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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여행

그 시절 그 때를 아시나요? - 헤이리 한국근현대사 박물관

by uesgi2003 2012. 10. 17.

 

1년내내 휴가없이 살인적인 업무를 견뎠던 MS를 그만두면서 늦었지만 가족과 한 달에 한 번은 여행을 다니겠다고 마음억었었는데 그렇게 되지 않는군요. 좀 여유를 부렸더니만 이제는 아이들이 고등학생이라 자신의 일정도 있고 학교수업도 있어서 시간내기가 마땅치않습니다.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시기가 가장 붐비는 계절의 주말인데, 저는 산이나 바다를 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보는 것이 너무 싫어서 가족의 바램을 외면하고 있죠.

 

결혼기념일에 안사람이 휴가를 내서 모처럼 시외로 나갔습니다. 처음에는 묵호항가서 회를 먹을까 싶기도 하고 정선이나 하다 못해 포천 명성산의 억새풀밭을 보려고 했지만 요즘 안사람의 체력이 많이 떨어져서 당일치기 장거리 여행이나 산행은 무리겠더군요.

 

그래서 거의 10년 가까이 안사람이 노래를 불렀던 헤이리 아트밸리를 들렀다가 작은 타운하우스인 도시농부 모델하우스로 코스를 잡았습니다.

 

최근에 헤이리를 다녀오신 분은 아시겠지만,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헤이리 아트밸리에서 아트밸리는 빼야겠더군요.

처음에는 상당히 아트스러웠겠지만 이제는 주로 카페, 어린이를 위한 놀이기구가 대세이고 갤러리는 전시물이 적거나 그나마 개관 준비 중이었습니다. 10년 전에는 '이건 아트다!'싶었을 건물도 지금 제눈에는 시내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건물이고 오히려 파주 출판단지가 더 잘 조성되었더군요.

 

패키지 티켓 구성을 봐도 일단 가장 인기있는 한국근현대사 박물관을 넣고 다른 박물관이나 갤러리를 넣을 만큼 볼거리가 줄어들었습니다. 주말에는 재즈 공연 등 볼거리가 좀 늘어난다고 하는데 그래도 아트밸리라고 부를만큼의 예술활기는 찾아보기 힘들더군요.

 

몇 장의 헤이리 사진 후에 누구나 추천하는 그리고 거의 유일한 돈 값을 하는 한국근현대사 박물관 전시물을 집중 설명하겠습니다.

사진은 IE에서 설명과 제대로 연결됩니다.

다음 에디터가 멀티 브라우징을 지원하지 않아서 크롬에서는 깨집니다. 저도 지금 크롬을 사용하고 있어서 안타깝습니다.

 

주 출입로를 놓쳐서 Gate7로 들어간 주차장입니다. 입구를 놓쳐도 사방에 진입로와 주차장이 있기 때문에 편한 곳을 선택하면 됩니다.

처음 차를 세운 주차장 정경인데 이 때만 해도 '음... 아트 밸리답게 역시 멋지군' 싶었습니다.

 

달리기 전용 스포츠세단인데 주인을 잘못 만나 연 10,000km도 못뛰는 불쌍한 녀석입니다.

그렇다고 팔 수도 없고... 상당히 잘 만들어진 듬직한 녀석입니다.

중간 중간 예쁜 카페에서 안사람 찍어주고 이동한 곳이 한길사 북카페입니다.

이런 서가가 4층까지 있어서 '책많이 읽는다고 자신하는 나인데도 한길사에 대해 이렇게 몰랐다니...' 순간 창피했는데... 역시 다른 출판사의 책들이 상당히 많이 있었습니다.

동물을 주제로 한 전시회인데... 역시 아트는 어렵습니다.

전혀 동물이 연상되지 않습니다. 1층은 이런 전시공간이고 2층은 집이더군요. 상당히 부러웠습니다.

중간 중간 어린이용 놀이기구와 극장... 온갖 카페... 심지어 가구점과 자라 아울렛을 지나쳐 19금 누드화 전시를 들어갈까 하다가 이 나이에 아트스러운 행동이 아닌 것 같아서 바로 한국근현대사 박물관으로 향했습니다.

패키지를 구입하면 다른 갤러리 2곳까지 합쳐서 1인당 9,000원~12,000원이었지만 다른 곳은 볼만한 것이 없어서 1인당 6,000원만 내고 이곳만 봤습니다.

 

전시물은 아주 훌륭합니다. 그런데 이동경로가 협소하고 되돌아나오는 것이 몇 군데 있어서 주말에는 제대로 못보고 밀려다니겠더군요. 특히 나이드신 분들의 회상잠긴 설명이 이어지면 가족간의 대혈투도 기대됩니다.

지하부터 시작되는데 들어서면서 감탄했던 6~70년대 골목풍경입니다. 정말 제 어릴 적 기억과... ㅡ.ㅡ...아니 어른에게만 들어왔던 이야기와 똑같습니다. 제 나이에 어떻게 저런 '어름' 간판을 볼 수 있었겠습니까? 이제 30대 초반인데... 그런데 고등학생 두 딸을???

입양했다고 해야지 ㅡ.ㅡ

그 시절 명품 신발이었던 말표 신발 전신주 광고입니다. 말표 고무신이 상당히 유명했었죠.

고무신을 말아넣어서 차를 만들고 진흙이나 모래밭에서 놀던 기억이 납니다... 아니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당시에는 곤로(지금은 풍로라고 부르나요?)로 난방과 취사를 겸했기 때문에 서울 동네에는 이런 석유집이 한군데는 꼭 있었습니다.

지금은 사라진 전당포입니다. 그 당시에는 동네 번화가마다 있었죠.

신동우 화백의 홍길동 간판과 골목길에 붙은 영화포스터입니다.

동네 막걸리집 또는 주점입니다. 그런데 아주머니가 들고 있는 간장병(아마 샘표)이 에러입니다. 당시에는 저런 간장병을 안썼죠.

어머님이 독실한(?) 토속신자여서 어릴 때부터 너무 자주갔던 무당집입니다.

설날에 무당아주머니에게 세배하고 돈받을 욕심으로 '절해도 되요?'라고 물었다가 무당과 어머니에게 기본이 잘 된 놈이라고 극찬을 받고 앞의 장군신에게 절했던 기억이 납니다. 당연히 돈은 못받았습니다.

석유집과 함께 동네마다 있었던 어름집입니다. 위생상태는 당연히 기대할 수가 없죠. 엄청 큰 얼음덩어리를 찍어서 꺼낸 후에 녹슨 쇠톱으로 잘라냈습니다. 동네 아이들은 그 때마다 옆에 있다가 부서진 조각을 서로 다투며 챙겼고요.

신속배달 문구는 에러입니다. 동네에서 무슨 신속까지...

세월이 지나도 살아남은 뻥튀기입니다. 당시에는 엿장수와 함께 동네 아이들 털어먹는 전형적인 사기(?) 행상이었죠.

아이들에게 부수러기 주면서 살살꼬시면 집에 있는 책이나 심지어 신고있던 고무신을 넘겨주고 잠시 동네아이들 잔치를 즐긴 후에 저녁에 개맞듯이 맞으며 아저씨 찾아다니곤 했었습니다.

앞에 연식이 상당한 모르는 ㅡ.ㅡ  아주머니가 있군요. 이 아주머니 정신이 나갔는지 자꾸 제 차를 타기에 집으로 데려와서 옆에 재웠습니다. ㅡ.ㅡ  

동네 구멍가게의 어름과자(왼쪽)와 빙수기계(오른쪽)입니다. 어름과자는 드라이아이스 주머니 위에 색소넣은 얼음덩어리였습니다.

전형적인 동네 뒷골목 풍경입니다.

당시 골목에는 북한스러운 생산장려 포스터가 곳곳에 붙어있었습니다.

그 당시 부업으로 할 수 있던 일이 풀봉투 붙이는 일이었습니다. 포장지가 없었기 때문에 폐지를 가지고 봉투를 붙여서 1장에 10전 하는 식으로 납품했는데 수출산업이 힘을 내면서부터는 와이셔츠 단추 다듬기, 곰 눈알붙이기 등이 인기를 끌었죠.

그런데 풀봉투붙이던 시기 그리고 그 정도의 집에서 전기밥솥은 상당한 오버입니다. 그냥 아랫목(연탄불이 있는)에 넣고 이불을 덮었죠.

전형적인 문방구입니다.

6/25전쟁 또는 군사격장 불발탄을 가져다가 해체해 고물로 파는 일이 많았는데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쳤습니다.

제가 두들겨맞으면 많이도 갔던 만화방입니다. 앗! 그렇게 들었던... 못구해서 칼러 만화를 가져다 놓았는데, 당시는 그냥 두꺼운 종이에 조잡하게 인쇄된 흑백만화였습니다. 용가리 만화가 지금도 기억이 나는군요.

70년대의 상업계 고등학교 교실입니다. 당시 타자와 주판은 취업의 열쇠였죠.

왠만한 상고는 인문계 고등학교보다 인재들이 많이 갔습니다.

큰 주전자로 수돗물을 받아오면 저 다방스러운 컵으로 온 급우가 돌려마셨죠.

수업 중에 선생님이 '주번 나와서 뒤집어라'했던 도시락입니다. 가장 밑에 것은 타기때문에 시간마다 순서를 뒤집어야했습니다.

군사정권의 잔재인 교련복입니다. 박통과 그 무리의 광적인 집착때문에 심지어 초등학교 2학년때에 사열준비하다가 발 못맞춘다고 턱이 돌아가게 맞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고등학교가 아니라 초등학교 때 일입니다.

당시 가장 인기있었던 학생잡지입니다. 누님 것을 몰래 보다가 혼나기도 했죠. 옆은 교련시간에 들던 무거운 고무소총입니다.

당시 나름 인기있었던 직장인 전화교환원입니다.

 

외국인과의 펜팔은 대세였는데... 사진을 축소해서 안보이지만, 나이트클럽처럼 여성 회원은 무료입니다. 주로 미군애들이었기 때문이죠.

연탄집 아이가 져나르던 기구입니다. 많으면 등에 지고 낱장은 저렇게 집계로 들었습니다.

어느 집에나 있던 찬장입니다. 서민용이라고 해서 못사는 사람이라고 착각하기 쉽지만 당시는 서민이 99%였습니다.

에이고... 자랑스러운 박통과 그 일가입니다. 중간에 선 여학생이 지금 유신 추억잔당을 믿고 나서는 박근혜씨죠?

박통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면도 있지만 우리나라에 너무나도 많은 해악을 남긴 인물이기도 합니다.

동네 의원에 가면 이런 공포의 찬장이 있었는데 여기에서 주사를 꺼내올 때면 어차피 맞을 건데도 악을 써대면 반항했었죠.

 당시 성인용 잡지의 대세 선데이 서울입니다. 저는 나이가 어렸고 어릴 때부터 복싱을 너무 좋아해서 돈만 있으면 주간 스포츠를 샀었습니다.

 당시로는 파격적인 달력인데, 3대 트로이카 중 한 명이었던 유지인씨입니다. 몸매는 유지인, 얼굴은 정윤희라는 말이 있었죠. 다른 한 분은 지금도 활발한 활동을 하는 장미희씨입니다. 야한 장면 하나없는 파격적인 성인영화 겨울여자로 당시 꿈과 같았던 100만 관중을 넘어섰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은 줘도 안먹지만 당시에는 한 숟갈이라도 얻어먹으려고 강아지새끼마냥 젖먹이 옆에서 헥헥댔던 분유입니다.

 당시 한 집에 한 세트는 반드시 있었던 못난이 인형입니다.

 광고문구를 잘 보시기 바랍니다.

분말주스인데... 고급식용색소만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색소로 주스맛을 내는 것입니다. 그것도 없어서 못 먹었죠.

 연고 이름 잘보시고요.

 좀 있는 집 아이가 먹었던 원기소 영양제입니다.

 

나이가 젊은 분들은 어떻게 이렇게 살았나 싶겠지만, 어차피 여러분의 신세대도 5년만 지나면 다른 세대에게 밀려나고, 여러분의 찬란한 전성시기도 50년 후에는 빛이 바랜 늙은이의 추억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만큼 여러분의 자취가 하나도 묻어있지 않은 답답한 역사이지만 작은 관심을 가져주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