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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남북전쟁

세계사를 바꾼 미국 남북전쟁 (8) - 차타누가 공성전(1부)

by uesgi2003 2013. 1. 28.


지난 토요일 세미나 '우리가 몰랐던 임진왜란'에 많은 분이 오셔서 기분 좋게 강의를 할 수 있었습니다. 주말 그리고 갑작스레 영하 10도 아래로 떨어져서 10분 정도 모시고 할 줄 알았는데 30분 이상 오셨고 다들 말씀을 좋게 해주셔서 모처럼 신이 나서 시간을 넘기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번 토요일에는 임진왜란의 프리퀄이 될 수 있는 '울지않는 새로 알아보는 일본 전국시대' 세미나를 할 예정입니다. 서울 종로 정독 도서관 2동 3층 1세미나실에서 오후 1시부터 시작될텐데 정독 도서관 앞이 관광지로 개발되어 가족이나 연인 나들이로도 아주 좋겠더군요.

제 블로그의 성격과 달리, 일본의 주요 인물과 리더십에 초점을 맞출 생각이어서 자기계발 세미나로도 좋을 겁니다. 


참석하실 분은 미리 정독 도서관 위치를 확인하고 오셔야 불편하지 않을 겁니다. 


오늘 이야기는 북군이 모처럼 궁지에 몰린 차타누가 공성전입니다. 대단한 전투가 벌어진 것은 아니지만 이전 이야기였던 치카마구아 전투의 후속이어서 재미있을 것입니다.


세계사를 바꾼 미국 남북전쟁 (8) - 차타누가 공성전(1부)


9월 22일, 치카마구아 전투 2일 만에 북군 윌리암 로즈크랜스(Rosecrans)의 병력은 차타누가 도시 안으로 안전하게 후퇴했다. 같은 날 남군 브랙스톤 브래그(Bragg)는 자신이 원하던대로 북군을 몰아넣었다고 주장하면서 뒤를 따라가 도시를 포위하고 차타누가를 내려다 보는 미셔너리(Missionary) 고지에 올라 북군이 항복하기만을 기다렸다. 

24일, 로즈크랜스가 1개 여단을 빼내 서쪽에 있는 룩아웃(Lookout) 산으로 보내자 브래그도 제임스 롱스트리트(Longstreet)를 보내 고지를 점령하게 했다. 룩아웃 산에 올려진 남군 포대는 테네시 강뿐만 아니라 내쉬빌과 차타누가 철도까지 사정권 안에 두면서 북군의 보급로를 끊어버렸다. 

북군은 새 보급로를 찾을 수 밖에 없었는데, 알라바마 브짓지포트 기차 하역장에서 짐을 내린 후에 마차에 싣고 앤더슨 교차로까지 좁은 길을 온 다음에 월든 산등성이를 넘고 테네시 북쪽 강변으로 내려와 다리를 건너 차타누가로 들여와야 했다. 이전의 철도로 1시간이면 오는 길을 최소 8일 동안 헤매며 와야 했는데 날씨가 안 좋을 때에는 20일까지도 걸렸다. 


그렇게 들여온 보급품으로 간신히 버티고 있었지만 가을비가 내리면서 마차가 다닐 수 없게 되었고, 혹사당한 당나귀는 하루에 수 백마리씩 죽어가서 결국 10,000마리가 넘는 당나귀가 죽었다. 35,000명까지 줄어든 북군은 평소에는 가장 혐오하던 크래커 조각이라도 먹겠다고 마차바닥을 뒤지는 지경이 되었다. 불을 피우거나 오두막을 짓겠다고 민가를 허무는 바람에 도시는 군인 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남군 기병 지휘관 조세프 휠러(Wheeler)는 5,000명을 끌고 북군 배후로 돌아 그나마 간신히 유지되던 북군의 보급로를 끊었고 단 한 번의 습격으로 300대의 마차를 불태우는 전과를 올렸다. 결국 10월 9일에 북군 기병대가 나서 보급로를 다시 복구시킬 수 있었다(지도 참조). 

로즈크랜스는 마치 반쯤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방관하고 있었고 "머리에 총맞은 거위처럼 멍청해졌다"는 말까지 나돌았다. 

브래그의 정신은 상대적으로 멀쩡했지만 기분은 상당히 나쁜 상태였다. 전투가 끝난 후에 레오니다스 폴크(Polk) 장군은 해임시켰고 토마스 하인드맨(Hindman)도 전출시키고 다니엘 하비 힐(Hill)도 어떻게 해보려고 하는 중이었는데, 브래그의 한심스러운 태도에 불만이 많았던 지휘관들은 남군 대통령 데이비스에게 "남군은 완전히 마비상태"라며 그를 교체시켜달라고 청원했다. 

데비이스가 급하게 달려와 10월 9일에 장교들과 모임을 가졌지만 브래그의 자리는 바뀌지 않아 많은 지휘관을 실망시켰다. 


정작 큰 변화는 북군에게서 먼저 일어났다. 10월 2주 차에, 전쟁상(Secretary of War) 에드윈 샌톤(Santon)은 인디애나폴리스로 가서 율리시스 그랜트(Grant)를 만나 로즈크랜스의 컴벌랜드(Cumberland)군, 암브로스 번사이드(Burnside)의 오하이오(Ohio)군, 윌리암 셔먼(Sherman)의 테네시(Tennessee)군의 최고 지휘관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했다. 

그랜트는 로즈크랜스를 조지 토마스(Thomas, 사진참조)로 교체하기로 결정하고 토마스에게 "어떤 피해를 입더라도 차타누가를 사수해 주기 바람"이라는 전신을 보냈고 토마스는 "굶어죽는 한이 있어도 도시를 사수할 것임"이라는 화답을 보내왔다. 

그랜트는 알라바마 스티븐슨에서 집으로 가던 로즈크랜스를 만났는데 회의는 상당히 우호적으로 진행되었다. 로즈크랜스는 그랜트에게 몇 가지 반드시 해야 할 일을 조언했고 그랜트는 "그가 왜 그 일을 하지 않았는지 궁금하다"라고 기록했다. 

회의를 마친 그랜트는 마차 잔해와 당나귀 시체로 이어진 보급로를 따라 차타누가에 10월 23일 저녁에 들어섰다. 

옷도 갈아입지 않은 그랜트는 바로 회의를 시작하고 토마스 참모장교들에게 각자 상황을 브리핑하라고 명령했다. "바위처럼 꼼짝도 않고 스핑크스처럼 침묵을 지킨" 그랜트는 "굶어 죽거나 항복해서 포로가 되던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암울한 상황"이었다고 기록했다. 그는 절대로 그럴 생각이 없었다. 

윌리암 스미스(Smith)가 새 보급로를 개척하자고 제안하자 그랜트는 귀를 쫑긋 세우고 질문을 퍼부어댔다. 컴벌랜드군의 공병 지휘관인 스미스는 부근을 정찰해서 브릿지스톤에서 차타누가로 이어지는 테네시 강줄기를 찾아냈다. 문제는 라쿤(Raccoon) 산과 브라운(Brown) 선착장이 남군 수중에 있다는 것이었다. 여기만 탈환한다면 증기선을 이용할 수 있고 거리도 13km로 줄어든다. 


북군 포토맥군의 조세프 후커는 20,000명이 넘는 증원군을 보내왔기 때문에 그들이 서쪽에서 압박을 가한다면 차타누가의 북군이 요충지를 탈환할 수 있게 된다. 남군의 사정도 북군만큼이나 절박하다는 것을 알고 있던 그랜트는 이 모험을 시도해보기로 했다. 

10월 27일 새벽 3시, 존 터친(Turchin)이 이끄는 3,500명의 보병이 야포 3문을 가지고 브라운 선착장으로 몰래 접근했고 윌리암 헤이젠(Hazen)의 1,500명은 50척의 보트를 타고 강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기습은 완벽하게 성공했고 보트에서 내린 북군은 남군 초병을 몰아냈다. 

브라운 선착장에 있던 남군 6개 중대는 총소리를 듣고 반격에 나섰지만 터친의 병력이 이미 강을 건너던 중이었고 병력이 상대가 안되는 남군은 바로 후퇴했다. 

오후 4시 30분, 북군은 강에 보트를 연결한 다리를 놓으면서 작전을 끝냈는데 전사자 6명, 부상자 32명에 불과한 완벽한 성공이었다. 흥분한 헤이젠은 병사들 틈을 오가며 "이제야 크래커 박스 상자를 열었다"라고 소리쳤다(그림 참조). 

룩아웃 산에 있던 남군의 대응은 너무 느렸다. 롱스트리트는 브라운 선착장의 전투를 작은 소동으로 생각하고 브래그에게 보고조차 하지 않았는데, 브래그는 다음 날 그 소식을 듣고는 몹시 화를 내며 롱스트리트의 2개 사단과 존 브렉킨릿지(Breckinridge) 군단의 1개 사단까지 모두 동원해 즉시 탈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롱스트리트는 별다른 이유없이 완전히 하루동안 시간을 흘려보내는 동안 북군 지원군이 서쪽에서 다가왔다. 10월 28일 저녁에는 선봉대가 브라운 선착장에서 불과 1.5km 떨어진 곳까지 다가왔다.

브래그의 명령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롱스트리트는 브라운 선착장에 북군이 증원되고 있다는 사실은 무시하고 남쪽에서 다가오던 훨씬 작은 규모의 북군 지원군을 무리하게 야습을 했다. 남군의 갑작스런 공격에도 불구하고 북군은 4문의 대포를 동원해 차분하게 방어했다. 격전이 3시간 동안 계속되어 북군의 탄약이 바닥을 보이고 있을 때에 남군이 갑자기 전열을 무너뜨리고 후퇴했다. 


그랜트는 차타누가에 온 지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크랙커 보급로를 열었는데, 창고에는 4상자의 크랙커 밖에 남지 않았었기 때문에 조금만 더 늦었다면 북군은 굶주렸을 것이다. 

처음에는 물방울같이 조금씩 들어오던 보급품이 화차 30분량으로 늘어났고 서쪽에서 셔먼 군단이 다가오면서 차타누가 공성전의 주도권은 북군에게 넘어가기 시작했다.  

브라운 선착장을 내준데다가 반격도 성공하지 못하자 그렇지 않아도 위태롭던 브래그와 롱스트리트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9월 내내 제퍼슨 데이비스 대통령과 부하 장성들이 차타누가에서 북군을 몰아내자며 연달아 제안을 했지만 브래그는 모두 거절했다. 

데이비스가 "녹스빌(Knoxville)에서 번사이드를 몰아내는데 롱스트리트의 2개 사단을 투입했으면 합니다"라고 요청하자 브래그는 기쁜 마음으로 바로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즉시 롱스트리트를 테네시 동부로 보내면서 "정말 제 어깨를 가볍게 해주는 결정입니다"라며 속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롱스트리트는 경악했다. 녹스빌 공격은 자신과 남군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의 병력은 보병 10,000명에 기병 5,000명이 전부였고 번사이드는 12,000명의 보병에 8,500명의 기병을 보유하고 있어서 훨씬 우세했다. 

더구나 자신이 떠나면 겨우 40,000명 밖에 안되는 남군이 하루가 다르게 늘어가는 북군을 상대해야 했고, 셔먼이 도착하면 60,000명 이상의 북군을 상대하게 되었다. 롱스트리트는 브래그에게 "우리 둘 다 실패로 가게 되는 결정이오"라며 항의했다. 

11월 5일, 북쪽으로 떠나면서 그는 사이몬 버크너(Buckner)에게 "기회는 전부 날려버리고 이리 저리 움직여야 하는 것이 우리 군의 운명인 모양입니다"라는 편지를 보냈따. 

롱스트리트가 걱정하던 것보다 훨씬 상황이 안 좋았다. 동부 테네시와 조지아 철도망은 너무 열악해서 녹스빌 중간까지 겨우 100km 가는데만도 8일이나 걸렸고 브래그가 약속했던 보급품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건 번사이드를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롱스트리트를 상대하기 위한 작전같다"라고 나중에 기록할 정도였다. 


롱스트리트가 11개월 전에 프레데릭스버그(Fredericksburg)에서 참패를 안겼던 번사이드는 자신에게 쏟아진 비난을 잘 참아내고 오하이오군을 신시내티에서 녹스빌까지 잘 이끌었다. 그는 컴벌랜드 협곡을 지키던 남군을 우회해 녹스빌까지 하루 50km를 진격해 내려왔다. 

테네시 동부는 북군을 지지해서 2:1 비율로 연방에 남기를 희망했는데 분리주의자들의 핍박이 워낙 심해서 북군이 도시에 들어섰을 때에는 시민들이 마치 해방군을 맞이하듯이 반겼을 정도였다. 

롱스트리트(사진의 왼쪽)가 녹스빌로 전진하고 있다는 소식에 놀란 워싱턴은 그랜트에게 행동에 나서 압박을 하라는 요청을 했지만 정작 번사이드(오른쪽)는 별로 두려워하지 않았다. 

"부하들은 어떤 적이던 상대할 준비가 되어 있다"라고 자신한 번사이드는 녹스빌 남쪽에서 남군을 상대하기로 하고 롱스트리트가 차타누가로 회군하지 못하도록 지연전을 펼쳐 그랜트를 도와주기로 했다. 

번사이드는 5,000명을 내보내 남군을 유인하는 한편, 나머지 병력은 요새화된 녹스빌 방어선 안에 남겨두었다. 


(우에스기 왈: 롱스트리트가 무능한 지휘관은 아니었지만 상관의 결정을 따르지 않는 행동이 한 두 번이 아니었군요. 결정적인 전투 게티스버그에서도 패전의 계기가 되더니만 여기에서도 북군의 숨통을 풀어주는 갈등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이 롱스트리트에 대해 좋은 평가를 하지 않는 모양입니다. 종전 후에 남군 지휘관으로는 유일하게 공화당을 지지한 변절도 그런 평가를 받게된 가장 큰 이유이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