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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로마

한니발, 알프스를 넘어 로마의 성문 앞으로 (2부)

by uesgi2003 2013. 8. 18.


이번 이야기는 저도 정리하면서 재미를 느낍니다. 워낙 유명한 분이고 온갖 자료가 널려 있지만, 그의 행적을 다시 한 번 따라가 본다는 것은 전사가로서 영광이니까요.


여기에서 나오는 연도는 모두 기원전이며 그림은 클릭해서 큰 그림으로 감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계속 반복해서 안내하고 있듯이, 역사는 기록자에 따라 정반대의 입장이 될 수 있습니다. 다양하고도 넓은 시각을 갖도록 마음을 열어 두기 바랍니다. 


한니발, 알프스를 넘어 로마의 성문 앞으로 (2부)


론강 너머로 육중한 코끼리를 보내는 일은 대단한 수고가 필요했다. 코끼리는 보트에 올라가는 것조차 싫어했다. 한니발은 넓은 뗏목을 만들게 해서 연결시켰고 가장자리 뗏목은 흙으로 덮어서 마치 땅위를 가는 것처럼 속였다. 그리고 선두에는 암컷 두 마리를 세워서 뗏목에 올라서게 만들었다. 코끼리가 올라서면 연결된 뗏목을 잘라서 강을 건넜는데, 처음에는 동요했던 코끼리가 땟목 중앙으로 모여서 안전하게 건널 수 있었다. 그 과정을 여러 번 반복한 끝에 대부분의 코끼리가 론강을 건넜고 중간에 물에 빠진 코끼리도 스스로 헤엄쳐서 강을 건넜다. 


코끼리가 론강을 건너는 동안, 한니발과 스키피오의 정찰부대가 전투를 벌였다. 치열한 전투 끝에 로마와 켈트 동맹군이 승리를 거뒀는데 160명을 잃고 200명의 누미디아 기병을 죽였다. 한니발의 진영을 확인한 정찰대는 80km를 달려 스키피오에게 정확한 보고를 했다. 스키피오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전진명령을 내렸다.


한니발은 스키피오의 군대와 일전을 치룰 생각이었지만 보이족장인 마길루스(Magilus)가 도착하면서 서둘러 알프스 산맥을 넘기로 마음을 바꿨다. 마길루스는 한니발이 도착하면 총동원령을 내릴 것이고 알프스 산맥을 수월하게 넘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니발은 마길루스가 카르타고 병사들에게 직접 그 내용을 말해달라고 부탁했고, 보이족의 약속을 들은 병사들의 사기는 크게 높아졌다. 한니발은 보병에게 북진을, 기병에게는 배후를 엄호하라고 명령했다. 


스키피오(왼쪽은 그의 청동상 - 혼선이 있는데 아버지가 아니라 아들 스키피오입니다.)가 한니발 진영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늦은 상태였다. 한니발의 마지막 병력이 3일 전에 출발했고 스키피오는 어디로 향했는 지도 모를 적을 찾아 황야를 헤매고 싶지 않았다. 그는 난처한 입장이었다. 원로원은 이베리아를 침공해서 한니발을 잡으라는 명령을 했는데, 한니발은 이탈리아로 들어가는 중이었다. 

그는 형 그나에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에게 많은 병력을 떼어주고 이베리아로 계속 진격하게 했고 자신은 급히 이탈리아로 귀환했다. 그는 시살피네 골(Cisalpine Gaul) 지역에 있는 로마군으로 한니발이 산맥에서 나타나면 전투를 벌일 생각이었다. 


한니발은 알프스를 향해 그리고 자신의 운명을 향해 군대를 재촉했다. 4일의 행군 끝에 론강과 이스카라스(Iskaras)강이 만나는 곳에 이르렀다. 한니발은 여기에서 부족의 상속다툼에 간여했다. 한니발의 도움을 받은 브란쿠스가 족장이 되었고 답례로 음식, 월동장비, 길 안내원을 지원받았다. 그 이후 10일 동안의 행군은 별 일이 없었다. 카르타고군은 10월 중순에 알프스 산맥에 도착했다.

이 지역부터는 호전적이고 강력한 알로브로게스 켈트족의 땅으로 어떤 이유에서든 다른 민족은 발을 들여놓을 수가 없었다. 


알로브로게스 부족은 고지대에서 알프스 산맥으로 진입하는 길을 장악하고 있었다. 한니발은 군대를 멈춘 후에 정찰을 내보냈고 알로브로게스 부족이 낮에만 감시초소에 경비병을 세운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날이 저물자, 한니발은 경보병을 보내 요충지를 점령했다. 새벽에 군대가 협곡에 접근하자 알로브로게스 병사들이 마을에서 달려나왔지만 이미 요충지는 카르타고군에게 점령된 상태였다. 순간 당황한 알로브로게스 병사들은 어떻게 해야 할 지를 모르고 있다가, 카르타고군의 행렬이 길게 늘어져서 약점을 보이자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카르타고군은 켈트족의 공격을 받고 혼란에 빠졌고 코끼리는 오히려 방해가 되었다. 한니발의 경보병이 반격에 나서서 아래에 있는 적을 쫓아냈지만 오히려 혼란만 더 가중되었다. 가파른 절벽에서 밀려 떨어지면서 양쪽의 피해를 극심했고, 결국 등 뒤에서 공격을 받은 알로브로게스 병사들은 마을로 쫓겨 들어갔다. 카르타고군은 마을을 약탈해서 피해를 약간이나마 보충했다. 


한니발은 병사들에게 하루 동안의 휴식을 주고 군기를 바로 잡았다. 그리고 다시 행군에 나선 3일 째에 또 다른 산악부족의 노인들이 나타나 한니발에게 선물과 협력을 약속했다. 한니발은 의심을 했지만 켈트부족이 음식, 인질, 안내원까지 내놓았다. 

처음에는 별 일 없는 것처럼 보이더니, 안내원은 부족병사들이 매복하고 있는 장소로 이끌었다. 한니발은 그럴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전열에는 기병과 수송부대를 배치시켜 두었기 때문에 적의 공격이 시작되자 기병과 수송부대는 서둘러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보병은 높은 곳에서 굴리는 바위에 튼 피해를 입으면서 힘든 전투를 벌여야했다. 


그 이후에도 소규모의 원주민들이 곳곳에 출몰하며 카르타고군을 괴롭혔지만 본격적인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다. 전투 코끼리를 처음 본 켈트부족은 몹시 두려워했고 그 근처에는 가까이 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고지대에 다가설수록 원주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대신에 자연환경이 무시무시한 적이 되었다. 햇빛이 따가운 아프리카와 이베리아 남부 출신의 병사들은 단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는 강추위였다. 심지어 눈까지 내렸다. 

알프스 산맥에 들어선 지 9일째 되는 날에 정상에 이르자, 한니발은 2일 동안의 휴식을 주었다. 실종되었던 병사와 동물들이 본대의 행적을 따라 계속 진영으로 들어왔다. 폭설이 내리면서 병사들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병사들의 사기가 위험해지만, 한니발은 멀리 이탈리아의 포계곡의 푸른 평원을 가르키며 이제 내려가기만 하면 된다고 말했다. 


남은 길은 내리막이었지만 굶주리고 지친 병사들에게는 절대로 쉽지 않은 길이었다. 이탈리아로 향하는 길은 등산로보다 가파랐고 새로 쌓인 눈에 모든 길에 쌓여서 함부로 발을 디딜 수도 없었다. 체력이 다한 병사들은 길 옆에 주저앉았고 다시는 일어서서 복귀하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눈사태까지 일어났고 우회로는 없었다. 

한니발은 병사들에게 바위를 치우고 눈을 퍼내게 했다. 하루 만에 좁은 오솔길이 만들어졌고 굶주려 죽기 직전인 말과 노새부터 통과시켰다. 2일이 더 걸려서야 코끼리가 지날 정도로 길이 넓혀졌다. 


카르타고군은 이베리아를 출발해 알프스를 빠져나오기 까지 무려 1,600km를 행군했고 5개월만인 10월 말에 이탈리아에 들어섰다. 알프스 산맥을 통과하는 데에만 15일이 걸렸다. 그에게 남은 병력은 20,000명의 보병과 6,000명의 기병이 전부였다. 많은 병사를 잃었지만 장거리 행군에서는 어쩔 수 없는 피해였고 남은 병사들은 호전적인 원주민과 거친 자연환경을 이겨낸 베테랑 전사가 되었다. 


로마는 경악했다. 원로원을 포함한 모든 사람이 이베리아와 아프리카에서 전쟁이 벌어질 줄 알았는데 한니발이 이탈리아에 들어섰다. 한니발은 기선을 잡았고 맑은 하늘에 벼락을 맞은 로마는 대응하기에도 힘들었다. 시실리에 있던 셈프로니우스 집정관의 아프리카 원정을 취소하고 신속하게 스키피오와 합류하라는 전갈을 보냈다. 


한니발이 알프스에 접근하는 동안, 스키피오는 시살피네 골로 달려가 2개군단과 동맹군의 전투준비를 시켰다. 적에 비해 전력이 모자랐지만 험준한 산맥을 빠져나온 한니발의 군대는 참담한 상태일 것으로 예상하고 서둘러 공격하기로 했다. 그리고 한니발이 있다고 알려진 티시누스강으로 2,000명의 기병과 4,000명의 경보병을 보내 정확한 위치를 찾았다. 


산맥을 빠져나온 카르타고군은 잠시 휴식을 취해 체력을 되찾았다. 그리고 검투사 경기를 즐겼다. 한니발은 알프스에서 잡은 켈트 전사들을 데리고 나와 승자에게는 자유와 상금을, 패자에게는 노예신분을 영원히 벗어날 수 있는 죽음을 주겠다며 경기를 할 것인지 물었다. 모든 포로가 경기에 나서게 해달라고 애원했다. 선택된 소수의 포로는 카르타고군이 지켜보는 가운데 자유와 죽음을 선택했다. 


검투사 경기가 끝나자, 한니발은 바로 자신들의 상황을 재현한 것이라고 연설했다. 카르타고군도 전장에서의 승리 아니면 죽음뿐이라고 강조했다. 아니면 지금까지 고생한 길을 되돌아 갈 것인가? 정복 아니면 죽음, 그리고 부유한 이탈리아가 카르타고군을 기다리고 있었고, 병사들은 전장에 기꺼이 나서겠다고 환호성을 질렀다. 


한니발은 6,000명의 기병과 함께 군대를 전진시켜 티시누스에서 스키피오를 만났다. 카르타고 기병은 그리 좋지 않은 상태였어도 스키피오의 기병이나 경보병 정도는 충분히 상대할 수 있었다. 로마군은 참패했고 스키피오도 부상을 당해 포로로 잡힐 뻔 했다. 그의 17살 먹은 아들 스키피오가 간신히 구해냈는데, 그는 자마전투에서 한니발을 격파하고 아프리카누스라는 명예를 얻게 된다. 


스키피오는 트레비아강의 고지대로 후퇴해서 아군의 지원을 기다렸다. 한니발은 셈프로니우스의 군대가 스키피오와 합류하도록 일부러 내버려두었다. 이미 12월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한 빨리 대회전으로 한 번에 격파하고 싶었다. 마찬가지로 셈프로니우스도 집정관 임기가 끝나기 전에 화려한 이력을 붙이고 싶었다. 

한니발은 장소와 시간을 자신이 원하는대로 골라 전투를 벌였다. 먼저 동생 마고에게 별동대를 주고 매복을 시킨 후에 병사들에게는 이른 아침을 먹이고 불을 피워 몸을 녹이고 가열한 기름을 몸에 바르게 했다. 그런 후에 누미디아 기병을 보내 로마군을 자극시켰는데, 셈프로니우스는 심지어 아침도 먹지 못한 병사들을 서둘로 진영 밖으로 내보냈다. 

누미디아 기병은 로마군을 유인해 트레비아의 얼음 강물로 끌어들였고 강물 밖으로 나온 로마군의 몸은 얼어붙었다. 


한니발의 병력은 켈트 부족이 합류하면서 28,000명의 보병과 10,000명의 기병으로 늘어나 있었고 셈프로니우스는 36,000명의 보병과 4,000명의 기병으로 전체 병력은 비슷했지만 기병에서 압도당하고 있었다. 손발이 얼어붙은 로마군이 밀집대형으로 정면공격해 들어왔고 한니발의 기병과 전투 코끼리는 즉시 로마군 기병을 전장에서 내쫓은 후에 로마군의 배후를 공격했다. 이 때에 마고의 매복군도 배후공격에 합류했다. 

사방에서 공격을 당한 로마군은 필사적으로 퇴로를 열었고 10,000명 정도의 군단병이 카르타고군의 중앙을 뚫고 안전한 곳으로 도망쳤다. 나머지 20,000명은 죽거나 포로로 잡혔다. 한니발은 트레비아에서 대회전을 벌여 대승을 거두었고 로마로 향하는 길을 활짝 열었다. 


향후 2년 동안 한니발은 로마가 보내오는 군단을 모조리 격파하며 전사상 최고의 명장반열에 오른다. 트라시메네 호수, 게로니움 그리고 칸나에 전투에서 3명의 집정관이 목숨을 잃고 수 만 명의 로마군이 땅에 뭍힌다.

이런 눈부신 승리에도 불구하고 조국의 지원을 받지 못한 카르타고군은 결국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패배하게 되지만 무려 16년 동안 한니발은 이탈리아에서 무패의 신화를 남긴다. 

한니발의 알프스 산맥 통과는 이후 모든 군 지휘관의 교본이 되었고, 그의 의지는 당대 최강이었던 로마군도 그리고 심지어 알프스 산맥조차도 꺾지 못했다. 


한니발의 알프스 통과 경로는?


지난 2천 년 동안 한니발이 알프스 산맥을 통과한 길에 대해 의견이 갈려 있다. 그리스 역사가 폴리비우스(기원전 200~118년)는 2차 포에니 전쟁이 끝나고 수십 년 후에 개인적으로 그 길을 따라가 보았다. 그는 상세한 경험담을 기록했지만 유감스럽게도 한니발의 경로라고 확정지을 랜드마크는 충분하지 않았다. 

로마 역사가 타이투스 리비우스 또는 리비 (기원전 59~기원후 17년)도 중요한 기록을 남겼다. 그 당시에도 한니발이 어느 길을 택했는 지가 상당한 논란거리였다. 폴리비우스와 리비는 대체적으로 의견을 같이 하지만 상세한 부분에서는 서로 갈리고 있다. 

거리와 지형에 대해 분석했고, 특히 정상에서는 포 계곡이 보여야 했다. 그리고 타우리니 부족의 본거지를 관통해야 했고 일년내내 눈이 내릴 정도로 높은 고지대여야 했다. 그리고 30,000명이 머물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넓은 공간이 있어야 했다. 


놀랍게도 이런 곳을 찾아내지 못했다. 그 동안 5가지 경로가 가장 근접한 것으로 분석되었는데 북에서 남으로 리틀 세인트 버나드 (2,188m) 등 5개 산 중의 하나로 보인다. 최근 24명의 역사학자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 따르면 모두 의견이 갈렸고 가장 많은 의견을 받은 몽 스니도 6명의 지지를 받았을 뿐이다. 

나폴레옹은 몽 스니를 한니발의 경로라고 밝혔는데 유물이 발견되어야 논란을 잠재울 수 있을 것이다. 그 때까지는 역사학자들이 주장하는 모든 경로가 사실일 수도, 거짓일 수도 있다. 


한니발과 전투 코끼리는 워낙 유명한 이야기라 다양한 그림이 남아 있습니다. 연대와 작가 상관없이 몇 가지만 옮겨와보겠습니다. 

중간에 알렉산더의 그림도 들어갔군요. 그냥 넣겠습니다.