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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남북전쟁

세계사를 바꾼 미국 남북전쟁 (8) - 차타누가 공성전(2부)

by uesgi2003 2013. 1. 30.

 

요즘이 좀 더 살기 힘들어졌다는 글을 올린 적이 있었는데, 각종 사건사고 소식이 순식간에 알려지는 이유도 있고 소득격차가 그만큼 심해진 이유도 있을 겁니다.

어제도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었는데, 부모에게 버림받은 3자매가 심각한 건강상태로 발견되었었죠. http://media.daum.net/society/others/view.html?cateid=1067&newsid=20130130023110041&p=seoul 

 

성인은 자신의 책임이 크지만 아이들은 부모나 주변의 지원이 없으면 유기동물과 같이 비참한 신세가 됩니다. 어떻게든 성장했다고 해도 밑바닥 인생은 큰 계기가 없이는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여유있는 삶은 아니지만 주변에 약간만 더 관심을 가지고 한 달에 몇 천원만이라도 기부하거나 베풀었으면 합니다. 우리가 아니라서, 우리 아이가 아니라서 외면한다면 우리가 다른 어려움을 겪을 때에도 도움을 바라지 못할 겁니다.

 

세계사를 바꾼 미국 남북전쟁 (8) - 차타누가 공성전(2부) 

 

번사이드의 병력은 11월 15일에 도시 남쪽 고지에서 롱스트리트의 병력과 만났다. 윌리암 샌더스(Sanders) 기병대는 얼마 안되는 병력이었지만 남군 기병 3개 여단을 밀어냈다. 그 후 며칠 동안 롱스트리트는 북군을 우회해서 포위하려고 시도해봤지만 레노와(Lenoir) 기차역에서, 다시 캠벨(Campbell) 기차역에서 북군은 교묘하게 빠져나갔고 11월 17일에는 아예 요새화된 녹스빌 안으로 무사하게 도망쳤다. 

녹스빌은 풍족한 도시가 아니었기 때문에 양쪽 모두 심각한 보급난을 겪고 있었다. 처음부터 보급을 받지 못한 남군은, 녹스빌 부근 주민의 적대적인 태도까지 만나게 되니 북군보다 훨씬 어려운 상황이었다. 

일주일 동안 고민한 롱스트리트는 도시 북서쪽의 진지에 총력으 기울이기로 했다. 지난 18일에 대단한 활약을 하고 치명상을 입은 기병 지휘관 샌더스의 이름을 딴 샌더스 요새는 높은 방벽뿐만 아니라 바로 앞에 깊은 도랑이 파여 있었는데 롱스트리트는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양쪽에 배치된 대포는 도랑을 향해 조준되어 있어서 죽음의 덫이었지만, 북군에게 들키지 않고 대병력이 집결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라는 이유로 여기가 선택되었다. 

 

11월 24일 공격준비를 마쳤지만 브래그가 지원군을 보냈다는 소식을 들은 롱스트리트는 기다리다가 28일에 차타누가에서 남군이 패배를 당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야습을 감행하기로 결정했다. 

자정무렵 북군 초병이 제압되었고 29일 맥로스(McLaws)의 3개 여단이 총검을 앞세우고 돌격해들어갔다. 북군의 근거리 사격을 맞아가며 전진하던 선두가 갑자기 시야에서 사라졌다. 도랑으로 굴러떨어진 후에 방벽을 기어오르는 동안 거의 학살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땅은 피로 물들었고 뒤따르던 병사들은 앞 사람이 흘린 피에 미끄러져 내려왔습니다."

20분 정도 지나자 롱스트리트는 작전을 중단시켰지만 이미 813명의 부하를 잃은 후였고 북군의 피해는 거의 없었다. 북군 장교가 말했듯이 "프레데릭스버그의 재편"이었다.

작전이 중단된 직후, 롱스트리트는 데이비스 대통령에게서 긴급 연락을 받았다. 차타누가에서 큰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북군 총사령관 율리시스 그랜트는 공격적인 성격으로, 차타누가에 틀어박혀 있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크랙커 보급로가 열리자 마자 참모총장 헨리 홀렉(Halleck)에게 "남군이 이대로 일주일만 있어준다면 모든 위기는 지나가고 우리는 다시 공세로 나설 수 있을 것입니다"라는 보고를 했다.

그가 기다리는 것은, 윌리암 셔먼의 테네시군이었다. 멤피스(Memphis)에서 떠난 테네시군은 홀렉의 명령에 따라 멤피스와 챨스콘(Chaleston) 노선을 수리하며 이동하느라 시간이 오래 걸리고 있었다. 11월 2일, 그랜트는 셔먼에게 철로는 그대로 두고 "브릿지포트(Bridgeport)를 향해 최대한 빠르게 이동해 줄 것"을 명령했다.

셔먼의 군대가 도착하면서 그랜트는 3개 군을 보유하게 되었고 셔먼에게 포위망을 돌파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기기로 했다. 그랜트는 셔먼의 능력을 믿고 있었고 테네시군은 자신이 지휘하던 병력이라 잘 알고 있었다. 반면에 다른 두 군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후커의 11과 12군단은 포토맥군에서 버려진 존재로 보였고 컴벌랜드군은 앞선 전투에서 패전을 했었기 때문이다.

"컴벌랜드군은 치카마구아 전투에서 얼마나 심하게 당했는지 참호 밖으로 나가려 하지 않았다"

 

셔먼의 목표는 브래그의 우익으로, 남군의 남쪽 보급로가 북쪽의 롱스트리트의 보급로와 만나는 교차지점으로 결정되었다. 셔먼은 브릿지포트에서 브라운 선착장으로 이동한 다음에 테네시 강 북쪽으로 도강해 차타누가 북쪽 언덕으로 이동할 계획이었다. 당연히 룩아웃 산에 있는 남군에게 움직임이 그대로 보이겠지만 북군의 최종 목적지는 마지막에나 알게 될 것이다.

남군이 눈치를 차렸을 때에는 이미 윌리암 스미스가 설치해 놓은 임시 다리를 넘어 미셔너리(Missionary) 산등성이를 따라 남군의 우익을 밀어내고 있을 것이고 보급로가 끊긴 브래그는 전면전을 피하고 후퇴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랜트는 후커와 토마스에게 지원 역할을 맡기고 12군단은 룩아웃 산을 우회해 로스빌(Rosville)에 있는 남군의 좌익을 위협하고 11군단은 차타누가 반대편에서 명령을 기다리게 했다. 토마스에게는 셔먼을 화력지원하다가 남군 중앙을 공격하게 했다.

11월 15일, 셔먼이 드디어 차타누가 근처에 들어왔고 잠시 미셔너리 산등성이를 보고 나서는 "해낼 수 있겠습니다"라며 자신의 부대로 돌아갔다.


원래 공격은 11월 21일로 예정되었지만 날씨가 험악해지면서 계속 지연되었고 바로 전 날인 20일까지도 폭우가 쏟아지고 강물이 불어나면서 임시 다리가 쓸려갈 정도였다. 강을 건너지 못한 1개 사단에게는 후커 군단에 합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셔먼이 브라운 선착장에서 강을 건너는 것을 본 남군이 착각을 해주기만 바라는 수 밖에 없었다. 그랜트는 셔먼에게 토마스 군단에서 1개 사단을 주었고 24일로 다시 공격날짜가 정해졌다. 

그랜트가 바란대로, 남군은 혼란에 빠졌다. 북군이 이리 저리 움직이는 것을 보고받은 브래그는 셔먼의 위치와 목표가 무엇인지 알지 못해 고민했다. 결국 셔먼이 녹스빌로 이동 중이라고 오판하고 11월 22일, 버크너와 클레번 사단에게 롱스트리트를 지원하라고 내보냈다. 

브래그는 나름대로 묘안을 생각해내고 휴전 깃발과 함께 그랜트에게 편지를 썼다. 

"차타누가에는 비전투원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들을 미리 철수시키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랜트는 편지를 받고 어리둥절해했다. 브래그가 곧 공격한다는 의도를 일부러 알려준 것이 분명했다. 남군 탈영병이 브래그가 병력을 미셔너리 산등성이에서 빼내고 있다고 알려주었는데 그랜트는 정말로 남군이 후퇴하고 있는 지를 확인해보고 싶었다. 정말로 그렇다면 지금 당장 공격해야 하는데, 셔먼은 준비가 안되었고 토마스 군단으로 시험해보면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차타누가와 미셔너리 산등성이 사이에는 차타누가 계곡이 있었고 오차드 노브(Orchard Knob)이라는 숲이 우거진 높은 언덕이 있었다. 몇 주 동안 남군이 장악하고 있었는데 그랜트는 토마스에게 무력정찰을 해서 남군이 여전히 있는 지를 확인해달라고 했다. 

23일 정오에 필립 쉐리던(Sheridan) 사단과 토마스 우드(Wood) 사단이 양쪽에서 천천히 나타났지만 남군은 북군이 훈련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오후 2시에 2개 사단이 돌격해 들어가자 남군은 엄청난 수의 적이 정말로 쳐들어온다는 것을 알았지만 순식간에 브래그의 포위망 중앙에 1.5km 깊이의 돌출부가 파이게 되었다. 토마스를 후속병력을 즉시 투입하고 포대를 설치해서 남군의 반격에 대비했다. 

오차드 노브는 전략요충지는 아니었지만 브래그가 후퇴하지 않았다는 귀중한 정보를 제공해주었다. 브래그도 그랜트가 공세로 나서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브래그는 이동 중이던 클레번 사단을 급하게 다시 불러들이고 윌리암 워커(Walker) 사단도 룩아웃 산에서 불러들여서 미셔너리 산등성이 북쪽 끝에 배치시켰다. 

셔먼은 차타누가 북서쪽 13km 지점에 드러내지 않고 공격을 준비 중이었고 후커 군단도 룩아웃 산에 위장공격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탈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24일 자정부터 북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테네시 강은 북군이 탄 보트로 가득찼고 반대편 강변의 남군 초병은 순식간에 제압되었다. 15분도 안되어서 1,000명이 반대편에 상륙했고 차타누가에서 증기선이 더 많은 병력을 태우고 나타났다. 병력을 내린 보트는 연결되어 셔먼의 3개 사단이 건널 수 있는 다리로 변했다. 

오후 1시, 셔먼은 강의 동쪽 고지를 향해 부하들을 전진시켰고 이상하게도 남군의 반격은 일체 없었다. 남군의 포화가 쏟아진 것은 고지 정상에 올라섰을 때였다. 셔먼은 대포를 힘들게 끌어올려 대응사격을 했고 아무래도 뭔가 이상해서 지도를 확인했더니... 이 고지가 아니었던 것이다(그림 참조). 

셔먼의 목표는 기차 터널이 있는 터널 고지로 미셔너리 산등성이의 북쪽 끝에 있는 것이었다. 터널 고지로 가려면 완전히 산 하나를 내려가야만 했다. 도강 작전은 완전히 성공했지만 셔먼의 병력은 엉뚱한 곳에 있었고 기습은 아무런 효과도 없는 것이 되었다. 상황이 파악이 안된 셔먼은 일단 참호를 파고 밤을 지새우기로 했다. 셔먼의 3개 사단은 클레번 사단에서 급하게 배치된 1개 여단을 밀어냈을 뿐이었다. 클레번 사단은 녹스빌로 가던 중에 브래그에게서 돌아와서 치카마구아의 남쪽 입구를 어떤 희생을 무릅쓰더라도 지켜내라는 명령을 받았었다. 


셔먼의 26,000명은 남군 클레번과 스티븐슨 사단의 10,000명보다 훨씬 많았지만 지형이 너무 험악했다. 1.5km 이상 떨어진 남군 방어선에 가려면 방금 올라왔던 고지를 내려가서 사격을 받으며 개활지를 건너 다시 가파른 고지를 기어 올라가야 했다. 

클레번은 정상에 포대를 설치해 방어선을 보강했고 중앙에는 제임스 스미스의 텍사스 여단을 배치했다. 

5시간 동안의 격전에도 불구하고 북군은 남군을 조금도 밀어내지 못했고 오후 3시 정도에 2,000명의 피해를 낸 셔먼은 작전을 중단하고 그랜트에게 가서 더 이상은 무리라고 말했지만 그랜트의 답변은 간단했다. "다시 공격하시오."

셔먼은 명령을 따르는 척하면서 200명만 보냈고 간신히 살아돌아온 생존자를 끝으로 터널 고지 공격은 중단되었다. 

그랜트는 믿음이 안가는 토마스 컴벌랜드군을 남군 중앙에 투입하기 전에 측면을 뚫어보고 싶었는데 셔먼이 실패하자, 다시 남군 좌익의 후커에게 모든 것을 걸기로 했다. 


같은 날 오전부터 공격에 나섰던 후커는 남군이 파괴한 다리를 다시 놓느라 시간을 보냈고 오후 3시가 되어서야 로스빌 협곡을 장악하고 미셔너리 산등성이의 남쪽 오르막에 교두보를 마련할 수 있었다. 

병력에서 차이가 났던 남군 브렉킨릿지는 점차 뒤로 밀려났고 그랜트가 그렇게 바라던 측면 돌파를 가장 믿었던 셔먼이 아닌 후커가 해낸 것이다. 

그랜트는 더 이상 기다리지 않기로 하고 토마스에게 전진하라고 명령했다. 그랜트는 남군의 전방 진지만 점령하고 거기에서 대기하라는 간단한 명령만 내렸다. 

브래그는 병력 중 절반을 전방의 진지에 배치하고 만약 공격을 당하면 일제사격 후에 도지로 후퇴시킬 생각이었다. 

컴버랜드군 20,000명이 들판에 모습을 드러내자 산 정상의 남군 방어선에는 긴장이 흘렀다. 그랜트의 걱정과 달리 컴버랜드군은 지난 전투의 패배를 설욕하려는 투지가 강력했고 전방 진지의 일제사격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경사로를 달려 올라가기 시작했다.

브래그의 명령대로 일제사격 후에 진지에 있던 남군이 후퇴하자, 몇 명의 북군이 그 뒤를 추격했고 결국 토마스 군단 전체가 정상을 공격하는 형태가 되고 말았다(그림 참조). 

멀리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그랜트는 토마스를 몹시 질책했다. "누가 정상공격하라고 명령했습니까?" 통제되지 않는 부대의 참상을 많이 경험한 그랜트는 후퇴명령을 내리려고 하다가 "이대로 공격해도 될 것 같은데? 실패하면 책임질 사람이 있으니까"라고 중얼거렸다. 


미셔너리 산등성이는 대혼란에 빠졌다. 전방 진지에서 빠져나와 정상으로 복귀하던 남군은 아군의 총에 맞아 쓰러지는 사람이 나왔고 북군은 포화를 뒤집어쓰면서도 용감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북군이 조금도 물러서지 않은데다가 작전에 따라 후퇴하던 아군을 패주하는 것으로 착각한 남군의 사기는 크게 떨어졌다. 무기를 던지고 산 뒤로 도망가는 병사들이 줄을 이었고 미셔너리 산등성이 곳곳에 북군의 연대기가 휘날리기 시작했다. 

북쪽에서 셔먼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낸 클레번 사단에게는 후퇴로를 확보하라는 명령이 떨어졌고 황당한 명령에 놀란 클레번은 병사들을 모아 터널 고지에서 내려와 달아나는 아군의 배후를 지켰다. 

그날 밤, 그랜트는 워싱턴의 홀렉에게 "아직 전투가 마무리되지 않았지만 브래그를 패배시켰다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룩아웃 산 정상, 차타누가 계곡의 진지, 미셔너리 산등성이 전체를 점령했고 브래그의 반격은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라는 승리의 전신을 보냈다(아래 사진 참조). 


11월 25일 저녁, 브래그의 패잔병은 치카마구아 기차역에 모여 기차를 타고 조지아 북부로 후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찌나 황급하게 후퇴를 했던지 다음 날 아침에는 온갖 곳에 마차와 대포 잔해 그리고 타다남은 곡식 자루들이 널려있었다. 

그랜트는 전군을 동원해 남군의 뒤를 추격했지만 클레번이 4,200명만 가지고 용감하며 6시간 동안 버텨준 덕분에 브래그는 안전한 거리까지 후퇴할 수 있었고 클레번의 전공은 남부 의회가 인정해주었다. 

11월 28일, 그랜트는 보급로가 늘어지는데다가 워싱턴에서 녹스빌에 갇혀있는 번사이드를 구출해야 한다고 계속 요구해왔기 때문에 더 이상의 추격을 하지 않았다. 홀렉은 "번사이드 장군이 심한 압박을 받고 있으며 더 이상 그대로 둘 수 없습니다. 전군을 동원해 그를 구원해야 합니다"라는 명령을 했다. 

번사이드의 군수품이 12월 3일까지만 버틸 수 있는 정도로 정말로 심각했기 때문에 고든 그랜저(Granger)의 4군단을 북쪽으로 이동시켰지만 그랜저는 "녹스빌로 전진하는 것은 아주 안좋은 결정이라고 판단했다"라며 명령을 거부했고 그랜트는 그랜저의 4군단을 빼앗아 셔먼에게 주고 녹스빌을 구원하라고 보냈다. 

셔먼의 부대는 북군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었고 탄약도 떨어진 상태였지만 쉬지 않고 130km 정도를 행군해 녹스빌에 도착했다. 12월 3일 데드라인에는 이미 롱스트리트가 녹스빌 포위를 풀고 후퇴한 상태였다. 롱스트리트는 이미 4일 전의 공격실패로 큰 피해를 입은데다가 구원군이 온다는 소식에 더 이상 있을 필요가 없었다. 


브래그는 차타누가를 잃은 비난을 병사들과 지휘관에게 돌리면서 스스로 사임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룩아웃 산은 어떤 희생을 치루더라도 지켰어야 했는데 병사들은 매우 실망스러운 전투를 했다. 그리고 나를 상대로한 전쟁은 대성공을 거뒀는데 그 결과가 바로 차타누가 함락이다." 

11월 30일, 데이비스 대통령은 브래그의 사임을 받아들이고 윌리암 하디(Hardee)를 테네시군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브래그는 리치몬드로 소환되어 군참모가 되었다.

차타누가를 북군에게 내준 남부는 문이 활짝 열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랜트는 3개 군을 차타누가에서 재정비하면서 봄의 군사작전을 준비했다. 링컨은 그랜트를 워싱턴에 불러 북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했고 서부전역 사령관에는 셔먼이 임명되었다. 그리고 전쟁발발 후 처음으로 북군의 서부전역과 동부전역이 협동하며 양동작전을 펼칠 수 있게 되었다. 

그랜트가 버지니아의 리를 공격하는 동안 셔먼은 조지아의 테네시군을 공격하게 되는데, 그랜트는 셔먼에게 자율권을 주었고 셔먼은 남부의 공장이라고 할 수 있는 아틀란타를 다음 목표로 결정한다. 


차타누가 피해


북군 피해

전사        753명

부상       4,722명

실종       349명

총계      5,824명


남군 피해

전사       361명

부상      2,160명

실종      4,146명

총계      6,667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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