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근대/남북전쟁

세계사를 바꾼 미국 남북전쟁 (9) - 와일더니스 (1부)

by uesgi2003 2013. 2. 6.


계속 강조해왔듯이 제 이야기는 모두 수십 년 동안 연구하신 학자분들과 자료를 편찬한 출판사들 덕분입니다. 그래서 제 블로그의 이야기를 가져가는 것을 권하고 더 많은 분들이 보셨으면 했는데, 요즘 지적재산권 문제가 크게 대두되고 있어서 더 이상 '펌'을 허용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에게 보다 정확하고 생생한 이야기를 전해드리려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지적재산권이 있는 사진과 이야기를 인용할 수 밖에 없습니다.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자료를 인용할 때에는 해당 출판사의 어느 책이라는 것을 밝히도록 하겠습니다. 


세계사를 바꾼 미국 남북전쟁 (8) - 와일더니스 (1부)


1864년 3월 초, 내전은 4년차에 접어들었고, 워싱턴의 초대를 받은 율리시스 그랜트는 참모총장으로 북군 전체를 지휘하게 되었다. 그랜트는 "마치 비정규직으로 사무실에 나와 있는 것 같은 평범한 사람으로 특색이 없었다"라는 인상과 달리 서부 전역의 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끌었고 링컨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1863년 7월에는 미시시피 빅스버그를 점령했고 그 해 11월에는 차타누가를 포위한 남군을 조지아로 밀어냈었다. 

링컨은 그랜트에게서 북군 지휘관에게는 없는 공격적이고 단호한 전사의 모습을 봤는데, 그 동안 믿었던 맥클레란, 포프, 번사이드, 후커, 미드의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면 더더욱 믿음이 갔다. 미드는 게티스버그에서 리의 공격을 막아낸 후에 그를 추격하는데 실패했고 8개월 동안 큰 전과를 올리지 못했다. 

미드는 실망스러운 전과때문에 포토맥군의 지휘관에서 해임될 것으로 예상했었지만 그랜트는 미드의 사임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랜트가 전체 작전권만 가져갔다. 미드와 헤어진 그랜트는 오른팔인 셔먼을 만나 남군에게 결정타를 날릴 새 전략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그랜트에게 주어진 22개 군단 662,000명 중에서 약 530,000명을 전투에 투입할 수 있었는데, 그는 동부와 서부 전역의 모든 북군이 동시에 공격해 남군이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하지 못하게 만들 생각이었다. 

그랜트는 도시를 점령하는 땅따먹기보다는 리의 북 버지니아군과 존스톤의 서부군을 야전으로 끌어내 승부를 보기로 하고 셔먼은 100,000명의 병력으로 존스톤을 공격하는 동안, 자신은 나머지 병력으로 버지니아의 리를 공격하기로 했다. 

그랜트는 미드에게 "귀관의 목표는 리의 군대입니다. 리가 가는 곳은 반드시 귀관이 따라가야 합니다"라는 간단한 명령을 내렸다. 프란츠 시겔(Sigel)의 26,000명에게는 쉐넌도어(Shenandoah) 계곡을 통과해 남진하면서 리의 보급원, 통신과 교통망을 위협하게 하고 벤자민 버틀러(Butler)에게는 버지니아 반도를 가로 질러 리치몬드로 진격하면서 미드와 협공하게 했다. 

 

리는 그 동안 오랜 좌절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게티스버그 전투에서 75,000명 중 30% 이상을 잃은데다가 후퇴하는 동안 탈영이 이어졌지만 남부에서는 이제 대체할 병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버지니아 중부로 돌아온 리는, 10월 초에 강 건너편에 있던 북군을 우회하려고 시도했는데, 미드(Meade)는 침착하게 잘 대처해서 리의 진출을 제대로 봉쇄했다. 리는 뒤로 물러나 겨울을 보낼 숙영지를 차렸지만 이번에는 워싱턴의 재촉을 받은 미드가 추수감사절에 공격을 해왔다. 리는 마인 런(Mine Run)이라는 개울을 따라 참호를 파고 단단한 방어선을 펼쳤고 미드는 그대로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리는 "군대를 지휘하기에 이제 늙은 것 같군. 적을 그래도 도망치게 한 적이 없었는데"라고 중얼거리며 자신의 상황을 한탄했다.

숙영지에 틀어박힌 남군의 처지는 비참했고 리는 리치몬드에 보급품을 보내달라고 계속 청원했다. "수 천 명의 병사가 군화도 없고 거의 대부분이 코트나 담요도 없이 겨울을 보내고 있습니다."

3년 간의 전쟁을 보낸 리치몬드는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인플레이션은 살인적이었고 일상용품은 수입되지 않았다. 커피는 450g에 10달러, 콩은 한 버킷에 60달러까지 치솟았다. 시민들의 처지도 비참해서 '굶어죽는 파티'까지 만들어 마지막 순간을 버티고 있었다.

3월 말 버지니아에 봄이 오자, 그랜트는 최전선에서 10km 밖에 안떨어진 곳에 사령부를 차리고 군을 사열하기 시작했다. 북부 시민들에게 그의 이름은 '무조건 항복'을 의미하는 희망이었지만 포토맥군은 의외로 그에게 별로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게다가 미드는 병력이 모자라는 1과 3군단을 해체해서 2와 4군단에 합류시켰기 때문에 승리하는 군대치고는 분위기가 나빴다. 한 병사는 일기에 "그랜트는 지난 3년 동안 동료들의 목숨을 날려버린 장군들보다 나쁠 것도 좋을 것도 없을 것이다"라고 기록했다.

 

그랜트는 승전의 열쇠는 압도적인 병력이라고 판단하고 포토맥군을 보강하는데 모든 힘을 쏟았다. 모든 북군 요새 지휘관에게 최소한의 인력만 남기고 모두 보내라는 명령을 내렸고 워싱턴 사령부에 있는 수 천 명의 경비부대도 전선으로 소환했다. 그리고 수도에 남아 있던 기병대는 모두 보병으로 전환시켰다. 심지어 사령부에 배치된 마차까지 줄여서 인부도 모두 병력으로 전환했다. 숫적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포로교환도 취소했다. 지난 3년 동안 남과 북은 포로를 정기적으로 교환했었는데 이것을 취소해서 남군이 병력을 보충할 방법이 없게 만들었다.

그랜트가 이런 극단적인 방법을 모두 동원한 이유가 있었다. 1864년에는 개전 당시에 입대한 북군이 모두 고향으로 돌아가는 해였다. 포토맥군은 상대적으로 나은 형편이었지만 북군 중 절반이 전역예정이었다. 북군은 전역예정 병사들에게 30일간의 휴가와 400달러의 현금을 주며 재입대를 권장했다. 그리고 명예와 전우애도 동원했다. 재입대한 병사는 역전의 용사라는 특별한 표식을 달 수 있었고 연대 병력 중 70%가 남으면 그 연대는 기존 그대로 지속되었다. 해임위기에 몰린 연대 장교들이 절망적으로 매달린 덕분에 50% 이상의 병사가 그대로 남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절반의 신병, 징집과 용병으로 채워져서 숫자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강건너에서 날마다 늘어나는 북군을 보고 있던 리도 리치몬드에 같은 요청을 했다. 해안 경비에 배치된 여단을 보내달라, 리치몬드 남부에 배치된 사단을 보내달라... 리는 4월 중순 "저 정도 적을 상대하려면 전국을 샅샅이 뒤져 병력을 긁어 모아야 할 것이다"라고 기록했다. 

그러나 데이비스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남부에 병력이 하나도 없게 되면 자신의 정치적 기반이 위협을 받기 때문에 마지막 순간에나 그러고 싶었다. 4월 말이 되자, 리의 65,000명은 그랜트의 120,000명을 상대하게 되었고 시간이 갈수록 그 격차는 점점 벌어졌다. 그리고 3월 26일, 북군 장교의 가족이 캠프를 떠나는 것이 목격되었고 4월 초에는 상인들이 강제로 소개되는 것이 관측되었다. 

5월 2일, 가장 높은 산에 오른 리는 북군 캠프를 내려다 보며 그랜트의 공격을 예상해봤다. 남군의 요새를 정면 공격할까? 그것보다는 양쪽 측면으로 우회해서 공격할 것이다. 동쪽으로 15km 떨어진 곳에 와일더니스(Wilderness)라고 부르는 상당히 넓은 잡목 숲이 있었는데 이곳으로 압도적인 병력을 끌고와서 유리한 전투를 벌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전투에 이기고 계속 남진할 때에도 강을 통해 보급을 쉽게 받을 수 있었다.

오른쪽으로 우회한다면 북군의 통신로가 노출되고 워싱턴이 비게 된다는 약점이 있었다. 고민하던 리는 망원경을 내려 놓으며 레피단(Rapidan) 강 건너 두 개의 여울목을 가리키며 "그랜트는 저기 중 한 곳으로 건너올거다"라고 말했다.

 

포토맥군은 5월 4일 자정 무렵에 리가 예측한 곳을 건너고 있었다. 그랜트는 서쪽으로 움직여 와일더니스를 통과해 북 버지니아군을 요새에서 몰아내고 야전에서 궤멸시킬 생각이었다. 

북군의 기동을 보고받은 리는 그답게 정면돌파하기로 했다.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리차드 이웰(Ewell)에게 2군단을 맡겨 오렌지 턴파이크(Orange Turnpike)로 보냈고 약간 남쪽으로는 힐(Hill)에게 3군단을 맡겨 오렌지 플랭크(Plank) 도로로 전진하게 했다. 더 남쪽으로는 제임스 롱스트리트(Longstreet)에게 1군단을 이끌고 캐써핀(Catharpin) 도로로 전진하게 했다. 3개 군단 모두 와일더니스에서 그랜트를 놀라게 만들 생각이었다. 

북군의 계획은 남군이 대응하기 전에 와일더니스를 장악하는 것이었다. 북군은 잡목이 우거진 와일더니스에서 전투를 벌이고 싶지 않았다. 여기에서는 기병대나 포병이 아무런 도움이 안되었고 보병기동도 거의 불가능했다. 북군 장교의 말대로 "전장으로 선택한다면 지옥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북군은 와일더니스에서 멈추고 말았다. 뒤처진 마차대열을 기다린 것인데, 북군 선봉대가 와일더니스에서 밤을 보내게 되었지만 남군이 아직은 요새에 틀어박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크게 염려하지 않았다. 더 큰 문제는 기병대가 제대로 정찰하지 않아서 오렌지 턴파이크를 그대로 둔 것이었다. 

스튜어트(Stuart) 기병대의 보고를 받은 리는 날이 새자마자 공격하기로 마음먹었다. 이웰과 힐이 북군을 붙잡아두는 동안 롱스트리트가 도착하자 마자 측면을 공격한다는 계획이었다. 

 

아무리 거친 와일더니스가 도움이 된다고 해도 겨우 40,000명으로 북군 전체를 하루 종일 붙잡아두기 바란다는 것은 위험했다. 그리고 롱스트리트가 제 때에 도착한다는 보장도 없었다. 늘 그랬듯이, 리는 5월 5일 오전에 그랜트가 더 다가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이웰의 2군단을 전진시켰다. 

그러나 롱스트리트는 5월 6일 아침에나 도착했기 때문에 이웰과 힐은 3배가 넘는 적을 하루 이상 붙잡아둬야만 했고, 만약 그랜트가 리의 병력이 둘로 나뉜 것을 눈치챈다면 정면돌파당할 수도 있었다.

해가 뜨자마자 이 상황을 모르는 그랜트는 남군을 상대하기 위해 병력을 배치하기 시작했다. 헨콕(Hancock)의 2군단은 챈스러스빌에서 토드 여관(Todd Tavern)을 향해 전진했고 거버너 워렌(Warren)의 5군단은 와일더니스 여관에서 파커 상점(Parker Store)로 향했고 세지윅(Sedgwick)의 6군단은 워렌이 비운 자리를 채우러 남쪽으로 이동했다. 번사이드(Burnside)의 9군단은 후위를 지키기 위해 그대로 남았다. 그랜트는 오후가 되기 전에 남군을 마인 런에서 몰아낼 수 있을 것으로 낙관했다.

워렌 군단이 오렌지 플랭크 도로를 향해 전진하고 있는 동안, 이웰 군단은 오렌지 턴파이크로 진출해 방어진지를 만들고 있었다. 여전히 남군이 하루 거리에 있다고 착각한 미드는 이들을 정찰병 정도로 생각하고 워렌에게 공격해서 쫓아내라고 명령했다. 그랜트도 미드에게 남군이 참호를 파지 못하도록 바로 공격하라는 지시를 했다. 

 

상관들의 재촉과 상관없이, 워렌은 전진대열을 전투대형으로 바꾸느라 몇 시간을 날려보냈고 우익 끝은 이웰 병력과 겹치는 지경이 되었다. 이 지경이 되어서야 자신이 상대하는 병력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된 워렌이 공격을 주저하자 미드가 다시 한 번 즉시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오후 1시, 워렌은 이웰의 진지를 향해 공격해들어갔다. 선더스(Saunder's) 들판을 건넜던 북군은 심각한 피해를 입고 다시 되돌아왔다. 도로 남쪽의 숲에서는 남군을 약간 밀어내는데 성공했지만 곧바로 반격에 밀려났다. 와일더니스와 같은 울창한 숲에서의 전투는 남과 북 모두에게 힘든 전투였다. 마치 "서로 보이지 않는 적을 향해 싸우는 이상하고 기괴한 대결"이라는 말처럼.

양쪽의 응원군이 합류하면서 전투는 더욱 격렬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