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근대/남북전쟁

세계사를 바꾼 미국 남북전쟁 (7) - 치카마구아 전투 (3부)

by uesgi2003 2013. 1. 21.


누구나 아는 듯 싶지만 의외로 많은 분들이 착각하는 교통상식 한 가지가 바로 비보호 좌회전입니다. 원래 직진 신호에서 오가는 차를 보며 자신의 위험부담으로 좌회전하는 방식인데 적색 신호에서 비보호 좌회전하시는 분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이 경우에 사고가 나면 일부러 와서 받은 것이 입증되지 않는 한은 좌회전하던 차의 100% 책임이고 특히 적색신호에서는 좌측에서 직진 신호를 받고 나오는 차들과 사고가 생길 위험이 큽니다. 


특히 뒷차량이 비보호 좌회전 차선에서 기다리다가 안간다고 마구 빵빵거리면 당황해서 급하게 좌회전하기 마련인데, 이럴 때에 사고가 나면 뒷 차 운전자 놈은 슬그머니 도망가겠죠? 오늘도 택시가 뒤에서 지랄(^^ 실제로 지랄한 것이 맞습니다. 계속 빵빵거리면서)해대니까 앞 차가 결국 적신호에서 좌회전 시도하다가 사고가 날 뻔했습니다. 만약 머뭇거리지 않고 그대로 속도를 내서 좌회전했다면 좌측에서 정상신호받고 나오던 차와 부딪힐 뻔 한거죠. 


그럴 때에는 그냥 무시하거나, 기어 옮기고 내려서 천천히 뒷 차에 다가가서 조용히 몇 마디하면 됩니다. 당황해서 움직이면 뒷 차는 절대로 자신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변호안해줍니다. 몇 분 더 기다리고 여유를 가지는 정상운전이 더 먼저이겠지만요. 


세계사를 바꾼 미국 남북전쟁 (7) - 치카마구아 전투 (3부)


숲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후드의 6개 여단은 북군 제퍼슨 데이비스(Davis)의 3개 여단에 덤벼들었고 몇 분만에 1개 여단을 전멸시키며 여단장과 696명을 죽였다. 다시 한 번 북군의 전열은 무너지기 직전이 되었다. 

위기의 순간에 토마스 우드(Wood) 사단이 틈을 메웠고 와일더(Wilder) 기병여단과 필립 셰리던(Sheridan) 사단이 그 뒤를 따라 위기의 현장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북군 포병대가 급히 포를 방열하고 후드 사단의 측면에 포탄을 퍼부어대자 후드 사단은 급하게 도랑으로 몸을 숨겨야만 했다.

와일더의 기록에 따르면 "그들 서로의 몸 위로 굴러떨어졌다. 그 모습이 얼마나 가련하던지 사격을 중지시켜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할 정도였다."


해가 저물자, 6.5km의 전선의 전투가 잦아들었고 토마스는 전열을 재정비하면서 남군이 또 한 번 공격해올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실제로 남군은 지치지 않고 공격해왔는데 이번에는 클레번(Cleburne) 사단의 차례였다. 제 때에 투입되었다면 훨씬 큰 영향을 미쳤겠지만 브래그가 뒤늦게 전선에 투입한 것이었다. 

클레번의 5,000명은 노을 속에서 치카마구아를 건너 베어드(Baird)와 존슨(Johnson) 사단에게 돌격해 들어갔다. 완전히 어둠이 내릴 때까지 300명의 포로를 잡고 북군을 1.5km 정도 밀어내는 것으로 전투를 끝냈다. 

첫 날의 의도하지 않았던 격전이 끝났는데도 휴식을 취할 여유가 없었다. 새벽부터 전투가 재개될 것이 분명했고 전초병은 서로의 모습이 보이기만 하면 저격을 해댔다. 

저녁 11시 지휘관을 소집한 로즈크랜스는 방어태세로 나가기로 하고 네글리(Negley) 사단을 중앙에서 토마스의 좌익으로 옮겨 좌익을 보강시켰다. 

남군도 전열을 가다듬으면서 폴크(Polk) 군단이 힐과 워커 군단과 함께 우측으로 공격하고 롱스트리트(Longstreet)는 벅크너(Buckner) 군단과 함께 좌측에서 공격하기로 했다. 

워낙 많은 병력을 움직이는 것이라 많은 혼란이 뒤따랐고 롱스트리트의 병력은 남쪽 수십 km나 떨어진 기차역에서 아직 도착도 하지 못한 상태였다. 롱스트리트가 오후 2시에 기차역에 도착했는데도 남군 중 어느 누구도 마중을 나오지 않았고 그는 포성소리를 따라 전장을 찾아가는 황당한 일을 겪었었다. 밤 11시에 겨우 브래그 사령부에 도착한 롱스트리트는 몹시 화가 났지만 우선은 전투가 먼저였기에 새벽에는 전투에 나설 준비를 했다. 


브래그는 전날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폴크 군단의 사단이 차례로 투입되면서 북군 좌익을 공격하는 피해가 극심한 힘겨루기 전투방식이었다. 좌익 공격이 제대로 진행된다면 롱스트리트가 북군의 중앙와 우익에 6개 사단을 투입해서 공격하게 된다. 

그러나 늘 그랬듯이 전날 밤의 병력이동으로 지연되었고 심지어 힐은 명령을 못받았다고 주장하며 다시 명령을 받을 때까지 움직이려고 하지 않아서 폴크의 공격자체를 가로막아 버렸다. 폴크는 해가 뜬 후에도 신문을 읽으며 아침식사를 즐기며 공격예정 시간을 훌쩍 넘겨버렸다. 

오전 9시 30분을 넘겨서야 전투가 시작되었고 전날처럼 격렬해졌다. 남군 브렉킨릿지(Breckinridge) 사단이 가장 먼저 돌격하며 토마스의 가장 왼쪽을 우회했고 북군 네글리 사단의 방어선이 안쪽으로 축소자 브레넌(Brannan)과 반 클레브(Cleve) 사단이 급히 지원에 나서 남군을 밀어냈다. 


다음 차례인 클레번 사단은 오전 10시부터 공격에 나섰지만 지난 밤에 급하게나마 만들어놓은 진지에 틀어박힌 북군의 일제사격을 받고 무너졌다. 폴크는 사단을 연달아 하나씩 내보냈지만 북군의 소총과 포탄 세례를 받고 막대한 피해만 입었다. 

남군의 공격이 좀처럼 수그러들 기세가 안보이자 토마스는 전날에도 그랬던 것처럼 로즈크랜스에게 우익에서 병력을 빼내 자신을 도와달라는 급한 요청을 했고 로즈크랜스는 그 요청을 받아들이는 치명적인 실수를 했다. 

병력이 이동하는 동안 참모 한 명이 북군 중앙이 비었다는 착각을 하고 로즈크랜스에게 보고를 했고, 토마스 우드 사단이 왼쪽으로 움직여서 레이놀즈 사단과 겹치는 일이 벌어졌다. 우드는 이미 아군이 숲 안에 숨어있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렇지 않아도 명령 불복종으로 심하게 질책을 받았던 터라 이번에는 그대로 명령을 따르기로 했다. 

우드 사단이 움직이면서 오히려 북군 중앙에는 500m 정도의 틈이 생겼고 토마스의 요청에 따라 셰리단과 데이비스 사단도 북쪽으로 이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큰 구멍이 생기게 되었다. 

그 순간에 롱스트리트의 병력 대부분이 그 틈으로 쏟아져들어갔다. 브래그처럼 한 번에 한 사단씩 투입하지 않고 모든 병력이 한꺼번에 전장에 투입되어 밀고 들어갔다. 


북군의 방어선은 순식간에 돌파당했다. 16,000명의 남군이 고함을 지르며 무인지경으로 틈을 밀고 들어와 북군 양쪽의 노출된 측면을 공격했고 북군은 그대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오후 12시 15분, 맥쿡(McCook) 군단과 크리텐덴(Crittenden) 군단 대부분은 맥팔랜드(McFarland) 협곡을 향해 등을 돌렸다.

공황상태에 몰려 정신이 없는 로즈크랜스에게, 제임스 가필드(Garfield, 후에 미국 대통

령)는 차타누가로 가서 최후의 방어를 하자고 설득했다. 그리고 자신은 토마스를 찾아가 제대로 버티고 있는 지를 확인하려고 했다. 

토마스는 가필드의 기대처럼, 스노드그래스(Sondgrass) 언덕과 호스슈(Horseshoe) 산등성이 부근에서 브레넌과 팔머 사단 그리고 방향을 잃은 북군 여단들을 데리고 힘든 방어를 계속 하고 있었다. 

그는 롱스트리트의 커쇼(Kershaw) 사단, 하인드맨(Hindman)과 버시로드 존슨(Johnson) 사단의 공격을 차례로 막아냈다. 늦은 오후가 되자 남군 폴크는 호스슈 산등성에서 포위된 북군을 향해 5개 사단을 투입해 공격했지만 이번에도 막아냈다. 탄약이 거의 떨어진 위기의 순간에 고든 그렌저(Granger) 예비군단의 2개 여단이 95,000발의 탄약을 가지고 도착했다. 

토마스는 부대를 오가며 병사들을 격려했고 "치카마구아의 바위"라는 자랑스러운 별명을 얻게 된다. 


그러나 북군의 나머지 병력이 도망친 상태에서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던 토마스는 어두워지는 틈을 타서 한 부대씩 협곡으로 후퇴시켰다. 롱스트리트가 "요술을 부린 것처럼, 우리 앞에서 북군이 녹듯이 사라져버렸다"고 기록할 정도의 대단한 후퇴였다. 

토마스는 로스빌(Rossville) 부근에서 전열을 정비하고 남군의 추격에 대비했지만 브래그는, 롱스트리트, 포레스트와 다른 많은 지휘관의 반대를 무릅쓰고 추격에 나서지 않았다. 

브래그는 "이미 많은 병사를 잃었고 포대를 견인할 말도 없다"라며 차타누가를 향해 북쪽으로 병력을 이동시켰고, 그렇게 결정적인 기회를 놓치게 된다. 









치카마구아 전투 피해 


북군

전사       1,657명

부상       9,756명

실종       4,757명

총계      16,170명


남군

전사     2,312명

부상    14,678명

실종      1,468명

총계     18,458명


앤티텀 전투 당시의 롱스트리트입니다. 

원래 북 버지니아 군에서 로버트 리의 가장 믿을 수 있는 지휘관 중 한 명으로 주역을 담당했지만, 게티스버그 전투에서는 리의 작전을 제대로 따르지 않고 태업을 벌이다가 서부 전역으로 스스로 전출을 요구해 이번 전투에 참가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