향해 질주했고 선봉대를 공격했다. 카이사르는 응전하지 않고 방어만 하며 서쪽으로 이동하는 할베티 본대를 계속 추격했다. 

2주 정도 지나서 헬베티가 언덕 밑에 숙영하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고 카이사르는 그들을 밤에 포위하려고 했다. 2개 군단이 헬베티의 측면으로 기어가고 다른 2개 군단이 반대편으로 돌아 언덕 위에 올라 작전이 성공하는 듯 했다. 그러나 날이 밝자, 로마 정찰병이 라비에누스 군단을 적으로 오인하고 할베티가 이미 언덕을 점령했다는 보고를 했다. 케이사르는 작전을 취소하는 수 밖에 없었다. 

헬베티와 로마군의 경주는 계속 되었지만, 아에두이 부족이 약속했던 보급품을 공급하지 못하면서 로마군은 밀을 찾아 인근 마을로 방향을 바꿨다. 헬베티는 로마군이 후퇴하는 것으로 착각했던지 아니면 보급품이 떨어진 것을 알고 보급로를 끊으려고 했던 것인지, 어떤 이유에서던 결전에 나서게 되었다. 


헬베티는 기원전 58년 7월, 아우존 브룩(Auzon Brook, 현재의 Amercy 부근) 계곡에서 로마군을 따라잡아 후위를 공격했지만 바로 로마 기병대의 반격을 받았다. 그동안 케이사르는 계곡의 서쪽 오르막에 정예 4개 군단을 3개의 사선대형으로 정렬시켰고 자신의 뒤에는 새로 모은 2개의 군단과 보조군을 배치시켰다. 모두에게 결전의 각오를 보여주기 위해 자신의 말과 함께 장교들의 말을 모두 풀어줬고 군단장도 일반 보병처럼 싸우게 했다. 

헬베티는 로마군의 오른쪽 계곡 아래에 숙영지를 만들었는데, 가족은 모두 마차에 두고 전사들만 밀집대형으로 정렬했다. 로마 기병대의 반격은 순식간에 격퇴되었고, 보이와 툴린기 부족은 예비병력으로 마차 앞에 남겨졌다. 헬베티 전사들은 언덕을 올라 정렬해있던 로마군과 부딪쳤다. 

백인대 (보통 80명), 중대 (2개 백인대, Maniples), 대대 (3개 중대, Cohorts)로 구성된 군단(Legion)은 당시 최고의 군대조직이었다. 군단병은 스페인 단검(글라디우스), 2개의 가벼운 창(필라), 곡선으로 휜 방패, 청동 투구와 갑옥으로 무장했으며 은 독수리를 군단의 신으로 모시며 모든 병사들의 머리 위에 치켜들었다. 

지휘관으로 그리고 로마의 정치가로서, 케이사르의 운명은 군단병들에게 달려 있었다. 첫 번째 큰 전투로 자신의 운명의 초석이 되거나 그대로 사라져버릴 수 있었다. 다행히도 신은 그의 편을 들었고, 그는 20,000명의 군단병을 높은 곳에 배치시켜 두었었다. 후방의 2개 군단과 보조병까지 합치면 병력 면에서는 전혀 부족하지 않았다. 

로마군과 비교하면, 켈트 족은 족장만이 휘황찬란한 무장을 했을 뿐, 일반 전사들은 방패 외에는 방어수단이 없었다.


헬베티 전사들은 패배는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의 죽음이나 노예생활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함성을 지르며 무질서한 밀집대형으로 다가서던 헬베티 전사들은 로마군의 경창(필라)에 막혀 머뭇거렸고 그 때를 놓치지 않고 군단병의 전진을 알리는 나팔소리가 울려 퍼졌다. 

카이사르의 "돌격!" 명령과 함께 단검을 뽑아든 군단병이 맨 몸의 헬베티 전사들에게 달려들었다. 헬베티 전사는 무기 하나만 든 알몸 상태가 되었는데, 로마군이 던진 경창이 방패에 꽂히면서 오히려 방해가 되는 방패를 던져버렸기 때문이다. 로마군단이 계곡 반대편으로 헬베티를 밀어붙이면서 계곡 물은 피 빛으로 변했다. 

헬베티가 뒤로 물러나면서 잠시 싸움이 잠시 중단되었다가 후방에 남겨졌던 보이와 툴링기 족이 로마군의 오른쪽 옆을 공격하면서 다시 격전이 벌어졌다. 아군의 등장에 힘을 얻은 헬베티 전사도 복수를 다짐하며 달려들었다. 로마군단의 명성은 헛소문이 아니었다. 세 줄의 사선 대형 중 처음 두 줄은 헬베티 주력을 향해 계속 나아갔고 세 번째 줄은 선회해서 보이와 툴링기의 공격에 맞섰다. 

양쪽 모두 절대로 물러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전투는 어두워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베테랑 백부장이 뒤를 버티고 있는 군단병들은 야만족의 공격을 수 백 번이나 막아냈다. 긴 무기를 사용하는 켈트족과 달리 단검의 로마군은 2~3명이 바짝 붙어서 협력할 수 있었고 피로해진 군단병은 뒤로 물러나고 휴식을 취한 군단병이 그 자리를 메우면서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헬베티를 밀어붙이고 있었다. 

보이와 툴링기도 역시 주력부대와 마찬가지로 전력을 다했지만 로마군 대열을 뚫지 못하고 점차 마차쪽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마차 뒤에 있던 여자와 아이들도 창과 단창을 던지며 힘을 보탰고 보이와 툴링기 전사들은 절망적인 그 모습에 다시 힘들내서 돌격해들어왔다. 


로마군은 마지막 마차 방어막을 넘어선 것이 자정무렵이었다. 양쪽 전선에서의 싸움이 끝나자, 약 40,000명의 헬베티 부족이 시체로 변했다. 그러나 생존자들은 대열을 갖춘 채로 린곤스(Lingones, 세느와 마른 강 부근의 켈트족 도시)로 도망쳤다. 카이사르는 링곤스로 전령을 보내 만약 헬베티를 돕는다면 로마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는 경고를 했다. 모든 마차와 식량을 남겨두고 도망쳤던 헬베티는 눈물로 카이사르에게 자비를 빌었고, 카이사르는 인질과 배반한 보조군을 내놓는다면 휴전하겠다는 제안을 했다. 


그림 설명: 당시의 카이사르는 절대로 이렇게 전면에 서지 않았을텐데 그림으로는 멋진 포즈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 전투는 비브락테(Bibracte) 전투로 불립니다. 


대부분의 헬베티 부족이 그 조건을 받아들였지만 로마를 믿지 않던 베르비게네(Verbigene) 지역 부족은 독일 국경으로 달아나려고 했다. 카이사르는 골 부족에게 라인 강으로 이르는 길에서 베르비게네 인들을 잡으라는 명령을 했고 붙잡혀온 베르비게네 인들을 모두 노예가 되었다. 

카이사르는 나머지 포로에게는 놀랍게도 관용을 베풀었다. 헬베티, 툴링기와 라토브리기(Latobrigi) 지역 부족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알로브로게스 부족의 도움을 받았는데, 그들이 돌아가지 않는다면 훨씬 난폭한 게르만 족이 그 지역을 차지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에두이 부족은 보이 포로들이 자신들과 함께 정착하게 해달라는 요청을 받아냈다. 

거의 25만 명의 적을 궤멸시킨 케이사르는 골 부족 전체의 구원자가 되었고 곳곳에서 축하사절을 받았다. 카이사르의 전과는 놀라운 것이었다. 그는 단 4개의 정예군단만 동원했을 뿐 2개 군단과 보조군은 예비병력으로 투입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전체 골 부족의 영웅이 되면서 골 부족은 로마의 더욱 든든한 동맹이 되었다. 


카이사르와 로마가 국경을 알프스 너머 다뉴브까지 확장하면서, 케이사르는 힐베티 부족을 "로마 시민의 동맹"이라고 이름붙였고 한 때 로마의 가장 완고했던 적이었던 헬베티 부족은 로마 제국의 속주민으로 편입되었다. 


영어이기는 합니다만 로마 군단병에 대해 아주 짧게 잘 설명해준 동영상입니다. 화면만 보셔도 그들의 조직이나 간단한 전술이 쉽게 이해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